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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학생 시대


1925년 내가 26세 되던 해 불타는 사명감으로 신학교 들어가기를 안타깝게 원했다. 그러나 중학교도 나오지 못한 나를 어느 신학교에서든지 받아 줄 리 없다. 때마침 동양선교회에서 경영하는 성서학원을 성결교계통에서 한다는 말을 듣고 또 그곳에서는 밥을 먹여 주며 공부를 시킨다고 하기에 문 감리사의 추천을 받아 서울로 올라갔다.

모처럼 하고 싶은 공부요 소원성취라, 그곳에 가보니 은혜의 별세계라. 그곳에서는 나를 3년간 불가마에서 빚어내는데, 지적으로는 별것 없었으나 영적으로 부흥과 말씀과 신앙을 통하여 깊이 지도해 주시는 선생님들‥‥‥그 중에도 특히 이명직 목사님은 나의 잊지 못할 은사이니, 그의 성경 강의와 설교 때는 시간시간 은혜로웠다.

나는 21세 때 철저한 회개를 하느라고 했으나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였는데, 신학교에서 부흥회할 때 철두철미한 회개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심령 상태를 돌아보게 되었다. 14세 때에 기차 타면서 키를 좀 줄이고 12세라 하고 반표로 몇 번 내왕한 일이 생각났다. 그래서 중화역장에게 편지와 함께 기차 요금을 4배나 해서 갚았다. 그랬더니 얼마 후에 총독부 철도국장한테서 사죄장이 오고 보낸 돈을 도로 보내왔다.

그 사죄장 일절에 "세상 사람들은 남을 속이지 못해서 애쓰는 데 너는 어쩌면 그렇게 10여 년 전에 지은 죄까지 다 회개하느냐? 네가 믿는 종교는 참으로 귀한 종교로구나. 너같은 사람만 있으면 경찰서는 무슨 소용이 있으며 재판소는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이 사실은 시일이 이미 지나고 문부를 상고할 데도 없는 까닭에 우리가 받은 줄 알고 도로 보내니 학비에나 보충하라"고 했다. 사죄장과 돈이 도로 온 그날의 기쁨은 어디에다 비길 데 없었고 그 후 주인에게 줄 수 없는 돈들은 모두 교회에 바치니 마음이 한없이 기쁘고 즐거웠던 것이다.

이렇게 당시의 신학교는 철두철미하게 회개를 강조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특별한 재능을 베푸사 신학생으로서 교회에 나아가 유년주일학교를 지도하면 매우 인기가 높았다. 그래서 나는 곳곳마다 노래와 동화 설교로 주일학교 부흥회를 많이 인도했다.

신학교(성서학원) 일학년 때에 상급반에 있는 이원균씨와 청량리교회를 맡아보게 되어 이원균씨는 장년을 맡고 나는 유년주일학교를 맡아 부장으로 있으면서 매주일 나아가 열심으로 개인심방을 했더니 큰 부흥이 일어났다.

그 당시 유년 학생들에 대해서는 다 기억지 못하나 그때 학생 중에서 윤형식은 체부동 교회 집사가 되었으며, 김창근 목사 부인과 조명석 목사 부인은 그때 고등반 학생으로 신앙이 좋더니 결국은 주의 종들을 받드는 훌륭한 사모가 된 것이다. 또한 유병은 형제들은 다 사회와 교계에 유력한 인물들이 되었다.

1927년 여름에 하기 방학이 되었다. 경북 김천교회에서 하기 성경학교를 하게 되어 그곳에서 두어달 동안 봉사하였다. 좋은 선생들을 모아 조직적으로 분반하여 가르치게 했다.

그때 안형주(지금 목사이다)씨도 처음으로 주일학교를 맡아보게 되고 같이 일을 하였다. 성경학교를 마치게 될 무렵 나는 그대로 성경학교만 마치고 헤어지면 안 되겠기에 며칠 동안 주일학교 부흥회를 하였다. 성령이 역사하사 그 동안 성경학교에서 준비된 어린 심령들에게 불을 붙여 주셨다. 순진한 어린 심령들이 애통하며 회개하고 자복하는 열매를 맺는데 걷잡을 수 없이 털어놓는다. 어린이들이 그 무서운 죄를 숨김없이 통회 자복하니 온 동리에 큰 소동이 일어나 기독교를 반대하는 신문 기자들까지 찾아와서 아이들을 마취시켰다고 비난을 했다. 그러나 그 후 그들은 오해를 풀고 사과까지 하였다.

그때 은혜받은 어린이들은 지금 어른이 되어서도 참 신앙을 갖고 집사, 장로 또는 부인 회장으로 여기저기서 교회를 돕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여러 주일학교의 부흥회에 큰 은혜가 있었다. 내가 일찍이 소학교 교원으로 있으면서 아동의 심리를 취급하는 방법을 잘 알았기 때문에 주일학교 부흥집회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내가 신학교 2학년 때였다. 그렇게 신성하게 복음주의로 훈련시킴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게는 불평과 불만이 많았다. 에덴 동산에 사탄의 충동이 있었던 것과 같이 어디서나 사탄은 일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지도자들의 실수도 있었을 것이다. 학생들의 불만의 씨는 결국 동맹 휴학으로 번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1. 선교사들이 금전의 권세를 갖고 민족적 차별을 한다는 것.

2. 학생들을 잘 대우하지 않는다는 것.

3. 교수진이 약하다는 것 등이었다.

나는 그것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싸울 조건이 아니므로 중립상태를 취하고 있었기에 좌우편에서 다 오해를 받게 되었다. 화해자 노릇을 못한 나는 역량 부족의 탓임을 느꼈다. 그러나 그 일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선하게 해결되었다. 불평 불만은 사탄의 씨요 불행의 초보이다. 그때 그 일의 주동자들 중에는 아주 타락한 자도 있고 단체를 떠나 다른 단체로 옮긴 사람도 있다.

졸업을 앞둔 나는 전도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고 중대한 사명을 감당키 어려운 내 부족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삼 일간 특별 휴가를 학교 당국에서 얻어 골방에 들어가 금식기도를 했다. 새로운 능력과 지혜를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아무리 애써 기도하여도 피곤하기만 하고 별로 특별한 증거가 없었다. 마지막 날 아침 성경을 펴서 예레미야 1장을 읽는 중 귀한 소식을 들었다.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오늘날 너로‥‥‥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아멘." 나는 확신과 감사로 일어났다.

내 나이 28세 되던 해 3월에 신학교를 졸업하게 되니 나의 신학교 3년 수양은 전도생활의 좋은 준비 기간이었고 점점 사명감에 불타 어서 속히 나아가 전도할 마음이 간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