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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주교회 목회 시대

 

35세 되는 봄에 신의주로 전근가게 되었다. 전임자 한성과 목사는 서울 신학교로 가고 내가 그 후임으로 가게 되었다.

신의주는 내 목회 중에서 제일 부흥되고 제일 재미있게 일한 지역 같다. 신자들이 불일듯 일어나고 믿지 않던 사람에게 가서 "예수 믿읍시다. 교회에 나갑시다" 하고 한마디만 하면 척척 교회에 나오곤 해서 집사들도 심방과 전도에 재미가 나니 더욱 열심으로 일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교인이 장년 4백여 명, 유년 5백여 명 도합 천 명이나 되었고, 24구역에 구역장을 두고 남녀 직원 50여 명이 한데 뭉쳐 은혜로 기도와 성경 연구에 힘쓰고 전도와 봉사가 초대교회와 같았다.

이러한 재미있는 교회 생활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때때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의 사생활까지도 정화시켜 주시어 깨달음을 주시곤 하였다.

한번은 성탄절이라고 어느 신자가 닭을 한 마리 가져왔다. 아내는 나보고 닭을 좀 잡아 달라고 하였다. 나는 닭고기는 잘 먹지만 닭을 잡기는 싫었다. 그래서 "여보, 목사가 닭 죽이는 목사요? 그런 것은 부인이 하는 노릇이오 원 나중에는 별것을 다 해달래는군" 하고 나무랐다.

그 당시 아내는 임신 중이라 태중에 그런 잔인한 노릇은 하기 싫다는 것이었다. "그럼 그만두구려, 다른 사람이나 주지" 하고 있을 때 마침 박동형이라는 우리 교회 청년이 찾아왔다.

"동형이, 저 닭 좀 잡아주게. 집사람이 그걸 못 잡겠다는군." 박군은 "아이구, 나도 그런 것 죽여 보지 않았는데요" 했다. "아니 이 사람아, 그거 칼로 목을 베어 내면 되지 않나?" 하고 재촉하니까 "그럼, 어디 해봅시다" 하였다.

그날 닭고기 국을 잘 먹었다. 그 이튿날은 12월 마지막 주일이었다. 시베리아 찬바람이 만주 벌판을 지나 신의주에까지 무섭게 휘몰아치고 게다가 눈보라까지 치는 추운 날이었다.

나는 기도실에서 기도하며 설교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내가 부엌에서 "목사님, 목사님" 하고 찾는다. 가보니 "저 수탉 좀 잡아매 주세요 끌러져서 달아나겠소" 한다.

"아, 이거 시험도 분수가 있지. 주일날 아침에 설교 준비하는데 원 별것을 다 하라는군. 당신이 좀 잡아매구려" 하니 "그것 좀 잡아매고는 기도 못하오? 나는 지금 바쁜데" 하고 자꾸 잔소리가 나온다.

그래서 꿀꺽 참고 여편네 말을 잘 들으면 오뉴월에 팥밥을 얻어먹는다는데 어디 팥밥이나 좀 먹어보자 하고 나갔다.

수탉은 여전히 모이를 주워 먹고 있었다. 가만가만 뒤로 가서 콱 붙잡으니 몸은 빠지고 꼬리가 잡혔다. 닭은 후드득 홰를 치면서 두 발톱으로 내 바른손 엄지손가락을 찢고 달아나 버렸다. 손에서는 피가 흘렀다. 언 손가락이 어찌나 깊이 패었는지 눈물이 왈칵 쏟아지게 아팠다. 그래서 쓰리고 아픈 손가락을 싸쥐고 들어오면서 아내를 실컷 원망하였다. 무슨 놈의 닭을 주일 아침에 잡으라 해서 손가락 병신만 만들었다고 야단을 하니 아내도 미안한 모양인지 기름을 발라주고 싸매 주었다.

그냥 손가락은 아프고 동시에 머리까지 아팠다. 그래서 아랫목에 머리와 손을 넣고 기도를 하였다. "주여, 주일날 아침 이거 무슨 일입니까?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면 머리털 하나라도 상치 않는다고 했는데 이거 웬일입니까? 그래도 무슨 까닭이 있는 모양이니 원인을 가르쳐 주옵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마태복음 23장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자여. 무거운 짐은 남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싫어하는 자여. 어제 일을 생각해 보라. 닭죽이기 싫다고 아내에게 미루고 박군에게 미루고 그러면서도 닭국은 잘 먹었지. 바리새인 손가락 같은 것 찍어 버려 마땅하겠지만 그만큼 둔 것도 감사해라. 너 그런 심보 가지고 강단에서 무슨 설교를 할 작정이냐? 바로 너를 잘 알아 회개하고 설교하라."

"주여, 감사합니다. 만번 죽어 마땅한 자식 이만큼 징계하여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다시는 나 하기 싫은 일 남에게 미루지 않겠습니다. 사랑의 채찍 감사합니다" 하고 그날 설교에 간증하니 교우들에게 웃음거리도 되었지만 참으로 은혜로웠다.

그 후에 교회가 너무 협착하여 신축하였는데, 벽돌 이층으로 220평 짓고 삼층 다락까지 하면 예배 드리는 장소만도 약 천 명은 수용할 수 있게 지었다. 아래층은 주일학교로 사용하게 되었다.

아마 우리 성결교회 중에서는 전국적으로 제일 큰 교회일 것같다. 또한 성경학교를 두어서 지방 교역자들을 양성하고 각처에 지교회를 설립하였다.

특히 신의주 마천동에 지교회를 세웠는데 불과 몇 개월이 못 되어 50여 명의 신자가 모였다. 목회를 하면서도 부흥 사명이 있어서 구의주, 양시, 안동, 비현 등지에 집회를 많이 인도하고 성결교만 아니라 장로교, 감리교에까지도 청함을 받았다. 대부흥회로 처음 집회를 가진 것은 내가 37세 때 평양 경창문 밖에 천막을 치고 수천 명의 사람들을 상대로 전도했을 때이며, 많은 구도자들이 생기고 그로 인하여 부흥초청이 더욱 많이 들어왔다.

내가 37세 때에 마지막으로 딸을 또 하나 받았다. 어찌된 셈인지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아들은 하나도 주시지 않고 딸만 고스란히 넷을 주시니 주는 생활만 하라는 뜻인가 보다. 섭섭한 마음 없지 않았으나 범사에 감사하며 막내 딸은 신의주에서 났다고 의숙이라 이름 지었다. 성격이 쾌활하고 명랑하였는데 어떤 때는 지나치게 명랑해서 미국 사회에나 맞을지 몰라도 우리 나라에선 흉보일 성질인 것 같다.

보육대학을 나와서 유치원 선생으로 있다가 청주 김종호 장로의 맏아들 김동수군과 결혼하였다. 동수군은 연대 상과를 나왔기 때문에 큰 사위, 작은 사위처럼 목사는 안 될 것이나 아마 교회 봉사하는 장로의 일은 잘 맡아보리라 생각한다. 1937년(38세 때) 총회가 서울 신학교에서 있었는데 그때 나는 단체 부흥사의 사명을 받게 되었다. 그 사명을 받기 전에 나는 이상한 꿈이라 할까 비몽사몽 같은 일이 한번 있었다.

총회 도중에 나는 너무 지쳐서(철야 기도와 회의 때문에) 신학교 서쪽 4층 어느 조그마한 방에 들어가 잠깐 누웠는데 김익두목사(장로교 부흥 목사)님이 오시더니 나를 위하여 안수기도를 한다고 나의 오른편 옆구리에 손을 대고 어루만지며 기도하셨다.

뜨끈뜨끈한 손이 닿자마자 불의 폭발이 일어나는데 너무 뜨겁고 놀라서 화닥닥 침대에서 뛰어올랐다. 떨어지니 꿈이었다. 어찌나 혼이 났는지 온 전신에 땀이 흐르나 심령은 매우 상쾌하였다. 불세례를 체험한 것이었다.

그날 밤 회의 때에 나를 부흥 목사로 임명하였고 나는 담대히 주님을 의지하고 사명대로 일생을 바치려는 결심을 굳게 하였다. 그리고 때때로 그때의 체험을 생각하여 새 힘을 얻곤 하였다.

1937년 전국 부흥사로 임명받고 주님의 인도하심대로 할 것이로되 그때에 내 마음에 작정하기는 회갑(回甲)까지 일천 교회를 목표로 하고 출발하게 되었다. 어언간 금년은 나의 회갑이요 천교회는 지난 지가 벌써 오래 전이다.

그때 부흥사로 떠나면서 1937년도 활천(活泉)에 투고한 나의 선언서(소감의 글)와 신의주 동부교회 이기백 장로의 석별시를 여기에 기록하겠다.

전국 부흥사 임명을 받고

일을 일으키시는 이도 여호와요 일을 그대로 이루게 하시는 이도 여호와시니라.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한 이가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 : 3). 아멘.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 신실하신 여호와 내 아버지의 약속이로다. 창세 전에 나를 아시고 모태로부터 나를 택하시고 출생 후 지금까지 거룩하신 품안에 영육을 보존하시고 전지전능의 손에 붙잡으사 작은 일에서 큰 일에 이르기까지 만사 합동하여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게 하심을 감사할 뿐이로소이다.

과거 현재를 통하여 미래의 빛난 소망은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더욱 새로워지며, 임하는 주님의 영광은 그날그날 순간순간에 작은 그림자를 통하여 나타나심이 은혜 위의 은혜요, 이적 중의 기적이요, 축복 중의 축복이로다.

금번에 귀중한 사명은 벌써 만세 전에 예정하신 주님의 계획이요, 4년 전에 보여주신 이상의 감동이 오늘에 성취될 때 일희일비(일희일비)의 정을 금하기 어렵도다. 무슨 연고인고?

주님의 거룩한 뜻은 언제든지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할 때 한번 더 기뻐하고 감사하며, 중대한 책임을 생각할 때 황송하고 떨리지 않을 수 없노라.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며 티끌 같은 미말의 자신을 돌아볼 때 이 사명의 말씀이 참으로 어려워 미디안 광야의 모세가 내게 거울이 되도다.

그러나 나의 본질을 아시고 택하신 하나님은 "내 권능은 약한 데서 강하니라" 하시며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사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며 또 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과 없는 것을 택하사 있는 것을 폐하시는 것은 옛적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법이요 하늘의 새 일인 것을 담대히 믿어 감사하노라.

지렁이 같은 야곱아, 산을 찧어 가루를 만들고 뫼뿌리를 갈아서 겨와 같이 날리리라. 오, 주의 권능으로 없던 내가 이 시대에 생겨나서 주의 영광 다 뵈옵고, 필요한 일을 알리어

주시는 그 사랑의 품에 있는 것은 웬일인가.

물질이나 정신이나 영이나 육이나 우리 전부가 주께서 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 도상에 순간순간 최후 숨결까지 그 안에서 사라짐을 나타내겠노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불타는 주님의 사랑, 그의 가슴을 내가 알고 나를 불러 세우신 그 뜻을 알려 주시는 힘, 임하는 말씀, 인도하시는 성령에 끌리어 순종하고 복종하리니 그 앞길에 장애와 사탄의 오묘도무수할 터이나 그 염려와 불신앙의 죄악을 다 태워버리고 힘써 매진하겠도다.

각처에 한 핏줄 한 몸으로 지음받은 형제 자매여, 한 순간이라도 이 그림자, 이 질그릇(상품)을 기억하시사 합심 동정의 기도를 드려 주소서.

"너희들이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어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이루어 주시리라.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행하는 일을 저도 행할 터이요 이보다 더 큰 일을 하게 하시리라."

주여, 나의 믿음의 부족함을 도우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이제 전임지인 신의주 동부교회에서 큰 새 예배당을 짓고 헌당식을 한 지 사흘 만에 떠나려니 여러 교우들과 큰 일을 겪고 떠나는 약한 마음, 뒤를 돌아다봄이 적지 않으나 법궤를 멘 새끼 밴 암소가 벧세메스로 향하는 길 눈앞에 어리어 내 심장은 고동하며 내 갈 길을 재촉하니 아니 가지 못하노라.

주여, 이 몸 떠난 후에 사랑하는 신의주 교회에 배전의 축복을 더하사 큰 영광과 이적을 한번 더 찬송케 하여 주소서.

1937년 신의주를 떠나면서 이성봉


석별의 노래

- 주의 종 이성봉 목사를 보내면서 -

떠나가신 그 자취를 생각하고 우는 마음

목자 잃은 미양(迷羊)을 생각하고 웁니다

삼천리 넓은 뜰에 이천만의 미양(迷羊)들

기갈에 우는 양 길 잃어 우는 양

아! 거룩한 목자여 빨리 가소서

저들을 먹이시고 저들을 찾으소서

영음 듣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주여 당신의 신을 갑절이나 주소서

주의 용사 출정함에 마귀 생명 없도다

승리의 개가를 소리 높여 부르리

아! 주의 종이여 ! 속히 가소서

선봉대장 주 예수님 간 지 오래됐나이다

십자가를 등에 지고 주를 따라가는 종아

무겁다 벗지 말고 괴롭다 퇴치 말자

수화창검(水火槍劍) 막는단들 두려울 것 있으랴

살아 계신 주의 손이 너를 부조하리니

갈보리산 골고다의 쓴 십자가

주님 일찍 져주시고 지금도 져주시니

지고 지고 또 지면 못질 리 없으리라

순교자의 홀린 피는 후계자를 고대하고

주님 뿌린 복음씨는 추수꾼을 고대하네

주의 사자여 네 피를 뿌리라 이 강산이 젖도록

파수꾼아 크게 외치라 네 목이 터지도록

추수꾼아 걷어들이라 천국 곳간 좁도록

네 흘린 핏방을 네 흘린 땀방을 네 흘린 눈물방을

마지막 면류관에 광채 찬란하리라

복음 지고 가는 자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동서의 넓은 천지 그대 발로 점령하고

수억의 많은 창생 주의 말로 포로하라

마지막 나팔 불 때 주 앞에 많은 상은

그대 혼자 받으리

오 주여 영광받아지이다 존귀받아지이다

주의 종 가실 길을 이 몸도 따르리라

내 힘없고 약하오나 그대 따라 가오리라

산 높고 험한 골짜기 넘고 걸어 따르오리다

가시밭과 골짝길을 두려 말고 따르리라

내 갈 길 앞장서서 헤아려 주소서

주여 나는 종의 앞길을 열어 주소서

가고 남긴 발자취 향기로워지이다

아름다워지이다

주여 비노니 축복의 손 펴소서 아멘.

1937년 12월 22일 이기백 드림

부흥사의 사명을 받은 나는 신의주 동부교회의 헌당식을 끝마친 지 사흘만에 처와 어린 자식 넷을 거느리고 시베리아의 찬바람 무릅쓰고 정든 교회와 교인들의 눈물의 전송을 받으며 사명의 길을 떠났다.

정을 생각하면 차마 떠나기 힘든 그곳이었지만 그 정을 뿌리치고 새 사명 가지고 서울로 올라왔던 것이다. 우리 식구들은 서울 신수동 교회(마포) 주택에 있고 나는 전적으로 순회 부흥에 나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