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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부흥목사 시대

 

부흥목사로 임명받은 내가 방방곡곡마다 큰 교회, 작은 교회 어느 곳이나 부딪히는 곳이면 하나님의 역사가 같이하셔서 큰불이 일어나곤 하였으며 예수의 향기가 진동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의 순회 전도기는 성결교 교단에서 출판하는 활천(活泉) 지에 다달이 기재되었다.

교회 교회를 돌아다닌 자취를 일일이 여기에 기록할 수 없다. 다만 그 중에 재미있었던 사실들 몇 가지를 적고자 한다.

1. 펑양 명촌 장로교회

1938년에 평양 명촌 장로교회에서 집회할 때 갑자기 집회 중에 귀신 들린 여자가 나타나 난동하는데, 그 여자는 오래 전부터 대감귀신에게 붙들리어 늘 그렇게 못되게 군다고 했다. 그래서 나와 여러 교우들이 함께 기도하여 그 귀신을 쫓아내고 주께 큰 영광을 돌렸던 일이 있었다.

2. 대령 율포교회

어떤 여인이 여러 해 동안 연주창(連珠瘡)으로 고생하다가 집회 중에 비몽사몽간에 천사가 나타나서 자기를 어루만져 주었는데 그때부터 불현듯 나아서 주께 영광을 돌렸다.

3. 군산 구임교회

삼년 동안 앉은뱅이였던 부인이 나음을 얻어 지금도 건강하게 교회에 봉사하고 있다.

4. 군산 성결교회

부흥 집회에 참석한 금마 복음교회(간판은 복음교회이나 인본주의로 행하는 이단 집단)의 신자 이대준, 이홍준, 김신환 삼인이 은혜받고 그 교회를 탈퇴하고 성결교회를 세울 때 많은 핍박을 받았으나 용기로 싸워 점점 교회는 생명의 움직임으로 큰 교회를 이루고 지교회까지 세 곳이나 세웠다.

그 후 이대준씨는 신학을 마치고 목사가 되어 지금 큰 교회에 목회자로 있으며, 그의 형님 이홍준씨는 이리 성결교회를 충성스럽게 받드는 장로가 됐으며, 김신환씨도 신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포항에 교회당을 신축한 후 지금 군산 해망동 교회 목사로 유력하게 일하고 있다.

그들의 열매로 많은 교역자가 나오고 있으며 신도들이 많다.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안다고 함과 같이 이들은 크고 좋은 나무들이며 하나님의 귀한 그릇들인 것이다.

5. 함경북도 웅기 집회

집회할 때이다. 어느 부인이 교회에서 철야하며 고통 중에 빠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어느 부잣집 소실로 삼 남매를 거느리고 있는 몸인데, 그 동안 교회는 나오면서도 마음에 아무 거리낌도 없다가, 지금 이 집회에 참석하여 철저한 회개와 은혜의 자리에 임하게 되니 고통과 번민 때문에 한시도 그 집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후에 그 부인은 단연코 남편에게 헤어지자고 했는데 남편은 그럼 나가라고 하면서 아이들은 다 두고 입은 옷 그대로 나가라고 하였다. 남편의 생각에는 그 부인이 이틀도 못 가서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라도 집에 돌아오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부인은 모든 육신적인 정을 떼어버리고 어느 조그마한 셋방을 얻어 그 전에 호사하던 것은 생각지 않고 고생을 감수하며 콩나물 장사로 교회에 봉사하고 지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이 일 년만에 이상하게도 회생하지 못할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을 때에 이 부인을 불러서 자기의 어린 아이 삼 남매를 부탁하고 재산을 절반 갈라 주어 그것으로 부유하게 지내며 교회에 크게 봉사하게 되었다.

6. 만주 해림교회 집회

또 한번은 만주 해림교회 집회 때에 들은 이야기다. 그 교회에 나정순이란 아주 성녀 집사 한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마음이 착하고 좋은데도 그 남편은 이런 부인을 두고 어디서 소실을 하나 데려왔다. 그리고 밤마다 자리를 나 집사 보고 깔아 놓으라고 하고는 둘이서 재미나게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 집사는 조금도 남편을 원망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 전도감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그 소실을 꼭 자기 동생과 같이 사랑하여 데리고 예배당에 다니며 글을 가르쳐서 성경을 보게 하였다는 것이다.

남편과 소실이 윗방에서 재미있게 지내는데 아랫방에서는 밤을 새워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 영혼들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 집사가 아랫방에서 그들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였더니 그 밤에 남편의 마음이 이상하게도 갑자기 변하여 그 소실이 보기 싫은 마음이 생겨서 날이 밝자 "너의 집에 가라"고 하더란다. 그렇지 않아도 소실도 그 동안 교회에서 은혜받고 그 자리를 떠나야 할 줄 알았으나 남편이 놔주지 않아서 헤어지지 못했는데 남편이 가라고 하니까 보따리를 싸서 얼른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헤어지면서 소실은 나 집사를 붙들고 "나는 모르고 형님 집에 왔다가 이런 큰 구원받고 가게 되었으니 영감 떨어지는 것은 시원해도 형님 떠나는 것이 섭섭하외다" 하고 울더란다. 작별한 후 나 집사와 그 남편은 나의 집회에 참석하였다.

그 남편은 "나는 돼지 새끼 같은 놈입니다. 좋은 부인 두고도 더러운 행동을 한 것 천벌받아 마땅합니다" 하며 통회 자복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온 교회가 모두 충격을 받아 더욱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으며 나 집사는 더욱더 올라가게 되었던 것이다.

7. 장호원 집회

그 교회 부인 허 집사는 남편이 아편 중독자라 늘 가정이 불화하고 평안함이 없으므로 남편 몰래 여비를 준비해 가지고 도망하려다 그 전날 밤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받고 자기 잘못을 회개하고 준비하였던 여비, 그 당시의 돈 십오 원을 몽땅 교회에 바치고 불화하던 그 가정이 평화로워지므로 주께 영광을 돌렸다.

8. 동북만 용정 집회

여기서는 대단히 큰 부흥을 체험하였다. 용정에 있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세 교파가 의논도 없이 모두 한곳에 모여 집회를 하는데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나는 강단에서 설교를 못하고 부인반 출입구에다 책상을 놓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과 밖에 가득히 서 있는 사람들을 번갈아 보면서 설교를 하였다.

그곳의 명신 중학교 교장 이하온 선생과 학생 전원이 하루도 빠짐없이 집회에 참석하여 더욱 집회가 재미있었다. 이천여 명의 군중들 중에 회개하고 중생을 경험한 자가 부지기수이고 새로 믿는 결신자가 130여 명이었으며, 그때 헌금을 할 때 특히 은혜가 있어 금반지, 시계 모두 빼 바쳐서 새로 교회 신축하는 데 큰 물질이 생겼던 것이다.

그 교회의 한 구두쇠 할머니는 이번 집회에 이 원을 헌금하려고 작정했는데 마지막 헌금하는 날은 이백 원을 헌금하였으며, 어떤 신혼 신부는 결혼반지(25원)를 빼서 바치고, 남의 집 고용살이하는 열네 살 난 어린 소년은 자기의 첫 월급 십일 원을 몽땅 바치고, 어떤 할머니는 자기의 옛날 결혼반지(똬리 가락지)를 빼서 바치었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로 한참 헌금 중에 난데없이 돌멩이들이 날아와서 교회 안에 있던 중학생 머리를 때려 잠깐 혼수상태에 놓이게 하였다. 그러나 이 학생은 그 아픈 중에서도 자기의 보물인 시계를 빼어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주님께 영광 돌리었던 것이다(헌금 총액 1,360원).

이 용정교회는 그 전부터 마역(魔役)으로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고 모두 시험에 들어 교회가 약했는데 그 집회로 인해 크게 부흥이 되었던 것이다.

9. 평양 서성리 장로교회 집회

이 집회도 참으로 많은 은혜가 내리었다. 그때 마침 장로교 총회가 있었기 때문에 만주와 저 남쪽에서도 교역자들이 많이 참석한 가운데 더욱 충만한 은혜가 내리었다.

첫째 날에는 어떤 미신자가 구경 왔다가 회개하고는 담뱃대를 꺾어 버리고 예수 믿게 되었고, 셋째 날에는 상당한 가문의 귀부인이 귀신 공경으로 유명하여 일 년에 한두 번씩 꼭 무당을 불러다 굿을 하며 별별 귀신을 다 섬기던 사람인데 성회에 참석하여 회개하고 모든 우상을 불사르고 특별히 굿할 때 입던 무당 예복 십여 벌을 끌고 와서 본 교회 목사에게 드리니 목사가 그것을 들어 보이면서 간증할 때 모든 신도들이 승리의 개선가를 불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10. 오금리 교회

이 교회는 지난 봄에 세워져서 어떤 대감의 별장 자리를 교회로 빌려쓰고 있었다. 이 교회가 세워진 동기는 내가 수원 있을 때에 홍길순이란 청춘 과수가 예수 믿고 25리나 되는 곳의 교회를 십년간이나 일주일도 빠지지 않고 다녔는데 완고한 시댁과 우매한 동리의 핍박과 조롱이 맹렬했음에도 주님의 십자가를 분명히 깨달은 이 자매는 주야로 눈물 흘려 이 동리에도 교회가 서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외로운 자의 하나님, 과부의 하나님은 이 기도를 응답하사 비로소 금춘에 교회가 설립되니 평균 삼십여 명의 신자가 모였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그 교회에 가서 집회를 하였더니 첫사랑 첫불에 타는 어린 심령들이 기쁨을 이기지 못했으며 새 결심자가 삼십여 명이 생기고 새벽기도회에도 사십오 명의 신자들이 나와 죄를 회개하고 온 교회는 열심으로 주께 봉사하였던 것이다. 그 후에 그곳에 예배당을 세웠던 것이다.

겨자씨같이 작으나 생명이 약동하는 홍 과부의 귀한 열매는 크게 되었으며 가시밭의 백합꽃같이 예수님의 아름다운 향기를 떨치었던 것이다.

11. 펑안도 무진교회

여기서도 재미있는 사실이 또 많았다. 그 교회는 전 해에 벽돌 예배당을 신축하고 칠백여 원의 채무가 있었는데 성회에서 어찌나 헌금열이 많은지 그 돈 다 갚고도 남음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 교회 부속학교의 학생들과 선생들 전부가 학교 시간을 단축하고 나에게 사경회 인도를 간청했다.

12. 황해도 송화읍 교회

여기서도 또한 큰 이적과 기사가 많이 있었다. 그 교회 권오균 목사는 먼저 내가 은혜받아야 신도들도 은혜받겠다 생각하고 열심히 철야기도를 하였던 것이다.

나는 몸이 몹시 쇠약해져서 도저히 병석에서 일어날 수 없었으나 그들의 열심 있는 기도에 아픈 몸을 이끌고 강단에 서서 결사적으로 설교하였던 것이다.

그때에 정영실이라는 사람이 크게 은혜받았는데, 그는 과거에 부모 처자 다 떼어놓고 만주로 러시아로 방황하며 가족의 속을 태우고 안타깝게 했던 사람이었으나 그 모친과 부인의 열렬한 기도로 인해서 다시 자기의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의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 꼭 예수를 믿으라고 부탁하고 운명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그저 할 수 없이 교회에 다니는 중에 이번 성회에 통회 자복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의 부인도 과거 삼십 년간이나 원수 맺었던 사람에게 가서 자기가 먼저 풀자고 하고 깨끗이 과거의 원수 맺었던 것을 청산하고 병든 그 사람을 자기네 집 아랫목에 데려다가 누이고 정성껏 간호하는 그런 큰 은혜가 내렸던 것이다. 그의 가정은 그 후 축복을 받아 교회 봉사 잘하고 가정이 행복하게 살았다.

13. 전의 집회

나는 여기서 욥과 같은 신앙자를 한 사람 만났다. 그 사람은 전의교회 방 집사이다. 그는 모범적 신앙가인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욥과 같은 시험을 허락하신 것이었다.

그것은 삼 년간에 그의 식구 중 네 명이 고스란히 세상을 떠났는데, 제일 먼저는 28세 난 장자가 죽고 다음에는 뜻밖에 사랑하는 아내가 죽더니 세 번째는 18세 난 둘째 아들이 또 죽더란다.

그리고 18세 난 둘째 딸이 또 죽어서 삼년 안에 처자를 모두 잃고 나니 이러한 변괴(변괴)가 또 어디 있으며 이렇게 비참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 방 집사는 하나님이 주셨다가 하나님이 데려가시는데 누구를 원망할까 보냐 하며 더욱 인생관을 체득해 나가고 영적 생활에 조금도 마귀에게 틈 주지 않고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보며 교회에 더욱더 봉사하는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동서를 분별치 못하는 늙으신 장모님을 친부모 이상으로 봉양하며 일반 사회와 교회에 큰 빛을 나타냈었다.

우리의 믿음이란 말만이 아니요, 실제 생활에 공효를 이루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는 것이다.

이 외에도 처음 집회에 나설 때에 가는 곳마다 많은 은혜가 임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일일이 여기에 기록하지 못하고 일년간의 집회 기간에 어떤 교회에 갔었다는 것만 기록하련다.

제일 먼저 평양서부터 출발하여 명촌 교회, 원주, 여주, 이천, 평양 경창문밖 교회, 안성, 장호원, 죽산, 재령, 해주, 경기도 광주, 인천, 충청도 은산, 도문, 조양천, 연길, 회령, 웅기, 용정, 나진, 송화, 구의주, 수원, 김천, 광주, 율포, 청주, 운동(충북), 춘천, 줄포 부강, 중화(평남), 무진(강원도), 삼천포, 안동, 부산, 대구, 평북 안주, 순천(평남), 상원, 평남 사이장, 용천, 강계, 위원, 서울 천연동, 목포, 목포 지교회인 섬교회 전부 순회, 군산, 청진, 포항.

이 외에도 여러 교회 교회마다 쉴 사이 없이 다녔던 것이다. 처음 집회 나서서 아무 지식도, 지혜도, 능력도 없었으나 일 년간을 하나님만 의지하고 각 곳에 다닐 때 주님이 같이하사 무한한 영광을 돌리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악마의 시기와 질투가 나를 넘어뜨리려 했다. 왜냐하면 내가 부흥목사로 정오의 햇빛처럼 빛나고 점점 올라가니 우리 교파뿐 아니라 장로교 감리교에서도 대환영들이다. 그래서 타 교파에도 많이 나가게 되니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성결교 부흥사이니 성결교만 집회하고 다른 교파에는 가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제지하니 내 마음 매우 괴로웠다. 나는 본시 장로교에서 구원받고 한 십 년 있다가 또한 감리교 구역에서 한 십 년 있었다.

그리고 25세에 성결교회로 왔던 것이다. 본래 나는 교파의 구별없이 봉사하는 것이 나의 사명인 줄 알아서 이에 불응하였었다.

그것도 전국적으로 일하던 것을 절반 갈라서 북한은 김이라는 사람에게 집회 인도하라고 하고 나는 남한만 일하라는 것이니 불가불 무슨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을 알고 39세에 휴직 청원을 내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이라는 사람은 전에 공산당으로 있다가 회개하고 석달 만에 신학교에 들어가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한때는 성도들로부터 큰 인기를 한 몸에 받았으나 얼마 가지 못하여 칠계를 범하고 아이까지 낳아서 본 단체에서 출교당하였는데 그 후에 중노릇하다가 6·25때 납치당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자를 지도자들이 눈이 어두워 잘 알지 못하고 속는 것을 생각할 때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