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재림의 복음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24:1-51)

볼지어다.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서 자기 옷을 지켜서 벌거벗고 행치 말고 자기의 부끄럼을 나타내지 않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계 16:15)

성경 중에 제일 많이 말한 곳에 진리가 있다고 하면 이는 곧 재림일 것이다. 재림에 대한 약속이 318회나 기록되어 있다. 혹자는 성경에 기록한 도덕율에 대해서는 믿지만 재림은 믿지 않는다.

그래서 구약을 없애고 신약에서는 묵시록을 없애고 사도신경을 뜯어고치고 예수의 재림설을 부인한다고 한다. 이는 물을 것 없이 마귀의 역사이다.

신자나 미신자나 무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니 마귀가 아니고 무엇인가? 성경은 부인한다고 부인될 것이 아니고 재림도 부인한다고 해서 물론 없어질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를 부인하는 자는 죄가 없다고 못할 것이니 우리 믿는 사람은 주의할 것이다. 과거 역사에서 구약의 예언을 우리는 경험하여 본다.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예수가 탄생하실 것을 벌써 사천 년 전에 창세기 3장 15절에 예언하였고 백여 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실 것을 예언하였고(사 7:14) 그뿐 아니라 미가 선지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겠다고 장소까지 예언했고(미 5:2) 심지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을 것까지 말하였다(시 22:18).

이러한 구약의 말씀들이 다 성취되지 않았는가?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에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은 물론 구속의 사업을 완전히 이루었다는 말씀이지만 구약의 모든 선지자가 자기를 가리켜 예언한 약속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도 된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신 말씀도 이제부터 이루어질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어느 교회의 영수(領袖) 한 사람이 믿은 지 오래건만 재림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한다. 어느 날 깨어 보니 곁에 누워 자던 자기 부인이 별안간 간 곳 없고 누웠던 자리에는 성경이 펴져 있는데 "두 여인이 맷돌을 갈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 두었다"는 구절에 빨간 줄이 그어 있더란다.

이것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아들 며느리 자는 방을 가서 보리라 하고 가서 본즉 그들도 역시 그 성경 구절에 빨간 줄을 그어 놓고 간 곳이 없었다.

이 영수는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나서 이거 우리 식구는 다들 어디로 나가 버리고 나만 빠졌구나, 야단이로구나, 에라 지금이라도 교회 목사님을 찾아가서 의논해 보리라 하고 곧 달려가 본즉 온 교회 신자들이 모여들어서 그 목사님을 가운데 세워 놓고 달라붙어 잡아뜯으면서 하는 말이 "글쎄, 이놈의 목사야, 다른 교회 신자는 다 들려 올라갔는데 우리 교회 교인만 들려 올라가지 못 했으니 이거 어쩌잔 말이오 목사가 재림이 있다고 분명히 가르쳐 주었더라면 우리가 준비하여 들려 올라갔을 터인데 재림을 분명히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들려 올라가지 못했으니 이거 어쩌란 말이냐"고 아우성을 치며 큰 소요를 하는 통인데, 곁에서 자던 자기 부인이 흔들어 깨워 주는 바람에 눈을 떠보니 한바탕 꿈이었다.

꿈을 깨고 나서 자기의 과거 신앙을 반성하고 그때부터 재림을 확신했다는 말도 있다. 하여간 먼저 말씀한 바와 같이 예수가 다시 오신다고 하는 문제는 세계 역사상에 큰 사실로 남아 있다. 그러면 예수께서 무엇하러 오시겠는가? 여기에 대하여 몇 가지 말씀드리려 한다.

세상 인류를 심판하시려고 오심

세상에서 참 공정한 심판은 예수님이 오셔야 이루어진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지라도 한 번 공정한 심판은 꼭 있어야 할 것이라고 믿어진다. 불공평하게 묻혀서 넘어간 과거 인류 역사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 엄밀한 조사와 공정한 판결이 있어야 하겠다는 말이다.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의 받을 상급을 받는 일이며, 선한 사람이 악인의 누명을 쓰고 영원히 풀지 못할 원한을 품고서 지하에 돌아가는 일이며, 충신은 간신의 누명을 쓰고 도리어 간신이 충신의 명예를 받는 일이며, 진정한 애국자는 빈한에 쪼들리고, 간교한 매국노나 모리배가 부귀를 누리며, 열녀(烈女), 현모(賢母)는 소박을 맞고 간사 요망한 악녀들은 온갖 사랑을 받고 넘어가는 일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이러한 세상을 볼 때에 하늘에 공도가 있느냐고 의심하고 선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는 자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 즉 선과 악의 사실을 윷짝 가르듯 확 갈라서 명백한 심판을 지을 날이 있을 것인데, 그것은 예수님이 오셔야 되는 것이다.

사람으로서는 공정한 심판을 할 수도 없으려니와 사람은 사람의 죄를 심판할 자격이 없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신이 아니고는 인류의 죄를 공정히 심판할 수 없다는 것을 세상은 점점 깨닫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심판의 주 한 분이 계시다는 것과 여러분의 행한 일이 한번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두어야 한다.

인류의 눈물을 씻으려고 오심

이 세상은 눈물의 골짜기이다. 이 세상이라는 골짜기에는 얼마나 눈물 흘릴 일이 많은가! 수를 능히 헤아릴 수가 없다. 억울한 눈물, 고민의 눈물, 질병의 눈물, 기근의 눈물, 전쟁의 눈물, 고아의 눈물, 과부의 눈물, 참회의 눈물, 고별의 눈물, 그리운 눈물, 약자의 눈물, 애국의 눈물, 배척의 눈물, 실연의 눈물, 무식의 눈물, 동정의 눈물, 심지어 감격의 눈물, 기쁨의 눈물까지 있어서 이래도 흘리고 저래도 흘리고 어찌하든지 눈물을 흘리게 마련된 세상이다.

누구는 말하기를, 아이가 나서 처음에 우는 뜻을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가? 인간이 세상에 한번 나와 보매 만가지 근심이 따르니라. 이런 말과 같이 사람이란 것은 눈물로 시작하여 눈물로 끝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세상에 왔을 때는 자기가 울고 세상을 떠날 때는 남을 울리는 것이 인간이요 세상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면 이런 눈물 저런 눈물을 다 거두어 주신다. 어떠한 종류의 눈물을 막론하고 눈물 없이 사는 시대가 전개될 것이다.

이것이 인간들의 최고 이상이다. 또한 특별히 성도의 눈물을 씻어 주신다. 성도의 눈물이란 것은 세상 사람이 흘려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눈물이다.

소돔 사람이 아브라함의 눈물을 알지 못했고 예레미야의 눈물을 당시 유대 민족들이 알지 못하였고 오늘날도 영혼을 위하여 흘리는 눈물을 세상이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는 만민 앞에서 이런 눈물을 씻어 주실 줄 믿어 의심이 없다.

영화롭게 시온성문 들어가서 다닐 때

눈물 없이 황금길을 다니며

금거문고 맞추어서 새 노래를 부를 때

세상 고생 모두 잊어버리리.

재림의 징조는 어떠한가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여러 가지 징조가 있을 것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 모든 일을 보거든"(마 24:33) 하신 말씀은 예수가 오실 것을 예시하는 징조를 말한 것이다.

첫째로 사회 정세를 보아 알 것이다.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여"(마 24:7). 이것은 동족상쟁(同族相爭)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면 동족 상쟁은 예수 오실 일의 한 가지 징조라는 말씀이다.

이웃 나라 중국은 자기 동족끼리 싸우기를 계속하고 있다. 지금도 그칠 줄 모르고 싸우고 있다. 과거에 프랑스 혁명전이나 러시아의 혁명전이나 스페인 내란이나 미국의 남북 전쟁이나 오늘날에 좌우 사상으로 동족끼리 얼마나 피를 흘리고 싸우고 있는가! 그들의 경우와 시비를 막론하고 동족 상쟁이라는 것은 말세에 나타나는 한 징조로 볼 수밖에 없다.

둘째로 자연계에 징조가 있다.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마24:7). 과거에 전세계적으로 기근이 많았겠지만 지금도 당하고 있으며, 특히 한국에서 당하는 기근을 생각하여 보자. 아마도 팔할 이상이 이 기근을 경험했을 줄 믿는다. 이것이 다 흉년이 있다는 예언이 성취되어 가는 현상이다. 또한 지진이 있다는 말씀에 대하여서도 10여 년 전에 일본에서 이러한 것이 일어난 잔재라든가, 또 기원 79년에 이탈리아 베수비오 화산이 터져서 폼페이라는 항구가 순식간에 화산재에 매몰된 참혹한 사실들을 두고 보더라도 이 말씀의 성취의 전주곡이다.

그뿐인가! 요한계시록 16장 21절에 보면 백 근짜리 우박이 내린다고 하였다. 백 근이라고 하면 지금 우리 나라의 쌀 한 가마니 중량과 같을 것이다. 이런 우박이 그 높은 하늘에서 빠른 속도로 떨어질 터이니 사람이나 육축이나 곡물이나 건물이나 무엇을 막론하고 견딜 것이 없다. 성경에 보면 이 우박으로 인하여 피해가 심히 크니 사람들이 하나님을 훼방한다고 하였다. 얼마 전에 이러한 우박이 와서 큰 피해를 입은 일도 있고, 수십년 전에 우리 나라에서도 계란 같은 우박이 내려서 인축이 상하고 장독이 다 부서진 일이 있다.

하여간 말세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강팍한 인간들을 형벌하시려는 재앙이니, 인력이나 과학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을 알아야 한다. 애굽의 열 가지 재앙이나 소돔의 유황비는 이 다음 세대 소돔과 애굽(계 11:8)에 내릴 징조를 보였다.

셋째로 국제 정세에 징조가 있다.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마 24:7). 이는 물을 것 없이 전쟁이다. 인간에게 무서운 재난은 전쟁이다. 전쟁이 무서운 일이라는 것은 전세계 인류가 경험한 것이니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2차 세계대전에서 스탈린그라드의 독소전이라든지 구주대전(1차 세계대전)에서 영독전 등이 얼마나 처참한 전쟁인가를, 일본의 동경과 광도 폭격전이 얼마나 무서운 전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요한계시록 16장에서 보면 정말 세계 대전은 아직도 남아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천하 여러 왕들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에 모아서 싸우게 하니 이는 히브리말로 아마겟돈이리라(계 16:14-16). 이것이 아마겟돈 전쟁이다. 세상의 정치가들은 다시 전쟁이 찾아오지 않기를 원하고 있다.

평화를 건설하려고 노력을 한다. 그러나 평화 건설이 되지 않는다. 왜? 그 이유는 각각 있겠지만 성경을 믿는 우리로서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아마겟돈 전쟁이 아직 남아 있는 것, 또 하나는 평화의 왕이신 예수 재림의 시기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이라 한다.

과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재림이 있기 전에는 세상을 평화롭게 할 수가 없다고 하는 절실한 느낌을 좀 생각 있는 사람들은 다 가지고 있다. 그 반면에 아직도 세상에는 큰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믿음은 고사하고라도 사람들의 예민한 신경에 벌써 예감하여지기 때문에 인류가 안심을 하지 못하고 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넷째로 세대의 인심에서 보이는 징조이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 먼저 말한 천재지변(天災地變)은 보이는 징조라 하겠지만 그보다도 자취 없이 오는 무서운 징조는 사람들의 애정이 식어지는 일이다.

나는 얼마 전에 기차나 전차를 탈 때 사람들이 약한 여자가 밟히든 말든 자기만 타려고 서로 밀고 싸우는 것을 보았는데 슬그머니 걱정이 생겼다. 이다지도 사람의 마음에 겸양심이 없고 애정이 없을까? 우리 대한이 언제나 저런 곳에서도 서로 겸양하는 덕을 가지는 국민이 될까 하고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과 사람들이 서로 모인 곳에서 애정은 도무지 볼 수가 없고 서로 먹고 씹으려는 것밖에 없다. 더구나 사랑의 단체라고 하는 교회를 보아도 역시 그렇다. 오늘날 예배 장소에 가서 보면 어쩐지 훈훈한 감이 없고 겨울 동산의 돌부처같이 싸늘하기 짝이 없다.

목사들은 자기 간판이나 내세우고 수완만 자랑하고 수단과 모략만 사용하여 자기 직분의 체면 유지뿐이다. 참으로 형제를 사랑하며 영혼을 사랑하여 남을 섬기는 종의 생활과 기도의 생활은 하지 않는다.

교회 발전을 위하여 하는 일이라고 보면 모아서 싸우기만 하는 것 외에 교회를 위하여 아무 효과가 없고 도리어 영혼을 넘어지게 하는 일뿐이다. 때로는 저희끼리 모여서 사랑하고 기뻐하지만 밝은 눈으로 그 내용을 검토하여 보면 이유는 유유상종(類類相從)에 불과하다.

서로 취미가 동일하고 처지가 동일하고 혹 신조가 동일하니까 저희끼리 사랑하고 내왕하는 것뿐이니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반감과 질시를 살뿐이다.

다시 말하면 원수를 사랑하고 나보다 못한 약자에게 더욱 친절히 하고 세상에서 배척을 당한 낙오자를 찾아서 따뜻한 우정으로 사귀어 주는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조금도 과도한 비판이 아니다. 오늘날 교회 내부를 보면 이상야릇한 비루(鄙陋)한 일이 많다. 성공자는 성공자끼리, 부자는 부자끼리, 옷 잘입은 사람은 옷 잘입은 사람끼리, 학식 있는 사람은 학식 있는 사람끼리 서로 친하고 서로 몰려가고 몰려오고 서로 모여 앉고 서로 악수하고 서로 주고 서로 받고 한다.

이런 무리가 교회를 주장하기 때문에 교회의 내부가 부패하고 교회의 근본 정신이 그릇되게 된다. 사실 세상에서 인생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이 위로를 받을까 하고 교회에 찾아왔다가 실망하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 후부터는 교회가 무슨 일을 한다고 해도 곧이 듣지를 않는다.

이와 같이 애정이 식은 교회는 도리어 남의 길까지 막게 된다. 애정이 식어진 교회들이 하는 일은 모두가 울리는 꽹과리 소리와 같아서 사람에게 덕을 세우기는 고사하고 사람들의 심정을 상하게 하는 것밖에는 더 하지 못한다.

현대 교회는 다른 것을 염려할 것 없다. 먼저 할 것은 우리의 믿음의 열을 뜨겁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소망도 명확히 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때에는 믿음도 폐하고 소망도 폐할 것이다. 우리 믿음의 대상이며 소망의 대상이신 예수가 구체적으로 오시면 믿음과 소망은 폐할 것이다. 오로지 사랑은 영원히 폐하지 못한다. 그런고로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다섯째는 교회에 수면으로 보이는 징조이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마 25:5). 이 말씀은 재림 전 교회가 다 졸며 자고 있을 것을 보이신 말씀이다.

옛날 로마 제국이 삼백여 년 간 계속하던 교회 박해를 그치고 콘스탄틴 황제 때부터는 기독교를 공인함으로써 그렇게 심하게 박해하던 국가가 일변하여 전적으로 기독교를 수입하고 국법으로 보호를 하게 되니, 그때부터는 기독교가 세력의 날개를 얻어서 기세를 날리게 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그때부터 교회가 졸고 자기를 시작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차라리 로마에서 하루도 쉴 사이 없이 교도들이 십자가에 달려서 혹은 칼날에 찍혀서 혹은 기름 가마에 끓여져서 죽을 때가 교회가 깨어서 자기 신앙을 지키는 때였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세력의 품에 안겨서 보호를 받을 때, 교회가 세상 권속을 잡게 될 때부터 신앙은 졸며 자기를 시작하였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을 정복했다는 것은 얼마나 놀랄 만한 일이었는가? 로마진의 창에 맞아서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복음이 얼마 가지 아니해서 로마를 정복하고야 만 것은 참 승리요 성공이다.

그러나 교회나 신자는 성공할 때 졸며 자기 쉬운 것이다. 잡아 삼키려 하는 대적과 박해 앞에서는 깨어서 기도하고 성경을 애독하는데 박해도 그치고 대적이 물러간 후에는 안일과 향락에 졸며 잔다는 말이다.

여기 조는 자와 자는 자가 두 가지 종류의 형편을 말하였는데, 오늘날 교회 신자 중에도 두 가지 형편이 있다. 첫째는 조는 자인데, 이는 졸다가도 무슨 소리가 들릴 때마다 깜짝 놀라서 정신을 차리는 일도 있다.

그러나 가로누워서 베개를 돋우어 베고 코를 골면서 자는 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깊이 자는 자도 있다. 늙은 노파의 자장가 소리에 자고 있는 아이와 같이, 늙은 마귀의 자장가 노래에 온 교회는 자고 있다.

튼튼하다 자장자장, 더디 온다 자장자장, 올 때 깨워 주마 자장자장.

도적같이 오실 예수

왜 예수께서 오실 것을 하필 도적으로 비유했을까 하면 첫째 도적은 생각지 않은 때 오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세상사람들이 생각지 않은 때에 오시기 때문이다.

때는 여름이었다. 내가 수원교회에 사역할 때 어느 신자 가정을 심방하였다.

나는 좀 무흠한 댁이라 생각 없이 그저 쑥 들어갔다. 그런데 내가 들어가자 온 집 사랑이 깜짤 놀라며 아이고 어쩌나 ! 소리를 치더니 하나는 뒷문으로 달아나고 하나는 건넌방으로 하나는 안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앉았던 자리에는 부인네 치마 적삼만 여기저기 놓여 있고 또 같이 있던 어린아이만 남아 있다.

나 역시 무의식 중에 들어갔다가 무색하기는 하지만 어찌할 바를 모르고 들어가다 말고 주춤주춤하고 있노라니까, 여기저기서 팔뚝을 쑥쑥 내밀면서 아무개야 내 치마 내 적삼 하고 재촉을 하니라 이 아이 혼자서 그들의 옷을 찾아 여기저기 갖다 주느라고 분주 법석했다.

나는 퍽이나 우습고도 퍽이나 딱한 일을 당해 보았다. 때는 여름날이라 덥기는 하고 이는 자기 집안 마루니까 누가 오랴 하는 생각으로 안심하고 딸, 며느리, 시어머니가 웃옷을 벗고 어울려서 열이 나게 잠을 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자기네들의 믿음 상태를 생각하다가, 심방하고 싶었던 목사가 찾아올 줄은 몰랐다. 나는 그들에게 예배 보기를 청한 후에 믿음의 준비를 권고했다. 예수께서도 이와 같이 오신다고 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편안하고 튼튼하다 말할 때에 해산할 기약이 아이 밴 여인에게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간 이르리니 결단코 면치 못하리라" 하셨으니 생각지 않고 방심하고 있을 때에 오실 것이다.

볼지어다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서 벌거벗고 행치 말고 자기 부끄러움을 나타내지 않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계 16:15) 하였다.

둘째로는 짭짤한 신자를 데려가시려고 오신다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피로 사서 세운 성도를 자기 앞에 올려다 두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얼빠진 신자 말고 새벽길같이 똑똑한 신자를 데려가신다. 자기 옷도 못 지키는 미치광이 신자가 아니라 옷을 정케 입은 단정한 신자를 데려가신다. 미지근한 온생원 말고 따끈하고 뜨거운 신자를 데려가신다. 있으나 없으나 한가지인 시시한 신자 말고 짭짤한 신자를 데려가신다. 어느 도적놈이 밤중에 잠도 못 자고 남의 집에 들어가서 꿰맨 고무신짝, 떨어진 걸레뭉치, 다 쓴 빗자루 몽당이 같은 것이나 휩쓸어 가겠는가?

도적은 언제든지 그 집의 값진 물건, 짭짤한 물건을 가지고 가는 법이다. 어느 교회나 짭짤한 신자가 많이 들려 올라갈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오늘날에는 교회 신자와 천당 신자가 구별되어 정해져 있다. 교회에 이름이나 걸어 두고 세상에서 온갖 행동을 다 하다가 교회에 와서는 망상과 공상만 하고 또는 말썽이나 피우고 문제나 일으키는 따위는 데려가면 천당이 더러워질까 봐 지옥불에 쓸어 넣으려고 그대로 두고, 아름다운 신자는 데려다가 천성에 보배 삼으시려고 데려가신다.

깨어라 때는 왔다고

파수꾼은 힘써 외친다

들은 사람 준비하라

맞으라 만왕의 왕의

발걸음은 문 앞에 왔네

신랑 예수 곧 오신다

휠씬 높이 들어

네 가진 등불을

할렐루야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 영접하라.

깨어서 자기 옷을 지키자

우리 신앙은 장차 오실 예수를 생각하는 중에 흔히 졸기 쉽다. 그렇지 않고 지금 예수가 오셨다고 하면 내 준비가 어떠하겠느냐는 입장에 자기를 세워 놓고 각각 자기를 반성하자는 말이다. 즉 전시 체제의 정신을 가지고 순간순간을 깨어 살자는 말이다.

졸고 자고 있는 열 처녀라는 말씀은 과거 이야기가 아니요 지금 우리 형편을 말함이니 지금 졸며 자고 있는 사람이 곧 나이다. 깨어야 할 사람도 나이다. 낮이 가까웠으니 머리를 들고 깨어라. 우리의 잠을 우리 스스로가 깨지 않고는 어떠한 불행에 내가 깨어지게 될지 모른다. 유두고는 졸고 있다가 삼 층에서 떨어졌고, 사울은 창을 거꾸로 박아 놓고 자고 있다가 물병을 잃어버렸고, 이스보셋은 자고 있다가 자기 신하 손에 죽었고, 시스라는 자고 있다가 귓구멍에 말뚝이 박혀 죽었고, 솔로몬 시대에 한 여자는 자다가 그만 사랑하는 아이를 깔아 죽였고, 요나는 배 밑층에서 자다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고, 다윗은 깨어 기도하지 않고

다락 위에서 졸고 있다가 죄를 범함으로 평생에 자기 집에서 환난이 떠나지 않게 되었다.

볼지어다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말고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계 16:15).

이러므로 너희들은 예비하고 있으라. 대개 생각하지 않을 때 인자가 오리라(눅 12:40).

1. 이 천지는 변하여도 주님 말씀 변찮아

이 시대의 징조 보라 문 앞에 주 오신다

2. 너회들은 예비하라 생각하지 않을 때

인자 속히 오신다고 간절한 부탁 있다

후렴 : 예비하라 성도들아 주님 다시 오신다

기쁘도다 할렐루야 아멘 주여 오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