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천국 백성의 품성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을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 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2)

물 속에서 사는 동물은 물 속에 적당한 생명을 가지고 살고 땅속에서 사는 동물은 땅속에 적당한 생명을 가지고 사는 것처럼 천국 백성이 된 자라면 천국에 적당한 품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사람에게 주신 것이고,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은 현대 우리 신자에게 주신 천국 헌법이다.

먼저 것은 돌비석에 새겼으나 뒤의 것은 우리들의 마음에 새겨서 품성에서부터 성취되어야 할 것이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세상에는 부자도 두 가지가 있고 가난한 자도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질은 많이 쌓아 두었으나 욕심이 많은 자는 가난한 자이다. 왜 그런가? 그 욕심은 무저갱과 같아서 무한정인즉 유한의 물질을 가지고는 채워 낼 수가 없다.

가령 백만 환의 욕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99만 환을 소유하고라도 불평 불만이 있다. 왜? 1만 환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이는 비록 99만 환을 가졌다 해도 부자가 아니니 물질을 많이 가진 빈한한 사람이라 하겠다.

그러나 자기 분수를 알아서 자족을 배운 사람이라면 자기 생활에서 감사와 자족을 깨닫기 때문에 만족한 생활을 하나니 부한 사람이라 하겠다. 그런즉 가난하면서도 사실에 있어서 부유하며 행복한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고 부자면서도 일생을 헐떡이며 거지의 생활을 하는 가엾은 사람도 있다.

여기에서 무한정한 사람의 마음을 유한정한 물질로 채울 수는 도저히 없고 무한하신 주의 은혜로만 채울 수 있다는 진리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 절에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심령적 방면으로 말씀한 것인데 욕심이 많아서 허덕이는 자라는 말도 아니요, 입을 것이나 먹을 것이 없다는 말도 아니다. 이는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가져야 할 정신적 태도를 가리킨 말이다.

불한당 만난 사람이 옷은 벗겨가서 벌거벗고 소유는 전부 박탈을 당하여 목적지까지 여행할 만한 여비도 없고 거기다 두들겨 맞아서 전신에 상처투성이가 된 것처럼, 자기는 하나님 앞에 도덕적으로 여지없이 파산당한 자며 사경에 처한 사람이 되어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구제할 방침이 없는 가련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상태를 말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 스스로 자만을 가지고 배를 내밀고 있는 자는 합당치 않다. 이는 하나님께 교만한 죄인이라 물리쳐 버리신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아무 것도 아니요 그저 적빈자요 거지라는 것을 깨닫는 자라야 복을 받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을 보면 어찌 그리 겸허하지 못한지 모르겠다. 형제를 섬겨서 주를 기쁘게 하고 교회에 덕을 세우려는 정신은 없고, 남에게 칭찬이나 받고 높은 자리나 차지해 보려고 눈알을 번개같이 굴리고 있는 꼴이야 차마 못 보겠다.

그뿐이면 좀 낫겠는데, 자기가 높아지려고 형제를 중상 모략하는 자는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이러고야 어찌 천국 백성이라 하겠는가?

우리는 먼저 겸허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모세는 천하에 겸손한 자라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는가? 모세에게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겸허한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천하에 위대한 사람으로 만드셨다.

모세같이 겸손한 사람은 되려고 하지 않고, 모세같이 위대한 사람만 되려고 하니까 거기에서 싸움판이 벌어져 교회의 추함을 세상에 폭로하고 만다. 어거스틴은 세상에 제일 좋은 것은 겸손이라고 했다.

그런즉 우리는 복을 받으려면 겸허한 자가 되어야 하겠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세상에는 자기 죄를 자랑하는 자가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호걸 남자다 하는 듯이, 두렵고 부끄러운 죄를 행하면서 오히려 자긍을 가지고 있다. 이는 마치 살찐 돼지가 배를 내밀고 꼴사납게 누워서 자기 신세를 자긍하는 셈이니 배후에는 잔칫날을 받아 놓고 잡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가여운 신세가 아닌가? 그 다음으로는 자기 죄에 대하여 무관심한 자와 자기 죄에 대하여 다소 양심상 가책은 받으면서도 죄를 짓는 자가 있다.

이렇든지 저렇든지 죄를 짓는다는 의미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니 한가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 죄를 깨닫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천국 백성의 자격이라 하면 죄를 한 번도 범하지 않는 자만이다. 그런데 "의인은 없나니 곧 한 사람도 없나니라" 하셨으니, 죄를 범치 않은 사람은 일찍이 한 사람도 없다. 또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육체가 없다" 하셨으니, 율법을 행한 자라는 말도 자격을 이루지 못한다.

그렇다면 천국 백성의 자격자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죄를 많이 범한 자라도 죄를 애통하여 회개한 자는 천국의 복을 받는다는 말씀이다. 이 얼마나 인류를 불쌍히 여기신 지극한 사랑인가?

우리들의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깨끗케 하시고 우리 죄가 태산같이 클지라도 깊은 대양 속에 돌 한 개를 던졌을 때처럼 흔적을 없게 하시는데, 이것은 우리가 죄를 통회하는 순간에 이루어질 것이다.

옛날 니느웨 성에 죄가 많아서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다가 요나의 전도를 받고 저희들이 애통할 때에 자비하신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다.

그뿐인가! 이스라엘 성군 다윗도 죄를 깨달을 때에 인사와 체면을 돌아볼 여지없이 눈물로 자기 침상이 썩도록 통회하였고 선지 이사야도 하나님의 영광 앞에 자기 죄상을 알게 되자 자기는 더러운 인간이라고 통회하였다.

과거나 오늘이나 무론하고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사유해 주시는 길은 오직 통회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그뿐 아니라 성경에 보면 또 다른 애통도 있으니 이는 사람의 영혼을 위한 애통이 있다.

예레미야 선지는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을 생각하고 슬프도다. 내 눈에 눈물 근원이 있은즉 내 백성의 여자 중에 죽음을 당한 자를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렘 9:1) 하고 애통하였으며, 바울 사도도 골육 친척을 위하여 내가 그리스도께 끊어지는 데까지 이를지라도 원하는 바라(롬 9:3) 한 말씀은 자기 동족을 위하여 애통하는 심정을 그린 것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 백성의 품성은 세상과는 역리(逆理)가 된다. 왜 그러는가 하면 온유한 자는 이 세상에서 밀려나갈 수밖에 없다. 배급소나 전차간에만 가보더라도 온유한 자는 못난이가 되어 뒤로 밀려 버리고 머리로 도끼를 삼아서 남의 옆구리를 들이받으며 악을 쓰며 덤비는 사람이라야 겨우 자기 앞이나 꾸려 가게 된다.

악한 세상은 온유한 사람을 이용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려 하기 때문에 온유는 복이라기보다 도리어 화가 될 편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유한 자에게 복을 주신다.

악한 자는 잠깐 복을 받는 것 같으나 길이 누리지 못하고 땅에서 그 후손이 끊어질 것이요, 온유한 자는 세상에서 밀려나갈 것 같으나 그 후손이 길이 복을 누리고 천년 왕국에 참여할 것이다.

산중에는 범이나 사자만 살고 그 외에 약소 동물은 없어질 것 같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약소 동물의 수효가 더 많은 것을 보아서 하나님은 온유한 자를 보호하시는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여기 "땅"이라고 한 것은 이후의 천년 왕국을 말한 것이나 온유한 자는 장차 천년 왕국에 가기 전에도 땅을 차지할 것인데 이는 마음의 땅(地理)이다.

세상의 영토는 무기로 얻을 수 있으나 마음의 땅은 무기로는 한 사람도 얻을 수 없고 다만 온유한 자가 얻을 수 있다. 나폴레옹은 "마음으로 얻는 예수의 영토는 점점 넓어가지만 무기로 얻은 나의 영토는 점점 작아진다"고 탄식하였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여기 "의"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가리킨 것이다. 범죄한 인간은 예수님을 떠나서는 의가 없다. 왜 그런가?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신다(롬 3:22)고 하신 까닭이다.

이는 즉 예수님을 사모하라는 말씀이다. 오늘날 신자들의 상태가 간절하지가 못하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 간절한 심정이 적다. 남녀가 처음 혼인하고서는 사랑과 애정이 뜨겁고 서로 간절하다. 잠시 동안만 보이지 않아도 잃을세라 고개를 끼웃거리며 서로 찾느라고 야단이다. 그러다가 첫 아이 하나를 낳아 중간에 누이면 처음에 그렇게 안타깝던 애정이 조금 식어진다. 둘째 아이를 낳고 셋째 아이 낳고 나중에 그 자녀가 장성하고 보면 그때는 밉지도 않고 곱지도 않고 그저 무해무득(無害無得)하다.

오늘날 교회 생활을 오래 한 신자를 보면 신앙에 권태증이 난 모양이다. 기도하는 것도 전도하는 것도 모두가 간절하지가 못하다.

우리가 이렇게 미온 상태로 언제까지나 계속할 것이나 곧 예수께서 토하여 버리신다고 하셨다. 물론 예수님이 토하시면 마귀가 와서 삼켜 버릴 것이다.

열정이 식고 신앙의 탄력이 빠진 미지근한 교우여, 지금 경성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를 섬기자. 나는 돌아가신 우리 모친의 신앙 생활을 기억하고 종종 격려를 받는 일이 많다.

24세에 예수를 믿으시고 40리 밖에 있는 교회에 출석하였는데, 주일이면 첫새벽에 일어나서 밥을 지어먹고 점심을 꾸려 가지고 교회에 가시면 아무도 오지 않았다 했다.

이렇게 하기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여 교회에 빠져 본 주일이 없었고 주일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40리 거리를 이웃처럼 다니셨다. 나는 어머니의 열심을 생각할 때마다 경성을 받는다.

자비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 말씀은 사랑의 수고를 하는 자라는 말씀이다. 불행을 당한 자를 볼 때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누구나 다 있다. 물론 목석이 아닌 이상에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을 리가 없다.

그런데 불쌍한 맘이 일어날 때에 그 불행한 자를 위하여 사랑의 수고를 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이다. 야고보는 형제나 자매가 옷이 없고 양식이 없을 때에 너희가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더웁게 하고 배부르게 하라고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였다. 이것은 곤란한 사람을 보고 동정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그에게 수고를 않는다는 말씀이다. 성경에 "자비"라 하신 말씀은 "동정" 이상의 표현이다. 동정은 보통 사람이 하는 일이요, 자비는 천국민의 품성을 가진 자라야 하는 일이다.

문둥병자를 위하여 일생을 수고한 다미앙(Damien) 같은 사람과 중국인을 흑사병에서 구하려고 병균을 먹고 본국에 돌아가서 죽으면서 "내가 죽은 후에 내 몸에 있는 병균을 연구하고 그 병균에 대한 약을 발명하여 중국으로 보내 달라"고 한 선교사들이라든가, 길가에서 졸고 있는 불쌍한 고아들을 보고 고아원 사업에 일생을 받친 조지 뮬러(George Muller)라든가, 그 외에도 몸에 병이 들었으나 돈이 없어 치료하지 못하는 병자를 위하여 자혜병원을 설립한 사람들은 다 동정심이 있는 자인 동시에 자비를 베푸는 자들이다.

우리 한국도 이러한 자비 운동자가 많이 일어나야 복을 받을 줄 믿는다. 세상의 불행한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애타 하신다. 그러면 이런 불행한 사람을 위하여 사랑의 수고를 하는 자가 어찌 복을 받지 않을 수가 있을까? 또한 자비한 자는 남의 죄를 잘 용서하는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현실 사회 정세와 서로 부합되지 않는 말씀 같다. 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를 "지금 세상은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없고 도리어 도적의 마음을 가져야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말은 언제나 위험한 말인 것이다. 이런 생각은 우리 인류 사회를 흑암으로 떨어뜨리려고 하는 것밖에는 더 되지 못한다. 만일 사람이 어떠한 악한 수단을 쓰더라도 자기만 잘먹고 잘입는 것으로 행복을 삼는다면 사람을 해하고라도 또는 사람을 속이고라도 심하면 죽이고라도 자기 욕심을 채우겠다는 노릇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세상 사람이 모두 이런 주장으로 살아간다고 하면 복은 그만두고 인류 사회는 얼마 가지 않아 파멸하고 말 것이다. 그런고로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은 만고의 진리이다.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를 막론하고 먼저 마음이 깨끗하여야 한다. 우리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복이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 "깨끗"이라는 말씀은 타락한 세상을 떠나서 깊은 산 험한 골짜기에 들어가 나무 열매나 따먹고 살면서 세상 사람과 접촉하지 않는다는, 그러한 소극적인 생활을 하라는 말은 아니다.

또는 선천적으로 양심이 강직하고 도덕심이 풍부하여 일단식일표음(一簞食一瓢飮)하면서라도 도를 행하는 것으로만 즐거움을 삼는 도덕 군자의 깨끗함을 말한 것도 아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된 깨끗함을 이르는 것이다.

자기는 죄를 한 번도 범한 일이 없다고 자랑하는 자의 깨끗함이 아니라 차라리 자기를 죄가 누구보다도 많은 죄인의 괴수로 알아서 예수 십자가 앞에 가서 자기 죄를 통회하는 순간적 깨끗함을 말한 것이다.

예수는 당시 율법이 정죄한 죄인이라도, 도덕이 용납하지 않는 절륜무도(絶倫無道)한 자라도 저가 깨닫고 회개하는 순간에 양털보다 흰눈보다 더 정결케 씻어 주시는 능력이 있다.

그뿐인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나 죄를 짓는 죄의 상습자라도 저가 죄를 알고 자복만 하면 한 번도 죄를 범치 않은 자로 여겨주시는 데 혁명적 기준을 세워 놓으셨다. 그러므로 천국 백성의 깨끗함이라는 것은 죄가 없는 자라는 뜻이 아니요 죄가 많은 것을 알고 회개하여 깨끗함을 받은 자라는 말이다.

어제의 사형 죄수도 오늘의 천국 백성이 되는 강도의 깨끗함이요, 잠시 전의 음부(淫婦) 탕녀(蕩女)가 전도자로 돌변하는 사 마리아 여인의 깨끗함을 말한 것이다. 그뿐인가! 교회를 박멸하려고 다메섹으로 올라가던 사울이 도중에서 주의 음성을 듣는 즉시로 돌변하여 그리스도의 대사도가 되도록 만드시는 그러한 깨끗함을 이르는 것이다.

우리를 깨끗케 하려고 예수의 보혈은 흐르고 있으며 성신은 활동하며 진리의 말씀은 지금 이곳에서 역사하신다. 믿음으로 받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