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하나님의 자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들을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일 3:1)

예수께서 세례를 닫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첫째로 가르쳐 주신 것이 이것인데, 즉 하나님은 아버지시요 인류는 그의 자녀라는 의식이다.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념을 가지고야 비로소 사람의 근본을 알게 되고 사람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어디서 왔으며 왜 살고 있으며 또 어디로 갈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사람들은 흔히 방황하게 된다. 그러나 먼저 말한 인류는 하나님의 자녀라 하는 신념이 이 중대한 인생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인류가 존재한 이래로 인생이란 무엇이냐 하는 의문이 계속되어 온 것이다. 그래서 옛 노인의 전설에는 검은 소가 사람이 되었다고도 하고 과학자는 원숭이가 진화되어 사람이 되었다고까지 한다.

"이러한 전설과 학설이 우리 의문에 만족한 해답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오직 성경만이 "인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가르쳐 주었다. 누구든지 이 성경을 믿게 될 때에 인류 문제의 첩경을 잡게 되고 모든 지식의 근본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의미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인가 하는 이유는 이러하다. 첫째로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다.(창 1:27)고 기록되었다. 여기 자기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이목구비를 말한 것이 아니라 도덕성을 말한 것인데, 즉 사람의 속에 있는 사랑, 선, 성결 등의 품성이 하나님과 같다는 말이다.

둘째로는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너를 낳았다(히 5:5)고 기록하였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셋째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르신다(마 6:26)고 하셨으니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이다.

그러면 먼저 읽은 본문에서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 얻게 하셨는고" 하신 말씀은 이상에 말한 의미에서 자녀라는 말이 아니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4) 하신 말씀과 같이 죄와 허물로 죽었더니 예수 안에서 다시 살고 자기를 지으신 아버지를 멀리 떠났더니 죄인을 찾으려고 세상에 오신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찾아 돌아온 아들이라는 말씀이다. 즉 두 번 낳은(요 3:3) 자녀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인류는 하나님의 자녀였으나 아담이 범죄하여 타락한 이후로 양심이 무뎌지고 죄로써 품성이 나빠져서 그대로 하나님을 떠났으며 인생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좋은 의식을 잊어 버렸다.

그래서 예수께서 오셔서 이것을 다 찾아 회복시키는 공로를 세워 놓으셨는데, 사람은 다 그를 힘입어서 자녀의 특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증명될 것인가를 몇 가지로 말하고자 한다.

성신이 임한 자

노아 당시에 총수가 지면에서 물러가기 시작하니 공중에 날아다니는 두 가지 동물이 있었다. 즉 까마귀와 비둘기였다. 까마귀는 본래 썩은 것을 잘먹는 동물이라, 당시 10개월 동안이나 탁랑(濁浪)한 홍수 속에서 이리저리 표류하며 썩어 넘어진 모든 육체들을 보고 깨끗한 노아 방주 속에서 절제 생활을 한 것을 후회하는 듯이 들러붙어서 뜯어먹었다.

비둘기는 성결한 새이다. 썩은 송장과 물로 발붙일 곳 없으며 인류가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잊고 살다가 썩어 넘어진 것을 보고 근심하며 돌아갔다. 그러나 까마귀는 기회를 만난 듯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늘도 내일도 쉴 새 없이 총각 송장, 처녀 송장, 늙은 송장, 아이송장 할 것 없이 돌아가며 파먹었다.

이놈은 남이 죽는 날에 썩은 고기로 배를 채웠다. 이 동물은 물론 마귀의 모형이다. 까마귀의 영을 가진 마귀는 지금도 돌아가지 않고 돌아다니며 썩은 자만 찾고 있다. 썩은 자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생활이 부패한 자를 말함이다.

이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어 썩은 자이다. 바울은 이처럼 부패한 자, 즉 버림받은 자들의 내면을 열거(列擧)해서 말했다.

손을 꼽아 헤아려 보면 불의, 악독, 탐심, 포악, 시기, 살인, 분쟁, 기만, 강퍅, 불효, 수근거리는 것, 음행, 능욕, 교만, 악한 작당, 어리석은 것, 배약, 무정, 불쌍히 여기지 않는 마음이니 이런 것들이 없는가? 하나님이 미워하는 자, 즉 반종교자들은 오늘날 죄악의 홍수에 썩어 넘어진 자들의 형상을 그린 것인데 24종류나 된다.

까마귀의 악령은 이러한 자들을 먹고 있다. 그러나 그때에 발붙일 곳이 없어서 돌아다니던 비둘기는 성신의 모형이니,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하셨다.

이것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거하신 것이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는 비둘기 모양인 성신이 임했지만, 죄가 있는 우리들은 불과 같은 성신을 받아야만 된다. 성신받지 않고서 신자나 목사는 될 수 있을지언정 하나님의 자녀는 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참 자녀가 되려면 성신의 증거를 알아야 하고, 또 성신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롬 8:14-16). 까마귀냐? 비둘기냐?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

요한에게 많은 군중이 세례를 받았고 또한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다. 군중이 받은 세례와 예수님께서 받은 세례를 혼동해서 생각하면 안 될 것이니 그 의미가 각각 다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때 사람들이 받은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다. "각각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니"하였다. 내가 요한의 세례라 하면 즉 회개의 세례를 말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요한의 세례를 받아야 된다. 교회 내에는 목사의 세례는 받았으나 요한의 세례는 받지 않은 사람이 있다. 이는 세례는 받아서 교인 명부에 올랐으나 아직도 그 생활에 변화가 없다는 말이다.

사람이 자기 죄를 아프게 뉘우쳐 통회자복(痛悔自服)하기 전에는 참 자녀가 되지 못한다. 대개 외모로 유대 사람 되는 것이 유대인이 아니요 육체의 할례를 받은 것이 할례가 아니라 오직 속마음으로 유대인 되는 것이 유대인이며 또한 할례는 마음으로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않으니라(롬 2:28-29)하였다.

그런고로 세례의 참뜻이 진정한 회개에 있는 것이요, 절대로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죄를 회개한 자에게는 그 세례가 은혜가 될 것이나 의식으로 받은 구원에 대한 조건이 못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독생성자 예수님께서는 왜 세례를 받으셨을까?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의 받는 의미에서 받은 것이 아니요, 그 받으신 뜻이 따로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정신에 합치한 자라야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남을 위하여 책임을 지는 자

세례는 죄를 씻는 표인데(벧전 3:21)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은 자신을 위하여 받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첫째 아담은 자기가 범한 죄의 책임을 아내 하와에게 전가(轉嫁)시키고 하와는 또 뱀에게 미루었다. 그러나 둘째 아담 되신 예수님은 전 인류의 죄의 책임을 짊어지시고 세례를 받으셨다.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도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말라고 기도하셨다. 사람들은 죄를 범하고도 그 책임을 남에게 미루지만 예수님은 그 죄를 다 짊어지시고 세례를 받으셨으며 또 십자가에까지 돌아가셨다.

하나님의 자녀의 특색은 책임감이 있는 데 있다. 마귀의 자녀는 자기 잘못을 누구 때문에 그랬다고 하여 남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 잘못한 것은 자기가 책임을 지는 것은 물론이요, 다른 사람의 잘못까지도 자기에게서 책임을 찾게 된다.

가인이 자기 동생과 둘이 나갔다가 혼자 들어오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책임을 추궁하셨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가인은 대답하기를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하고 무책임한 말을 하였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얼마나 악한 말이냐? 우리는 여기서 반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 좌우에는 죽어 가는 영혼을 보시고 그 책임을 우리에게 추궁하신다(겔 30:7-8).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핑계하지 못할 것은 그 피값을 우리 손에서 취하리라고 하셨다. 어찌 그 책임을 피하겠는가? 가인이 아벨을 타살하고 혼자 집에 돌아가려 하였으나 아벨의 피가 호소하였다.

우리가 혼자 아버지 집에 가려 할 때에 우리 뒤에서 호소하는 소리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은 연대 책임이 있는 것이니 이웃 형제의 일이 나에게 관계없다고 못할 것이며 이 사회나 국가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나에게 책임이 없다고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책임감이 강한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아니할 수 없으니 만일 전하지 아니하면 나에게 화가 미치리라(고전 9:16)고 하였다. 바울은 이 책임감에 불타서 일생을 희생한 사람이다.

사람은 소인일수록 책임감이 적으며, 대인일수록 책임감이 많은 법이다. 위인(偉人)일수록 책임감이 강하고 큰 것이니 한 가정에 대한 책임을 느끼는 사람은 가정의 위인이요, 한 국가에 대한 책임을 가지는 사람은 그 국가의 위인이요, 전세계에 대하여 책임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는 세계적 위인이다.

선에 대하여 협력하는 자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기를 사양하매 예수님께서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옳은 일에 협력하시는 정신이시다. 요한의 세례를 협력하심이요, 또한 일반의 세례를 협력하시는 뜻이다.

사람이란 타인이 자기보다 먼저 사업에 성공하여 군중의 심리가 거기에 끌리는 것을 보면 이를 시기하여 방해하려는 악심이 생기기 쉽다. 그보다 좀 선한 사람이라면 적극적으로 방해 행동은 아니하되 수수방관(袖手傍觀)하는 식으로 비웃으며 어디 얼마나 나가나 보자 하고 불간섭 태도를 가진다.

그러다가 성공하던 사람이 실패하면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하고 물 건너 불 구경하는 식으로 보고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라면 이런 심리가 없다. 예수께서 요한의 성공에 협력하고 일반의 옳은 일에 참가한 것처럼 타인이 선한 일에 성공했다면 그 일을 기뻐하고 또한 협력을 한다.

그러므로 남의 선한 일에 협력하는 정신의 유무에 참 자녀가 되었는가 안되었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정신이 우리를 서로서로 얽어매는 금사슬이 될 것이다.

선한 일에 협력하는 맘이라든가 남의 기쁨에 같이 기뻐하며 남의 걱정에 같이 근심하는 동정심을 서로 얽어매는 사슬로 삼아서 가정과 가정, 형제와 형제, 이웃과 이웃이 얽히어 산다고 하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일이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신자가 집회에 열심히 참석하여야 할 이유는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열성이요, 둘째는 자기 심령에 은혜받는 일이요, 셋째는 선한 일에 참가하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유명한 사람의 집회나 겨우 몇 번 나갈 뿐 그 외의 집회에는 갈 생각을 안 한다. 예수님께서 "나와 같이 모으지 않는 자는 헤치는 자라" 말씀하셨으니, 이는 선한 일에 협력을 하지 않는 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겸손한 자

하나님의 자녀는 검손하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태도를 생각해 보자. 그 얼마나 겸손하신가? 그 겸손에는 자연히 우리의 머리가 숙여지고 만다.

마침내 그 겸손 앞에 천하도 정복을 당하고 말았다. 대개 사람은 높은 사람에게 기도받기를 좋아하고 이것을 명예로 아는 것이다. 어느 교회 전도사 부인이 그 교회 목사를 위하여 기도를 했더니 그 목사가 이것을 자기 불명예로 생각하여 노발대발하였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예수의 겸손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 속에 어떠한 훌륭한 것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져야 할 품성은 없는 사람이다. 모세는 천하에 겸손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우리는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생각될 때마다 더욱 겸손하여야겠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천하를 자기 손에 붙이신 줄 알고도 제자의 발을 씻어 주셨으니, 우리도 내가 남보다 높은 지위에 올라갈수록 삼의 발을 씻어야 하겠다. 제자가 존 플레처(John Fletcher)에게 묻기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만일 한 번만 허락하시는 은혜가 있다고 하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한즉 그는 "겸손"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사람이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할지라도 겸손의 덕이 없으면 그는 허영심과 자고심에 날뛰는 사람밖에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자녀가 모인 곳에서는 피차에 겸손하여 서로 높여야 한다.

남을 멸시하고 자기를 내세우려고 하지 말고 서로 겸손하라. 왕으로 피택된 사울이 짐짝 속에 숨은 것처럼 자기를 숨기는 정신을 가져야겠고, 지성소(至聖所) 속에 있는 스랍이 얼굴을 가리고 선 것같이 자기가 요직에 있다고 생각될 때마다 자기 얼굴을 가리는 정신을 가져야 하겠다.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겸손의 덕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 분쟁이 생기게 된다고 생각한다. 어느 교회에서는 목사와 장로가 기도로써 서로 싸운다는 말을 들었다. 강단에 선 목사님이 타락한 심령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오늘날 신자 중에는 자기만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치 않고 돈만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이들에게 어서 벌을 내리사 아나니나와 삽비라같이 이 자리를 떠나게 해주소서"하고 기도하면 그 기도를 듣고 있던 청중에 한 장로님이 "오! 네가 나보고 하는 기도로구나. 어디 보자. 내 차례가 오기만 하면 나도 공격을 하리라"하고 기억해 두었다가 기회만 오면 그는 또 타락한 사역자를 위하여 기도한다.

"오늘날 강단 안에는 양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만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지 않고 돈만 사랑하는 사역자가 많습니다. 이러한 사역자를 어서 바삐 청산시켜 주소서"하고 기도를 한다.

이런 교회에 어찌 은혜가 임할 것인가. 우리의 겸손한 기도는 남의 영혼을 감동시키지만 겸손치 못한 기도는 분재의 씨를 뿌리고 마귀를 기쁘게 하는 것 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시니 겸손한 마음에 임하신다. 피차에 겸손하자.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권세를 주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느니라(요 1:12)

타락한 죄인 괴수 천층 지옥 갈 자식

십자가 공로 힘입어서 주의 자녀 되었네

오직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세

측량할 수 없는 사랑 어찌 감사 않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