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이해 깊은 생활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본문에 안다는 말이 네 번이나 기록되어 있다. 참으로 우리 일상생활에서 서로 알아주는 이해 깊은 생활처럼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이상적인 가정은 이해 깊은 가정이다.

부모와 자녀간에 서로 이해하고 내외간에 피차 이해(理解)하는 가정은 행복스러운 이상적 가정이라 할 것이다. 또한 교회서도 목사와 신도 그리고 신도 상호간에 잘 이해하여 일치 단결한 교회는 이상적(理想的)이요, 국가 역시 군관민(軍官民)이 서로의 입장과 처지를 알아주고 이해하는 국가라야 발전하는 이상적 국가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리 이해 깊은 사람이라도 항상 오해가 많다. 그래서 분쟁이 일어나고 분열이 생긴다. 그 다음 오는 것은 눈물이요 한숨뿐이다. 그러나 감사하기는 우리 주님은 이해 깊은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는 것이다.

보라! 주님 세상 계실 때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음부(淫婦) 탕녀(蕩女)에게 먼저 말씀을 건네시고 이해 깊은 사랑으로 반역하고 오해하며 쌀쌀맞게 대하는 그 여인을 구원하시사 주의 증거자를 삼으신 것이다.

"네 남편을 데려오라" 하시니 여인이 대답하되 "남편이 없도다. " 주님께서는 "옳다. 네 남편 없다는 말이 진실되다...... 이는 참으로 이해 깊은 말씀이다.

남편을 다섯 여섯씩 두고도 없다는 여인에게 그 말이 "진실이다" 하심은 무슨 뜻일까? 거짓말하는 것을 아시고도 겉치장으로 말씀하신 것일까? 아니다. 세상 사람은 너를 더러운 여자라고 보지만 나는 그렇지 아니하니, "네가 남편을 다섯 여섯씩이나 옮겨 다닐 때 네 신세의 가엾음을 알 수 있고, 이번 남편에게서나 이해 깊은 사랑의 행복을 누리려 하였으나 버림받고 저 남편에게서나 위로를 받을까 하였으나 또 짓밟힘을 받았으니 그러한 남편 다섯 아니라 오백이 있다고 해도 어찌 사랑의 대상인 남편이라 할 수 있겠느냐 ! 없다는 네 말이 진실되다" 하여 그 여인의 타락된 동기(動機)를 이해하시고 현재의 상태를 동정하여 하신 말씀이다.

여기에 여인은 녹아져서 음부 탕녀가 변하여 주의 전도자가 되었고 사마리아 온 성에 큰 부흥을 가져오는 도화선이 되었다.

또 한번은 많은 군중이 음행하는 여인 하나를 잡아 가지고 주께 와서 일문하기를 "모세 율법에 음행한 여인은 돌로 죽이라 하였는데 선생은 어찌 생각하느냐?" 할 때에 주님께서는 땅에 글을 쓰시면서 우선 그들의 흥분된 심정을 안정시키시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 하셨다. 그 권위 있는 말씀에 군중은 스스로 양심에 찔려 아이로부터 어른까지 슬금슬금 다 돌아가고 음행한 여인만이 공포와 불안에 떨며 있을 때, 주께서는 이해 깊으신 말씀으로 타일러 "다시 그런 죄를 짓지 말라" 하시고 돌려보내셨다.

얼마나 이해 깊은 사랑이냐? 나 같은 죄인도 이와 같은 주님의 이해 깊은 사랑과 자비로 용서함받았다. 이해 없는 인간들은 남의 작은 죄라도 크게 만들어 정죄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일향(一向) 미쁘신 사랑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이해하여 주시는 것이다.

보시라! 주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홀리시며 기도하실 때 무정한 제자들은 졸고만 있었다. 깨워 놓으면 또 자고 깨워 놓으면 또 잤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연약한 제자들을 동정하시어 "깨어 기도하여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하셨다. 이 얼마나 이해 깊으신 사랑이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안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주님에서 우리를 이해하여 주심과 동시에 우리도 또한 주님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가나안 여인이 주님을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귀신 들렸나이다" 간청할 때 주께서는 들은 체 만 체 지나가셨다. 그러나 여인은 낙심치 않고 다시 간청하매 주님 대답하시기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 하여 이방인 너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민족 차별로 냉정하게 물리치셨다.

그래도 여인은 따라오면서 간구하매 주님 다시 말씀하시기를 "자녀의 떡을 빼앗아 개에게 줌이 마땅치 않다" 하여 개라고까지 하셨으니 얼마나 섭섭하며 원망스러웠을까마는 여인은 오해하지 아니하고 "옳습니다. 개도 아이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습니다"고 할 때 주님께서는 그때에야 "여인아! 네 믿음이 크도다. 믿는 대로 되리라"고 이해 깊은 그녀의 신앙을 칭찬하셨다.

또 한번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이 일어나 위지사경(危地死境)에 제자들은 애타게 부르짖었으나 주님은 들은 체 만 체 주무셨다. 제자들이 주님을 깨우면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하니 주님께서는 도리어 책망하시며 "적게 믿는 자여, 왜 의심하느냐" 하셨으니 이해하기 곤란하다. 또한 요한복음 11장 5절에 보면 주님께서 사랑하시던 베다니의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데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고 하였으니 나사로를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얼마나 더 머물러 계실 뻔하였는가? 이해하기 곤란하다. 마리아의 낙심도 짐작되고 남음이 있다.

다 장사지낸 뒤 나흘만에 오셨으니 많은 사람이 이러한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면 실망하기 쉽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고 주님의 뜻을 참으로 이해한다면 나흘이 아니고 넉 달이 지난 후에 오신다하여도 의심 없이 더욱더 그 사랑을 신뢰할 것이다.

"양도 나를 아는 것이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으니라."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잘 아시므로 언제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며 신뢰와 복종뿐이었다. 이해 깊은 사랑으로 예수를 따라 우리는 그 안에 있고 그는 우리 안에 있어 언제나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합일하는 생활의 체험을 얻을 때 복되다 하리로다.

또한 우리는 서로 좀더 이해 깊은 사랑으로 합심하여 주님께 영광 돌려야 할 것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 할지어다. 이로써 너희가 나의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