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주를 좇는 자와 각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거기에 얼마나 많은 희생과 영단(英斷)이 있는지를 알아야 하겠다. 오늘날 장사에 실패하고 신학교에 들어와서 수양을 받고 사역자가 되려는 사람과는 아주 다르다고 생각한다.

육지에 배를 버리고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은 현재의 직업을 당장에 버리고, 다시 말하면 부모 처자를 생각할 여지없이 다 잊어버리고 주를 따르겠다고 일어선 것이다.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그 위대하신 인격에 감화를 받아 가지고 그들의 손에서 아직 생선 비린내가 가시기 전에 툭툭 털고 벌떡 일어선 것이다.

이 얼마나용감한 일인가! 오늘우리 가운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자는 이러한 정신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의 생활, 즉 인습과 환경에서 또 맺어진 모든 인연에서 손을 떼고 툭툭털어 새 생활에 들어서는 용단(勇斷)이 아니고는 하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를 잘 믿는 일이라는 것은 우유부단(優柔不斷)하는 졸장부로서 못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고로 참각오와 용기가 없으면 나서지 못할 일이요, 나섰다 할지라도 중도에서 넘어지고 마는 것이다.

예수를 믿기 시작한 사람은 많으나 끝까지 성공하는 사람이 적은 것은 그 까닭이다. 천로역정에 보면 기독도가 장망성을 떠나서 천성을 향하여 갈 때 순풍을 만난 돛과 같이 일사 천리로 간 것이 아니다.

무쌍한 변화와 무쌍한 난관이 많지 않았는가. 기독도를 따라 이천(易遷)이라는 사람이 같이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그만 우울니(憂鬱尼)라는 수렁에서 돌아서고 말았다.

주를 따르는 우리 신자가 앞에 당하는 어려운 일은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주를 따르는 자"라는 생각 아래에는 반드시 "각오"라는 큰 결심을 부대하여야 될 것이다.

자기를 이길 것

자기를 이긴다는 일은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찢어 버리라. 사람이 자기로 더불어 싸워서 이겼다고 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경험 중에 가장 고상한 경험이다.

살아가기 위하여 직업 전선에서 싸우고 자기를 해치려고 하는 원수와 싸우는 일은 누구나 힘을 다한다. 그러나 자기를 이긴다는 일은 이 세상 생활 범위에서 나와서 신앙 생활 범위 안에서 사는 자라야 비로소 싸움의 상대자가 혈육이 아니요 차라리 자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고로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전 9:27)고 하였다. 이것은 속에 있는 죄악의 성질과 싸운다는 뜻이 아니요, 육체의 욕심을 제재한다는 말인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주를 따르려 하는 자의 생활은 먼저 자기 본위의 생활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사람이 생활한다고 하면 그는 자기를 본위 삼아 한 말이다. 즉 자기를 기쁘게 하고 자기를 평안케 하고 자기를 살게 하는 것뿐이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의 하는 일 전부가 자기를 위하여서라는 조건에서만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를 따르는 자는 이러한 생활 범위에서는 될 수 없다. 자기를 부인해 버리고 군복을 입고 전선에 선 병정과 같이 자기를 세우신 자를 위하여 생활하는 정신을 가져야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라도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을지니 그런고로 사나 죽으나 우리들은 주님의 것이라(롬 14:7-8) 하는 바울의 철저한 생활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자기를 버리는 데 철저했던 바울은 동족을 사랑함에는 "골육친척을 위하여는 내가 그리스도께 끊어지는 데까지 이를지라도 원한다"고 하여 진정한 애국자가 되었고 교회를 사랑함에는 "매일 내 맘에 쌓여 있는 일이 있으니 곧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하여 진정한 목자가 된 것이다.

자기를 참으로 이기고 버린 자가 되지 않으면 진정한 애국자도 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싶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받은 성신을 배나 더 받으려고 따라다닐 때에 마지막으로 엘리야가 승천하고 보이지 않으니 엘리사는 자기 옷을 벗어 찢었다.

그러고 나니까 마침 엘리야가 벗어 던진 두루마기가 둥둥 떠서 내려왔다. 엘리사는 재빨리 받아서 입었다. 이 두루마기를 가지고 요단강을 치니 요단강이 갈라졌다. 엘리사가 자기 옷을 찢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교훈을 준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오순절 다락방의 제자들도 자기라는 옷을 찢을 때에 하늘로서 권능의 두루마기가 내려왔다.

아담, 하와도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만든 치마를 벗고서 하나님이 주시는 가죽 옷을 입고 그 앞에 용납을 받았으며,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 향기로운 기름을 주께 바쳤으니 이는 자기를 부인하고 이기고 주를 기쁘게 하는 일에 좋은 적례가 된다.

인정이나 의식에 얽매이지 말 것

손에 쟁기를 잡은 자가 뒤를 돌아보는 것이 합당치 않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그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나니, 곧 정과 욕까지 하였나니라. 인정 관계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정실(情實) 관계로 나를 얽어매는 문제가 많다. 이것들을 일일이 돌아보다가는 주를 좇을 수 없다. 아담은 자기 아내의 말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같이 선악과를 먹었으니 남의 죄에 같이 빠진 셈이다. 그러나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은 이러한 정실 관계로 오는 문제를 사정없이 물리쳐 버렸다. 애첩 하갈과 그 소생 이스마엘도 축출하라고 하실 때 인정 없이 축출했고, 독자 이삭을 잡아서 제사하라고 할 때에 끝까지 순종한 것을 보라.

천진한 아들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려고 데리고 사흘 길이나 갈 때에 인정이 있는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그뿐일까?

모리아산에 이르러서 이삭이 "불과 나무는 여기 있지만 제물은 어디 있나요?" 하고 물을 때 아브라함이 인정으로 생각하자면 여기서 넘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으로 일관하여 나갔다.

이스라엘이 법궤를 블레셋에서 옳겨올 때에 새끼 낳은 소로 하여금 멍에를 메고 법궤를 끌고 가게 했다. 새끼 멘 소가 아무 소리 없이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앞만 보고 가는 것으로 주의 권능을 나타낸 것이다.

법궤를 메고 벧세메스에 다다라서는 그 소를 잡아서 제사를 드렸으니 이것은 너무 잔인한 것 같지만 후생에게 교훈을 주는 것이다. 집에다 새끼를 두고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향하여 걸어가는 소, 마지막으로 생명까지 바쳐서 제물이 된 소, 이 소는 사명을 위하여 전부를 바친 주의 뒤를 따르는 사역자의 그림자이다.

오늘날 주의 교회를 메고 나가는 사역자는 자신이 이 소의 운명인 것을 각오하여야 한다. 어리석은 나의 이야기를 한다면, 모친이 별세했다는 비보(悲報)를 듣고 여러 해 만에 고향에 갔으나 곧 만주교회에 약속한 집회 일자가 박도하여 겨우 하룻밤을 집에서 쉬고 그 이튿날 새벽에 떠나게 되었다. 시끄러운 집안 일이 내가 와야 정리되리라고 집에서 기다렸으나 불과 몇 시간만에 떠나게 되니 참 딱한 사정이 많았다.

그러나 주의 정병은 사사로운 일에 매이지 않는다는 말에 위협을 받아서 캄캄한 길을 더듬으면서 집을 떠났다. 그날 이른 아침으로 평양에 당도하여 남의 집에서 공부하는 어린 딸들을 찾아갔다.

마침 어린 두 딸은 저희들끼리 배급쌀로 죽을 끓여 놓고 찬바람이 휘휘 도는 냉방에 앉아서 서로 떠먹고 있었다. 여러 날만에 아비 만난 어린아이들은 퍽이나 반가워는 하는데 죽을 떠먹을 때마다 어려운 사정을 애원하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아비 된 나로서는 마음이 비길 데 없이 심히 아팠다. 만주 집회를 연기한다고 전보를 치고 며칠간 아이들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일어났다.

그러나 나는 인정을 죽여 버렸다. 새끼 낳은 소를 생각했다. 아버지는 만주교회에 집회 약속을 했으니 불가불 가야 되겠다하고, 차마 일어서지 못할 사정을 이기고 벌떡 일어섰다. 차시간에 도착하려고 바쁜 걸음을 재촉하다가 돌아보니 아이들이 아비를 전송한다고 추운 겨울날에도 불구하고 따라나왔다. 뒤축이 다 떨어진 운동화를 끌고 양말은 여기저기 구멍이 나서 붉은 살이 나오고, 따뜻한 털모자 하나 쓰지 못하고 떨어진 수건으로 귀를 싸매고 따라온 모습을 볼 때에, 에라 돌아서자 만주 일자는 좀 연기하기로 하자 하는 생각이 또 들었다.

그러나 또 하나님의 법궤를 멘 새끼 뗀 소가 번개같이 떠올라 다시 결심하고 기차에 올랐다. 기차가 떠날 때까지 가라고 하여도 들어가지 않고 떠나는 아비를 전송하려고 떨고 서 있는 어린 딸들을 보니 자연히 눈물이 흘러나왔다.

기적 소리가 들리자 오리발같이 언 두 손을 들어서 흔들어 주었다. 나는 멀리 멀리 그들이 그늘 속에서 슬며시 사라져 가는 것을 보면서 평양역을 기어이 떠났다. 기적 소리가 사라지고 그들의 섰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는 벌써 기차가 대동벌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내 가슴 속에는 붉은 두 손길이 아직도 흔들고 따라왔다. 이때의 심경은 전에 없던 가족애로 치우쳐서 얼마 동안은 억제하기 어려웠다. "아! 너는 주의 멍에를 메고 가는 소가 아니냐? 뒤를 생각지 말고 앞만 향하여 걸어가라." 나는 이 음성에 다시 용기를 얻어 목적지를 향했다.

남의 일을 간섭하지 말 것

이 말은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자기 일이나 하면 그만이라고 하는 오불관언(吾不關焉)의 처세주의를 가지라는 말이 아니요, 자기 신앙 목적에 방해를 받기까지 상관없는 남의 일에 간섭치 말라는 말이다. 과연 남의 일을 돌아가면서 이것저것 간섭하다가 신앙에서 넘어지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솔로몬 왕도 말하기를 남의 일에 간섭하는 사람은 싸우는 개의 귀를 잡는 일이라고까지 하였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이지 자기와 남과의 관계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내 환경이야 어찌되었든지, 남이야 이러건 저러건 이것들을 비교해 가지고 자기 신앙 목적에 방해를 받지 달고 믿음을 주장하사 완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나아갈 것뿐이다. 포도원에서 일하는 어떤 품꾼처럼 남의 일을 적게 하고 삯전을 많이 받든지 적게 받든지 자기가 주인과 약속한 삯전이나 받으라는 말이다.

우리들은 각각 자기 입장에서 주와 상대하여 살 것뿐이고 남의 입장을 자기와 비교하여 신앙의 손해를 받지 말아야 하겠다. 남의 성공에도 남의 실패에도 즉 감독이 타락하거나 말거나 이로 인하여 자기 신앙에 상처를 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웃시야 왕이 범죄하고 벌을 받아 죽던 해에 이사야는 도리어 성신을 받지 않았는가.

허영심을 버릴 것

예수님 당시에 주를 따르던 사람 중에 예수님이 유대국에 등극하시면 좌승상이나 우승상을 바라던 자도 있었다. 오늘날도 허영심으로 교회에 출입하며 믿는 자가 있을 것이다. 허영심으로 따라가는 자는 낙심하고 말 것이다.

기독도가 천성을 향하여 갈 때에 위선(僞善)이와 시의(恃義)라는 두 사람이 담을 넘어서 들어왔다. "너는 어디서 오는 사람이냐"고 물은즉, 나는 이 담 넘어 허영촌(虛榮村)이라는 마을에 산다고 대답하였다.

이 두 사람은 얼마 동안 가다가 간난산에 이르기 전에 곁길로 가고 말았다. 이것은 허영심으로 주를 따르려 하는 자가 실망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무슨 일에든지 진실한 맛과 사랑으로 할 것이지 허영으로 말 것이다.

사사로운 일에 얽매이지 말 것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말하기를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소서" 할 때에, 예수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대답하셨다. 이는 제자의 효심을 막는 것이 아니고 제일 목적을 다른 일과 바꾸지 말라는 말씀이다. 이런 말씀을 보고 우리 나라에서 예수교는 아비도 모르고 어미도 모르는 도라고 비방을 했다. 그러나 우리의 민도가 점점 열리고 문화가 향상됨에 따라서 이해가 되어 간다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는 민생을 위하여 하는 일보다도 죽은 조상의 유골을 위하여 하는 일을 보다 더 크게 여겼다. 다시 말하면 생명을 위하여 하는 일보다도 죽고 썩을 일을 위하여 얽매여 왔다는 말이다.

낡은 부대에 새 술을 담지 못한다는 말씀과 같이 낡은 구도덕으로는 주의 새 도를 감당치 못할 것이다. 생명의 주를 따르는 것은 이러한 사소한 외식과 사사로운 일에 얽매이는 자로서는 감당치 못할 일이다.

먼저 말을 다시 되풀이한다면 내가 만주 가 목사라는 곳에 가서 집회를 인도하는데, 이때에 모친의 병환이 위급하다는 급보가 왔다. 이 전보를 보고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나는 잠시 당황했다. 자식의 마음으로 부모의 마지막에 안 가자니 안타깝고, 가자니 오래 전부터 준비했던 집회가 시작되어 성황 중에 나가는데 중지될 일을 생각하니 그도 차마 못할 일이고, 또다시 병석에 누우신 어머니가 자식을 기다리고 눈을 감지 못할 것을 생각하니 비통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난경(難境)에서 기도를 하는데, 내게 문득 한 음성이 들려 오기를 네가 만일 나라를 위하여 출전하여 일선에서 싸운다고 하면 이 전보를 받고 갈 수 있겠는가 하는 음성이 들려 왔다.

그때야 나는 쉽게 판단을 얻었다. 나는 그리스도의 정병이니 사사로운 일에 매일 수 없다는 판결을 얻어 가지고 집회를 계속하는데, 또 다시 전보가 왔음으로 이제는 송구한 심정으로 떼어 보니 어머니는 그만 세상을 떠나셨다는 비보였다.

남은 집회를 마치고 그날로 그곳을 출발하여 황급히 집에 도착하니 벌써 삼 일 전에 장례를 지냈다.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지 못한 울적한 마음으로 어디 비할 길 없어서 어머니가 평소에 보시던 성경 갈라디아서를 이리저리 뒤져보았다.

어머니의 친필로 적은 노래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돌아가신 모친을 생각하고 이 노래에 곡조를 만들어서 불렀다.

1. 하늘 나라 우리 집 보석 성에 내 집은

영원 무궁하도록 낡아짐이 없도다

2. 보석 성에 우리 집 해와 달과 등불에

비치임이 없어도 항상 밝은 곳일세

3. 하늘 나라 내 집은 먹을 예비 안 해도

열두 종류 다달이 과실 맺어 주도다

4. 보석 성에 우리 집 의복 준비 안 해도

세마포와 횐 옷이 무궁 무진하도다

5. 하늘 나라 성도들 우리 임금 우리 주

영원 무궁하도록 경배 찬양하도다.

자, 우리는 사사로운 일에 얽매이지 말고 전심으로 주를 따르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