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참 평안의 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 세상은 걱정과 수고로 가득하다. 근심, 걱정, 슬픔, 탄식, 우수, 사려, 우환, 질고, 고통, 번민, 불안, 공포라는 말들은 항다반(恒茶飯)으로 붙어 돌아가는 문자인데, 이런 말들은 같은 의미의 말을 늘어놓은 것 길지만 그렇지도 않다.

세상에서 사람이 당하는 걱정 중에는 형형색색, 시시각각, 이모저모로 아리고 쓰라린 별별 걱정이 많다는 의미다. 그뿐이겠는가? 남에게 치욕을 받을 때에 통분의 수고, 사랑하는 자에게 배척을 받을 때에 외로움의 수고, 친구간에 오해를 받을 때에 안타까운 수고, 약자로서 강자에게 눌림을 당할 때에 억울한 수고 등이다.

이 얼마나 많은 고통, 수고인가? 바다에는 풍랑이 없는 날이 없는 것처럼 세상에는 수고와 걱정이 없는 날이 없는 것이다. 또한 사람마다 자기가 당한 수고는 커 보이는 것이다.

나만큼 이렇게 많은 걱정을 당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사람마다 걱정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돈은 있으나 자녀가 없는 사람은 말하기를 자녀 있는 사람이야 무슨 걱정이 있을까 하지만 아들이 많은즉 일이 많은 법이라고 했으니 그도 역시 걱정이 있고, 돈 없고 자녀 많은 사람은 그의 자녀가 그다지 귀한 줄 모르고 돈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지만, 부한자는 일이 많다고 했으니(富則多事) 그도 역시 걱정이 있고, 지위 높은 사람을 부러워하지만 높은 나무에는 바람이 세다고 했으니, 그에게도 걱정이 있고, 말라깽이는 살찐 사람을 부러워하지만 그는 여름 올 것을 걱정하고 있으니 그도 역시 걱정이 있고, 수염 많은 사람의 풍채 좋은 것을 부러워하지만 그는 음식 먹을 때가 걱정이요 더구나 물엿을 먹을 때에 수염에 달라붙어서 걱정이다.

그러고 본즉 세상은 걱정과 수고투성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세상을 꿰뚫어 보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인생에 대하여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이런 말씀을 뜻 있게 듣고 예수 앞으로 나을 것이다.

사람마다 수고와 걱정을 벗어버리고 평안한 세상을 살고 싶어 하지만 평안을 가질 수 없고 평안을 느끼지 못하는 까닭이 어디 있을까?

있어야 할 곳을 떠난 고로 평안이 없음

나는 일찍이 어느 지방에서 교회 일을 볼 때에 그 지방에서 제일 팔자 좋다고 하는 영감을 찾아갔다. 그는 벼 삼천 석을 짓는 부자이며 자녀는 5남 3녀요, 손자들이 삼십여 명이나 되는 큰집에 살고 있다.

내가 그에게 인사를 드린 후에 존장(尊長)은 남보다 유달리 많은 복을 받아 이 지방에서 팔자 좋기로 유명하다니 축하를 마지않습니다 하고 말을 붙인즉, 그는 펄쩍 뛰면서 "그 어느 정신빠진 사람이 그럽디까? 나같이 하루도 빼는 날이 없이 걱정하는 사람은 이 지방에 없을 것이오" 하기에 나는 다시 물었다. "그래 무슨 걱정이 그다지도 많습니까?" 한즉 "말씀 마시오. 내가 볏섬이나 하는 탓으로 뜯어먹으려고 덤벼드는 놈뿐이요, 소작인까지도 핑계를 만들어 내지 않으려고만 하니 그도 걱정이죠 아들 녀석들이 많으니까 남 보기에 팔자 좋다고 할지 모르나 말 마시오 한푼 벌어서 보태려고는 않고 그저 쓰려고만 하니 그도 걱정이죠 요사이는 둘째 아들마저 첩을 얻어 가지고 살림을 내니 이것이 다 내게서 나갈 돈 아니오. 손주 녀석들이 삼십여명이 되니 뻔질나게 나만 조르고 나만 뜯는구려. 어느 누구 맞잡아 걱정해 주는 놈 없고 나 혼자 당하려니까 모두 탄식뿐이오. 팔자 좋은 것이 무슨 말이오" 하고 하소연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영감 보고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면 존장 팔자가 내 팔자만 못 합니다 그려. 왜 그러냐 하면, 나는 당신같이 돈도 많지 않고 또 아들도 없지만 날마다 평안한 생활, 만족한 생활을 하니까요 그 까닭이 어디 있는지 들어보시렵니까?" 하고 전도를 시작한 적이 있었다.

사람이 반드시 돈이 많고 자녀가 많다고 평안을 누리지는 못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품안에 안기지 않으면 참 평안이 없고 수고와 불만뿐이다. 부모의 품을 떠난 아이에게 어찌 평안이 있으며, 궤도를 벗어난 기차를 어찌 운전할 수 있으랴? 마찬가지로 생명이요, 길이요, 빛이 되신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인생에게 평안이 있을까? 있을 리가 없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탕자가 부모 슬하에 있기를 싫어하고 자기 자유로 살려고 하였으나 마침내 타향 객지에서 가엾은 걸객의 외로운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이 청년은 부모가 자기에게 하는 것이 싫어서 그 앞을 떠났으나 그래도 부모 슬하에 있어야 할 것을 몰랐던 것이다.

오늘날도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싫어한다. 계명이라든가 양심과 도덕의 제재를 받지 않고 제 마음대로 살아간다. 그런고로 저들의 생활은 번민과 고통이 아니면 그의 양심이 혼돈되고 마비되어서 인간의 정당한 생활에서 추방을 당하여 생의 신성과 참 평안을 맛보지 못하는 가엾은 인생이 되고 만다. 그런고로 베드로가 "회개하고 바른 데로 돌아오라"고 한 것은 인간으로서 있어야 할 곳에서 떠난 인간들을 보고 한 말씀이다.

죄 없이함을 받아야 할 것

죄인은 평강을 누리지 못한다. 왜 그런가? 사람이 죄에 대한 책망을 받는 동안에는 참 평안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서선(西鮮) 지방에서 일할 때에 들은 말인데, 그 지방에 어느 여자 한 사람이 잉태 후 여러 달이 되었는데 뱃속이 하도 이상하고 괴상스럽게 아파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은 결과 의사의 말이 "당신은 잉태한 것이 아니요 괴상한 병이니 유산을 시킬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막 유산을 시켜 놓고 본즉 아이가 아니고 이상한 괴물 몇 개가 나왔는데 자세히 본즉 뱀이었다 한다. 이 얼마나 괴상한 일인가? 뱀이 사람의 복중에서 자라고 있으니 평안할 수 있는가? 나는 생각하기를, 사람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뱀 새끼 하나씩을 다 자기 뱃속에 품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절대로 이상한 비유가 아니다. 사실이다. 옛날 에덴 동산을 파괴시킨 뱀이란 놈은 오늘에 있어서도 제2에덴인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시키려고 각 사람의 복중에 새끼를 낳아 놓고 있다. 놈이 기회를 타서 발작을 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별별 죄를 다 짓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복중에 이 사탄의 새끼를 잡아내기 전에는 그 사람의 생활은 평강이요, 기쁨이요, 참사랑의 동산이 되는 그야말로 에덴이요, 사람의 진정한 행복의 영역(領域)에 들어가 보지 못할 것이다.

주님도, 세례 요한도 "독사의 종류들아" 하고 책망하셨다. 내가 일찍이 평양 숭실대 강당에서 사경회를 인도할 때에 이 문제를 가지고 말씀을 하였더니, 돌연히 한 자매가 일어나서 좌석을 헤치며 집회 도중에 뛰어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 일을 유의는 하였으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고 있던 중에 후에 알아보니 놀라지 말라. 이 자매는 그 걸음으로 경찰서로 갔다. 왜 그랬을까? 견딜 수 없는 죄의 고통을 해결하려고 간 것이다. 이 자매는 환경의 지배에 강박하여져서, 어느 일본 사람과 만나서 살다가 두 딸을 낳고 나서 혼자 되었는데 생활을 할 수 없어 두 딸을 데리고 자기 모친을 찾아갔다 한다. 찾아가니 "너는 딸이니까 할 수 없이 받아들이지만 너의 두 딸이야 누구라고 받겠느냐" 하고 배척하였다 한다. 이 여자는 그때에 생각을 잘못하여서 이것 때문에 나도 살 수 없다는 생각으로 낳은 지 4개월밖에 되지 않는 아이를 걸레로 입을 틀어막아 죽여 버렸다.

그리고 자기도 물에 빠져 죽으려고 언덕에서 뛰어내리려 할 때에 네 살 난 큰 딸이 엄마를 부르며 야단하는 통에 어미의 인정에 또 끌려서 목적을 달하지 못하고 겨우 돌아섰다 한다.

그러다가 평양에 와서 식모살이를 하는 중에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그때에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던 것이다. 주님의 음성을 들은 이 여자는 견디지 못하여 곧 경찰서에 뛰어가서 그 사실을 자복하고 벌을 받겠다고 자청하자 서장이 참담한 범죄였으나 깊이 뉘우치는 것을 볼 때에 놀라고 감격되어서, 하나님이 용서하신 죄인을 내가 용서치 않으리요 하고는 어서 나가서 당신의 하는 일이나 잘하고, 열심으로 믿기를 바란다고 하며 용서하였다고 한다.

보라! 사람들 중에 이렇게 무서운 죄를 두고 그저 살아가는 사람이 어찌 많은지 알 수 없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처리하기 어려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용서하시고 평안을 주시려고 오셨다.

바울을 보라! 죄 문제에 대하여 얼마나 고민을 당했는가. "슬프다 나는 괴로운 사람이라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 이 얼마나 괴로운 탄식인가? 사망의 몸이란 말은 자기 몸에 썩은 송장이 들러붙어 있다는 뜻인데 이것을 떼어 달라는 괴로운 애원이다.

당시 로마법 극형(極刑)에 사형수에게 죽은 시체를 맞붙여 동여매고 사독이 입으로 코로 들어가서 나중에 죽게 하는 대단히 잔인한 사형법이 있었다.

바울은 자기가 죄로 당하는 고민을 여기에 비하여 부르짖은 것이다. 아! 이 사망의 몸, 즉 죄에서 분리하여 없이함을 받기 전에는 평안이 오지 않는 것이다.

선후가 전도된 생활은 평안이 없음

만물의 근원이시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먼저 알고 살지 않는 사람은 선후가 바뀐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가령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평안하냐고 물어 보라. 거꾸로 사는 사람이 평안할 리 없다.

우리가 나무를 심을 때에 가지를 땅에 묻고 뿌리를 공중으로 쳐들어 심는다면 그 나무가 살 수 있겠는가? 만일 마차를 부리는 마부가 마차를 앞에 놓고 말을 뒤에다 세우고 끌면 끌어질 것인가? 이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하려고 할 사람도 없다. 사람이 하나님 없이 생활을 계획하는 것은 모두가 이런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는 참 평안도 없을 것이요, 인생관에 대한 정확한 중심도 붙들어 보지 못하고 그저 헤매다 말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은 생활의 선후를 바꾸지 말라는 말씀이다. 사람이 세상에 있어서 의, 식, 주의 염려를 무시하라는 것은 아니다.

생활에 먼저 할 것이 있고 나중 할 것이 있으니, 즉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는 것이다. 오늘날 인생들의 생활은 그렇지가 못하기 때문에 그 생활에 평안이 없고 허공을 치는 생활을 하고 있다.

유물주의(唯物主義)자는 하나님도, 종교도, 예의도 다 필요 없다. 세상은 다만 물질뿐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로부터 보이지 않는 세균(細菌)까지 다 물질이다. 물질을 떠나서 그 외에 다른 것이 있을 리가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먹고 살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이는 사람의 생활을 썩어질 미생물 생활에 떨어뜨려 놓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귀하다는 것을 어디서 증명하겠는가? 사람이 귀한 존재라고 하는 것은 다만 가치세계(價値世界)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고, 물질뿐이라고 한다면 변소에 있는 구더기 생활에서 더 나을 것이 없다고 본다.

구더기도 언제까지나 그곳에서만 살다 죽는 것이 아니고 얼마를 지나면 변화가 있는 것이다. 날개 달린 파리로 변하면 변소에서 살지 않고 사람의 잔등에도 기차에도 타고, 심지어 사람의 밥상에까지 자유로 올라가고, 나중에는 어찌되었든지 맛있는 음식은 먼저 타고 앉아서 먹을 뿐 아니라 사람 밥상에다 똥을 깔기고, 대감님의 이마에 올라앉기도 하니 얼마나 훌륭한가? 사람은 먹고 마시다가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을 찾아 사랑과 믿음과 소망을 얻고서야 참으로 의의 있고 평안이 있을 것이다.

자족을 모르고는 평안이 없음

바울은 무슨 일이든지 내가 자족을 배웠다(빌 4:11)고 하셨다. 바울 같이 평생에 파란 많던 사람이 없었고, 바울 같이 또 일생을 평안한 생활로 보낸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생활의 비결이 어디 있는가? 근본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믿는 까닭이요, 그의 처세술에 있어서는 자족을 아는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자족을 가진 사람은 어떠한 악조건이 있더라도 평안을 가지지만, 만일 사람이 자족을 모르면 어떠한 순경에서라도 불평만이 있게 된다. 우리가 인생이라는 것을 근본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자족을 가지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왜 그런가? 모든 것을 그저 값없이 받은 까닭이다. 모태에서 아무 것도 가지고 나온 것 없이 오늘까지 살고 또 옷 한 가지라도 남아 있으니 생각하면 모두 공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도 내가 만든 것이 아니요, 공것이다. 내 몸뚱어리까지도 내가 만든 것이 아니요 그저 얻은 공것이요, 우리가 먹고 있는 한 그릇 밥이나 한 벌 옷까지라도 모두가 공짜로 얻은 것이니, 도무지 불만을 가질 까닭이 없고 자족하게 생각할 것뿐이다.

나는 내 밑천과 자본을 0으로 잡고 있다. 나는 이렇게 극단까지 생각한다. 만일 내 눈 하나가 멀어서 보지 못한다고 하자, 하나만이라도 공것이니 그것으로 족하고, 내 팔 하나가 병신이 되어 쓰지 못한다고 하자, 한 팔이라도 남았으니 그 역시 공것이므로 만족하고, 최후로 이 전신이 다 없어진다고 치더라도 밑져야 본전이니 불만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욥은 이러한 철저한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다. 동방에 유명한 유복지를 다 잃어버리고 마지막 자기 몸까지 병들었을 때에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하였으니 그야말로 밑져야 본전이라고 철저히 깨닫고 철저히 깨달았다. 나는 나의 밑천을 공으로 치고 살았으니까 가난뱅이가 될 것 같았는데 도리어 부자가 되었다. 놀라지 말라! 내 자본이 얼마인가 하면 12억 환이다. 이 말은 실없고 허황한 말 같으나 가장 진실한 진담이요 사실이다.

왜? 내가 쓰고 있는 이 몸을 물자를 들여서 기른다고 하면, 독일 같은 과학이 발달된 나라에서도 2억 환이 든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 몸 하나만 하여도 2억 환짜리가 되고 또 내가 19세 되던 해에 2억 환짜리 아내 한 사람을 맞았으니 그것만 해도 벌써 4억 환이 되지 않았는가. 그 다음으로 딸이 넷이니 12억 환 재산가가 아닌가. 나는 집에 들어가면 서발 막대기 휘둘러도 하나 거칠 것 없는 12억 환 자본가이다.

그러다가 만일 또 하나님이 데려가신다 해도 내가 손해 볼 것은 하나도 없다. 왜? 밑져야 본전이니까. 이러한 인생관을 가지기 때문에 내 생애는 항상 평안하다.

소망이 없으면 평안이 없음

사도 바울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롬 12:12)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소망이 없이는 즐거워할 수 없다. 비유컨대 소망을 저수지(貯水池)라고 한다면 기쁨은 분수기(噴水器)와 같다. 저수지에 물이 많으면 분수기는 언제나 힘차게 물을 뿜을 수 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소망하는 일이 참되고 영원한 일이라면, 우리 생활은 항상 평안하고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음부의 그늘이 점점 짙어져서 쓸쓸하고 우울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왜 그럴까? 다시 보니 그 사람의 두 팔은 포승으로 결박을 당하고 전후 좌우에는 권총을 품은 경관들이 장엄하게 둘러앉았다. 아! 이는 00사건에 주모자로 00지방 법원에서 살인자라는 죄명으로 사형 언도를 받고, 서울 고등법원으로 재심을 받으러 가지만 모면할 아무 희망이 없어 사형대를 연상하면서 지금 기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었다.

같은 열차를 타고, 같은 서울을 향하여 가는 사람이지만 한사람은 즐거워한다. 사람의 소망이라는 것이 그 사람의 현실 생활을 주장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태라는 정거장에서 세월이라는 열차를 타고 북망산이라는 정거장을 향하여 달리고 있다. 참 소망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가? 바울은 "의의 면류관을 예비해 두었다"고 하였고, "지금 당하는 고난과 장래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다"고 말하였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평안함을 너에게 주노니 내 평안을 너에게 주는 것은 이 세상이 너에게 주는 것같이 너에게 주는 것 아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천국의 소망이냐? 지옥의 절망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