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망성에서 좁은 문까지

 

1. 기독도의 상태(깨닫는 사람, 시 49:20)

존 번연은 한 구렁텅이에서 꿈을 꾸었다(구렁텅이는 옥중, 꿈은 인생관을 가리킴). 황막한 광야에서 한 사람이 남루한 옷을 입고 등에는 무거운 짐을 지고 손에는 책 한 권을 들고 집을 등지고 돌아서서 그 책을 읽다가 울며 떨며 슬퍼하며 근심하고 있었다.

이는 장망성(將亡城) 사는 기독도(基督徒)의 상태이다. 장망성을 떠나 천성(天城)가는 제일 계단은 심령이 각성되는 것이다. 사람이 비록 존귀한 데 거하나 깨달음이 없으면 멸망할 짐승과 같다(시 49:20)고 하였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탕자는 받은 재산 모두 탕진하고 마지막에 돼지 치는 목자로 돼지와 함께 잠자고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다가 홀연히 깨달았다. 자기 신세를 깨닫고, 자기 장래 멸망을 깨닫고, 아버지 집의 모든 것이 풍성함을 깨달아서 돌아올 때,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이다.

탕자 같은 인생아! 깨달으라, 깨달으라(눅 15:17).

1. 자기의 진상을 깨달음(시 38:4; 사 64:6)

첫째로 기독도가 남루한 옷과 등에 무거운 짐을 진 것은 자기의 진상을 깨달음이다. 남루한 옷은 무엇인가? 이사야 64장 6절을 보라. 우리가 다 깨끗지 못한 자와 같으며 우리의 모든 의가 더러운 옷과 같다고 하였다. 또 등의 무거운 짐은 무엇인가? 시편 38편 4절을 보라.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또 시편 40편 12절에는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칼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나이다."라고 했다.

또 욥기 40장 4절을 보라.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되, 보소서 나는 천한 자라 무엇을 주께 대답하리이까 오직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하며 티끌과 재 가운데 회개하였다.

천성 가는 기독자의 자격은 먼저 자기의 죄를 깨닫는 것이다. 이전에는 자기가 잘나고 깨끗하고 의롭고 얌전한 줄 알았더니 이제는 추하고 불의하고 흉악한 자임을 알게 되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자임을 고백하게 된다. 다윗은 죄가 내 머리털보다도 많다 하고, 바울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하고 부르짖었다.

이사야는 "내가 화가 있으리라" 자복하고, 어거스틴은 어려서 어머니 젖 빨다가 젖꼭지 깨문 것까지 회개하였다고 하며, 이 천로역정을 지은 존 번연도 참회록에 "아이고, 나는 더러운 자이다. 내 죄가 내 속에서 솟는 것이 샘에서 샘물이 나온 것 같구나. 이 세상에 내 마음하고 짝할 것은 악마밖에는 없을 것이라"고 부르짖었다.

옳다. 아무리 교회 출입을 하고 잘 믿는다고 하는 신자나 교역자까지라도 한 번은 자기의 진상이 철두철미하게 정수리로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는 문둥이 같고 추악한 자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는 진실로 천성 갈 자격이 없는 자이다.

2. 인생관을 깨달음

둘째로 황막한 광야에서 집을 등지고 있는 것은 인생관을 절실히 깨달은 것이다. 이 세상의 부귀고영은 뜬 구름과 같고 가고 오는 이 세상은 뜻 붙일 곳이 전혀 없다는 쓸쓸한 광야에서 적막한 사회상을 깨달은 것이다.

솔로몬의 부귀영화도 바벨론의 장한 경치도 오늘날 간 곳이 없고 고금 세계의 천만 사정은 꿈과 같이 지나고 만고 역대의 흥망성쇠가 물레바퀴 돌아가듯 하는구나. 춘삼월에 피는 저 꽃은 열흘의 짧은 목숨을 한탄하고 있지 않은가? 가고 오는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고 장망성같은 이 세상은 무정하기 짝이 없다.

산다 하면 늘 살 것인가? 사람 살기 백년 가기 잠깐이요 뒷동산에 한 무덤을 이룰 때에 일생 수고는 흔적이 없구나. 고해 중에 지나는 나그네의 일엽편주(一葉片舟)는 어디로 갈 것인가? 모든 육체는 풀같이 썩어 버리고 세상의 영광은 꽃과 같이 쇠잔하리라.

멸망의 기차는 고동을 틀면서 달려오는데 죄악의 술을 마시고 허영의 꿈을 꾸는 자는 장망성을 아마 자기집 아랫목으로 아는 모양이다.

3. 생명의 존귀를 깨달음

셋째로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까 하는 자기 생명의 존귀함을 깨달은 것이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생명을 바꾸겠느뇨(마 16:26). 생명은 귀하다. 살아 있는 개는 죽은 사자보다 나은 것이다(전 9:4).

4. 성경의 권위

넷째로 손에는 책 한 권을 들었으니, 기독도는 이 책을 보고 자기의 진상과 황막한 인생관 그리고 생명의 존귀함을 깨달은 것이다. 그 책은 무슨 책인가? 잡지나 소설책인가? 역사나 과학책인가? 두말 할 것 없이 성경이다.

성경은 과연 사람의 진상을 알리는 거울이요, 시대와 사회상을 잘 알려주는 망원경이요, 우리 생명을 밝혀 주는 현미경이다. 이는 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다. 이것으로 주의 종이 경계함을 받으며 이것을 지킴으로 큰 상을 얻으리로다(시 19:10-11).

기독고가 손에 성경 한 권을 든 것은 참 행복이었다. 우리 책장에 만 권의 서적이 있어도 성경이 없는 책장은 죽은 책장이다. 온 세상이 다 불타고 천지가 변하여도, 풀은 마르고 꽃은 다 떨어지되, 오직 여호와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사 40:8).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묵시하신 바니 이 성경은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더욱 온전하게 하느니라(딤후 3:16).

5. 참회의 눈물

다섯째로 근심하고 애통하는 기독도의 상태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과연 천성 가는 사람에게는 눈물만 있는 것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다(고후 7:10). 그러나 울라고 한다고 덮어놓고 울지 말라. 언젠가 충청도 은산에서 부흥회를 하는데 어떤 노파가 심히 울기에 물어보니, 죽은 영감 생각이 나서 운다고 했다. 신세 타령 팔자 타령 하여 우는 눈물은 몇 동이를 쏟아도 소용 없는 것이다.

죄를 슬퍼하라. 죄를 사랑하는 마귀새끼요, 죄에 빠지는 것은 인간들이요, 죄를 슬퍼하는 것은 성도라고 어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참회의 눈물은 진주보다 귀하다. 다윗은 통회의 눈물이 요를 적시고 침상을 띄운다 하고 내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고 고백했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 주라고 부르짖었다(롬 7:24).

6. 구원은 개인 문제

여섯째로 한 사람이 서 있었다는 것이다. 구원은 개인 문제다.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된다는 것이다. 어떤 노인에게 전도하니 "내게는 전도 그만 두시오. 나는 예수 아니 믿어도 일 없소" 했다. 왜 그런가 하니"우리 마누라 잘 믿고, 아들 딸 잘 믿고, 며느리 손자 다 예배당 잘 다니니 천당 갈 때 에 나 하나 들고 올라가지 못하겠소" 했다. 한심한 일이다.

마누라 밥 먹어 영감 배부를까?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한다. "사람을 바라지 말며 인생을 기다리지 말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체를 믿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으리라 저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이 되리니 좋은 일이 이르는 것을 보지 못하리라(렘 17:5) 하셨다.

2. 친족의 오해

기독도의 형편을 본 그 가족은 매우 놀라고 두려워하나 믿지 않고 오히려 정신병이 들었다 한다. 조롱도 하고, 책망도 하고, 상관하지 않는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참된 은혜 받게 되면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다. 예수를 바알세불이 들렸다 하였으며 그의 제자 된 현대 신자를 너무 똑똑해 걱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 미치광이가 복되다. 사실은 세상 사람들이 다 미쳐 산다. 보라. 어떤 사람은 돈에 미치고, 허영에 미치고, 계집에 미치고, 술에 미치고, 미신에 미치고, 사연에 미치고, 오락에 미치고, 명예심에 미치고, 먹는데 미친다. 미칠 바에는 예수에게 똑바로 미쳐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복이 있느니라(마 5:10).

3. 전도의 방문(롬 10:10)

고통하고 근심하는 기독도에게 전도(傳道)가 찾아 왔다. 선한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롬 10:15).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당신이 택한 사람을 위하여, 구원할 백성을 위하여 전도를 보내 주시는 것이다.

보라. 다메섹 도상의 사울에게 아나니아를 보내 주셨고, 로마 고넬료의 가정에 베드로를 보내시고, 무화과나무 밑에서 기도하던 나다나엘에게 빌립을 보내시고, 구스의 내시에게도 빌립이 광야로 찾아가게 하셨고, 빌립보 강변의 자주장사 여인들에게도 바울이 찾아가게 하신 것이다.

오늘 당신들을 위하여는 누가 찾아와서 기쁜 소식을 전하여 이 큰 구원을 받고 알았는가? 그리고 이 장망성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하고 고통하는 기독도가 이 구석 저 구석에 그 수를 알 수 없으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겠느냐"(사 6:8) 하시는 주의 음성을 듣는가?

많은 사람을 가르쳐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는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치리라(단 12:3).

눈을 들어 산을 보라 만산 초목 욱었고나

곳곳마다 가시덤불 굴러 있는 해골떼라

재목 없어 집 못짓고 살 곳 없어 방황하나

맹수 밥이 되는 영혼 주의 종아 어찌할꼬.

전도가 기독도에게 "왜 여기서 그대는 울고 근심하느뇨" 하니 기독도가 가로되 "나는 내 손에 든 책을 보고 죽을 죄를 깨닫고 죽은 후에 심판 받을 것을 생각하니 무거운 짐에 눌려 죽을 뿐만 아니라 지옥에 빠지게 되었나이다. 감옥에 들어가는 것도 잡시 괴로움을 견디기 어렵건만 하물며 지옥에 빠지는 그 심판을 어찌 차마 받으리까?" 전도는 그 말을 듣고 깊이 동정하면서 "살 길을 찾으려면 왜 여기서 방황하는가? 속속히 이 장망성을 떠나서 장래 노하심을 피하라"는 주의 말씀을 주었다.

기독도는 장망성을 떠나면 어디로 피하여야 되겠나이까 물으니 전도는 손을 들어 가리켜 "저기 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좁은 문이 보이지 않는다." 하니 "저편의 환한 빛은 보이는가?" "보인다" 하니 "그 빛을 바라보며 그리로 향하여 달려가면 거기 좁은 문이 있을 것이니, 그 문을 두드리면 당신의 행할 바를 가르쳐줄 사람이 있으리라" 하였다.

⊙ 좁은 문(마 7:13)

그렇다. 우리가 처음부터 예수의 깊은 진리를 분명히 보고 따른 것은 아니다. 거울 속으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여러 가지 동기로 교회에 나왔으나 믿고 나아가면 점점 깨닫게 되는 것이다. 너희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하였고 이제는 따라오지 못하나 이후에는 따라오리라 하였다(요 13:7-36).

좁은 문(마 7:13), 천성 가는 길은 좁고 험한 것이다. 기차 철도가 길기는 길어도 좁은 것이다. 기차는 철도가 좁아도 철도로 가야지 철도가 좁다고 넓은 데로 가면 어찌될 것인가? 곧 탈선되며 또 전복될 것이다.

모든 인생은 왜 이 길로 오지 않는가? 종교 생활은 자유가 없고 좁다고, 신앙 생활은 무미 건조하고 부자유하다고 오지 않는다. 주의 법도와 그 계명 또 절제 생활, 도덕 생활은 다 부자유한 것 같으나 이 길은 진정 사는 길이요, 자유 방종은 사망이요 멸망이다.

기독교의 신앙 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그러한 것이다. 가령 밥을 세 공기 먹어야 알맞은 사람이 반찬 맛이 좋다고 한 공기나 두 공기 더 먹으면 넓은 길로 가는 것이다.

탈선이 되어 배에 병이 생기고 설사가 나서 병원에 가 의사의 신세를 지느라고 야단이다. 모든 질병은 대개가 절제 없는 생활에서 생기는 것이다. 또한 일남일녀는 좁은 길인데, 왜 많은 여자는 애게 한 사람뿐인고 하고 많은 남자와 친해 보라. 또 많은 남자는 왜 내게는 한 사람뿐인고 하고 많은 남자와 친해보라. 이 사회가 어찌될 것인가? 아라비아에는 코 떨어진 여자가 많다 한다. 그 사회에는 다처주의(多妻主義)라 여자끼리 강샘을 하여 서로 코를 잘라 버려서 그렇게 된 것이라 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사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커서 그곳으로 가는 사람이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험하여 찾는 자가 적으니라. 그 문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내가 곧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들어가며 나오는 자유를 얻고, 생명의 꼴을 얻으리라(요 10:9) 하였다. 천하 인간에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이 없느니라(행 4:12).

4. 기독도의 출발(창 19 :17)

기독도는 이제 귀한 복음을 듣고 큰 보화를 얻은 것처럼 껑충껑충 뛰면서 달아나기를 시작하였다.

거기서 그의 집이 멀지 아니한지라. 그의 처자들이 그 광경을 바라보며 울며불며 돌아오라고 따라가며 부르짖었으나 저는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고 "생명, 생명, 영원한 생명" 하면서 달아났다. 모든 것 다 버리고 달아났다. 천성에 가는 사람은 귀를 틀어 막아야 하는 것이다.

⊙ 귓구멍이 넓은 사람은 천성 가기 어렵다.

이 사람이 이렇다면 이럴 듯하고, 저 사람이 저렇다면 저럴듯하여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무정견(無定見)한 무골충(無骨蟲) 같은 사람은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하늘 나라에서 요구하는 인물은 의지가 돌같이 강하여 대소사에 맘이 뜨지 않고 어떠한 문제든지 일정한 의견을 가진 인물인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 부자가 당나귀를 끌고 가다가 물에 빠진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부자(父子)가 등에 아무 것도 싣지 않은 나귀를 끌고 가는데 한 동네를 지나노라니 사람들이 보고 "저런 미련한 사람, 아무것도 싣지 않은 나귀를 끌고 가는 것보다 한 사람 타고 가지" 했다. 그 말이 그럴 듯해서 아들을 태우고 아버지가 경마를 잡고 갔다. 또 한 동네를 지나가노라니 사람들이 또 "저런 못난 영감, 아들을 태우고 아버지가 경마를 잡아? 에익! 망할 영감, 이 다음 효도 잘 받겠다. 자식 참 잘 가르친다."고 하면서 비난했다.

그 소리를 듣고, 그것 참 그렇겠다 이번에는 내가 탈 것이니 네가 끌어라 하고 바꾸어 타고 갔다. 또 한 동네에 들어가니 사람들이 "저런 무심하고 무정한 영감 보라, 어른인 아비가 타고 어린 아이가 경마를 잡았다. 에익! 이 영감, 평안하시오? 그렇게 인정머리가 없소." 했다. 그 말을 들으매 참말 안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 둘이 타자 하고 약한 나귀 등에 두 사람이 올라 앉아 갔다. 어린 나귀의 허리가 비뚝비뚝 부러질 지경이었다.

또 한 동네를 지나가노라니 "저런 악한 영감,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둘이 타는 법이 어디 있는가? 그 나귀 허리 부러지는구나" 이 말을 들은 부자는 큰일났다. 이래도 말썽 저래도 말썽이니 이번에는 당나귀의 네 다리를 결박하여 둘러메고 돌다리를 건너다가 나귀가 요동치는 바람에 그만 나귀는 물에 빠져 죽었다. 참으로 말 많은 세상이다.

내가 사람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하랴? 우리는 이 세상의 잡음을 귀 막아 물리치고 신령한 우리 주님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여야 한다.

⊙ 달아나라. 너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들에도 머무르지 말고 생명을 위하여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창 19:17).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롯에게 천사가 와서 경고한 말씀이다. 달아나라. 언제나 긴장한 태도이다.

가면 가고 말면 말고, 되면 되고 말면 만다는 이러한 태도로는 아무 것도 성공하지 못한다. 먼저 위험을 피하고 사망을 피하여 달아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의 마라톤에는 허다한 간증자들이 구름같이 둘러싸고 있으니 의의 면류관을 들고 속히 오라고 부르시는 우리 주님의 음성을 따라 모든 거리끼는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참음으로, 믿음으로 주장하자.

완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면서 힘차게, 씩씩하게 따라가서 개선의 영광을 누려야 할 것이다.

5. 고집과 이천의 성화(마 16:23-24)

기독도는 벌써 벌판 한가운데쯤 갔는데, 동네에서 두 사람이 따라왔다. 한 사람은 고집(固執)이요, 다른 사람은 변하기 잘하는 이천(易遷)이라고 한다.

고집은 기독도 붙들고 강제적 위협적으로, 이천은 사정적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기독도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으니라" 하고 고집의 위협도 이천의 사정도 다 떨쳐 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고집이 가로되 "이 사람아, 거기 가면 무엇이 그리 좋아서 이 좋은 장망성을 버리고, 그 귀여운 처자를 다 버리고 친절한 친구도 다 버리고 딴 고집을 부리면서 간다는 말이야?" 기독도가 가로되 "이 책을 좀 보라. 거짓말 없으신 신실하신 주의 말씀에 천성은 근심도 없고 눈물도 없고 질병과 사망의 고통이 없는 참으로 평안한 곳이요 천군 천사 성도들과 같이 영세 무궁 복락을 항상 누리는 곳이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이니라" 고집이 가로되 "세상에, 그렇게 고집 센 자는 처음 보겠네. 친구들이 그만큼 사정하면 금수가 아닌 바에야 모를 리가 있나. 미친 주제넘은 놈이라"고 했다.

이천이 가로되 "그런 욕설은 그만두게. 이 사람 기독도의 말이 참말이라면 나도 따라갈 마음 있네." 고집이 가로되 "세상에, 그렇게 고집 센 자는 처음 보겠네. 친구들이 그만큼 사정하면 금수가 아닌 바에야 무를 리가 있나. 미친 주제넘은 놈이라"고 했다.

이천이 가로되 "그런 욕설은 그만 두게. 이 사람 기독도의 말이 참말이라면 나도 따라갈 마음 있네." 고집이 가로되 "야! 이 사람, 너도 또 미쳤느냐? 그런 미친 놈 따라가다가는 장차 무슨 봉변을 당할지 누가 아느냐? 그럼 어서 너희들끼리 잘 가서 복 많이 받아라. 나는 그런 얼빠진 놈들과 작반(作伴)하지 않을 터이다" 하고 고집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천이는 결심하고 기독도를 따라왔다. 기독도와 이천은 벌판으로 같이 길을 걸으며 이야기했다. "고집이도 이런 귀한 도리와 장래 재앙을 알았으면 그렇게 경하게 돌아가지 않았으련만........" 하고 탄식했다.

금강석이 아무리 보배라 할지라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는 것이다. 어린 아이에게는 금덩어리를 주고 사탕을 주면 금덩어리를 내버리고 사탕을 먹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의 귀한 진리를 몰라서 무시하고 반대하고 며칠이나 살겠다고 그저 썩어질 세상, 썩어질 허영에 끌리어 죄악에 빠져 멸망의 걸음을 걷는 자 그 수가 얼마인고!

6. 우울니 절망소(시 69:3; 고후 7:10)

이천은 기독도에게 "우리 두 사람만 여기 있으니 좀 자세히 이야기해 주시오. 그 가지고 있는 책이 다 참말일까요?" 기독도 가로되 "그렇고 말구요. 천지는 변하여도 이 말씀은 영원불변하신 진실한 말씀이오. 우리가 가는 곳엔 영원한 나라가 있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곳에서는 우리보다 먼저 간 성도들과 천군 천사들이 서로서로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항상 은총을 누리며, 금 면류관 쓴 장로들이며 금거문고 타는 성도들이며 주를 위하고 충성되이 그 계명을 순종하다가 죽은 순교자들이 다 평안한 영생복락을 누린다"고 하며 그러한 나라를 바로 눈앞에 보는 듯이 열심히 말하였다.

이 천은 그 말을 듣고 "아, 어서 갑시다. 그렇게 좋은 곳이 있는 줄을 이 세상 사람들은 다 모르지요. 빨리 갑시다." 기독도는 "여보, 그대는 짐이 없어 잘 가지마는 나는 내 등에 있는 무거운 짐 때문에 빨리 갈 수가 없다"하니 이천이 말하기를 "그대는 무슨 짐을 밤낮 그렇게 지고 다니는가?" 하였다.

이천은 같이 따라가기는 하지만 도무지 자기 죄에 대한 깊은 느낌이 없는 천박한 신자이다. 돌밭의 씨와 같이 싹이 곧 나오기는 하지만 햇빛이 내리쬐면 곧 말라지는 것이다.

이렇게 재미롭게 이야기하며 가던 두 사람은 별안간 뜻밖에 수렁에 빠져 들어갔다 우울니(憂鬱泥) 절망소(絶望沼)라는 곳이었다.

저희는 거기서 한참 뒹굴어서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대단히 위험한 곳이어서 저들은, 내가 깊은 수렁에 빠져 능히 설 곳이 없나이다 내가 깊은 물에 들어가니 파도가 나에게 넘쳤도다(시 69:2)고 한 말씀과 같이 되었다.

기독도는 등의 짐이 무거워 더 깊이 빠져 들어갔다. 이천이가 기독도에게 말하기를 "여기가 어디인가? 이제는 어찌하려는가?" 기독도는 "글세, 나도 모르겠다." 이천이 벌컥 성을 내며 가로되 "이 사람아! 이것이 종일 나더러 말하던 복인가? 이것 첫걸음에 이 모양이 되니 더 가다가는 나중에 더 큰 봉변을 당할지 알겠는가? 내가 정신 빠진 자이지, 왜 이런 미친놈을 뒤로 돌아서서 내려오면 나오기 쉬운 곳이었다."

7. 이천이 돌아감(히 10:38)

이천이는 겨우 빠져 나와 기독도를 저주하며 "아! 이놈아, 어서 너 혼자 천성 가서 내가 받을 복까지 다 받아라. 나는 다시는 너 같은 자에게 속지 않을 것이다" 하고 빨리 집으로 돌아갔다.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돌아오는 일이 지혜 있는 일이라"고 칭찬하는 이도 있고 "야! 이 삶아, 그러기에 내가 가지 말라고 하지 않더냐? 그런 미친놈을 따라갔던 것이 대단히 잘못이라"고 책망하는 이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따라가려면 끝까지 따라가지 못하고 모험을 시작하였다가 조그마한 어려운 일이 있다고 중도에 그만두는 겁쟁이라, 너는 아무것도 성공 못할 놈이 아닌가? 뼈 없는 무골충과 같은 놈, 신용 못할 놈이로구나" 하여 온 동네의 조롱거리만 되었다.

⊙ 맛 잃은 소금

오늘날도 주를 따르다가 타락하는 사람은 세상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것이다. 맛 잃은 소금은 밖에 버려 사람에게 밟힘이 되리라(마 5:13)고 하였다.

⊙ 경기적 신자

이천이는 왜 그렇게 속히 돌아갔는가? 경기적 신자이기 때문이다. 불경기가 될 때에는 물러가는 것이다. 기독도를 따라갈 때에는 좋은 것만 생각하였지 가는 길에 어려운 일이 있을 것을 예상하지 못하였다.

강원도 춘천의 어떤 노파는 예수를 믿으면 복 받는다 하여 석 달 동안 예배당에 잘 다니다가 주일에 예배당 간 사이 고추 세말 도적맞고 교회 아니 나오므로 그 교회 목사가 심방하니, 그 노파가 말하기를 "나는 이후로 예수 그만두겠소" 했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 "하나님이 있으면 왜 고추 도적놈도 못 지켜 주겠소?" 하였다.

자라 모가지 신자다. 자라 모가지는 평안 무사할 때는 쑥 나오다가 무엇이 건드리기만 하면 쏙 들어가는 것이다. 오늘도 그러한 신자가 많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인가"(행 14:22).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 10:38).

누구든지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느라(마 16:24) 하신 우리 주님이 간곡히 부탁하신 귀하신 말씀을 잘 기억하고 따라야 한다. 왜 이들은 그 절망소에 빠졌었는가?

⊙ 절망소에 빠진 원인

첫째는 이야기를 너무 한 까닭이다. 성도의 생활은 말을 조심해야 한다. 밑천 들지 않는다고 공연한 말 너무 하다가는 실패의 원인이 된다. 다윗은 내 입에 파수꾼을 세워 주소서(시 141:3) 하였다.

둘째는 우울니에 징검다리가 있는데 그 징검다리를 보지 못하였다. 징검다리는 하나님 말씀이다. 우리가 어려운 일 당할 대에 침착하게 하나님 말씀을 잘 상고하여 말씀에 서서 나가야 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환난을 받으나 안심하라. 세상을 이겼노라. 네가 물에 들어가도 같이하고 불에 들어가도 같이하리라. 이러한 모든 말씀을 기억하라. 내가 주의 말씀을 감춘 것은 범죄치 않게 하려 함이니라.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 되나이다.

8. 은조의 구원(히 2:18)

기독도는 아무리 어려워도 돌아서지 않고 "죽어도 천성이나 바라보며 죽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혼자 아무리 애를 써도 할 수 없다. 울어도 할 수 없고 힘써도 할 수 없고 참아도 할 수 없다. 움직일수록 더욱 빠져 들어간다. 때마침 은조(恩助)란 분이 와서 건져 주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다(히 4:16). 시험당할 때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쌓인 날 돌아보사 넓으신 사랑 베푸신다.

무거운 짐을 나 흘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날 구해 줄 이는 주 예수시니 오직 예수뿐이 아닌가? 베드로도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보고 무서워 빠져 들어갈 때 주님이 오셔서 "적게 믿는 자여, 왜 의심하였느뇨" 하시면서 붙들어 건져 주셨다. 우울니에서 나온 기독도는 "내 짐이 점점 무거울 때에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예수는 나의 능력이시니 내 대신 짐을 져 주시네" 하는 찬송을 부르면서 걸어갔다.

9. 세지의 유혹(갈 3:1)

육정부(肉情府)에 사는 세지(世智)란 자가 기독도를 만나 "그대가 수고로이 어디로 가는가?" 하니 기독도는 대답하기를 "나는 장망성 살던 사람인데 진실로 곤고한 사람이라. 좁은 문으로 가서 이 무거운 짐을 벗고 영생 얻으려고 하노라" 하였다.

세지는 "허허, 이사람 큰일 났군. 세상에 이 길처럼 험하고 괴롭고 어려운 길은 없는데, 그대가 오다가 한판 굴렀네 그려. 이제 앞으로는 얼마나 더 어려운지 모르네. 곤하고 위태하고 어둡고 기갈 드는 곳, 추운 곳, 죽음의 곳이라고. 우리 동네 육정부 사람들도 한때 간다고 하더니 다 돌아왔네. 오늘 나를 참 잘 만났네. 이제라도 속히 돌아가게. 내가 경험도 많고 지식도 많은 사람이니 내 말만 들으며 행복일세" 했다.

기독도는 "아니오. 아무리 어려워도 이 짐만 벗는다면 아무 데라도 가겠소."

세지는 "그 짐 있는 줄은 어찌 알았나?"

"이 성경 책 보고 알았소."

"에익! 무식한 사람, 그렇게 맘이 약해 어찌하나? 그것 다 사람 속이는 거야. 그대 처자가 있지 않은가? 그렇게 무정히 혼자 살겠다고 하는 것은 인정 도리상 용납하지 못하는 일이니 정히 그 짐 벗기 원하면 내가 좋은 길을 가르쳐 줄 터이니, 저기 보이는 시내산 아래 도덕촌(道德村) 찾아 율법 선생한테 가서 수양을 하고 도를 닦으라. 거기는 물건도 싸고 집도 많아 처자를 데리고 재미나는 곳이라네." 한다.

기독도는 그 말을 듣고 가던 길을 버리고 복음의 길을 떠나서 시내산 율법 선생을 찾아갔다. 갈수록 짐은 점점 더 무겁고 공포와 의심에 싸여 다 죽게 되니 진퇴양난(進退兩難)이라. 산에서는 화광(化光)이 일어나고 불꽃이 그 몸에 미치려 할 때 그제서야 세지에게 속은 것을 후회하며 더 가지 못하고 전신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10. 전도의 재차 방문(갈 4:19)

때마침 전도가 다시 찾아와서 엄숙한 말로 경계하고 바른 길을 가르쳤다. 이는 주님의 지극한 사랑이시다(갈 4:19).

전도가 가로되 "왜 내가 좁은 길을 가르쳤는데 이렇게 속히 곁길로 들었는가? 율법이나 도덕이나 인간의 수양으로 그 짐을 벗고 천성의 생명길로 능히 가는 줄 아는가?"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아, 너희 눈앞에 십자가가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꼬이더냐? 너희가 복음들 듣고 믿음으로 성신을 받았느냐? 율법의 일을 행하므로 성신을 받았느냐? 너희가 이렇게 어리석으냐?(갈 3:1-3) 하였다.

기독도가 가로되 "그렇게 위험한 줄은 몰랐습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희망이 없습니까?"

전도는 다시 여러 가지 주의 말씀을 보여주며 회개를 명하였다. 세 가지 말 들은 것을 통탄히 여기라.

첫째, 정도를 떠나서 미혹의 길에 간 것

둘째, 십자가를 싫어하여 평안한 육신의 길을 구한 것

셋째, 죽음이 지배하는 곳에 발을 디디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배반하고 사람의 뜻을 순종함이라.

기독도는 벌벌 떨면서 "나는 화를 받을 자요 멸망할 자이라" 고 슬피 울며 회개하였다. 세지를 만난 것도 불행이요, 그 말을 경솔히 믿은 것도 나의 어리석음이요, 사욕을 좇는 길에 미혹한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전도는 다시 주의 긍휼과 사죄의 말씀을 주어 위로하고 바른 길에 세워 주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성취하라."

⊙ 이단을 삼가라

우리가 가는 길에서 복음에 서지 못한 어린 심령들은 율법주의, 도덕주의, 신비주의, 인본주의, 자유주의자들에게 괴롬을 당함이 많다. 사이비(似而非)한 종교 이단 지도로 끌고 나간다. 좀 신령하게 잘 믿어 보려는 자가 근본 문제를 알지 못하고 지엽적인 문제를 주창하다가 미혹에 빠지는 일이 적지 않다.

가령 성신받는 일은 먼저 빛 아래서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성결을 받으며, 또 참사랑이 내 맘에 가득하여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함이 급선무이다. 무슨 이적이나 묵시나 금식이나 방언이나 신유나 예언을 주창하다가는 탈선한다.

신비주의로 말씀에 서지 못하면 극단적 감정과 자기 노력을 믿고 무슨 특별한 무엇을 보고 들으려고 사람의 정욕으로 구하다가는 성신 받지 못하고 마귀의 영에 속아 자기도 속고 사람들을 속이는 일이 많다.

율법주의자는 토요일을 안식일이라 주장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입수하는 것 같으나 밤낮 "날", "날" 타령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분명히 알려 주시지 않았는가?

예를 들면 당나귀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당나귀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당나귀는 사람이 타고 다니라는 것이지 사람이 당나귀를 머리에 이고 다니라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날" 타령 그만하고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산 예수를 그대로 받아 당신 심중에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고 순복음적이요 정통 건전한 신앙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 전통신앙

1. 하나님은 빛이시다. 빛은 이지(理智) 방면이요,

2.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도덕(道德) 방면이요,

3.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생명은 신비(神秘) 방면이다.

그러므로 이지와 도덕과 신비를 구비한 신앙이 건전한 참 종교요 참 그리스도인이다. 이지와 도덕이 결함된 신비는 미신에 빠지고 신비의 체험이 없는 이지는 너무 냉랭하고 쌀쌀하다. 이지와 신비가 없는 도덕가들은 너무 무미 건조하고 싱겁다.

언제나 가슴은 뜨겁고 머리는 냉정하라. 신비에 가슴이 뜨겁다가 머리까지 뜨거워지면 큰일이요, 이지 방면의 머리는 발달되고 연구는 많으나 생명의 신비 체험이 없는 학자들은 너무나 냉랭한 말라빠진 교리만 붙잡고 있어 생명의 신앙은 사막이 되고 현대 교회는 고목이 되지 않는가? 열심 내어 회개하라.

전도는 기독도를 위로하고 다시는 곁길로 가지 말라고 신신 부탁하고, 좁은 길로 가는 길을 다시금 분명히 가르쳐 주고 흔연(欣然)히 작별하였다.

⊙ 재차 사명의 사랑

당신의 택한 사람을 위하여 자주 전도를 보내심은 "주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더라"는 말씀 그대로이다.

엘리야가 사명에 낙심하고 호렙산 동굴에 있을 때 재차 사명을 주시고, 요나가 불순종하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 여호와께서 다시 나타나서 재차 사명을 주시고, 세 번이나 주를 모른다 하고 떨어져 3년 전 내버린 그물을 다시 가지고 3년 전에 떠났던 갈릴리 바다에 나간 베드로를 다시 찾아 새 사명을 주신 주님의 사랑에 아직 감복하지 않는 자야 어찌 사람이라 할까!

하나님은 사랑일세

죄악에 타락된

우리까지 사랑하니

참사랑 아닌가

11. 좁은 문을 두드림(마 7:13;요 10:9)

기독도는 전도와 작별하고, 이제는 누구에게나 말도 하지 않고 누가 물어도 대답도 하지 아니하고, 이전에 잘못만 걱정하면서 급한 걸음으로 좁은 문만 바라보고 가다가 좁은 문에 다다르니 그 위에 간판이 있는데 "문을 두드리라. 또한 열어 주실 것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감사에 넘쳐 한 곡조 불렀다.

장망성에 살던 죄인 도망하여 나왔도다

좁은 문을 두드리며 사는 길을 바라도다

구세주의 인휼하심 바른 길로 인도하네

큰 은혜를 찬송하니 노랫소리 높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