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학, 나의 길

전성용 박사(아버딘 대학, 조직신학)

 

머리말

나의 신학적인 관심은 성령론적 신학을 지향하고 있다. 성령론에 대한 나의 관심의 배경은, 나의 개인적인 신앙의 형성이 성령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리고 한국교회의 발전에 성령운동이 크게 영향을 끼친 점과 더 나아가서 20세기에 일어난 오순절 운동에 대한 신학적인 관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의 기독론적 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성령신학이 요청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론은 아직까지 구호만 있고 틀이 없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성령신학자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성령론적 신학은 앞으로의 과제이다. 지금까지 서양신학에서 삼위일체론적 신학 또는 기독론적 신학을 구축해 왔는데, 이제 성령신학이 수립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전 세계적으로 높아가고 있다. 이러한 신학적인 목표와 함께 나는 우리 교단의 신학적인 뿌리인 요한 웨슬리의 신학, 그리고 칼 바르트의 신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걸어 온 나의 신앙과 신학의 길을 더듬어 봄으로써 나의 신학적인 사고의 내용을 진술하는 것이 이 글이 목표하는 바를 이루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 신앙의 형성

나는 1949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장로 아버지와 권사 어머니의 2남 3녀 중 네 번째로 태어나서 경건하고 복음적인 분위기에서 자랐으며,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에 출석하였다. 초등학생 시절에 교회학교 선생님이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간다는 말을 듣고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면서, 지옥에 가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나는 천국에 갈 자신이 없었다.

나의 부친(전삼진 장로)은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성결교회(홀리네스 교단)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되었고, 당시 일본에 와 있던 예수 믿는 처녀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 한국에 복음을 전하고자 귀국하여 평신도로서 교회를 섬겼다. 1943년 성결교회가 일제의 박해를 받던 중 200여명의 교회지도자들이 구속되었는데, 당시 마산에서는 은희봉 목사와 함께 부친이 평신도 대표로서 구속되어 수개월 간 경찰서에서 지냈던 경험이 있었다. 부친은 평신도 대표로서 여러 가지 교회회의에 참석하였으며, 교단의 여러 어른들에 관하여 말씀하였기 때문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성결교회의 사정을 듣게 되었고, 자연히 성결교회에 대해 친숙하게 되었다. 특히 이성봉 목사님의 순회전도 천막집회는 감동적이었으며, 초등학생이었을 때 이성봉 목사님의 안찰을 받은 적이 있다. 그리고 이명직 목사님의 성결한 모습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여러번 들었다.

1965년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중 어떤 교회의 철야 기도회에 참석하면서 나의 신앙은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철야 기도회에 참석한지 삼일 째 되던 날 방언기도를 하게 되었고, 그 이후 여러 부흥회에 참석하면서 구원의 확신과 성령세례를 받게 되고 계속해서 은혜생활을 하면서 신앙이 성장해 갔다. 당시에는 매일 성경을 수십 장씩 읽고 새벽기도회에 나가 2시간씩 기도하였다. 고등학교 3학년때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희미하나마 앞으로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대학을 졸업한 후 신학교로 가기로 하였다. 신학교에 가기 전에 좀 더 공부를 하고 싶었다.

2. 신학수업 시기

1968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는데, 4년간의 대학생활은 많은 배움과 함께 많은 방황의 시절이기도 했다. 철학을 통하여 서양의 여러 학자들의 사상을 접하게 되어 깊은 사색적인 삶의 오묘함을 맛보고 신비한 동양사상을 배우는 것도 즐거웠다. 논리학도 재미가 있었고, 특히 니이체와 키에르케고르의 책들을 재미있게 읽었다. 사실은 철학책보다도 세계문학전집을 더 재미있게 읽었다. 그러나 철학은 논리적인 정합성(consistency)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의 이성을 즐겁게는 하였으나 나의 영혼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나의 영혼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성령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지식이 주는 즐거움은 항상 제한적이고 허무하였다. 나의 영혼은 궁극적인 해답을 들었기 때문에 비본래적인 것들의 한계를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학생활은 즐겁고 보람있는 일도 많았지만, 방황과 혼돈의 시간이 많았다. 그것은 또한 영적인 투쟁의 시간이기도 했다.

1972년 나는 마음 속으로 계획하였던 대로 아현동에 있던 서울신학대학의 본과(B.D. 과정)에 입학하였다. 신학대학에 다니면서 나의 신앙적 지식이 점점 명료해져 갔으며, 특히 정진경 목사의 조직신학과 조종남 학장의 웨슬리 신학 강의는 나의 신학의 기초를 놓아주었다. 내가 속한 성결교회의 신학적 뿌리인 웨슬리 신학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응답을 조화시킨 우수한 신학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선행적 은총론과 성화론은 웨슬리의 독창적인 신학으로서 우리 교회의 귀중한 신학적 보화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웨슬리 신학을 더욱 발전시켜 우리교단의 신학적 기초를 견고히 해야 할 것이다.

     

정진경, 조종남 교수는 나의 신학의 기초를 놓아주었다.

1976년에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학과에 입학하면서 나는 칼 바르트와 만나게 되었다. 당시 박봉랑 교수로부터 처음으로 칼 바르트를 소개받았으며, 박순경 교수와 김균진 교수, 김광식 교수의 조직신학 강의들을 통해서 나의 신학적 입장이 정리되어 갔다. 그리고 김중기 교수의 기독교 윤리학 강의는 조직신학과 직접 상관이 없었지만, 신학과 신앙이 융해된 모델로서 은혜스러운 강의였다. 한태동 교수의 강의를 통해서는 책 속에 있는 저자의 사고의 틀을 추출해내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이것은 앞으로 나의 학업을 위해 대단히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문상희 교수의 신약강의와 박준서 교수의 구약강의는 성서를 새롭게 보는 안목을 열어 주었다.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논문으로 "칼 바르트의 인간론"을 썼다.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II/2를 읽고 정리한 것으로서, 칼 바르트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얻게 되었다. 칼 바르트의 인간론은 기독론적 인간론이다. 하나님의 계시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요 참 인간으로서, 인간 일반이 닮아야 할 인간성의 원형(archetype)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본래적 인간성이란 하나님을 위한 인간과 이웃을 위한 인간인데, 첫째로, 하나님을 위한 인간성이란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종해야 하고, 둘째로 이웃을 위한 인간성이란 인간은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랑의 관계는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 안에서 성부와 성자가 맺고 있는 원초적인 삼위일체의 관계와 유사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 야웨와 이스라엘, 그리스도와 교회, 남자와 여자, 나와 너, 주체와 객체의 관계와 유사성을 가진다. 바르트는 이들 사이의 관계의 유사성을 '관계의 유비'(analogia relationis)라고 하였다.

1980년에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하였으며, 1981년부터 서울신학대학에서 시간강사로 강의하기 시작했다. 1982년부터 경기도 용인군의 원삼 교회에서 단독목회를 하였다. 주말의 교육전도사와 달리 단독목회는 매일 새벽기도와 심방과 구역예배 그리고 주일예배와 저녁예배 및 수요 저녁예배의 설교를 준비해야 되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다. 평균 일주일에 15회씩 설교를 하였다. 그러나 2년 간의 단독목회는 대단히 값진 경험이었다. 영적으로 깨어 있고 긴장된 시간이었으며,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는 신앙적인 연단과 훈련의 시간이었다. 나 자신의 신학이 구체적인 교회의 삶의 현장을 떠날 수 없는 현실적인 신학이 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추상적인 이론으로부터 현실적인 삶 속에서 형성되는 신학이야말로 설득력과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1984년에 서울신학대학교의 전임강사가 됨으로써 나는 신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을 전업으로 삼게 되었다. 그 동안 조직신학, 현대신학, 종교철학, 인간론, 바르트 신학, 성령론, 성례전론, 교회론, 삼위일체론 등의 과목을 강의하였다. 1987년에는 『기독교 신학개론』(서울:대한기독교 교육협회)을 출판하였다. 이것은 조직신학의 강의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하였다.


3. 영국 유학생활

1992년 나는 영국 아버딘 대학교(Aberdeen University)에 유학을 가서 데이빗 퍼거슨(David Fergusson)교수의 지도로 "칼 바르트의 성령론적 세례론" (Karl Barth's Pneumatological Doctrine of Baptism)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하였다. 나는 연세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였으나 영국에서 끝내게 되었다. 나의 박사학위 논문에서는 두 가지 점을 주장하였다. 첫째로 지금까지 학자들의 일반적인 이해에 의하면 바르트의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시대→변증법적 신학시대→아날로기아 신학시대의 3단계로 발전했다고 주장되고 있는데, 나는 이것을 발전시켜 아날로기아 신학의 단계가 다시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고 하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자유주의 신학시대→변증법적 신학시대→기독론적 신학시대→기독론적 성령론적 신학시대로 발전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둘째로 1943년에 쓴 『교회의 세례론』에 나타난 바르트의 세례론은 기독론적 세례론이라고 할 수 있으나, 1967년에 쓴 『교회 교의학』 IV/4에서는 성령론적 세례론으로 발전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 신학의 발전과정과 세례론의 발전과정은 양립되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

 

칼 바르트 : 칼 바르트의 성령론적 세례론

1,500년의 기독교 역사를 가진 영국에서의 유학생활은 나의 신학과 신앙의 발전을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오랜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다져진 성숙한 기독교 신앙은 깊은 감동을 주었으며, 한편 교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영국교회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한국교회의 나아갈 길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Newsweek의 보도에 의하면, 지난 20년 간 성공회교인이 150만명에서 100만으로, 감리교회가 13,000에서 7,000으로 감소하였다. 영국교회가 영국사회를 성숙한 선진사회를 만드는 데 공헌했으면서도 교회가 활력을 잃어버리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은 앞으로의 한국교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한국교회가 양적인 성장에만 집중하기보다는 깊은 영성을 가지고 도덕적으로나 지성적으로 성숙한 교회가 됨으로써, 마르지 아니하는 영감을 퍼 올릴 수 있는 영적인 생명력의 원천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쇠퇴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우리의 과제는 영성 대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영국의 신학계의 높은 수준에 대해서 우리는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교수들의 강의의 수준이나 신학자들이 쓰는 책이나 논문들의 학문적인 수준은, 우리 나라와 비교할 때, 대단히 앞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특히 나의 논문을 지도해 준 퍼거슨 교수의 학문적인 능력은 감탄을 금할 수 없게 하였다. 그는 나의 오류를 지적해 주었고, 나의 생각을 정확하게 간파하여 올바른 길로 인도해 줌으로써 나의 논문이 빠른 속도로 진척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그리하여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학위를 마치게 되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미 Bultmann, London: Geoffrey Chapman, 1992; The Creator and the Cosmos, London: SPCK, 1998; Moral Philosophy and Christian Ethic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forthcoming) 등을 저술하였다. 나는 퍼거슨 교수의 저서 가운데서 『불트만』(서울신학대학교 출판부, 1998)을 번역 출판하였다. 퍼거슨 교수의 이 책은 불트만을 온건하게 해설한 입문서로서 신학생들이 쉽게 읽을 수 있다. 불트만의 사상이 지나치게 자유주의에 가까운 문제점들이 있지만(불트만을 자유주의 또는 신자유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는 바르트와 함께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두 사람의 신학자로 간주되는 불트만을 비껴갈 수는 없다. 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를 정면 돌파해야 할 것이다. 그를 비판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를 알아야 한다.

불트만을 비껴갈 수는 없다.


4. 나의 신학적 입장

나는 지금까지 웨슬리의 신학과 칼 바르트의 신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한국교회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성령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성령운동은 나 자신의 신앙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하비 콕스의 『영성, 음악, 여성』(동연, 1996)에서 성령운동의 사회적, 역사적 함의가 잘 분석되었다. 성령운동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칼 바르트는 앞으로의 신학은 성령신학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교회교의학』 IV/1 이후 성령의 역할과 지위에 대해서 크게 강조하였으나 기독론적 신학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바르트는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해하였는데, 이것은 서방교회의 전통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며, 성령을 인격적 주체로서 이해하는 삼위일체론적 성령론이 수립되어야 한다. 몰트만의 말과 같이 성령론은 아직까지 구호만 있지 새로운 틀(패러다임)에 이르지 못하였다. 20세기에 일어난 성령운동의 내적인 의미, 즉 하나님의 구속사의 전개로서의 성령의 존재와 역할을 증명하는 신학이 정립되어야 한다. 성령을 창조자요 주님이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성자시대를 이어서 교회시대를 주관하는 성령시대의 주관자로서, 성령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친교 안에서 이해하는 성령의 통전적 이해가 필요하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관심사일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관심사는 웨슬리 신학과 바르트 신학의 만남이다. 웨슬리와 바르트는 얼핏 보기에는 서로 상관이 없는 것 같이 생각되지만, 그 내용에서 상당히 유사한 점들을 살펴볼 수가 있다. 두 사람 다 은총의 신학자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인간의 응답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이 인간의 응답하는 자유는 웨슬리에게서는 선행적 은총에 의해서 주어지며, 바르트에게서는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다. 웨슬리와 바르트의 만남은 성결교회의 신학의 정립을 위해서도 대단히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화론을 통해 웨슬리와 바르트는 만날 수 있다!

그 동안 말씀을 강조하는 장로교회와 함께 체험을 강조하는 성결교회는 한국교회의 한 신앙유형으로서 자리매김을 해왔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순복음교회가 체험을 강조하는 교회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였으며, 성결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있는 것 같다. 한국교회를 지도할 수 있는 신학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과거의 뜨거운 신앙적 전통이 강화된 것도 아니다. 이것은 성결교회의 위기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복음주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세계적인 신학적 토론에 가담함으로써 성결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을 밝히는 것이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신학적인 과제라고 하겠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