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다케(Didache)의 구조연구

 

                                       

 

 

머리말

 

필자는 1996년에 서울신학대학교에서 발간한 <교수논총> 제7집(pp. 145-155)에 "디다케(Didache)의 구조연구"라는 연구논문을 게재하였다. 그 논문은 성서 이후 기독교의 최초의 문서인 디다케의 구조와 갈라디아서의 구조를 비교한 것이다. 그 논문에서 필자는 갈라디아서의 내용과 그 구조는 믿음과 복음이고 디다케의 내용과 그 구조는 행위와 율법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초대교회가 본래의 복음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구약종교의 율법주의로 회귀하게 된 것을 증명하고 이것을 거울삼아서 한국교회가 미래를 위한 대비를 해야한다고 촉구하였다.

        이 논문은 그 후속편이면서 그 논문을 수정 보완하는 증보판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발견한 갈라디아서의 새로운 내용을 구조적으로 분석하여 한국교회의 성숙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립하기 위하여 하나의 모티브를 제기하고자 한다. 먼저 96년에 쓴 논문을 전재한 다음에 마지막 제 V장에서 새로운 갈라디아서 이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I. 서론

 

디다케(Didache)는 성서이외에 기독교회의 가장 오래된 문서이다. 즉 1세기 말의 요한문서 이후에 쓰여진 문서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고대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자료이다. 디다케 혹은 "12사도의 교훈"1)이라고 불리워지는 이 문서의 저작연대를 제베르크(Seeberg)는 2세기 초로 추정하고 있으나 하르낙(Harnack)은 A.D. 120년에서 165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다.2)

        이 논문에서 필자는 기원 2세기에 쓰여진 이 고대문서가 교회가 창립된 지 불과 100년만에, 마지막 성서가 집필된지 불과 반세기만에 그 내용에 있어서 신약성서와 비교하여볼 때 얼마만한 괴리가 일어나고 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우선 디다케의 내용을 분해하여 그 사고구조를 파악한 다음에 신약성서 가운데서 특별히 믿음을 강조하였으며 그 분량이 디다케와 비슷한 갈라디아서의 내용을 분해하여 그 구조를 도식화하고, 이 양자를 비교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 양자 사이에서 발견되는 신학적 차이점을 규명하고 이러한 차이점이 오늘 현대 교회에 시사하고 있는 교훈과 의의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교회의 문서는 죽은 문자가 아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증언하는 살아있는 교훈의 목소리를 청종할 때만이 교회가 다시금 새롭게 자신을 반성하고 개혁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II. 디다케의 내용분해

 

디다케의 내용중 문제가 되는 구절들을 예를 들어서 다음과 같이 분석해 보겠다.

 

<예문 1>

        만약 누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 만약 누구든지 너의 속옷을  가지고자 하거든 겉옷까지도 주어라.3)

 

<예문 2>

        율법을 따라서 주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는 죄가  없음이라. 받는 자는 화가 있을찐저. 그가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면 무죄하거니와 받아야 할 필요가 없으 면서 받는 자는 왜 무엇 때문에 받았는지에 대해서  형벌을 받을 것인바 옥에 가두어서 그가 행한 것에  대해서 조사를 받고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놓여나지 않을 것이다.4)

 

위에 든 예문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분해하여 기호화 할 수 있다.

 

<예문 1>5)

        

        오른뺨·왼뺨=(x)·(x)=(x)²

        오리·십리=(y)·(y)=(y)²

        속옷·겉옷=(z)·(z)=(z)²

 

이상의 기호화된 내용을 단순화시키면 아래와 같이 된다.

 

        (x)²,(y)²,(z)²....

        =(X)²

 

<예문 2>

        (받을 필요)·(받으면)=무죄

        (∼받을 필요)·(받으면)=형벌(∼무죄)

 

위의 내용을 기호화하면 다음과 같다.

 

        (x)·(x)=(x)²

        (∼x)·(x)=∼(x)²

 

위의 식과 아래의 식을 통일시키기 위해서 아래의 식의 양변에 각각 마이너스(∼)를 곱해주자.

 

        ∼[(∼x)·(x)]=∼[∼(x)²]

                    =∼∼(x)²

                    =(x)²

                    =(X)²

 

위와 같이 예문 1과 예문 2를 각각 기호화한 결과 디다케의 내용을 이루는 기본적인 사고구조는 (X)² 즉 믿음과 사랑이 아니라 율법과 심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것은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는 인과율적이고 조건적인 사고방식이다. 악을 행한 사람은 형벌을 받아야 하고 선을 행한 사람은 복을 받아야 된다는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의 이성과 도덕에 부합되는 사고이다.

        이러한 필자의 논증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더 많은 예문들을 제시함으로써 위의 주장을 견고히 하고자 한다.

 

<예문 3>

        음식물에 관해서는 네가 할 수 있는 한 견디라. 그런  우상에게 바친 제물에 대해서는 철저히 너를 지킬지니 그것은 죽은 신들에게 바친 것임이니라.6)

 

<예문 4>

        너희 금식이 위선자와 같지 않게 하라. 그들은 매주  둘째와 다섯째날에 금식하나 너희는 넷째와 예비일(금요일)에 하라. 주님께서 명하신 것처럼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매일 세번씩 이렇게  기도하라.7)

 

<예문 5>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자 이외에는 아무도 성만찬을 먹거나 마시지 않게 하라. 이와 관련하여 주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고 하셨다.8)

 

<예문 6>

        너에게 오는 모든 사도는 주님처럼 영접하라. 그러나  그는 단 하루만 머무를 것이며 만약 그에게 필요하다면 그 다음날도 대접하라. 그러나 그가 사흘을 머무른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이다....만약 그가 돈을 요구하면 그는 거짓 선지자이다....어느 누구라도 성령으로  말하기를 돈을 달라 하거나 다른 무엇을 달라고 하면  너는 그를 듣지 말라.9)

 

<예문 7>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자는 누구나 영접하라...그러나 필요한 이 삼일 이외에는 그를 너와 함께 머물러 있게 말라.10)

 

<예문 8>

        다른 사람에게 나쁘게 행동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가  회개할 때까지는 아무도 말하게 하지도 말고 그가 너희로부터 듣게 하지도 말라.11)

 

지금까지 유사한 내용을 함축한 8개의 예문들을 예시하였다. 이 예문들은 똑같은 사고구조를 가진 구절들로서 위에 제시한 <예문 1>과 <예문 2> 처럼 분해되어 기호화 될 수 있다.

        이상의 예문들에 대한 구조분석을 통해서 디다케의 근본사상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디다케는 두 가지의 길 곧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제시하여 생명의 길은 사랑이요, 사망의 길은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자기 희생적인 기독교의 사랑이 아니라 행위에 의한 자기의(義)를 주장하는 율법주의에 머무르고 말았다. 그것은 조건적이고 타산적인 사랑이지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이 아니다. 그리하여 결국 디다케는 비율법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정죄와 심판을 촉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디다케의 근본사상은 기독교의 복음적인 용서와 사랑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유대교의 율법주의로 변질 내지는 퇴보했다고 할 수 있다.

 

III. 갈라디아서의 내용분해

 

갈라디아서는 A.D. 53-55년에 쓰여진 바울의 편지로서 디다케와는 시간적으로 100년 미만의 거리에 있는 문서이다.12) 그러면 율법과 믿음을 대조하여 믿음을 강조한 갈라디아서의 내용을 분해해 보자.

 

<예문 1>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만이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방인들로 믿기만 하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해 주시리라는 것을 성서는 미리 내다 보았습니다.13)

 

위의 구절의 내용을 분해하면 다음과 같다.

 

        이방인(∼아브라함의 자손)·믿으면⊃구원

                (∼x)             ·(x)

                =∼(x)²

        =∼(X)²

 

이 예문을 디다케의 <예문 5>와 비교해 보자.

 

        (∼세례를 받은자)·(∼성만찬)

        =∼(x)           ·∼(x)

        =∼∼(x)²

        =(x)²

        =(X)²

 

즉 디다케의 기본구조는 (X)²곧 율법주의이며 갈라디아서의기본적인 사고구조는 ∼(X)²즉 율법의 정반대인 복음과 믿음이다. 갈라디아서의 복음주의가 디다케에 이르러서는 정반대인 율법주의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더 많은 예문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예문 2>

        우리는 본래 유다인이고 이른바 이방죄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는 길이 율법을 지키는데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갈 2:15,16a).

 

<예문 3>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         2:20).

 

<예문 4>

        여러분들은 율법을 지켜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갈 3:2).

 

<예문 5>

        성서에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꾸준히 지키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율법을 지키는 것에 의존하는 사람은 언제나 저주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율법을 통해서는 아무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갈 3:10).

 

IV. 결론

 

지금까지 디다케와 갈라디아서의 내용을 분해하여 기호화함으로써 양자의 사고구조를 극명하게 대조할 수 있었다. 갈라디아서와 디다케는 그 분량에 있어서는 서로 비슷한데도 갈라디아서에는 '믿음'이라는 어휘가 24회 사용된 반면에 디다케에서는 단 2회만이 사용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중의 1회도 시련을 견디는 인내의 행위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디다케의 구조는 율법의 구조 즉 옳은 것은 옳고 틀린 것은 틀리다 라고 하는 폐쇄적이고 고착적인 윤리를 그 사고의 틀로 삼고 있으며 이것은 인간의 행위로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믿음으로써 구원과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갈라디아서의 복음의 구조와는 근본적으로 상이하다고 하겠다. 디다케와 갈라디아서의 사고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비교하여 도식화할 수 있다.

 

        <디다케>                      <갈라디아서>

           |                                     |

        율법     --------------    복음

        합리적   --------------    불합리(absurd)

        조건적   --------------    무조건적

        타산적   --------------    희생적

        정의     --------------    사랑

        도덕     --------------    종교

        행위     --------------    믿음

 

우리는 디다케의 내용을 통해서 당시 교회가 당면하였던 교회 안의 윤리적 문제들을 살펴볼 수 있다. 선지자라는 이름으로 교회와 신자들을 방문하여 오랫동안 기거하며 돈을 요구하는 행위나 외적인 기도와 경건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빚어지게 된 교회 안의 난맥상 및 기타 음식물과 금식, 성만찬 참여자격 등의 문제들에 대해서 당시 교회에 의하여 정리된 지침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교훈들은 당시 교회 안에 횡행했던 복음에 편승한 몰지각한 파렴치한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대응전략 내지는 생활지침으로서의 의의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비윤리적 행태들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응답치고는 너무나 저급한 수준의 대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의 응답과 대응은 그것이 복음적인 자기희생의 숭고한 아가페적 사랑의 정신으로 하지 않을 때 교회의 고유한 윤리적 권위와 우월성을 확보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디다케는 비윤리적 행태들의 도전에 대해서 비복음적이고 율법적인 경직된 응답을 제시함으로써 당시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난맥상과 함께 이러한 문제에 대한 교회의 대응의 윤리적 저열성을 폭로하고 말았다. 따라서 디다케는 신약성서의 복음의 숭고한 정신으로부터 크게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의 순수성이 그토록 짧은 시간 안에 그렇게도 엄청나게 변질될 수 있다는 역사적 사례를 보게 된다. 우리는 선교 110년을 맞이한 한국교회가 성서적 복음의 순수성을 견지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긴장된 각성과 치열한 자기 변혁을 요구하는 과제인가에 대한 경종을 다시금 세차게 울려야 할 것이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초대교회 당시 바울과 야고보를 비롯한 보수파 사이에 갈등과 투쟁이 있었다.14) 그렇다면 고대교회 안에는 율법주의적인 색채가 강한 전승이 있었을 것이며 이러한 전승이 디다케에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우리는 디다케가 쓰여졌던 역사적 배경을 밝힐 수는 없으며 이것은 성서 안에 나타난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 즉 예수와 야고보의 교훈 및 바울의 교훈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을 구조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어느 정도 접근할 수 있다고 본다. 이 문제는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IV.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두 가지 행위

 

       우리는 "디다케의 구조연구"에서 디다케와 갈라디아서의 본문에 나타난 사고의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디다케의 율법의 틀에 대조되는 갈라디아서의 복음의 틀을 찾아내었다. 그리하여 기독교가 복음을 잃어버리고 율법으로 변질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하는 것이 구조적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는 단순히 복음과 믿음에 대한 강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에 대한 강조와 함께 우리의 행위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이해가 혼용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논거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장에서는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두 가지 행위를 분석함으로써 종교개혁이후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안고 있는 신앙과 행위의 화해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율법의 행위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와 믿음을 대조하였다. 갈라디아서 3장 2절에서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하였으며, 3장 5절에서는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행위와 믿음은 양자택일(either∼or)의 관계에 있다. 즉 행위와 믿음은 율법과 복음, 육체와 성령이라고 하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 대립의 관계(contradictory relation)에 있다. 이러한 모순 대립의 관계를 진술한 본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가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갈 4:24-29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지금까지 예를 든 여러 예문들은 다음과 같은 이분법으로 그 내용을 구별하여 도식화 할 수 있다.

 

 

        시내산 ----------------    예루살렘

        하갈   ----------------   사라

        이스마엘---------------    이삭

        율법   ----------------   복음

        종     ----------------   자유인

        육체   ----------------   성령

        행위   ----------------   믿음

        저주   ----------------   복

        인간   ----------------   하나님

        악     ----------------   선

 

       이것은 바울의 율법과 복음의 도식으로서 이 경우에 행위는 인간적이고 율법적이고 죄악적인 것이요 그래서 버려야 할 유기의 대상이다. 즉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이나 자기의로써 구원받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서 인간의 행위나 노력과 상관없는 인간을 초월하는 신적인 차원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이분법은 논리적으로 선언명제(alternative proposition)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 A or B)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둘은 모순 대립의 관계이며 양자택일의 관계이다.

 

        2. 성령의 행위

 

       둘째로, 갈라디아서 5장에서 우리는 갈라디아서 3장에 나타난 행위와 전혀 다른 제 2의 행위에 대한 바울의 진술을 만나게 된다. 예컨데 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The only thing that counts is faith expressing itself through love)"에서는 믿음뿐만 아니라 믿음에 동반되어야 할 사랑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에서의 행위는 인간의 율법적인 행위인 반면에 갈라디아서 5장에서의 행위는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는 행위이다. 물론 근원은 서로 다르지만 그러나 둘 다 인간의 행위를 가리키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혼란에 빠질 위험이 있다. 갈라디아서 3장의 행위를 율법의 행위로, 갈라디아서 5장의 행위를 성령의 행위로 구별할 수 있다. 성령의 행위를 가리키는 예문들을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갈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갈라디아서 5장의 행위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는 행위이다. 율법의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와 상관없는 자연인의 행위요 그것은 구원받는 믿음과 상관없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그 행위는 양자택일의 논리에 의해서 거부되어야 할 행위이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5장의 행위는 신앙인의 행위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의 행위는 거부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강조되어야 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바울은 여기에서 양자택일의 명제가 아니라 양자긍정의 명제를 사용하였다. 여기에서 사용한 바울의 논리는 이것도 저것도(both A and B) 즉 이중긍정, 양자긍정의 논리이다.

        이 양자긍정의 논리는 이미 우리에게 친숙한 성서의 논리이다. 예수께서는 여러 차례 이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규범을 해명하였다. 그는 특히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사도바울과 같이 양자택일의 논법으로 해명하지 아니하고 양자긍정의 논법으로 해명하였는데 우리는 이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예컨데 십일조와 사랑의 관계를 설명하신 경우에 그는 이것도 버리지 말고 저것도 취하라고 하였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눅 11:42, 마 23:23). 이것은 "이것도 저것도"(both∼and) 즉 양자긍정의 논리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와 같은 논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마 7:16-18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리라.15)

        

        마 5:17, 18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16)

 

        마 12:33, 35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마 22:17ff.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17)

 

        마 25:37ff.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18)

 

       갈라디아서 3장에서의 행위는 율법과 믿음 사이의 양자택일의 논리였으나 갈라디아서 5장에서의 행위는 성령 안에서 믿음과 행위가 양립해야 한다는 양자 긍정의 논리이다. 양자택일의 논리는 하나님과 하나님 아닌 것 사이의 갈등과 대립을 해명하는데 유효한 논리이다. 절대적인 하나님과 상대적인 피조물은 양립할 수 없다. 절대적인 하나님과 하나님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이 감히 하나님과 대립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인간의 율법적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믿음과의 사이에서 양자택일의 관계에 있으며 이 양자택일의 논리에 의해서 배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양자택일의 논리가 타당하다.

        반면에 갈라디아서 5장에서의 양자긍정의 논리는 하나님 한 분의 은혜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믿음과 행위는 둘 다 하나님 한 분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둘 다 긍정되어야 하는 양자긍정의 논리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지 어느 하나라도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자택일의 논법과 양자긍정의 논법을 둘 다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나간 500년간의 개신교회의 역사는 양자택일과 양자긍정 사용에 혼선을 빚은 역사였다. 갈라디아서 3장과 갈라디아서 5장의 혼동의 역사였다. 바울과 예수 사이의 혼동의 역사였다. 때로는 갈라디아서 3장을 때로는 갈라디아서 5장을 적절하게 적용해야 하는데 지나치게 갈라디아서 3장에 집착함으로써 조화와 균형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 결과 개신교회는 믿음은 강조하였으나 행위는 약화되고 말았다. 믿음과 행위를 양자택일의 관계로만 이해한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의 표어 가운데 "오직 믿음"(sola fidei)이 있다. 이것은 마틴 루터가 주장한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의 교리를 표어화 한 것이다. 루터의 이 사상은 갈라디아서 3장의 양자택일의 논리를 신학화 한 것이며, 로마서 1장 17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를 표어화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서 안에서 그 어디에도 "오직 믿음으로"(faith alone) 라는 말을 찾을 수 없다. 로마서 1장 17절에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지니"(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오직 믿음"이라는 표현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오직 믿음"의 표어는 과장된 것이다. 왜냐하면 마틴 루터 자신도 결코 오직 믿음을 가르치거나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9) 사도바울도 갈라디아서 3장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분명히 갈라디아서 5장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도바울의 균형잡힌 가르침을 교회가 재인식해야 한다. 교회가 갈라디아서 3장만 보고 갈라디아서 5장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교회의 실수이다. 더 나아가서 야고보서 2장 24절에서 야고보 사도는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A person is justified by what he does and not by faith alone)이라고 명백히 교훈하였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5장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하며 이것은 당연히 예수의 양자긍정의 논리의 연장으로 해석해야 한다.

 

맺는말

 

    지나간 500년간 개신교회는 복음과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였다. 잘하였다. 그리하여 선교의 열정, 성령세례의 역사, 교회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 대신 교회는 행위가 없는 믿음, 열매가 없는 나무, 알맹이가 없는 죽정이가 되는 결과도 함께 가져왔다. 소위 도덕무용론으로의 경향성이 전체 개신교회 안에 암암리에 퍼져 있다. 그래서 우리 개신교회는 윤리적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문제의 원인 가운데 하나를 갈라디아서 3장의 일방적인 강조, "오직 믿음"이라고 하는 비성서적 구호 등에서 찾게 되었다. 이제 교회는 21세기를 맞이하면서 더 이상 이러한 오류를 반복해서는 안된다. 갈라디아서 3장과 갈라디아서 5장의 양자긍정의 논리가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 예수와 야고보의 논리가 율법과 복음을 함축하는 보다 균형있고 원숙한 논리인 반면에 갈라디아서 3장과 종교개혁의 오직 믿음(sola fidei)의 논리는 율법과 복음을 모순 관계로 보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와 혼선을 야기하였던 점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신앙과 행위는 결코 양자택일의 관계로 완전히 설명될 수 없는 관계임을 인식하고 이것을 교회 안에서 적극적으로 가르쳐야한다. 이러한 인식과 훈련을 통해서 교회는 앞으로 성숙한 교회, 열매맺는 나무가 되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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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e Teaching of the Twelve Apostles in The Ante-Nicene Fathers Vol. VII (Grand Rapids: Eerdmans, 1886), 369-383.

2) Realencyklopaedie Für Protestantische Theologie und Kirche Ed.  by Harnack Vol. I, 713; J. L. Neve, <기독교교리사>, 서남동역(서울: 대한기독교서회), 73 재인용; 최근의 자료에 의하면 디다케의 저작연대를 A.D. 80년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J. Stevenson, A New Eusebius (London: SPCK, 1992), 375.

3) The Teaching of the Twelve Apostles, 377. 마태복음 5장 38절 이하에서 예수께서 이 본문을 선포하였을 때 그것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오른뺨, 오리, 속옷은 율법적인 요구 즉 당시의 일반적인 도덕적, 법적인 관행이었으며, 정복자 로마군인들이 유대인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요, 피정복자 유대인들이 수행해야 하는 의무였다. 그러나 예수의 윤리는 율법을 넘어서는 사랑의 윤리였다. 희생과 봉사를 통한 율법의 극복이었다. 그런데 디다케에서 사용된 똑같은 본문은 문자적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그 내용과 맥락(context)에서는 율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예문 2>에서 "율법을 따라서...."로 시작되는 구절이 증명한다.

4) Ibid.

5) 디다케에서 오른뺨과 왼뺨, 오리와 십리, 속옷과 겉옷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단지 양적 차이 내지는 종류와 양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마태복음 5장에서는 이 양자 사이에는 근본적인 질적 차이가 있다.

6) Ibid., 379. 사도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 모든 음식을 깨끗하다 하였으며 예수도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였다.

7) Ibid., 둘째와 다섯째는 유대인의 금식일이며, 넷째와 예비일은(마 27:2) 배신일과 장사일로서 사도적 제정(apostolic constitution)에서 나왔다. 예수는 외식적인 금식을 반대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당부하였으나 다다케는 단지 금식일의 변경만을 요구함으로써 유대교와의 질적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8) Ibid., 380. 막 7:26ff, 마 15:21ff.에서 예수는 가나안 여자에게 이 말을 하였으나 예수의 의도는 이방여인을 시험하기 위함이었으며 결국 예수는 그 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라는 말씀으로 맺고 그를 치료하였다. 따라서 성서 본문을 성례전적 본문(sacramental text)이라고 할 수 없다.

9) Ibid.

10) Ibid., 381.

11) Ibid.

12) 김 철손 외 공저, <신약성서개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35.

13) <공동번역성서>(서울: 대한성서공회, 1977), 360. 갈 3:6-8. 공동번역이 본문의 내용을 분해하는데 더 정확하기 때문에 필자는 여기에서 공동번역을 사용하였다.

14) 김 연태, <바울해석>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 231ff.

15) 믿음과 행위를 나무와 열매의 관계로 설명함으로써 믿음과 행위를 모순관계로 보지 아니하고 양립의 관계로 설명하였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모순 대립과 양자택일에서 오는 긴장과 갈등이 없다. 물흐르듯하는 자연스러움이 있다. 예수의 성숙하고 세련된 사고의 단면을 볼 수 있다.

16) 바울은 율법과 복음을 모순 대립의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와 성령에 의한 믿음의 관계를 양자택일의 관계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율법과 복음을 공존의 관계로 보았으며 자신을 율법의 완성자로 제시하였다. 즉 구약과 신약을 약속과 성취의 관계로 해석한 것이다.

17)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은 국가에 대한 납세의무이고 성전에 성전세를 바치는 것은 교회에 대한 종교적 의무이다. 교회에 대한 종교적 의무와 국가에 대한 납세의 의무는 모순대립의 관계에 있지 않고 양립관계에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대한 의무뿐만 아니라 국가에 대한 의무도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

18)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눈에 보이는 형제는 사랑하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에 대한 사랑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19) 파울 알트하우스, <루터의 신학>(서울: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96), 275ff. "신앙이 없는 곳에는 또한 어떤 선한 행위도 없다는 것과 반대로 선한 행위가 없는 곳에는 어떤 신앙도 없다." "따라서 선행이 뒤따르지 않으면 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우리 마음 속에 거하지 않고 죽은 신앙이 분명하다." "열매가 없는 신앙은 효과있는 신앙이 아니라 조작된 신앙이다." 등 루터는 여러 곳에서 신앙과 행위의 양립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오직 믿음"을 루터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