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영성, 음악, 여성

 

(하비 콕스 지음, 도서출판 동연, 1996)

                                                

 

   

20세기초에 시작된 성령운동이 1세기가 지나기 전에 약 5억의 사람들을 성령운동교회의 교인이 되게 한 것을 볼 때 오순절운동은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p. 107, 18, 41). 콕스는 이 운동이 구라파와 북미에 국한된 기독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만드는 역할을 했다고 본다. 즉 기독교를 전 지구적인 종교로 만드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하비 콕스는 이 세계적인 운동의 창시자를 1906년 L. A.의 아주사 스트리트에서 성령운동을 시작한 윌리암 시모어라고 주장한다(p.221). 1900년에 이미 토페카에서 찰스 파햄의 베델 성경학교에서 아그네스 오즈만이라는 백인 여자가 방언을 한 사건이 있었지만 그러나 방언기도는 교회사를 통해서 계속되었기 때문에 방언기도만으로 이 운동의 기원이라고 볼 수 없다. 애주사 스트리트 부흥회 출신 선교사들이 미국 각지와 전세계로 퍼져나가 말씀을 전파함으로써 다음 세대에 크게 성장한 성령운동의 씨앗을 뿌렸기 때문에 아주사 부흥운동을 현대 오순절운동의 효시로 보아야 한다. 이 운동에 대한 호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하비 콕스는 20세기 오순절 운동을 사회학적이고 종교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운동에 대해서 보다 거시적이고 현상적인 이해를 하게 된다. 즉 오순절운동에 대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콕스는 그렇게 함으로써 오순절운동의 내적 의미를 밝히고 그것의 원동력의 근거를 파악하게 되고 기독교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할 수 있게 한다고 본다.

 

제1부: 성령운동의 역사

 

서론: 작은 교회와 거대 도시

 

하비 콕스의 출발점은 많은 신학자들이 예견하였던 하나님의 죽음 내지는 종교의 쇠락이 일어나는 대신에 왜 종교의 부흥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다. 지나간 25년간 기성교단들은 20-40%가 감소하였으나 오순절교회들은 두 배, 세 배가 부흥하였다는 사실이 그로 하여금 이 현상을 연구하게 하였다. (영국의 경우 지난 20년간 성공회는 150만에서 100만으로, 감리교회는 13000교회에서 7000교회로 감소, 그러나 가톨릭은 400만으로 증가) 그가 발견한 성령운동은 이제 전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으며(보편성 p. 27), 그 교회의 구성원들은 현대 도시의 평범한 사회인들이라는 것이다(도시성 p. 29). 그리고 그들의 교회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권위적 교리와 전통적 예배의 냉랭함에 반발하는, 기독교에서 가장 체험을 강조하는 교파이다(구체적, 경험적 p. 40). 그러나 콕스는 아직은 성령운동 본래의 정신에 충실한 면이 있지만, 어쩌면 그들이 성령운동을 유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하고 있다.

 

제1장 천년왕국의 도래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콜럼비안 세계 박람회에서 세계종교회의가 열렸는데 이것은 미국이 새로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20세기를 향한 원대한 꿈의 표현이었다. 이 세계 박람회는 미국이라는 한 나라가 강조된 제국주의적인 발상이었고, 백인우월주의의 인종차별의 한계를 가졌으며 종교간의 대화는 대화로 끝나고 연합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1894년의 화재로 박람회장은 사라지고 말았다. 인간중심주의의 허망한 종말이었다.

 

제2장 로스앤젤레스에 강림한 성령의 불길

 

1906년 4월 9일 로스앤젤레스 노스 보니 브래 애비뉴(North Bonnie Brae Avenue) 214번지 목조 단층집에서 기도하던 비천한 직업의 흑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였다. 그들의 인도자는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순회설교가 윌리엄 조셉 시모어(William Joseph Seymour)였다. 그들이 수주동안 함께 모여 기도했을 때, 혀 모양의 불길, 방언, 신유, 기타 표적들이 나타났다. 제 2의 오순절사건이후 근처 애주사 스트리트(Azusa Street)의 버려진 작은 교회를 임대했다. 당시 그 건물은 마굿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1906년 4월 14일부터 이곳에서 매일 집회를 가졌으며 3년간 계속되었다. (시모어는 1870년 루이지애나주 센터빌에서 노예였던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조용하고 겸허한, 그러나 추하고 단정치 못한 모습이었다. 그는 1922년 백인동료들의 조문을 받지 못한채 쓸쓸히 사망하였다. (p. 105)

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집회에 참석했는가? 개발의 꿈에 부풀어 희망을 안고 로스앤젤레스로 몰려든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악덕 부동산업자와 사기적인 도시계획 등으로 실망한 사람들, 산업성장의 중지로 야기된 취업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1907년에 몰아닥친 대공황 등으로 실의에 빠진 사람들이었으며 이렇게 빈곤한 사람들은 새로운 희망을 줄 대상에 갈급해 있었다. 시모어는 바로 그런 희망을 그들에게 제공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지금 새로운 역사를 인도하고 계시며 따라서 많은 이적과 기사들이 나타나 세계의 끝날이 다가옴을 입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종말론적 희망의 메시지를 그들에게 주었으며 이 메시지는 성령의 은사들에 의해서 입증되었다(p. 97).

 

제3장: 성령운동의 확산

 

근본주의자들은 성령운동을 비판하였다. 벤자민 워필드(B. Warfield)는 하나님은 베드로와 바울 이후 기적을 베풀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기적이 있다고 믿는 성령운동을 비난했다. 아이언사이드(H. Ironside)는 "가장 추잡한 성격의 미신과 광신행위의 온상이 성령운동이다"라고 주장했다. 캠벨 모건(C. Morgan)은 성령운동을 "사탄의 마지막 구토"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성령운동의 위기는 외부보다는 내부에 있었다. 그들은 사소한 문제들 즉 넥타이를 매는 문제, 지하 대피소 건설문제, 세례를 삼위의 이름으로 줄 것인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줄 것인가 등의 문제로 논쟁하였으며 이 논쟁을 통하여 분열되어 갔다. 그리고 이 분열의 과정은 성령운동의 확산의 과정이었다.

 

제2부: 성령운동의 특징들

 

성령운동이 성공한 이유는 원초적 영성(primal spirituality)을 회생시켰기 때문이다. 콕스는 원초적 영성의 세 가지 차원을 원초적 언어(primal speech), 원초적 신앙심(primal piety), 원초적 희망이라고 부른다.

 

제4장: 새로운 신앙표현-원초적 언어의 회복

 

방언기도는 현대인이 결핍하고 있는 무아적 황홀감, 무아적 희열의 체험으로서 이것은 심원한 본능적 통찰력과 활기차고 자유로운 느낌으로부터 인간을 가두어 온 인지기능의 창살과 장벽을 일시나마 파괴하는 체험이다. 콕스의 스승 틸리히는 황홀감이란 결코 감정만이 주를 이루고 생각은 결여된 비이성적인 상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무아적 황홀감은 일상적 의식의 세계를 초월하는 인간 심연에서 심연으로 전달되는 지각의 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이 방언은 2세기 몬타니즘에도 있었으며 그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유지되었다. 요한 웨슬리는 방언기도에 대한 소식들을 듣고 있었으며 그는 몬타누스를 '진정한 성서적 기독교인'으로 묘사했으며 세상에 존재한 최상의 사람 중 하나로 칭송했다(p. 142). 비교종교학에서도 무아적 소리 표현이 여러 종교 속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데, 콕스는 방언기도를 하나의 무아적 소리표현의 실례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p. 143).

 

제5장: 이적과 기사: 원초적 신앙심의 재발견

 

콕스는 성령운동의 성공원인 가운데 한 가지를 시대적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변화는 금세기에 수행된 온 세계의 도시화와 연관되었다. 도시로의 이동에 의해 초래된 문화충격은 새로운 공동체 형성의 필요를 낳았으며 성령운동은 이러한 사회, 문화, 경제적 위기에 직면한 사람들 속에서 급속한 성장을 보였다.

이러한 문화변동에 대부분의 교회들은 신속하고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보수주의자들은 교리만이 불변의 진리이며 교회의 계급구조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주장만 했다.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시대의 조류에 적응하려고 노력했으나 기능적 합리주의 문화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짐으로써 인간의 영적 세계의 중요성을 외면했다(p. 159). 그런데 성령운동은 제 3의 길을 제시했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신조를 거부하고 기독교 신앙의 신비를 보존했다. 또한 교회의 계급구조를 폐지하고 개인적 종교체험을 유지시켰다. 그들은 학문주의와 전통주의 모두를 배격하고 살아 숨쉬는 그대로의 인간 영성의 본원적 바탕에 눈을 돌렸다.

 

제6장: 현존하는 미래: 원초적 희망의 회복

 

콕스는 성령운동에서의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주장이 입증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운동이 확산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는 이 재림운동을 700년전 요아킴 플로리스(Joachim de Floris 1130?-1202)가 말한 성령시대와 유사하다고 본다. 성령운동의 메시지가 강한 호소력을 가지는 이유는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외적인 표현 뿐만 아니라 그 표현을 넘어서는 기쁨의 기대정서 즉 설레이는 소망감에 있다. 그것은 하나의 천년기 감각 즉 대단히 거대한 변화가 목하 진행중이라는 문화의 가장 핵심적인 정서감을 의미한다. 이 예언이 성취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운동이 전세계적인 종교부흥의 물결을 주도하는 이유는 그것이 가진 인간의 원초적 희망에 대한 회복력 때문이다.

제7장: 너희의 딸들이 예언할 것이라

여성들이 성령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성령운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는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직접적인 체험 즉 하나님과 각 개인의 직접적인 만남의 체험이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성령의 체험은 여성들로 하여금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하였고 이것은 예배에서의 간증이라는 형식으로 여성들의 예배참여를 자연스럽게 유도하였다.

더 나아가서 급격한 산업화, 전문화의 과정에서 대가족제도가 무너졌으며, 새로운 가족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는 사회적 상황에서 성령운동의 메시지는 잘못된 가족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최고의 방편을 제공하였다. 기존문화가 심어준 남성들의 권위적 처신을 변화시키고 또 그들의 독단적이며 파탄적인 가계운영을 포기하게 하는 메시지를 강조함으로써 여성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얻게 되었다.

 

제8장: 음악으로 만나는 예수님

 

여성이 성령운동 확산의 주체였다면 음악은 성령운동 확산의 주된 매개수단이며 예배의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콕스는 특별히 성령운동과 재즈음악과의 동질성과 상응성을 주장한다. 둘 다 미국의 하류사회에서 태어났다. 여러 민족의 언어가 함께 사용되는 도시 로스 엔젤레스와 뉴 올리언스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처음에는 무시당하고 조롱받았으나 나중에는 미국적 색채를 띤 세계의 정신을 지구상 모든 곳으로 전달하는 수단이 되었다.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이 당시 바흐의 합창곡과 회중 찬송이라고 하는 새로운 음악의 탄생과 함께 이루어졌듯이 오늘날에는 재즈음악이 성령운동의 새로운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콕스는 재즈가 이제 인류 역사상 진정한 최초의 보편적 음악이 되었다고 주장한다(p. 217).

 

제3부:세계 각처의 성령운동 개관

 

제9장: 우리는 이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중남미 성령운동

 

어셈블리아 데 데우스(Assembleia de Deus)라는 브라질 성령운동교단은 현재 1,100만 내지 1,500만의 교인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브라질의 학자들은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성령운동교인들이 주일 미사에 참석하는 가톨릭교인들보다 더 많다고 평가한다(p. 244). 이것은 15세기말에서 16세기 초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가톨릭세력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소위 '영적 정복'(spiritual conquest)이 오늘날 반전되어 가톨릭세력이 성령운동에 영적으로 정복당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p. 255).

콕스는 성령운동이 중남미인들에게 엄격한 도덕적 감각 뿐 아니라 신앙적 주체로서의 자신감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그들의 삶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주었다고 본다.

 

제10장: 무녀와 마돈나-고대 유럽 영성의 회복

 

콕스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의 성령운동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곳에 약 35만명의 성령운동교인이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유럽에서의 성령운동은 기타 지역에 비해 활발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며 콕스도 이 점에 대해서 적극적인 통계나 현상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다만 성령운동을 여성해방의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앞으로 이 운동의 발전방향에 대한 암시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제11장: 한국의 무속과 기업정신-환태평양 아시아의 원초적 영성

 

콕스는 1991년 2월 8일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WCC세계대회에서의 정현경의 춤과 강연에 대해서 보고하였다. 정현경은 한국의 민속전통에 한의 영이 있는데 우리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성령의 임하심을 느끼고 맞닿고 맛볼 수 있는 것은 바로 한의 영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녀는 나는 더 이상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 대신 "나는 파괴되어 가는 생명들의 고통 속에서 우리와 함께 눈물을 흘리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선언하였다(p. 308). 그녀에게 성령이란 불교의 보살과 같이 득도한 존재로서 자비와 지혜의 여신이라고 말했다. 정현경교수에 대한 반응은 우레같은 박수와 우레같은 침묵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진정한 아시아 기독교의 확인이라고 환호하고 어떤 이는 모든 것에 신성을 부여하는 범신론과 기독교가 이교도 문화에 굴복한 종교혼합주의라고 일축하였다. 콕스는 성령운동교인이 아닌 정현경교수가 성령에 대한 논의를 불러 일으켰다는 것 자체가 성령운동의 에너지가 성령운동 그 자체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원초적 영성의 분출로서의 이 사건의 의의를 해석하고 있다.

콕스는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특징을 두 가지로 지적하였다. 첫째로,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사라져가는 것처럼 보이던 전통적인 한국 종교 문화의 특징적 요소들을 사람들이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p. 311). 이것은 콕스에 의하면 '무교적 기독교'라고 규정될 수 있는데, 한국의 전통종교와 기독교의 결합된 형태를 말한다. 그는 여의도 순복음교회 예배에서의 축귀와 안수, 신유기도, 열광적인 춤, 통성기도 등을 무속종교와 유사한 것이라고 본다. (콕스는 한국의 성령운동과 무속종교의 유사성을 위한 근거로서 질병의 원인을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죽은 친척이나 조상들에게 있다고 말하는 자들로부터 찾고 있는데 이것은 예외적인 것으로서 정당한 논거라고 할 수 없다). 둘째로, 새로운 정치 경제구조와 폭발적인 도시화가 초래한 심각한 사회부조리 문제에 사람들이 적절히 대처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콕스는 한국에서의 괄목할 만한 경제발전과 폭발적인 교회성장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고 그 근거를 한국성령운동교회들의 놀랄만한 조직훈련에서 찾았다. 그는 80년대의 대규모 전도집회들을 예를 들고 각 교회에서 실시하는 총동원주일 등의 전도행사, 철야기도회, 성경공부, 구역예배 등을 예시하였다. 그는 이러한 교회성장을 위한 조직화작업을 회사를 확장해가는 기업적인 정신으로 해석하고 이러한 한국교회가 결국은 윤리적인 비판의 힘을 잃어버리게 될 것을 우려하였다(p. 334).

 

제14장: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인가-미국의 성령운동

 

콕스는 성령운동의 발상지가 미국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일종의 정서적인 애착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재즈와 함께 성령운동을 미국적 정신의 세계화라고 하는 제국주의적인 발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단순한 애국심의 차원인지 그 이상인지는 명료하지 않다. 콕스는 미국의 성령운동 가운데 염려스러운 부분들이 있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는 저열한 자기자랑과 쇼맨쉽으로 포장된 사기 허위의 성령운동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이와 함께 건강과 물질축복의 신학의 만연에 대해서도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엉터리 사기꾼 같은"(p. 387) 성령운동의 왜곡된 현상은 한국의 성령운동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서 성령운동의 어두운 면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성령운동을 파괴할 수 있는 심각한 현상들이다).

 

제15장: 물적 사기꾼과 영적 전사들-미국의 성령운동

 

콕스는 루이스(C. S. Lewis)의 글을 인용하면서 현대의 악마관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첫째, 악마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다. 현대의 해방신학자들은 너무 쉽게 초월적 악마세력들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다. 틸리히는 악의 세력을 개인적 차원보다도 구조적 차원에서 횡행하고 있다고 보았다. 아우슈비츠나 히로시마 원폭투하 등이 악의 세력의 증거이다. 둘째로, 악마들에 대해 지나치게 건전치 못한 관심을 가지는 것이 문제이다. 예컨데 악마의 목록을 만들어 놓고 어떤 사물들에 악마가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물신숭배신앙을 가진 성령운동교인들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것은 종교적 문제를 격하시키고 우스갯거리로 만드는 것이라고 틸리히는 지적하였다.

콕스는 성령운동에 불기 시작한 현실정치개입을 경계하고 있다.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은 1988년 침례교목사직을 반납하고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초기 성령운동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금 당장 어느 때나(any day now) 올 것이기 때문에 공직에 입후보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버트슨은 지배신학(dominion theology)을 가지고 이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에서 유대-기독교 가치관을 믿는 사람만이 세계를 통치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였다(p. 401). 콕스는 성령운동과 해방신학의 결합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이러한 현실참여 및 정치참여운동은 본래적인 성령운동의 변질을 초래할 것으로 우려한다. 이러한 급진적 종말론에서 점진적 종말론으로의 신학적 중심의 이동은 많은 성령운동교인들을 주일오전 예배와 구역모임으로부터 이탈시키고 있다. 이것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서 지연된 하나님 나라, 현실초월신앙에서 현실개입신앙으로의 성령운동의 전이이다.

콕스는 미국의 성령운동교회안에 있는 현실왕국 조직론자들, 권력욕에 사로잡힌 이기주의자들에 의한 교단분열, 성령운동이 물질적 부만을 추구하는 중산층의 영적 이데올로기가 되어 가고 있음, 인종차별의 재건 등을 보면서, 오늘날 성령운동이 온 세계에 전해줄 수 있는 귀중한 메시지를 상실 할 지도 모르는 중대한 위기로 진단하고 있다.

 

제15장: 해방의 성령

 

콕스는 21세기의 종교의 두 갈래 길을 근본주의와 체험주의(experientialism)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성령운동은 어느 길로 갈것인가 라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는 종교다원주의 사회에서 제각기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은 아무런 보호막을 가지지 못한채 서로를 물어뜯는 이전투구의 추악상을 연출하게 되며 근본주의가 민족주의와 손잡게 되면 대결과 혼돈을 초래한다고 보았다.

성령운동이 체험주의에 공헌하기 위해서는 체험이라는 용어와 성령이라는 용어를 이해해야 한다. 체험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나 성경과 이성 그리고 전통과 더불어 체험이 종교와 신학의 권위적 근거로 사용되었다. 체험이란 어떤 것에 대해 느끼고 깨닫는 감정과 의식의 결합작용 또는 행위로서의 경험이다. 체험 그 자체는 근거가 아니고 그 근거가 이해되어지는 수단이다. 이점을 분명히 한다면 성령운동은 체험주의의 제휴세력이 될 것이다.

성령운동의 체험은 성령과의 만남이었다. 초기 성령운동의 방언기도와 이적 기사 등의 체험은 종말론적 믿음에 대한 확실한 징표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상황이 바뀌었다. 대분분의 성령운동교회에서는 우리를 도와주시고 치유하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의 직접적인 임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스도가 곧 재림할 것이라는 기대는 희미하게 언급되고 있으나 사실상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한 때 성령운동의 핵심이었던 예수의 재림에 대한 기대는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콕스는 이 문제에 있어서 성령운동이 딜레마에 직면했다고 본다. 종말론이 사라지면 현실 안주와 자기 정체에 빠지게 되며, 종말론이 강조되면 환경위기와 같은 문제들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결점이 있다는 것이다. 콕스는 하나의 대안으로서 이 세상의 재앙적 종말보다는 기약된 하나님나라를 향한 이 세상의 변혁을 강조하며, 물질적 복락을 강조하고 세속권력기관을 장악하려는 현실왕국론자들 보다는 가난한 자들 가운데서 성령운동을 계속하는 성령운동 해방신학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보려고 한다. 결론적으로 콕스는 성령운동의 충동적 추진성을 고려해 볼 때 성령운동과 근본주의의 결합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성령운동은 감정적, 공동체적, 설화적, 희망적, 실천적이기 때문이다.

 

결론

 

지금까지의 진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0세기 성령운동을 20세기말에 살펴 볼 때, 여성해방에서 괄목할 성과를 이룩했으며, 음악이라고 하는 도구를 활용하여 이 운동을 크게 확장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인종갈등의 극복은 실패한 것으로 보여지고 종말론은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초기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종교가 이제는 중산층의 세속적인 욕구충족을 위한 축복종교로 변화되었으며, 세속권력에의 집착은 이 운동의 신성한 근원으로부터 단절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따라서 이 운동이 21세기에 과연 계속해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해 갈 것인지 의심스럽고 우려스럽다.

하비 콕스는 여성들이 이 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았으며 여성해방을 성령운동의 성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운동교회가 여성목사와 여성장로제도시행에 소극적인 것을 보면 여성의 역할과 지위는 여전히 제한되어 있는 것 같다. 성령운동이 개인의 내적인 변혁에 치중한 나머지 제도와 조직의 변혁에는 소극적이고 무관심한 것으로 생각된다. 오히려 지성적 계몽을 강조하는 진보적 교회들이 여성의 해방과 지위향상에 보다 적극적이고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다.

콕스는 재즈가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보편적 음악으로서 성령운동을 세계화하는 도구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으나 과연 재즈가 교회음악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아직까지 재즈는 예배음악이라기 보다는 전도음악 또는 준비찬송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스펠송에 대한 심각한 우려의 목소리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콕스의 시각은 문화식민주의적 발상이 아닐까?

콕스는 방언기도를 무아적 소리의 표현으로서 다른 종교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종교다원주의적인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p. 416). 과연 종교다원주의적인 관점을 가진 비교종교학이 성령운동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의 자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성령운동의 현상적, 사회학적 해석으로 성령운동을 정당하게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을까? 성령운동과 한국의 무교나 이방종교와의 외형적인 종교현상의 유사성에 기초하여 기독교와 타종교의 화해나 대화를 시도한다면 성령과 악령을 구별하지 못하는 영적 무지를 노출하게 될 것이다. 정현경의 경우가 그것의 하나의 실례(實例)이다.

성령운동의 사회학적 이해의 결과는 결국 성령운동의 도덕적인 해이라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수준을 넘어갈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지적은 콕스의 성령이해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콕스는 성령운동의 현상만을 다루고 있을 뿐 성령운동의 내적인 의미 즉 하나님의 구속사의 전개로서의 성령의 역할과 존재를 해명하는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성령을 창조자요 주님이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성자시대를 이어서 교회시대를 주관하는 성령시대의 주관자로서, 성령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친교 안에서 이해하는 성령의 통전적 이해가 필요하다. 이것은 조직신학의 과제로 남겨져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성령운동의 발전적인 방향의 제시는 결국 성령운동 자체의 과제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