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조 목사의 생애와 활동

 

 

성결교신학교(성결대학교 전신) 교장 역임

 

 

 

영암 김응조 목사는 1896년 1월 23일에 경북 영덕군에서 출생했다. 영암이 처음으로 기독교에 입신하게 된 것은 13세 되던 해이다. 그는 7세 무렵에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13세 되던 해, 오랫동안 출타해 있던 서당 훈장의 아들인 최봉희씨로부터 처음으로 "예수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영암은 일찍이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 14세가 되기까지 7년간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한 후 선친의 남다른 교육열에 힘입어 신학문을 공부하게 된다. 영암의 신학문 수업은 그에게 신앙의 성숙과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그 때 그의 신앙은 지극히 단순하여 어느 날 주일학교에서 모세의 이야기를 듣고는 "나는 공부해서 모세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모세가 되겠다"는 어린 시절의 결심은 영암에게 일평생 영향을 미쳐 생전에 기회 있을 때마다 "나는 새끼 모세"라는 표현을 즐겨할 정도였다. 2년간의 계동학교 유학시절은 그에게 있어 처음으로 기도에 눈 뜬 시대이기도 하다. 계동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고 영해읍 보통학교 4학년 졸업반에 편입하여 1년간 일본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한 다음 대구에 있는 미션계통의 계성중학교에 입학하여 계속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때가 1913년, 영암의 나이 18세 되던 해였다.

1916년 4월 15일, 서울신학교(현 서울신학대학교전신)에 선교사를 찾아가 영암은 주의 종으로 공부하기 위한 회심의 결단을 하게 되었다. 즉시 신학교 입학을 희망했으나 입학 연령이 1살 미달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하나님이 주시는 인내와 연단의 기간으로 알고 고향에 내려가 1년을 기도로 준비하고 1917년 서울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입학한 후 일본 동양선교회 대표 D. 카우만의 초청으로 영암은 7인의신학생들과 함께 1년간 일본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영암에게 있어 일본 전도여행이 무엇보다 의미 있었던 것은 그가 이방지역에서 재림의 환상과 성결의 체험을 했다는 사실이다. 1년간의 일본 전도를 마치고 1918년 4월 귀국하여 공부하던 중 1919년 3월 기미독립 운동에 영암은 학생대표로 참가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영암은 4년 구형에 2년 실형 언도를 받고,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영암은 3년 동안의 신학교 과정 가운데 1년을 일본전도로, 1년 6개월을 독립을 외치다 치른 옥고로 보내었으니 강의실에서 공부한 기간은 불과 1년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1920년 10월 1일 25세의 나이로 영암은 서울신학교를 졸업하였다. 또한 영암은 1977년 독립운동가로서의 공로로 대통령으로부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고, 1987년에는 교육 공로자로 대한민국 국민포장을 받았다. 영암은 민족의 암흑기에 25세의 나이로 전도자가 되어 그의 삶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헌신하기 시작했다. 25세에 전도자로 인생을 새 출발한 영암은 존 웨슬리가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외쳤듯이 "조선은 나의 교구다"라는 붉은 글자를 한국지도 위에 그려놓고 민족복음화를 위해 헌신하기로 서원하였다. 그 후 영암은 첫 임지인 철원교회를 비롯하여 공주교회, 안성교회, 서울 아현교회 등에서 목회하였다.

영암이 목사 안수를 받은 해는 1926년 4월, 전도사 시무 5년만이었으며 영암의 나이 30세 되던 해이다. 안수와 함께 영암은 전국 5개 지방 가운데 제일 큰 지역인 북부지방 감리목사로 파송받아 5년 동안 한반도 북부지방 교회를 순회 감독하며 사역하였다. 그러던 중 영암은 34세 무렵부터 건강을 해쳐 급기야는 폐렴에 걸리고 말았지만, 목포교회로 임지를 옮겨 요양하면서 목회를 계속하였다. 1931년 호남지방 감리목사, 1936년 중부지방 감리목사로 활동하면서 1937년에는 서대문 독립문교회 당회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가 신학교 졸업과 함께 외쳤던 "조선은 나의 교구다"라는 구호 그대로 영암은 우리 나라 전 지역의 교회들을 위해 일하게 된 셈이다.

한편, 영암 김응조 목사는 문서선교의 개척자로, 일제 암흑기에 민족의 비전을 제시한 초교파 부흥사로 공헌하였다. 전쟁으로 문을 닫은 지 1년만인 1951년 서울신학교가 총회의 결의에 따라 다시 문을 열었고 1952년 영암 김응조 목사는 교수로 임명되었다. 영암은 신학교 교수직 등 교단 내외의 크고 작은 일에 적극 앞장섰으며 1956년에는 성결교회 제 11대 총회장으로 파선되는 등 교단과 신학교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영암은 교회와 신학계의 세속화를 거부하고 성경적 복음주의 보수신학의 도장인 성결교신학교를 설립한 신학자이자 교육자이다. 1961년 12월 30일 성결교신학교 재단 이사회를 구성하고 1962년 9월 20일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 영암의 사저에서 성결교신학교를 개교하였다. 개교이래 1980년까지 초대 교장을 역임하시고 30여년 이상을 강단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영암은 예성교단의 지도자일 뿐 아니라 자유화의 물결 속에서 한국교회를 지켜온 초교파적 지도자로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약력 

 

1896.1.26 경북 영덕군 지품면에서 출생
1915.4.15 대구 계성고등학교 4년 수학 및 교원 양성학과 졸업
1919.3∼1920.8 3.1 운동에 학생대표로 참가. 그로 인해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1920.9 경성 성서학원(서울신학대학 전신) 졸업
1925.4 성결교회 연회에서 목사 안수 받음
1936.4∼1940.3 충북지방 순회목사 및 경성 독립문교회 당회장 겸임
1936.4∼1945.8.15 신사참배 거부 및 독립전도사, (생명지광) 잡지 경영함
1950.8∼1953.8 성결교회 전임 부흥사로 활약
1953.9∼1961.3 서울신학교(서울신학대학 전신) 교수 역임
1962.7 미국 훼이스 신학 대학원에서 명예 신학박사 취득
1962.9∼1980.11 성결교신학교(성결교신학대학교 전신) 설립 및 교장 취임(교수 겸임)
1977.12.13 독립 유공자 대통령 표창 받음
1987.12.5 교육 공로자 대한민국 국민 포장 받음
1991.4.17 96세를 일기로 소천함

   

끝까지 읽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