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치하 목회사역 증언

 김응조 목사

(목회와 신학 1990년, 12월)

 

 1896년 12월 3일, 나는 동해안 일우(一隅) 태백산과 소백산 중추지대인 산명수려(山明水麗)한 산촌에서 3형제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옛날에는 산중도방(山中道傍)이란 별명까지 있던 이곳은 시냇물이 50번이나 굽이굽이 흘러서 동해로 들어간다고 하여 붙인 오십천(五十川)이 유명했어요.

 내가 날 때에 한국의 사정은 대원군의 집정으로 이조말 풍운이 급박한 때요, 국제정세는 약육강식의 각축전이 벌어질 때입니다. 대원군의 반기독 운동으로 많은 천주교인들이 살해를 당하였고 민비와 대원군 사이에는 정권 쟁탈 전이 반복되곤 했지요. 대원군정권이 후퇴되자 종교의 자유가 시작되어 각국에서 선교사가 속속 내한하여 선교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스스로 생각할라치면 나는 가장 요긴한 때에 태어났다는 겁니다.

 넉넉치 못한 농촌생활이라 영양상 별로 도움될 것 없는 음식들을 먹고 자랐지만 건강체로 태어나 무병하게 자랐습니다. 일곱 살 때 동리 한문서당에 입학했는데 나를 가르치던 최선생님은 한학에 거유(巨儒)로서 많은 학자들을 배출했던 분이지요. 철없는 나에게 천자문, 동몽선습 등을 배워주시더군요. 어린애에게 내나라 역사는 고사하고 남의 나라(중국) 역사부터 가르치는 구식 교육법이 한문서당이지요.

 

일본 물리치려고 백여호 동리가 거진 교회 다녔고

 내가 13세 되던 춘삼월이었습니다. 최선생님의 아드님되신 최봉희 씨가 수십년 출타했다가 전라도 해남에서 돌아왔어요. 그는 해남에서 예수교의 내용을 알고 서양 선교사가 주장하는 기독교를 믿으면 서양세력을 빌어서 일본 사람을 한국에서 물리칠 수 있다고 선전하더군요. 이때는 1909년 봄 3월이요 융희 3년이었습니다. 고종 황제가 퇴위하고 융희 황제가 즉위한 지 3년이요, 이등박문이 통감부를 설치하고 한국의 실권을 장악할 때입니다.

 동리의 어른들은 최씨의 말에 감동되어 기독교를 동리 모든 사람들이 합심하고 믿기로 작정하였으니, 기독교가 좋아서 믿으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세력을 빌어서 일본을 배격하자는 뜻입니다. 대표 몇 사람을 선정해서 이들이 대구에 가서 선교사와 교섭하고 교회 설립을 상의한 뒤에 성경 찬송을 구입해 가지고 돌아와서 김태두 씨 집에 교회를 설립하고 뜰에 십자가를 세우고 백여호 동리가 거진 입신케 되었습니다. 이것은 진리 바람이 아니라 사상 바람입니다.

 이때에 선친께서도 가족 다섯을 데리시고 입신케 된 것이 나와 우리 가족이 기독교에 관계를 맺게된 원인이 된 것입니다. 그때에 마침 일본 수비대가 의병 소탕전을 따라서 우리 동리에 왔다가 십자가를 보고 감히 교회에 침입하지 못한 것을 본 동리 사람들은 여기 무슨 수가 있다고 생각하며 더욱 열심히들 몰려들었습니다.

 내 나이 스무 살 되던 1915년 4월 15일, 그때 나는 대구 계성학교 다닐 땐데, 순회온 피득 목사님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피득 목사님은 유대인으로서 개신교로 개종한 선교사였어요. 세례문답을 지나서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는 기도가 끝나자 내 심령이 뜨겁게 변했습니다. 나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마음에 철장같이 서더군요.

 내가 그때에 오. 이래서 세례를 받는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하도 이상해서 다른 사람에게 물었더니 다른 사람은 아무치 않다고 해서 그때에 나는 이것은 하나님이 내게만 주신 은혜로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오늘에 그때 일을 회상하니 하나님께서 주님이 수세하실 때에 나타난 사실을 내게도 주셨구나(마 3:17). 그때에 하나님이 벌써 나를 택하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꼭 3년 뒤, 그러니까 1918년 4월 15일 전에 서울신학교 자리를 찾았습니다. 사쿠라꽃은 만발하고 봄빛이 꽃동산에서 메아리치더군요. 왜 거길 갔느냐고요 고비원주(高飛遠走)의 웅지(雄志)를 품고 해외로 나가기 위해 선교사와 교제하기 위해서였지요. 목적한바 선교사를 찾으니 어떤 부인이 나오더니 한국사람의 이름을 대면서 그리로 찾아가라고 해요. 그를 찾아가려고 꽃나무 사이로 지나가는데 어디선가 풍금 소리가 들리더군요. 살같이 빠른 광음은 잃으면 못찾네. 헛되이 허비 말고서 구주의 일하세. 나의 심령의 고민과 그 꽃동산의 환경, 그 찬송 소리 삼자일체로 나의 고달픈 심령을 울려주었습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눈을 감고 서서 기도하기를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갈 길을 보여 주옵소서 하는 말로 기도를 마치고 문을 두드리니 몇 학생이 나오는데 내 보기에도 그들이 모두 천사와 같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나의 감상은 나도 저런 사람과 같이 되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거였어요. 여기가 무엇하는 데냐고 물으니, 교역자 양성하는 곳이라 해요. 당신들은 무엇을 배우느냐 물으니 성경을 배운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신학 교인줄 알았습니다. 그때 내 생각에는 나도 언젠가 여기서 저 사람들과 같이 공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학교 책임자를 찾아서 입학 가능성의 여부를 물었더니 다른 조건을 좋으나 연령이 미달이기 때문에 안된다는 거예요. 학칙의 연령은 23세이니 1년이 모자라요. 1년 보류를 약속하고 돌아서니 섭섭하기는 하나 내가 찾을 곳을 찾았다는 기쁜 마음은 변하지않더군요. 그때부터 세상에 속한 허영심은 없어지고 해외니 하는 잡념도 없어졌어요.

 서울을 떠나서 고향에 돌아오니 전같으면 불평과 고민이 떠나지 않을 것이나 오히려 희망에 넘치는 기쁨의 미소를 띄우게 되었습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처럼 있는 것을 다 파는 기간이었지요. 이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믿은 것은 허영과 공상에 가득찬 복잡한 그 마음을 가지고는 신학을 할 수 없다는 섭리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감사가 넘치더군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으라는 말씀과 같이(마9:17) 새 부대를 준비하는 기간으로 믿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신 섭리는 놀라웠어요.

 

일본 전도대 단원으로 현해탄 건너가니

 1년 준비 기간이 끝나니, 1917년 4월 1일에 등교하라는 통지가 와 행장을 준비해 가지고 육로로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입학수속을 마치고 나니 학생이 모두 18명이더군요.

 그런데 입학한 지 한달쯤 지나자 일본 동선(東洋宣敎會) 본부에서 씨.카우만 씨의 명의로 한국 신학생 가운데 일어를 할 줄 아는 학생을 선발해서 일본 전도대로 보내라는 요청이 왔어요. 이것은 동선 총재 카우만 씨가 기도 중 일본 전국에 호별(戶別)전도가 필요하다는 계시를 받고 막대한 금액과 100여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이 사업을 시작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한국 신학교에서도 이 사업에 협력하라는 뜻이었지요.

 이 전도 대원의 자격은 첫째, 일어를 알아야 한다(전도할 정도로). 둘째, 신체가 건강하여야 한다. 셋째, 신앙이 철저하여야 한다. 세 가지 조건에 나는 문제없이 합격되었습니다. 첫째 조건은 내가 일어를 특별히 배웠으니 문제없고, 둘째도 선천적으로 부모에게 건강체를 받았으니 문제없고요, 셋째도 무난히 통과되었습니다.

 나와 같이 선발된 대원은 일곱명이었습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양복을 사서 입고 현해탄을 건너서 하관에 도착하니 카우만 씨가 맞아주더군요. 이때에 미국에서 선교사로 대장격으로 10명이 나오고 일본사람 9명에 한국사람 한명씩 끼워 놓으니 대장 외에 10명이었어요. 하는 일은 매일 전도지를 한가방 넣어가지고(그대가 섬길 하나님 하나님의 선물) 군부에서 사용하던 집집마다 기재된 지도를 보며 한집도 빼놓지않고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유숙하는 처소에 천막을 치고 전도하는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본을 복음으로 점령하자는 뜻이지요. 큰 운동이었어요. 이것을 일본의 남단 구주(九州)지방부터 시작하여 북해도까지 치밀어 올라갈 작정이니 말입니다. 그들은 천막전도나 노방전도에서 꼭 나를 내세우더군요. 나는 스물세살의 투지 왕성할 때 아니었습니까. 좋다 하고 나섰지요. 나의 청년기의 능력있는 설교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어요. 때로는 불교인신도인들에게 돌을 맞은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전도를 해보면 대개가 기독교는 일본 정신과 반대되어 못 믿는다고 해요. 심지어 하나님이 높으냐, 천황이 높으냐 묻기도 하고요. 여기 대한 대답은 곤란해요. 하나님이 높다면 반역자라고 속단하니 말입니다. 노방전도나 천막전도에 조금도 귀 거슬린 소리를 들으면 덮어놓고 돌을 던지고 고로세하면서 폭동을 일으켜요.

 일본 전도는 많은 수확이 있었으며, 1918년 4월엔 동경에 집합하여 작별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카우 만 총리는 한국 형제들의 활약을 칭찬하면서 축복했습니다.

 우리는 일본에 1년동안 있으면서 많은 경험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더 있기를 원하나 기정방침이라 할 수 없이 승리의 개가를 부르면서 귀국하였지요.

 귀국하자 이내 새학기 학과는 시작되었지만 일년동안 일본에서 지내던 활동적 기분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어요. 그때는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일주일에 두번씩 노방전도하고 매일밤 무교동 전도관에서 구령회 전도를 했습니다. 학생이 총동원하여 지나가는 사람을 인도해 들여서 설교하는 결신을 시킨 겁니다. 매일같이 규칙적으로 그렇게 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길로 오지를 않아요. 붙들려 승강하기 싫으니 지나가다가 붙들면 급한 환자 위해 약 지으러 간다고 속이기도 하더군요. 전도 방법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였으나, 학교의 규칙이라 할 수 없이 맹종하였지요. 그리고 매일 오후에는 결신자를 심방했어요. 좌우간 이것은 학과 실습의 하나로서 신학생을 위하여는 마땅한 일이라고 그후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3.1운동 이야기를 좀 하지요

 이제 3.1운동 이야기를 좀 하지요. 서울에 있는 전문학교 학생들은 지령을 따라 3월 1일을 기하여 남대문 역에서 파고다공원까지 만세를 부르며 행진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여기에 참가한 학교는 연전, 고전, 이전, 우리 신학교, 감신 등입니다. 우리는 미리 여행자의 차림을 하고 아침 8시에 남대문 역에 모여서 일제히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파고다공원을 향하여 돌진하였습니다. 동시에 파고다공원에서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약속되어 있었지요.

 각 학교 대표들만 모여서 200여명이었는데, 일제가 아무리 경찰이 밝다하여도 여기까진 깜쪽같이 몰랐습니다. 우리는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남대문을 향했어요. 그때에야 일경이 총칼을 휘두르면서 추적했어요. 한 순경이 칼을 들고 내 뒤를 따르는데 금방 그 칼이 내 목에 닿을 듯 하였습니다. 나는 위급함을 알고 응급결에 남대문 옆에 있는 지물포에 뛰어 들어가서 난을 면하였습니다. 일경은 앞만보고 먼저 간 학생들을 따라가더군요.

 난을 피한 후 학교로 돌아와서 정신을 차리니 우리 학교 학생 가운데 몇 사람이 체포되어 투옥되었더군요. 나는 다시 나가서 불란서 영사관 앞에서 일반 군중들과 함께 시위운동을 하였습니다. 강화회의가 파리에서 열리는 것만큼 우리의 운동을 파리에 정확히 전해달라는 뜻이었지요. 이날에 우리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만세를 부른 셈입니다. 불란서 영사는 나와서 손을 흔들며 알았으니 가라는 신호를 보내더군요. 우리는 질서 정연하게 해산하고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이때에 우리 학교뿐 아니라 서울에 있는 모든 학교는 임시 방학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3월 5일에 나는 많은 선언서를 가지고 고향 영해로 내려갔습니다. 내가 내려올 줄 안 경찰서는 형사를 대기시켰다가 대문에 들어서자 가자고 하더군요. 나는 이미 각오한지라 형사에게 끌려서 병곡주재소에 가 연금되었습니다. 그날은 마침 장날이라 벌써 그곳 주모자들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를 부를 것을 약속한 모양이예요. 장꾼들은 보통 때보다 몇배나 많았습니다. 그들은 일제히 만세를 부르면서 주재소 면소할 것 없이 모조리 파괴했어요. 원래 그들의 목적은 파괴나 폭행이 아닌 질서 정연하게 독립만세를 부르려 하였으나 몇만명 대중들이 흥분한 나머지 기세양양하게 10년 간 쌓였던 울분이 터지게 된 셈이다. 일경들도 대세를 못이겨서 관서를 비우고 무기만 가지고 산으로 피하여 그 광경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이 급보를 들은 대구 수비대가 들어와서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많은 사상자를 남기고 체포와 투옥으로 사건은 일단락 지어졌지요. 나는 서울서 내려온 선동자로 지목되어 수백명 관계자와 함께 대구 형무소로 투옥되었습니다.

 5평 감방에 처음에 20명을 수용하더니 차차 각처에서 만세꾼이 들어오기를 시작하니 5평 감방에 30명에서 최 고 40명까지 수용하여 앉기도 부족하였습니다. 밤으로는 서로 등을 대고 눈을 부치는 판이었는데 제일 좋은 자리는 똥통 위였어요. 밥은 처음에는 1홉 8작을 주더니 사람이 많으니 1홉도 안되었어요. 많은 사람은 영양부족으로 죽기도 했습니다. 무더운 한여름을 이렇게 지내니 몸에서 흐르는 땀이 마룻바닥을 적실 지경이었습니다. 잠은 물론이요 앉지도 눕지도 못할 형편이었습니다. 솔직히 일찍 죽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이라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학교보다 옥중에서 배운 성경이 더 많았어요

 나는 기나긴 여름을 이렇게는 지낼 수 없다. 나는 죽을 수밖에 없다. 이제는 하나님과 그 말씀에 내 몸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성경을 차입해서 성경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죽음의 갈망에서 성경을 보니 반갑기 한이 없었어요. 그때에 나의 감상은 이제는 살았다. 이 성경이 나를 살려줄 것이다고 믿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부터 매장 대지를 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 한장을 읽고 한장의 대소 대지를 만들어서 외우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매일 이같이 성경에 작심하니 더운 것 배고픈 것 괴로운 것을 잊어버릴 정도였습니다.

 내가 그때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마4:4)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틈틈이 간수의 눈을 피하여 성경말씀으로 같은 방 사람에게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로해 주고, 병나면 기도해 주었어요. 그들이 나를 감방 목사라고 부르더군요. 마치 내가 바울의 로마행 배 가운데 죄수로서 다른 사람의 위로자가 된 것 같은 역할을 했던 셈이지요(행27:33~37).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기도해 주는 것이 나의 일과였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내 마음에 위로와 힘이 생겼습니다. 기나긴 여름은 어느덧 지나가고 가을이 되었을 때 내가 외우는 성경은 마태복음에서 에베소서까지였어요. 나는 신학교보다 옥중에서 배운 성경이 더 많았습니다. 재판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배운 일본말로서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역설했습니다. 나는 재판장에게 우리는 요구는 노예가 아니요 독립이오. 무엇이 잘못이오. 이 한마디로 양심을 찔러 주었습니다. 그리고 방청객에게 일대 충격을 주었지요.

 다른 주모자는 7년 구형에 4년 언도를 받았으나 나는 폭행에 가담하지 않았다는(혹은내 변론이 주효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유로 4년 구형에 1년반의 언도를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공소하나 나는 순순히 복역함으로써 애국을 표시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재판이 오래 끄는 바람에 9월에 가서야 기결수가 되니 붉은 바지에 147호의 명패를 붙이고 파나마 모자를 만드는 공장에 취역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손에 복을 주어서 일등공으로 뽑히니 밥도 많이 주고 대우도 좋았습니다. 기결수가 되니 한방에 200명씩 수용하더군요. 나의 전도 무대는 넓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들에게 전도하려 보내셨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나는 전도를 계속하였지요.

 대지에 흐는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서 복역한지 반년이 지났습니다. 그때에 마침 이왕 전하와 망자여왕 사이에 결혼이 성립되어 경사에 의한 특사령을 따라서 반년형을 남기고 출감하니 1년 반복역했지요. 미결로 반년 기결 일년 합 1년 반이지요. 나는 이 1년 반 동안을 모세의 미디안 수양, 바울의 아라비아 수양으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국가에 대한 보은의 기간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한국에서 맨 처음 만세를 부른 것도 나요, 감옥에서 혹독한 고생을 한 것도 이몸이니 말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같이 입옥한 많은 동지 가운데 죽은 사람이 허다하나 살아서 나오게 된 것도 감사할 제목이지요.

 

"죽도록 충성하겠습니다"는 한마디 답사

 출감한 나는 몸이 극도로 허약하였습니다. 사실 감옥에 있을 때는 몰랐으나 막상 나와놓고 보니 맥이 풀리더군요. 한여름동안 휴양을 마치고 등교하니 구사일생의 출전 군인격입디다. 동창들은 벌써 졸업을 하고 나갔는데 나는 사실상 수학기간 3년 일본에서 1년, 옥중에서 1년 그러고 보니 수학기간은 1년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얻은 경험과 옥중에서 직접 하나님께 배운 성경은 실상 학교에서 배운것보다 더 나았습니다. 내가 옥중에서 있었던 간증을 원장님께 털어놓으니, 원장님은 원더풀을 연발하시고는 내게 말하기를 형제는 수학기간은 짧으나 실력과 모든 경험이 졸업생과 다름이 없으므로 졸업장을 줄터이니, 앞으로 더욱 충성하기를 바란다고 하시면서 이미 예비한 졸업장을 수여하더군요. 눈물겨운 마음으로 죽도록 충성하겠습니다라는 한마디 답사로 물러나니 때는 1920년 10월 1일이었습니다.

 이때에 내 나이는 스물다섯살, 투지만만한 청년이었지요. 그러나 나는 이때부터 장년기로 편입한 것이며, 나의 사명의 중대성을 깨닫기도 했지요. 나는 졸업장을 받고 돌아와서, 벽에 걸어둔 한국 지도에 붉은 잉크로 십자가를 그렸습니다. 인천에서 원산까지 가로긋는 획과 의주에서 부산까지 내려긋는 획으로 말입니다. 글자 넓이는 두치 가량입니다. 조선은 나의 교구다 큰 글자를 써 놓고 날마다 쳐다보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나의 사명에 대한 기염이요 첫 소리입니다. 백배 용기가 마음에 용솟음쳤지요.

 1920년 10월 10일 본부에서 파송한 강원도 철원교회를 필두로 광주교회, 안성교회, 서울 아현교회를 전심전력으로 섬겼습니다. 내가 목회하는 방법은 본 교회를 중심으로 자형으로 30리 이내에 지회를 세우는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이 나에게는 독특한 교회확장 방법이었습니다. 나는 이 방법을 어디서든지 실행하였고 또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1926년 4월에 목사 안수를 받고나니 북부지방 감독으로 임명하더군요. 이때에 감리목사 제도는 한 지방을 맡아서 각교회를 시찰 육성 감독하는 제도였지요. 북부지방(함경도, 북간도, 강원 일부)을 맡아 처음으로 지방 각교회를 순시하니 대개가 농촌이요 산지더군요. 지방 발전을 위하여는 이것은 잘못입니다(전임자가 소극적 전도방법을 사용하였다). 단체 발전을 위하여는 대도시를 점령해야 한다는 정책으로 원산, 함흥, 성진, 나남 청진, 라진, 웅기, 서수라, 회령에 교회를 신설하였습니다(그중에 기성 교회도 있음). 바둑 순창놓듯이 하고 활동하였더니 중간에는 저절로 교회가 설립되더군요. 5년 동안 눈부신 활동을 하였더니 신설교회가 30여개나 되었습니다. 북으로 북간도에서 남으로 강릉까지가 순회구역이었습니다.

 북선에서 동분서주 몰아적 활동은 유한한 나의 육체에 이상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서른네살 땐데 폐렴 2기가 되었습니다. 본부에서는 나를 생각하여 의사의 말대로 따뜻한 지방에 생선이 많고 공기가 맑은 목포로 임명하더군요. 이때 목포는 일년 전에 신개척한 교회인데 초가집 셋방에 신자는 불과 10여명이더군요. 한 지방의 책임자로서 활동하던 나에게는 눈에 걸리지 않았어요. 그리고 주택은 단칸방에 다섯 식구가 새우잠을 자야 했어요. 그때도 한재가 심하여 기차로 물을 운반하는데 한통에 그때 돈으로 15전이더군요. 수난, 주택난, 생활난, 질병난 등 5난 속에 매일 지내니 없는 병도 생길 판이지요. 몸은 점점 쇠약하여 온갖 병이 생기더군요. 그때 나는 하루 빨리 죽는 것은 축복이요, 하루 더 사는 것은 저주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절망상태에 빠졌습니다.

 질병의 공세에 몰린 나는 올데 갈데 없으니 하나님밖에 찾을 데가 없었어요. 복잡한 도시나 가정을 떠나서 해발 2천척이나 되는 유달산을 향하여 아침 5시에서 7시까지 기도하기로 시작했습니다. 내가 작정하기는 백날을 계속하되 그동안 하나님의 자비가 계시면 다행이요,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각오하되 영혼이나 구원해 주시면 감사할 것 뿐이라는 맘으로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때는 1930년 9월 10일이요. 내가 기도한 장소는 넓은 바위 위입니다.

 

유달산에서 경험한 유리알 환상

 기도를 마치고 나니 몸이 노곤해지면서 잠이 오더군요. 비몽사몽 중에 내가 앉은 바위가 갈라졌어요. 내가 생각할 때에는 10여길이나 되는 것 같았습니다. 밑에서부터 옥백수같은 생수가 굽이굽이 돌아서 올라오고 필경 내가 앉은 자리까지 넘쳤어요. 내가 물 위에 둥둥 뜬 것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내 마음에 무엇이 꽉 차더군요. 그리고 순간에 내 몸을 보여주는데 내 몸이 유리알같이 맑아졌어요. 정신을 차려 깨고보니 위대한 환상이었습니다. 그때 부터 내 마음과 몸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마음에는 기쁨, 사랑, 능력, 소망이 솟아오르고, 내 몸은 유리알처럼 맑으면서 날아갈 것같이 가벼웁더군요. 그 때에 내가 주여 감사합니다. 나는 살았습니다 하고 일어서니 심신이 뜨거워졌습니다. 뛰면서 목마른 자들아 다 이리오라 이곳에 좋은 샘 흐르도다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내가 이 찬송을 몇십번 불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내 목을 완전케 하시므로 지금도 아무리 설교해도 목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병으로 인하여 고생해 보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왔습니다. 내가 분명히 알기는 하나님이 내 심령과 육체를 새롭게 해주신 줄 믿습니다. 이때부터 나의 별호를 영암(靈岩)(고전10:4)이라고 지어서 기념하게 되었지요.

 그후로 호남지방 감리목사로 여러 지방 예배당 건축과 지방성경학교를 신설하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대도시를 점령한 다음 소도시를 공략하고 또 준 소재지로 침투하는 방법을 써서 호남지방 재임 5년 동안에 부임할 때에 20개던 교회가 떠날 때는 51개소로 31개소가 증가되었고, 교인수는 1,000명에서 3,000명이니 2,000명이 증가된 셈이요, 교회당 신축이 38개소로서 개평하면 3배가 증가된 셈이지요. 이것은 순전히 내가 목포에서 받은 불의 성령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불이 아니고는 성공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게 합니다. 그때에 그 불이 오늘까지 꺼지지 않고 연소됨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1937년 3월에 서울 독립문교회로 부임했습니다. 지방 책임자로 있을 때에는 직접 관계가 없어 그랬는지 일제의 간섭이 없더니 개교회 목회자로 있으나 별별 간섭이 많더군요. 무슨 회 무슨 행사에 참여하라는 공문이 빗발 같이 날아들더군요. 꼭 들어앉아서 한번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연 주목이 심할 수밖에요. 형사는 문턱이 닳도록 풀방구레 쥐처럼 드나들었어요. 필시 저들의 눈에는 반역자로 지목되었을 것입니다.

 1937년 4월 18일은 천장절 축하식이 배재학당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대동아전쟁이 절정에 달할 때이지요. 일제가 약이 오를대로 오른 때이라 미리 형사가 와서 출석예약까지 받고간지라 할 수 없이 참석하였습니다. 교역자, 사회유지, 선교사까지 참석했습니다. 김종우 목사의 사회로 식은 끝났습니다. 형사는 출입문을 지키고 서서 남산 신궁으로 가자고 하더군요. 다른 사람은 할 수 없이 앞뒤 형사의 인도하에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남산을 향하여 끌려갔습니다. 나는 어떤 선교부인이 뒷문 가시철문을 열고 나가는 틈을 타서 같이 빠져나와서 난을 피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생각하니 천지가 아득하고 앞날이 막연하더군요. 내가 신사참배를 하고 그들을 순종 하느냐 안하고 나가느냐는 나뿐아니라 뜻있는 교역자면 누구나 고민의 문제였습니다. 교단 일부에서는 참배가 국가의식이요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편도 있었습니다. 나는 이것은 약자의 변호라고 생각하고 적극 반대했습니다. 나는 이 문제를 앞에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왕산 송림 속에서 매일 아침 기도로 하나님께 물었으나 역시 응답이 없더군요. 그래서 나는 생각하기를 교회의 책임자로 있으면 면치못할 터이니 교회를 사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막상 교회를 사임하고 보니 당면문제가 여섯 가족의 생활 문제였습니다. 내가 공직에서 떠난 두 가지 이유가 있으니 첫째는 교회의 책임자로 있으면 참배를 면치 못할 것과, 둘째로 성결단체가 다른 단체에 솔선하여 신사참배 무죄론을 주장한 것이 비신앙이라는 점이지요. 응급책으로 전세집이나 얻어가지고 학생 하숙을 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고 이 방면으로 모색했습니다.

 

검억산 밑의 은둔과 50줄 새출발

 그래서 혜화동에 방 열한 개 딸린 집을 구해 자급전도계획을 세웠습니다. 나의 자급전도의 계획은, 가족은 학생 하숙을 처서 먹게하고 나는 초교파적으로 순회부흥 전도와 생명의 빛(生命之光)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문서전도를 겸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부흥회도 곤란하고 출판물 같은 것도 허가는 고사하고 취소 통합을 명하는 때였어요. 새로 출판은 감불생심일 뿐이었지요. 그러나 나는 믿고 출판 허가원을 제출하였습니다. 뜻밖에 일주일만에 허가가 나오더군요. 이것도 한 가지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쉽게 허가가 나온데 대하여는 두 가지 꼽아볼 수 있는데 첫째는 내가 지금까지 직접으로 자기들에게 위험인물로 보이지 않은 것과, 둘째는 내 글 내용이 복음적이요 시국에 저촉 될만한 말이 없는 때문이 아니었는가 합니다다.

 일제 탄압 밑에서 말씀이 기근이 든 때인만큼 내가 발간한 생명의 빛(生命之光)은 내용이 설교, 성경강해, 신학, 전기, 신앙간증, 설교방법, 예화 등등으로 순수한 복음말고 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한달에 3,000부씩 찍어서 국내는 물론이요, 만주까지 독자가 생겼습니다. 한달에 세곳 이상 집회를 나가면서 이것을 계속한다는 것은 곤난한 일이었어요. 밤을 세워가며, 기차간에서, 집회 후에 원고를 썼어요. 몇사람이 들어도 어려운데 혼자 몇 사람의 일을 하려니 퍽 어려웠어요. 3,000명의 주소 성명만 쓰는 것도 사흘이 걸리더군요. 그래도 나는 원기왕성하게 기쁨으로 괴로운 줄 모르니 이것도 기적의 하나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때는 부흥회 하기가 곤란한 때였지요. 왜냐하면 첫째는 부흥사 얻기가 곤란함이요, 둘째는 당국에서 부흥회 인가를 잘 하지 않음이요, 셋째는 부흥회 때에 간섭이 심한 때문이지요.

 나는 잡지에다 쓰기를 누구든지 순복음의 진리를 듣기를 원하면 초교파적으로 도와주겠다고 광고를 한 때문에 각 처 각교파에서 요청했지요. 그때에 부흥강사를 청하려면 당지에 집회 계출하면 당지 경찰에서 부흥사 소재지 경찰에 조회하여 부흥사의 신분 사상을 검토하여 허락, 불허, 주의 세 가지로 통지합니다. 허락은 막론이요 불허는 못 가고 주의는 가도 간섭이 심해서 집회가 안되었습니다.

 나는 이상 세 가지 가운데 허락으로 조회가 가더군요. 그 원인은 잡지 원고를 총독부에 제출하면 매달 허가장이 동대문 경찰서고등계 주임에게 오면 주임은 나를 불러서 직접 내게 수교하더군요. 그것은 허가장에 총독의 직인이 찍힌 때문인 것같아요. 총독부에서 출판허가하는 사람쯤은 문제가 없다는 뜻인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나는 절대 신임한 때문에 언제나 조회에 오케이였지요. 이것도 하나님의 기적의 섭리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잡지 인가를 쉽게 내준 것이나, 허가장이 나의 신분을 옹호해 주는 것이나 나를 가지시고 문서전도, 부흥전도에 사용한 것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때는 1943년, 내 나이 마흔여덟일 때, 대동아전쟁이 치열해지자 언론과 집회 자유는 극도로 제한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언론기관은 기독공보 하나만 남기고 모조리 폐간하였고 집회자유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생각컨대 5년간 붓으로 입으로 주의 종 의무를 다했다고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성결교회는 폐쇄되고 교역자들은 해산되고 신자들은 타교파로 이산되었습니다. 옛날 아합 시대에 7000명을 굴에 숨겨둔 가운데도 엘리야 한 사람을 가지시고 사명을 완수케 하신 것같이, 하나님은 작은 종을 독립케 하시고 함께하사 생명의 빛으로 사용해 주셨음을 감사하는 바입니다.

 전쟁이 치열하자 공습을 두려워서 소개를 명하니 시민들이 교외로 소개하더군요. 나 역시 할 일도 없고 이제는 은거의 때임을 자각하고 시외 면목리 검억산 밑에 가서 판자집을 짓고 짐승을 기르면서 전쟁의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은둔생활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나는 이 기간을 요한의 밧모도 생활을 연상하고 계시록 연구에 착수했습니다. 산골 시내물에 발을 담그고 말씀을 연구하고 반석 위에 앉아서 밤으로는 하늘을 쳐다보고 기도했습니다. 여기가 바울의 아라비아요, 요한의 밧모도였지요. 여기서 1년간 수양은 나에게 새 출발을 준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역사적인 민족해방 8.15가 되자 다시 부흥운동에 나섰는데, 이때는 내 나이 벌써 4자를 넘어 50이더군요. 인간활동은 50부터라는 옛 사람의 말도 있거니와 나는 이제부터라고 믿고 새출발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시련과 고난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6.25사변과 교회의 수난, 교단 정화운동과 교단분열, 성결교신 학교 설립 등 필설로 헤아리기 어려운 일들도 많았지만, 오늘까지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셔서 일백년 가까운 세월을 숨쉬고 있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