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교회사와 김응조의 재림론

박명수 

 

1. 들어가는 말

김응조(金應祚) 목사가 한국교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해방이후 한국의 보수주의 신앙과 신학을 이끌어 왔던 중요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한국교계의 보수주의 교파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예수교대한성결교회의 정신적인 지주이며, 또한 보수주의 신학을 강조하는 성결대학교의 창립자이다. 따라서 그의 신앙과 신학을 밝히는 것은 한국교회의 보수주의의 일면을 밝히는 것이 될 것이다.

김응조 목사의 신앙과 신학의 핵심은 재림론에 있다. 그가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을 강조하였지만 그의 가장 큰 강조점은 역시 재림이었다. 그의 부흥회의 주요 테마는 그리스도의 재림이었고, 그의 책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 것의 하나가《말세와 그리스도의 재림》이며, 성서 가운데서 그의 전공분야가 바로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이었다. 그는 스스로 예언서 전문가라고 자처하였다. 특별히 일제 말과 해방 이후의 혼란스러운 시대를 지내면서 그의 말세론 강의는 많은 청중을 확보할 수 있었다. 따라서 김응조 목사의 신학을 연구하는 데에서 그의 재림사상을 살펴보는 것은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은 그의 창작물은 아니다. 그의 재림론은 그가 여러가지 종말론을 연구하고 그것을 자기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우리는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의 역사적인, 그리고 신학적인 배경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이런 맥락에서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에서 김응조 목사의 재림신학의 신학적 특성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본인의 전제는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은 대체로 보아서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이라는 것이다. 물론 한국성결교회는 자신들의 종말론이 세대주의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김응조 목사와 한국성결교회의 재림론에는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의 중요한 특징이 모두 들어 있다. 즉 역사에 대한 시대구분, 휴거론, 시온주의적인 요소 등이 그것이다. 비록 김응조 목사와 성결교회가 세대주의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세대주의적인 예언서 해석방법인 미래주의적인 해석방법을 사용한다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또한 한국성결교회는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환란전 휴거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약간의 융통성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김응조 목사는 이런 성결교회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본인은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 연구에서 이런 이론적인 측면에서만 살펴보려고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재림론은 세상을 보는 해석학적인 틀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재림론은 단순한 종말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 전체에 관한 일이요, 단순한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자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알려주는 삶의 지침에 관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인은 그의 재림론이 그와 한국교회에 어떤 행동을 가져왔는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근래에 미국 교회사학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역사연구에 대한 행동과학적인 접근이론을 이용한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지금까지의 역사 연구가 이론연구에 치우친 나머지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를 진정으로 공정하게 연구하려면 이론과 더불어 그것이 실제 삶에 어떻게 연결되어 나타났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인은 김응조 목사의 종말론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그를 중심으로한 한국의 보수주의와 예수교대한성결교회의 성립에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2. 근대복음주의와 전천년설의 등장과 발전

종말론은 기독교의 역사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종말론은 기존 체재를 위협하는 위험스러운 사상으로 이해되어져 왔고, 따라서 기성교회에 의해서 배척받았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몬타누스, 중세교회의 요아킴 에레미아스, 종교개혁시대의 뮨처와 재세례파 등에게서 잘 찾아볼 수있다. 그러나 19세기에 등장한 전천년설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근대복음주의 신학에서 매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별히 19세기 말부터 미국사회에 불어닥친 도시화와 자유주의는 기존사회를 비관적으로 보게 만들었고,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게 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재림을 강조하는 전천년설에 속해서 쉼을 얻게 되었다. 여기에서 종말론은 많은 보수주의적인 경향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끈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샌딘(Ernest R. Sandeen)은 20세기의 근본주의의 뿌리가 바로 이 세대주의적인 종말론이라고 주장한다. 샌딘의 주장이 조금 과장된 것이긴 하지만 20세기의 복음주의에서 전천년설이 차지하는 위치가 매우 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면 근대복음주의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전천년설은 어떻게 발전되었는가? 18세기의 복음주의자들은 세계의 진보를 믿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로 세상은 진보하며, 따라서 그뒤에 천년왕국이 임한다는 후천년설을 믿었다. 이런 견해의 대표적인 사람이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이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런 낙관주의적인 후천년설을 밀어내고, 반대로 천년왕국 이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진다는 전천년설이 등장하게 되었다. 전천년설은 역사는 점점 타락하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타락한 역사는 심판을 맞는다는 비관주의적인 역사이해와 관련이 있다. 이런 비관주의적인 역사이해가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프랑스혁명으로 인한 사회적인 혼란과 관계가 있다.  

19세기에는 단순히 천년왕국 이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다는 전통적인 견해(이것을 학자들은 역사주의적 전천년설이라고 부른다)를 넘어서서 새로운 형태의 전천년설이 등장하였다. 이 새로운 형태의 전천년설을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라고 부른다. 이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영국사람인 달비(John N. Darby)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 역사주의적 전천년설은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이미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해석에 따르면 요한계시록의 짐승은 바로 교황을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교황이 1798년에 프랑스의 군대에 의해서 로마에서 축출된 것을 예언의 성취라고 본다. 따라서 짐승의 시대는 지나고 이제 인자(人子)의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에서 출발한 19세기의 역사주의적인 전천년설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짜를 계산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 밀러(William Miller)는 1843년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짜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여기에 비해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이런 예언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앞으로 있을 7년 대환란 가운데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을 미래주의적 전천년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단지 이런 요한계시록의 해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인 해석이다. 이들은 구약의 예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구약이 예언한 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의 계획에는 없던 교회시대가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휴거설이다. 이전의 역사주의적인 전천년설과는 달리 세대주의는 휴거설을 믿는다. 즉 7년 대환란 이전에 그리스도의 공중재림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7년 대환란 이후에 지상재림이 온다는 것이다.

달비의 이런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은 미국에 전해져 1875년부터 미국의 나이아가라성서대회(Niagara Bible Conference)를 중심으로 큰 세력을 얻게 되었다. 여기에는 19세기 미국의 주요한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가담하였다. 여기에는 19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복음전도자인 무디(Dwight L. Moody)를 비롯하여 고든(Adoniram J. Gordon), 피어슨(Arthur Pierson), 어드만(George Eerdmann), 블랙스톤(William Blackston) 같은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이 이렇게 짧은 시일내에 큰 세력을 갖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19세기 후반 미국의 비관주의적인 상황 때문이다. 19세기 후반의 미국은 사상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많은 혼란을 겪고 있었다. 특별히 유럽에서 새로 등장한 진화론과 고등비평은 많은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현실을 비관적으로 보게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주의자들은 낙관적인 후천년보다는 비관주의적인 세대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둘째는 세대주의의 방법론이 상식철학의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미국사상의 중심은 상식철학이었고, 세대주의는 상식철학의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다. 세대주의는 상식철학과 같이 먼저 역사적인 자료를 모으고, 그 다음에 그것을 분류하는 귀납법을 사용한다고 주장한다. 즉 역사의 시대구분과 종말의 징조는 막연한 사변이 아니라 구체적인 증거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말엽부터 이 진영에 분열이 생기게 되었다. 그것은 주로 달비의 교회론 때문이었다. 달비는 원래 영국 국교회의 성직자였는데 당시의 영국교회는 매우 타락해 있었다. 따라서 그는 교회를 적 그리스도로 보았고, 참으로 순수하게 남아 있는 신앙공동체만이 그리스도의 공중재림 때에 휴거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달비의 교회론은 기존 교회를 하나님의 은총의 수단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말세의 사탄의 도구로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세대주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달비 속에 나타난 이런 극단적인 견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대부분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비록 교회가 타락하였지만 교회를 그렇게 적 그리스도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교회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논쟁의 초점은 신자가 언제 휴거할 것인가이다. 즉 환란전 휴거설과 환란후 휴거설이다. 환란전 휴거설이 전통적인 세대주의인 데 비하여 여기에 도전을 한 것이 환란후 휴거설이다. 환란전 휴거설이 보다 비관적인 교회관을 갖고 있는 데 비하여, 환란후 휴거설은 교회의 역할을 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19세기 말엽에 많은 사람들이 초기의 달비의 사상을 버리고 환란후 휴거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환란후 휴거설주의자들은 달비의 미래주의적인 해석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주로 고든, 어드만, 심프슨 같은 사람이었다. 피어선 같은 사람은 환란전 휴거설을 받아들이면서도 교회의 역할을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하였다. 블랙스톤은 미래주의적인 해석을 고수하였다. 이런 갈등 때문에 1875년부터 계속되어 오던 나이아가라대회는 1900년대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이렇게 19세기 말엽에 쇠퇴해가던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을 다시금 부활시킨 사람이 스코필드(Syrus I. Scorfield)이다. 스코필드는 1902년 몇몇 사람들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약속받아 7년에 걸친 대대적인 관주성경작업을 시작했다. 이것은 미국 최초의 관주성경으로서 세대주의에 입각하여 성경을 해석하고 정리한 것이다. 이 관주성경이 출판되자 이 책은 보수주의적인 신학자와 신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로써 사라져 가는 것 같았던 세대주의적인 종말론이 다시금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이후부터 스코필드 관주성경은 세대주의의 교과서로 통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코필드 관주성경과 더불어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의 보급에 큰 역할을 한 것이 성경학교이다. 무디성서학원과 로스앤젤레스성서학원(The Bible Institute of Los Angeles: 이것이 현재의 바이올라대학교의 전신임)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남부에서는 달라스신학교가 세대주의의 본거지 역할을 하였다.
지금까지 주로 칼빈주의 전통에서 전천년설의 발전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웨슬레안은 이런

종말론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무엇보다도 먼저 미국 감리교가 19세기에 가졌던 재림사상은 후천년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미국 감리교회는 19세기에 들어서서 굉장한 속도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복음의 전파와 더불어 인류의 문화의 진보를 믿었다. 이것은 19세기 말에도 마찬가지였다. 전천년설이 장로교와 침례교에 큰 힘을 발휘한 만큼 감리교에는 별다를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 감리교인 가운데 전천년설을 받아들인 주요 인물은 평신도인 블랙스톤뿐이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미국에서 일어난 성결운동이 발전되어 가는 과정에서 기존의 중생·성결 외에 신유와 재림까지 덧붙여지게 되었다. 주류 성결운동은 여전히 후천년설적인 입장을 고수하였지만 일부에서는 후천년설을 거부하고, 전천년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성결운동의 중요한 지도자인 갓비(William Godbey), 왓슨(George Watson), 피켓(L. L. Picket) 등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그룹이 만국성결연맹이었다. 만국성결연맹의 창시자인 냎(Martin W. Knapp)은 이들의 영향을 받아서 전천년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들은 기존의 성결운동과는 달리 전천년설을 받아들이고, 이것을 웨슬레안 성결론과 결합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들이 가지고 있던 전천년설은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이었다.

 

3. 한국교회와 성결교회의 재림사상의 발전


전천년설은 초창기부터 한국땅에 널리 전해져 있었다. 미국 장로교 해외 선교국 총무인 브라운에 따르면 "한국문호 개방 이후 찾아온 전형적인 선교사는……신학과 성서비평에서는 굉장히 보수적이며, 그리스도의 전천년왕국 재림설을 핵심진리로 믿었다"고 말했다. 1904년 한국에 방문하여 복음을 전한 바 있는 일본인 나카다는 한국땅에는 재림의 복음이 이미 널리 전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선교사 게일이 초기 한국교회의 모습을 소설의 형태로 기록한《선구자》에 의하면 선교사들 사이에 전천년설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주로 장로교 선교사들이 전천년설을 믿은 데 비하여 감리교 선교사들은 전천년설을 매우 낯선 것으로 생각하였다. 사실 19세기 말 미국의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미국의 복음주의 내에서 널리 전파되었던 전천년설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은 전천년설을 믿었을 뿐만이 아니라 19세기 말의 대표적인 전천년설인 블랙스톤의 책을 한국말로 번역하여 출판하기도 하였다. 이 블랙스톤의 책은 1913년 게일에 의하여《예수의 재림》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한국성결교회는 출발부터 전천년설을 핵심진리로 가르쳤다. 한국성결교회의 뿌리가 되는 동양선교회의 창시자인 카우만과 나카다 주지는 무디성서학원에서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카우만과 그의 동역자 길보른은 냎이 세운 하나님의성서학원에서 공부를 하였다. 이 두 학교는 전천년설을 가르치는 학교였다. 동양선교회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단체는 바로 만국성결연맹이다. 이 단체는 전천년설을 중생·성결·신유와 더불어서 강조하였다. 또한 동양선교회는 일찍이 블랙스톤의 Jesus Is Coming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동경성서학원의 교재로 사용하였다. 감리교인인 블랙스톤이 쓴 이책은 전천년설에 관한 책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힌 책이기도하다. 또한 블랙스톤은 자기가 책임자로 있던 스트워트 재단을 통하여 당시로서는 막대한 재정인 약 15,000달러를 동양선교회의 선교를 위하여 지원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동양선교회는 출발부터 중생·성결·신유와 더불어 재림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 재림설은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이었다.

한국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에서 세운 동경성서학원에서 공부한 정빈과 김상준이 귀국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동경성서학원에서 동양선교회가 강조한 순복음, 곧 중생·성결·신유·재림을 배웠고, 한국에 돌아와서 이것을 전했다. 특별히 재림을 강조하고, 이것을 신학적으로 정리한 사람은 김상준이었다. 김상준은 1918년 한국 최초로《묵시록 강의》를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을 밝혔다. 특별히 3.1운동 이후 민족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새로운 소망을 찾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주로 참조한 것은 미국의 사이스와 왓슨, 그리고 사사오 데쓰사브로라고 밝혔다. 사이스는 19세기 말의 유명한 루터교 지도자였으나 그의 교파와는 다른 종말론을 가졌기 때문에 논쟁이 되었던 사람이다. 왓슨은 이미 위에서 언급한 성결운동의 지도자이며, 사사오 데쓰사브로는 초기 동양선교회의 지도자이다.

김상준은 그의《묵시록 강의》에서 성서해석에서 과거적 해석, 역사적 해석, 그리고 미래적 해석의 3가지 방법을 언급하고 있다. 과거적 해석은 성서의 예언을 이미 지나간 과거의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독일의 비평학의 산물이며, 역사적 해석은 성서의 예언을 현재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로 해석하는 것으로써 신빙할 수 없고, 다만 요한계시록의 1, 2, 3장 이외에는 아직 이루어지지 아니한 미래의 일을 기록한 것으로 보는 미래적 해석이 합당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김상준의 재림론은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이다. 그리고 고대의 사부들과 근대의 영적 대가들이 대부분 이 설을 주장한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이것은 바른 평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미래주의적인 해석은 19세기에 들어와서 생긴 새로운 종말론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은 역사적 기독교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근대복음주의 교회가 성서를 재해석함으로써 만들어 낸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전천년설이 강하게 등장한 것은 3.1운동 이후이다. 19세기 말 망해가는 나라에 들어온 기독교는 한국인들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희망을 주었다. 하나는 문명의 개화를 통한 민족의 구원이다. 이것은 많은 지식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세상의 도래이다. 한국인들에게는 원래 천지개벽이나, 정감록 같은 종말사상이 강하게 있어 왔다. 이런 한국인들에게 있는 잠재해 있는 종말의식이 기독교의 전천년설을 받아들이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첫번째의 흐름이 주로 지식인들 사이에서 강하게 나타났다면, 두번째의 경향은 주로 부흥회를 통하여 나타났다. 이런 두번째의 흐름을 주도한 사람이 길선주인 것이다. 길선주가 당대의 제일의 부흥사였고, 그의 메시지의 핵심이 '말세학'이었다면 이것으로써 한국교회에 말세론이 얼마나 중요한 주제였는가를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길선주의 종말론적인 메시지는 3.1운동 이후 갈 바를 모르는 한국사람들의 심정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교회로 하여금 현실적인 문제에서 눈을 돌려 초월적인 곳으로 관심을 바꾸는 비정치화라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한국 성결교회도 이런 형태의 신앙을 가졌다.

3.1운동 이후 전천년설이 한국교회로 하여금 비정치적인 방향으로 나가게 하였다면 1930년대 후반에는 재림이 일제의 대동아전쟁과 관련하여 가장 정치적인 사건으로 화하였다. 당시의 일본은 가장 위험한 적으로서 공산주의를 들고 있었다. 기독교는 일찍이 공산주의를 기독교의 가장 위험한 적으로 간주하였다. 여기에 세대주의는 공산주의를 바다에서 올라온 붉은 용으로 묘사하여 공산주의를 공격하는 데 선봉에 섰다. 이명직 목사는 말세의 붉은 용은 소련의 공산주의이며, 그 증거로 소련의 인명살상과 종교박해를 들었다. 그리고 독일과 일본, 그리고 이탈리아가 연합하여 이 붉은 용, 즉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다고 하면서 공산주의와의 싸움은 단지 무력만으로 안되므로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이 사단, 즉 적룡래(赤龍來)와 건전한 싸움을 하여야겠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본의 편에 선다는 것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것이며, 이것은 교회의 본래의 입장과 일치한다는 논리를 발견할수 있다. 여기에서 가장 비정치적인 것을 주장했던 전천년설이 가장 민감한 정치적인 것과 연결되어 친일의 논리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친일에도 불구하고 결국 세대주의와 천황을 숭배하는 일본 세력은 양립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역사가 전개된다고 주장하는 데 비하여 세대주의는 그런 역사관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세대주의적인 역사관은 역사의 궁극적인 완성은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는 모든 악의 세력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천년왕국을 세운다는 것이다. 이런 역사이해는 천황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는 일본의 국체사상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재림을 강조하는 성결교회, 안식교회, 대한기독교회 등은 강제로 해산당하였다. 일제의 강요에 의하여 씌어진 성결교회의 해산명령서를 보면 이것이 잘 드러나 있다. 즉 "더구나 교리로서 신생·성결·신유·재림의 사중복음을 강조하여 왔었는데 취중(就中) 재림의 항은 기독이 가까운 장래에 육체로서 지상에 재림하여 그 왕이 될 뿐이 아니라……근본적으로 국체의 본의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신자들은 우주의 궁극적인 주인이 천황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가라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대답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 역사의 주인은 그리스도라고 고백했기 때문에 수난을 받아야 했다. 여기에서 특기해야 할 것은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재림을 강조하여 왔지만 일제의 박해 앞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수하다가 해산을 당한 교회는 이른바 대교단이 아니라 성결교회 같은 소교단이었다는 것이다.


4.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의 형성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그의 삶 가운데서 형성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재림론이 어떻게 그의 삶 가운데서 형성되었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김응조 목사는 1896년 1월 26일 경상남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한학을 배운 그는 대구의 기독교계 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한 뒤 변호사가 되기 위하여 법률학교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원래 어려서부터 기독교 신앙을 가졌던 그는 이제 외국 유학을 해 보려고 선교사와 접촉을 시도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가운데 동양선교회가 운영하는 경성성서학원의 소문을 듣고 결국 그는 1917년 4월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여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공부를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그는 동양선교회가 일본에서 시작한 지방전도대(영어로는 The Great Village Campaign)의 대원으로 선발되었다. 이 지방전도대의 전도는 전천년설에 기초를 둔 전도운동이다. 19세기의 많은 복음전도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기 전에 온 땅에 복음이 전파되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재림하려면 먼저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복음의 전파이지 신자들을 회심시키는 것은 아니다. 물론 회심시키면 좋지만 일차적인 목적은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므로 복음전파가 주요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런 선교정신의 영향을 받은 동양선교회는 일본의 모든 집들을 한 집도 빼놓지 않고 다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하고, 이런 선교정신을 후원하는 스트워트재단의 지원을 받아 일본전역에 축호전도를 나서게 된 것이다. 이 운동은 1911년 11월에 시작하여 1918년까지 계속되었다.

김응조 목사는 이 전도대의 일원으로서 전도한 것이다. 이 전도대는 여러 분대로 나뉘어졌는데, 각 분대는 미국인 선교사를 분대장으로, 그리고 일본인을 9명, 그리고 거기에 김응조 신학생을 비롯한 한국인을 한 명씩 배치하여 편성하였다. 김응조 신학생은 이 전도대에 속하여 일본의 산촌 곳곳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이 전도활동 중에 그는 그의 생애에 결정적인 신앙 체험을 하게 되었다. 1917년 9월 13일 그는 도미야마현(富山縣) 후쿠이시(福井市)의 약송(若松)이라는 여관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사실 이 때 그는 재림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날 밤에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환상을 보게 되었다. 그의 간증을 들어 보자.

"나는 그때까지 재림에 관한 신앙이나 지식이 없었다. 이날 밤 여관방에서 자는데 나는 한복판에 누웠다. 밤중에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별안간 환해지면서 수 많은 천사가 나팔을 불고 예수께서는 흰구름을 타시고, 영광스러운 광채의 몸으로 천사의 호위하에 강림하신다. 그 때에 나는 너무 기뻐서 "여러분 정신 차리라 예수가 재림하신다" 하면서 큰소리로 외치며 손을 흔들고 야단을 쳤다.
일본사람들이 자다가 깨어 정신을 차리고 주의를 준다. 그 환상이 없어지면서 공중에서 소리가 있는데 요한일서 3장 3절을 말하는지라.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하니 그 광경과 그 음성이 역력히 기억난다. 일본사람에게 그 성경을 읽어 달라고 하였더니 "주를 향하여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도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 : 3) 주님이 내게 재림의 광경을 보여주는 동시에 내게 성결하라고 암시하신 모양이다. 오늘 내가 재림의 주를 열심으로 증거하는 것도 이 때의 계시를 받은 때문이다. 주님이 내게 귀한 환상을 보여주신 줄 믿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김응조 목사의 재림 환상이 성결한 삶으로 연결되어짐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전형적인 성결운동의 종말 이해이다. 즉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은 신자로 하여금 더욱 거룩한 삶을 살도록 요청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결운동의 지도자이며, 동시에 전천년설을 가르친 왓슨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왓슨은 1915년 한국에 와서 한국성결교회의 최초의 목사안수식에 참여한 사람이다. 왓슨에 의하면 신자는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하여 흰 옷, 곧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김응조 목사에게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나는 이같은 영광의 주님을 맞이하려면 내 심령이 깨끗하여야 하겠다는 결심으로 그 이튿날 밤에는 골방으로 들어가서 기도하기를 시작했다. 내 마음에 빛이 임하면서 내 죄가 낱낱이 드러난다. 나는 눈물로 회개했다. 나는 지금까지 도덕상으로는 별로 큰 죄를 지은 것이 없다. 그러나 심령이 더러운 것을 깨달았다. 꿈에 보던 주님의 영광과 내 심령을 대조하여 보니 나는 지옥 갈 자격밖에 없다고 느껴졌다. 부지중 기도의 소리 "주여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나로 깨끗하게 하여 주옵소서." 눈물과 기도가 교접하였다. 주의 음성에 "내가 너를 깨끗게 하노라" 하는 순간에 내 마음은 유리같이 맑아지고, 마음에는 기쁨이 충만했다. 옳다. 지금은 영광의 주님을 맞이할 수 있다는 자신이 확실해진다. 주여 감사합니다 하고 일어나니 시계는 12시 종을 친다. 나는 이 간증을 여러 곳에서도 하였으나 동경 간다 홀리네스교회에서 할 때에는 수백 명 청중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이것은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체험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하면 국가에 대한 관심은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 한국교회에서 가장 열성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한 길선주 목사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기독교계의 대표로 서명하였다. 한국에서 최초로 묵시록 강해서를 썼고, 열렬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했던 김상준도 3.1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이것은 김응조 목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1년의 일본전도대의 활동을 마치고 1918년 4월에 귀국하여 다시금 성서학원에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해 1919년 3월 1일에 저 유명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따라서 경성성서학원도 휴학을 하게 되었고, 김응조 목사는 독립선언서를 휴대하고 고향에 내려가서 독립운동을 벌이려고 계획하였으나 정보가 누설되어 결국 바로 체포되어 미결수로 6개월을 보내고, 4년 구형에 1년 반 언도를 받았다. 그러나 감형이 되어 1년 만에 석방이 되었다. 김응조 목사는 이 기간을 국가에 대한 보은의 기간이라고 설명한다. 김응조 목사의 이러한 공로는 정부로부터 인정받아 1978년 4월 10일 대통령으로부터 3.1독립 유공훈장을 받았다. 적어도 3.1운동 이전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강조와 민족의 독립은 별도로 움직이는 두개의 운동이 아니었다. 열렬한 재림론자가 바로 열렬한 애국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양립은 3.1운동 이후에는 유지되지 않은 것같다.    

3.1운동 이후 한국성결교회는 재림을 매우 강조했다. 특별히 성결교회는 1920년대부터 등장하고 있는 공산주의·자유주의·남녀평등의 모든 것들이 바로 말세의 징조라고 생각하고, 이제 머지않아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왔다고 설교하였다. 이런 재림의 설교는 일제시대 성결교회의 설교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항상 종말론은 혼란한 시대에 강하게 나타나는 법이다. 일제시대의 참혹한 한국인들의 삶은 현실에 희망을 두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천년왕국의 소망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만들었다. 사실 의지할 만한 현실이 전혀 없는 일제시대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이야말로 신자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었던 것이다. 김응조 목사도 이런 난국을 거치면서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을 갖자고 강조하였다. 그는 "재난은 오실 주님의 소식을 전하는 천사의 나팔소리이다. 택함을 입은 자여, 신부여 예비하라"고 외쳤다.

김응조 목사는 신학교 졸업 이후 전도사로, 목사로, 감리목사로 성결교회의 중진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는 활동적인 성격으로 가는 곳마다 교회를 부흥시켰고,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그가 당시 1920년대에는 성결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인 아현교회를 담임하기도 하였고, 북부지방, 호남지방, 중부지방의 감리목사를 맡았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1937년 일본이 대륙을 침략하여 그의 야욕을 불태우기 시작할 때 김응조 목사는 성결교단을 떠나서 독립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그는 두 가지로 그 이유를 말한다. 첫째는 성결교단에 속해 있으면 교단의 책임을 맡게 되고, 그러면 일본의 신사참배를 강요받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미 성결교회가 다른 단체와 같이 신사참배를 용인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그는 신사참배 때문에 성결교단을 떠났다고 주장한다.

김응조 목사는 교단을 떠나서 자유로운 전도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943년 일제 말에 이르자 총독부는 종교집회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암울한 시점에서 그는 성경의 예언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였다.

"전쟁이 치열하자 공습이 두려워서 소개를 명하니 시민들이 교외로 소개한다. 나 역시 할 일도 없고, 이제는 은거의 때임을 자각하고, 시외 면목리 검억산 밑에 가서 판잣집을 짓고 짐승을 기르면서 전쟁의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은둔생활을 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이 기간을 요한의 밧모도 생활을 연상하고, 계시록 연구에 착수했다. 산골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말씀을 연구한다. 반석 위에 앉아서 밤으로는 하늘을 쳐다보고 기도한다. 여기가 바울의 아리비아요, 요한의 밧모도이다. 여기서 일년간 수양은 나에게 새 출발을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왔다. 김응조 목사는 다시금 동대문감리교회를 시점으로 해서 부흥회를 재개하였다. 그리고 이 부흥운동은 그의 삶을 마칠 때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이 부흥회의 핵심은 말세론 강의이다. 그의 집회는 낮의 사경회와 밤의 부흥집회로 구성되었는데 사경회의 주제는 거의 예외없이 말세론이었다. 그는 1918년 일본에서 그리스도 재림의 환상을 본 후부터 재림 전파에 대한 특별한 사명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이어져서 해방 후에는 전국에 재림을 전파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앙망하게 하는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는데, 그는 이것을 재림촉진운동이라고 부른다. 1954년에는 지금까지 전한 재림론을 책으로 출판하였다. 그후부터 이 책은 그의 집회의 주요 텍스트였다.  

김응조 목사의 부흥회의 범위는 가히 전국적이며, 모든 교파를 망라하고 있다. 그는 원래부터 교파의식이 강하지 않았다. 성결교회는 원래부터 교파로 시작한 단체가 아니었다. 그가 1937년 교파를 떠난 것도 바로 이런 생각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교파는 복음전파의 필요상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교파에 대한 지나친 거부감도 배격하였다. 사실 부흥사란 초교파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이런 교회관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여하간 그의 자서전 제일 마지막에 기록하고 있는 그가 부흥집회를 인도한 교회는 전국의 모든 지역을 포함하여 426교회에 이르며, 장로교·감리교·성결교회가 고르게 분포되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성결교회가 228회, 장로교회가 148회, 감리교회가 50회에 이르고 있다. 이것으로 볼 때 김응조의 재림론은 단순한 성결교회의 재림론을 뛰어넘어서 한국교회의 재림론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응조 목사의 재림사상은 신학교육을 통하여도 강의되어졌다. 1952년 9월 부산에서 서울신학교의 교수로 초빙되었다. 당시의 서울신학교는 6.25로 많은 교수들이 납북되어 심각한 교수진의 빈곤을 맞이하게 되었고, 따라서 김응조 목사에게 신학교에서 강의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그후 그는 서울신학교의 교수로, 성결교신학교의 교장으로 그의 재림론을 강의하였다. 신학교가 미래의 교역자들을 양성하여 그들을 통하여 개교회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생각하면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은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널리 전해졌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부흥회와 신학교육 외에도 그는 글을 통하여 재림사상을 전하였다. 그는 일찍이〈활천〉을 통하여 문서로 복음을 전하였다. 그후 일제 말에는 개인적으로〈생명지광〉(生命之光)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이 잡지가 3.000부나 발행되었다고 말한다. 해방 이후에도 그는 계속〈활천〉에 재림론을 연재하였고, 이것은 뒤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또한 예성과 기성의 분열 뒤에는〈성별〉지에 재림론을 연재하기도 하였다. 그는 40여 종이 넘는 단행본을 출판하였는데, 그 가운데 재림에 관한 것으로는 이미 위에서 언급한《말세와 예수 재림》(1954),《다니엘서 강해》(1953),《성서적 정통신학》(1969),《성서대강해》에 나와 있는 다니엘과 요한계시록 강해 등이 있다.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은 한국의 특별한 상황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한국인들 마음속에는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말세사상이 있다. 불교의 미륵불, 도교의 진인, 그리고 정감록 등은 한결 같이 말세에 새로운 세상을 건설한다고 주장하는 한국 민중들의 메시야이다. 그리고 이런 말세사상은 세상이 어지러울 때에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은 이런 한국전통의 말세론에 대한 기독교적인 대답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상들은 일제의 어두운 암흑기와 해방 후의 혼란한 사회 속에서 크게 확산되었다. 여기에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런 기독교의 재림사상을 한국의 전통종교나 민간사상과 결합하여 새로운 말세론을 제시하여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기도 했다. 한국에서 나타난 모든 이단들이 이 점에서 거의 예외가 없다. 통일교, 전도관, 그리고 양도천의 세계일가공회가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리에서 벗어나서 신자들을 미혹하는 잘못된 이단이 되었다. 여기에 비해서 김응조 목사의 재림사상은 충실히 근대복음주의로부터 전해 받은 재림론을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5.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 내용과 특색 : 이론적인 측면

한마디로 말한다면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은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이다. 그는 성결교회의 목사로서 성결교회가 가르치는 재림론을 그대로 전하려고 노력하였다. 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동양선교회의 신조는 거의 미국 만국성결연맹의 신앙개조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만국성결연맹은 창립부터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을 받아들여 왔다. 물론 한국성결교회도 만국성결연맹도 자신들의 입장을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냥 단지 전천년설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분명하게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을 따르고 있다.

장로회신학대학교의 한숭홍 교수는 김응조 목사의 신학과 사상이라는 논문에서 김응조 목사의 신학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그것을 좀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그의 신학은 체계적인 신학 수업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독학으로 정립한 것이기 때문에, 많은 부분이 평신도들의 성서내용 이해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도 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신학의 많은 부분은 신학적으로 쟁점화될 수 있는 문제제시나 성서해석학적 논쟁점을 제공하고 있지 못하며, 매우 보수적인 성서관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한숭홍 교수의 김응조 목사에 대한 평가는 잘못된 것이다. 사실 김응조 목사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근대복음주의의 신학적인 흐름을 충분히 소화하고 있으며, 이것을 자신의 언어로 담아 한국교회에 소개하고 있다. 특별히 그의 종말론은 놀랍게도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과 일치하고 있으며, 이것은 그의 종말론이 그가 스스로 공부해서 형성한 것이 아니라 세대주의적인 종말론을 지침으로 삼아서 공부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숭홍 교수의 이런 평가는 미국의 근대복음주의에 대한 이해가 없이 독일의 신학의 잣대로 김응조 목사의 신학을 평가했기 때문에 생긴 편견이라고 생각된다.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을 역사에 대한 시대구분, 구약의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의 문자적인 이해, 휴거로 인한 공중재림과 지상재림의 구분등을 주요 특징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성결교회의 헌법과 초기 성결교회의 지도자들인 김상준·이명직·이건 목사 등의 글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은 이런 성결교회의 전통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먼저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을 개관하면서, 이것이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첫번째,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은 전천년설이라는 것이다. 전천년설이란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김응조 목사는 계시록 20 : 2∼4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천년왕국이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전천년설의 배경에는 이 세상에 대한 비관주의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강력한 희망이 담겨져 있다. 김응조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가 오시지 않고는 천년시대가 있을 수 없다. 타락한 인간과 마귀가 남아 있는 동안 행복의 세상이 있을 수 없다. 이미 말하였거니와 천년이 지난 후에 예수가 오신다는 말은 성경에도 없거니와 현실과도 맞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말세가 될수록 세상은 점점 악화되고 그리스도의 교회는 점점 박해를 받고 있다." 또한 "마귀가 있고 그리스도가 없는 세상에 평화와 행복이 있을 수 없다. 주님이 오시기 전 지상천국을 꿈꾸는 자는 성경에서 탈선된 이단설로 우리는 단연 배격한다"고 지적한다.    

김응조 목사는 그의 전천년설에 근거하여 기존의 여러 학설들을 비판한다. 그는 교회와 천년왕국을 동일시하는 무천년설은 세속주의에 물든 교권주의의 주장이며, 먼저 천년왕국이 이루어진 다음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온다는 것은 성서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또한 성령강림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동일시하는 성령강림설도, 이미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마음속에 재림해 있다는 기재림설(旣再臨說)도 성서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잠깐 왜 이런 전천년설이 한국교회에 널리 파급되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는 일제의 박해와 해방 후의 혼란, 그리고 6.25전쟁을 겪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세상의 역사에 대한 비관주의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강력한 희망이 한국교회 신자들의 마음 속에 절실했던 것이다.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이 형성된 것이 바로 이런 시기이며, 그가 재림론을 가지고 한국교회의 방방곡곡에 다니면서 외쳤던 것도 이 시점이다. 따라서 전천년설은 한국인들의 토양에 매우 적합한 사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두번째, 김응조 목사는 역사를 여러 시대로 구분을 한다. 세대주의는 역사를 여러 단계로 나눈다. 하나님은 각 시대에 따라서 각각 독특한 방법으로 역사한다는 것이다. 김응조 목사도 인류의 역사를 7시대로 나눈다. 그가 나누는 인류의 7시대란 무죄시대, 양심시대, 허락시대, 족장시대, 율법시대, 은혜시대, 안식시대 등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은혜시대는 교회시대요, 안식시대는 천년왕국이다. 그러나 김응조 목사는 이 역사구분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이런 시대구분이 그의《말세와 예수의 재림》에 단 한번 나올 뿐이다. 그러나 이런 시대구분 방법은 세대주의자들과 성결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널리 보편적으로 이용되던 방법이었다. 아마도 필자의 견해로는 김응조목사가 세대주의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하여 이런 시대구분을 전면에 내어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세번째로 김응조 목사는 계시록에 대한 미래주의적인 해석을 따른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대로 역사적 전천년설은 이미 계시록의 예언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대주의는 계시록의 예언이 과거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상준은 그의《묵시록 강해》에서 이 미래주의적 해석을 따른다. 김응조 목사도 이런 입장을 유지한다.

김응조 목사는 그의 요한계시록 강해에서 과거적 해석, 역사적 해석, 미래적 해석, 영적 해석의 네 가지 해석법을 말하고 있다. 과거적 해석은 요한계시록은 기록될 당시의 역사적 사건들을 다룬 것이라는 관점이다. 여기에서는 계시록은 기독교와 로마제국의 갈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역사적 해석이란 대부분의 계시는 이미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고 일부는 현재 성취되고 있으며, 일부는 미래에 성취될 것이라고 본다. 여기에서는 기독교와 천주교의 갈등이 주된 관점이다. 영적 해석이란 계시록의 사건이 특별한 역사적인 사건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요, 신자가 악마의 세력과 싸우는 영적인 전쟁을 묘사한 것이라고 본다. 미래주의적 해석은 계시록 4장 이하의 모든 내용이 미래에 속한 것으로 그 주내용은 그리스도의 공중재림과 지상재림, 그리고 7년 대환란에 대한 내용이 주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김응조 목사는 교부들과 영적 대가들이 따른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 해석방법이 일부 신자들을 미신적으로 빠지게 하기도 하였지만 이 방법을 옳은 것으로 인정한다.

네번째로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은 다니엘서의 세대주의적인 해석에 기초하고 있다. 세대주의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다니엘서 9장 24절에서 27절 사이에 나오는 70주에 대한 해설이다. 즉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멸망부터 천년왕국의 도래까지는 70주라는 것이다. 이 70주는 일반적으로 490년을 말한다. 계시록에서는 1일은 1년을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멸망 이후 천년왕국의 도래까지는 490년이 걸린다는 것이다. 이 70주(490년) 가운데 처음 7주(49년)에 예루살렘이 회복되었다. 이것은 느헤미야가 돌아와서 예루살렘성을 개축한 것을 말한다. 다음 62주(434년)에는 예루살렘성의 개축부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때까지이다. 문제는 마지막 1주인데 다니엘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원래의 계획에 의하면 1주(7년) 후에 천년왕국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 변수가 생긴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그래서 원래의 계획에 없던 새로운 시대가 생겼다. 이것이 교회의 시대이며, 또한 은혜의 시대라고도 말한다. 이 교회시대는 원래의 계획에는 없는 시대이며, 따라서 이 시대가 얼마만큼 계속될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교회시대가 지나간 다음에 7년 대환란이 오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온다는 것이다. 김응조 목사의 다니엘서 강해는 이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구약의 예언은 이스라엘에 관한 예언이며, 교회에 관한 예언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구약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한 것이지 교회의 등장을 말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교회의 등장은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이루어질 천년왕국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점에서 김응조 목사는 이런 해석을 부분적으로 수정하여 받아들인다. 그는 천년왕국은 단순한 유대인의 회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잘못된 유대인의 견해를 수정하여 보다 완전한 왕국으로 완성한다는 것이다. 즉 천년왕국은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김응조 목사는 구약의 예언에 대하여 이스라엘과 교회를 엄격하게 분리하는 극단적인 세대주의의 입장보다는 이스라엘과 교회를 어느 정도 겹치는 것으로 이해하는 온건한 입장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다.

다섯번째,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은 휴거론을 받아들인다. 아마도 휴거론이야말로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의 가장 대표적인 이론일 것이다. 김응조 목사는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4 : 17, 요한계시록 12 : 5, 마태복음 24 : 40 등을 근거로 하여 신자가 환란 전에 공중으로 휴거하여 공중에 재림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 휴거 이론 때문에 그리스도의 재림은 공중재림과 지상재림으로 나뉘어지고, 공중재림과 지상재림 사이에 7년 대환란이 나오게 된다. 이것이 역사적 전천년설과도 다른 점이다. 역사적 전천년설은 휴거도 공중재림도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환란 이후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할 뿐이다. 따라서 휴거 이론이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만들어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휴거 이론은 단순한 묵시문학적인 드라마가 아니다. 여기에는 기존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가 내포되어 있다. 즉 이 세상의 교회는 점점 속화되어 가고, 동시에 참된 신자는 점점 보기 힘들게 된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신앙을 지킨 신자들은 신랑되신 예수께서 공중에 재림하실 때에 불러 모아서 그들과 공중 혼인잔치를 벌이신다는 것이다. 즉 휴거이론 속에는 기존 교회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는 것이다. 김응조 목사는 어느 정도 이 점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여러 곳에서 현실교회에 대한 실망을 말하고 있다. 교회는 점점 속화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는 계속 순수한 교회에 대해서 역설하고 있으며, 이것이 그후에 성결교회를 분리하는 사상적인 배경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김응조 목사는 특별히 환란전 휴거설을 믿고 있다. 성결교회는 해방 이후 휴거에 관한 문제를 놓고 진통을 겪었다. 즉 6.25전쟁의 와중에서 대구의 최정원 목사를 중심으로 환란통과설을 주장한 것이다. 환란통과설이란 신자도 7년 대환란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김응조 목사의 태도는 일단 환란통과설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환란통과설을 신자의 휴거를 반대하는 것으로 이것은 비성서적이라는 것이다. 성서에는 분명하게 신랑을 맞이할 다섯 처녀와 버려둘 다섯 처녀가 있고, 공중으로 데려갈 신자가 있음과 동시에 버려둠을 당할 신자가 있다(마태 24 : 40∼41)고 말하고 있다. 즉 휴거가 성서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데려감을 당하지 못한 자 가운데서 적그리스도와 싸워 순교할 자도 있으므로 환란을 통과할 신자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휴거설을 전제한 것이다. 따라서 김응조 목사는 환란전 휴거설을 믿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결교회는 환란통과설을 주장한 최정원 목사의 주장은 잘못된 주장으로 정죄하여 성결교회에서 축출하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은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그만의 경우는 아니다. 한국 성결교회가 그렇고, 한국교회도 일반적으로 보아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전천년설이라는 것은 분명히 밝히면서도 자기의 전천년설이 세대주의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은 한국의 장로교회가 세대주의라는 용어를 쓰기를 싫어하며, 이것을 비판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6.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의 내용과 특색 : 실천적 측면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은 종말론은 기독교 신학의 제일 마지막에 있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의 모든 것을 종말의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맞는 말이다. 최근의 성서신학자들은 초대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는 종말이며, 그리고 그 종말의 빛 아래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해석하였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현대신학도, 현대신약학도 종말론이 기독교 신학의 중심에 있어야 된다고 본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 점에서는 김응조 목사도 마찬가지이다. 그에게서 종말론은 신학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학의 핵심을 결정하는 요소이다. 특별히 이것은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더욱 분명하다. 그의 삶의 대부분은 그의 재림론의 빛 아래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재림론은 단지 신학의 한 이론일 뿐만이 아니라 모든 행동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김응조 목사에게서만 보는 독특한 것은 아니다. 김응조 목사는 한국의 보수주의적인 신학의 일면을 대표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재림론이 어떻게 그의 생활에 구체적으로 연결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의 보수주의를 이해하는데 매우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에는 역사에 대한 비관주의가 흐르고 있다.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주요한 문제는 현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역사를 하나님의 역사로 보느냐 아니면 악마의 역사로 보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전천년설은 현재의 역사를 비관적으로, 그리고 악마의 역사로 본다. 전천년설, 특별히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은 항상 역사에 대한 비관적인 생각에서 출발했다. 영국의 달비는 영국교회가 하나님의 도구가 아니라 적 그리스도의 도구라고 생각했으며, 19세기 말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문명은 인류를 진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락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전천년설은 인간의 진보를 믿는 낙관주의에 대항하여 인류 역사의 비관적인 측면을 부각시킨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역사에 대한 비관주의가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이 후천년설을 비판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김응조 목사는 현재의 세상을 "마귀가 있고 그리스도가 없는" 세상이라고 규정하며, 이런 세상에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전혀 비성서적인 생각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천년왕국은 예수님께서 먼저 지상에 재림하셔서 마귀의 세력을 결박한 다음에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그는 지금 세상과 마귀의 지배, 다가올 세상과 그리스도의 지배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전천년설의 이런 비관주의적인 역사이해는 문명의 발달을 진보의 표징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종말의 표징으로 이해하게 한다. 김응조 목사는 말세의 징조로서 항상 교통의 발달과 지식의 증가를 들고 있다. 그는 현대과학의 결과를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이런 것들에 대해서 놀랄 것도 없고, 떠들것도 없다. 다만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은 말세라는 것과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깝다는 것뿐이다"고 지적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천년설의 반문화주의, 그리고 반지성주의를 볼 수 있다. 또한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전천년설은 항상 과학의 동향에 대해서 민감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과학의 진보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은 과학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가 아니라 이런 과학의 진보가 성서의 말세의 징조를 보여주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전천년설과 과학과의 묘한 결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역사에 대한 비관주의는 왜 한국의 보수주의가 역사의 참여에 대해서 소극적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서 한국기독교는 사회참여를 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를 놓고, 사회참여를 주장하는 진보주의와 이것을 거부하는 보수주의의 양측이 심각하게 대립하였다. 사회참여를 주장하는 진보적인 그룹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서, 모든 세상에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비해서 보수주의는 사회참여는 인간이 천년왕국을 건설하려는 인본주의이며,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천년왕국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서만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김응조 목사는 "기독교는 수양이나 이지(理智)의 종교가 아니다. 따라서 개조의 종교도 아니다. 기독교는 신조(新造)의 종교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심과 같이 타락한 인류를 새로 창조하여 새 사람을 만들어서 신천지에서 영원히 살게하는 것이 목적이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사상의 배후에는 지금 공중권세를 잡은 현 세상에서 진정한 역사의 발전은 없다고 보는 비관적인 역사이해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둘째,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은 보수주의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다. 이미 샌딘이 지적한 대로 20세기 근본주의의 배경에는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 전천년설은 20세기에 들어서서 자유주의를 배격하는 데에서 제일 앞장서 왔다. 특별히 근대교회사에서 가장 신학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성서에 대한 고등비평이다. 고등비평은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직접 씌여진 책이 아니라, 사람들이 여러 자료들을 모아서 편집한 책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주의적인 미국 기독교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이것을 반대하기 위해서 일종의 보수적인 연대가 이루어졌다. 사실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가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인 해석이다. 세대주의는 성서는 가능한 대로 있는 그대로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인 태도는 구약의 예언은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의 회복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은 문자 그대로 올라가신 모습과 같이 육체적으로 인격적으로 이루어지며, 천년왕국은 교회시대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지상에 임하는 왕국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하나의 아이러니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이런 문자적인 성서해석은 이른바 정통주의적인 성서해석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주의의 고등비평이라는 문제에 직면한 보수주의 그룹들은 이런 차이점들에 대해서 눈 감고, 성서의 문자적인 해석을 공통분모로 하여 보수적인 연대를 이루었다.

김응조 목사는 말세의 중요한 징조로서 거짓 선지자의 등장을 말한다. 그는 거짓 선지자의 대표적인 사례로 자유주의와 특히 고등비평을 들고 있다.

"'거짓 선지자는' 유사종교의 탈을 쓰고 신비주의와 미신으로 유부녀를 유혹한다. 그러나 더 무서운 거짓 선지자는 교회 안에 숨어서 신학자와 교수의 탈을 쓰고 소위 자유신학, 신신학, 현대주의신학이라는 명칭하에 성경의 이적 기사를 부인하고 성경을 과학으로 해석하며 성경유오설과 목적영감설 등으로 성경의 권위를 박탈한다."

사실 근대 복음주의에서 가장 근본적인 신학논쟁은 성서의 영감에 관한 문제이다. 자유주의는 여기에 도전하였고, 보수주의는 이것을 수호하였다. 성서를 어떻게 보느냐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김응조 목사의 전천년설적인 재림론은 그와 그가 속한 예수교대한성결교회를 보수주의 신학의 보루로 만들게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결교회의 신학의 새로운 변화를 보게 된다. 그것은 성결교회가 그 본래적인 체험적인 복음주의에서 교리적인 보수주의로 바뀌어 간다는 것이다. 원래 성결교회의 목적은 정통교리의 수호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통교리가 기독교의 복음을 온전하게 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전제 아래 성서의 복음을 온전하게 전하려 한다는 의미의 온전한 복음(Full Gospel : 이것을 한국에서는 순복음이라고 번역하였음)을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세워진 교단이다. 따라서 성결교회는 원래 순복음의 전파가 목적이었지 정통교리의 사수가 목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김응조 목사와 예성은 자유주의와의 싸움에서 정통신학의 사수를 기치로 내세웠고, 따라서 보수신학을 자처하게 되었다. 이런 것은 예성이 그의 신학대학원의 명칭을 보수신학원이라고 명명한 것, 그리고 김응조 목사가 자신의 조직신학책을《성서적 정통신학》이라고 명명한 데서도 잘 찾아볼 수 있다.    

셋째로,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은 순수한 교회를 지향하게 하였다. 이미 위에서 지적한 대로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은 그 출발부터 타락한 세상과 타락한 기성교회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하였다. 그리고 순수한 교회를 지향하였다. 공중으로 들림받아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교회는 타락한 세상교회가 아니라, 순수한 신자들의 모임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말세에 해야 할 일은 바로 이런 순수한 신자들을 모아서 신랑되실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물론 미국의 세대주의자들이 이런 초기의 세대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이런 일반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여전하고, 아울러 순수한 교회를 지향하는 마음도 강하게 작용하였다. 사실 이러한 순수한 교회에 대한 갈망이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논쟁이 1920년대 이후에 강하게 나타났을 때 많은 교회로 하여금 자기의 본래의 교파에서 분리해 나와서 새로운 교파를 만들게 하였다. 이런 신학적인 맥락에서 김응조 목사의 교회론을 이해할 수 있다.

김응조 목사는 원래부터 순수한 교회에 대한 깊은 바램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성결교회가 일제의 신사참배정책에 순응할 때 성결교회를 떠나게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그는 교파 자체에 대해서 큰 중요성을 두지 않았다. 교파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교파를 떠나서 자유롭게 전국을 다니며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 6.25동란으로 한국교회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부딪히고, 성결교회가 인재를 필요로 할 때 그는 성결교회에 다시 복귀하여 서울신학교의 교수로, 이어서 성결교회의 총회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가 총회장으로 일할 때 내세웠던 표어가 교단의 정화였다. 그는 구체적으로 구제품을 둘러싼 의혹, 성직자의 세속사업에 대한 관여, 세속정치에 대한 관여 같은 것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정화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구호에 그칠 뿐 실지로 달성되지는 못했다. 그 자신의 표현대로 용두사미가 되고 만 것이다.

김응조 목사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예성과 기성 분열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선교사의 타락이다. 원래 성결교회는 순수한 신앙과 순수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모토로 하였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직접전도이다.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전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동양선교회 원래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교단의 선교를 구제품을 나누어 주는 것을 방편으로 하여 전개하였고, 이런 과정에서 끊임없는 분쟁의 씨앗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결교회는 직업적인 선교사와 그들과 타협한 교역자들 때문에 분열했다는 것이다. 김응조 목사는 이런 요인이 WCC, NCC 가입과 연관되어 결국 기성과 예성이 갈라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김응조 목사의 이런 사상의 배후에는 교회를 신랑되신 예수의 신부로 보는 교회관이 자리잡고 있다. 신부는 신랑에게 대하여 정조가 있어야 한다. 그는 "기독교는 정조의 종교이다. 만일 기독교가 정조를 잃었다면 죽은 종교이다"고 말한다. 그런데 기독교가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는 탈속해야 한다. 현재의 기독교는 속화되었다. 교회는 속화되어 사회사업단체로 전락하고 말았고, 선교사들은 전도보다는 구제품 나누어 주는 일에만 전념한다. 그러나 교회는 여기에서 탈속해야 한다. 주님을 가시밭의 백합화라고 한다면 교회도 가시밭의 백합화여야 할 것이다. 이런 순수한 교회에 대한 갈망은 결국 기존교회를 속된 교회로 판단하고, 여기에서 분리하여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세우는 방향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등장하는 새로운 주제가 성별(聖別)이다. 교회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성별이  ICCC 기관지의 명칭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넷째, 김응조 목사의 재림사상은 복음주의적인 삶의 원천이다. 많은 학자들은 재림론을 타계적인 것으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사실 종말론은 기독교 신학의 어떤 것보다도 더욱 신자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측면에서 어떤 학자는 "전천년설은 그 이론보다 실천이 좋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실지로 19세기 말부터 근대 복음주의의 삶에서 종말론보다도 신자들의 일상적인 삶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종말론은 한편으로는 지루하고 수치스러운 교회의 분열과 교리 논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를 수호하고, 신자로 하여금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게 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는 종말론의 보다 적극적인 측면을 말하고자 한다.

김응조 목사는 먼저 그의 재림론을 성결론과 연결시켰다. 원래 그가 1918년 일본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환상으로 보았을 때, 그가 처음 반응한 것은 성결이다. 즉 신랑되신 예수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성결교회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인 두 주제의 결합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는 무엇보다도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 따라서 재림은 역사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지금 역사 속에서 최선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김응조 목사는 공중에 휴거될 수 있는 자는 죄와 상관이 없는 자, 책망을 받을 필요가 없는 자, 곧 성결한 자를 지칭한다고 말한다. "주를 만날 자의 유일한 조건은 성결이다.……  주님이 성결하시니 그의 신부될 자도 성결치 않으면 그의 배필이 될 수 없다. 이는 그와 우리가 일체된 까닭이다."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은 성령 충만한 삶을 강조했다. 원래 세대주의는 성령의 은사와 역사는 초대교회에만 나타나고 그 이후에는 사라졌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19세기의 성결운동과 오순절운동은 이것을 변형시켜서 받아들였다. 즉 말세에는 성령의 새로운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을 말세의 늦은비운동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말세의 가장 중요한 표징은 성령의 역사와 은사의 부흥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종말운동과 오순절운동이 서로 만난 것이다. 물론 김응조 목사는 성령의 은사운동은 신비주의라고 반대하였다. 하지만 그는 말세에 신랑되신 예수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열처녀처럼 등불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재림의 준비로서 성령충만을 강조하였다. "유대인에게는 신랑을 맞는 유일의 조건이 등불이다. 열 처녀가 다 같이 등은 가졌으나 다섯 처녀는 기름이 부족하므로 신랑을 맞이하지 못하였다. 등을 신앙에 비유하면 기름은 성신이다. 성신을 받지 못한 사람은 주를 영접할 수 없나니라"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은 선교적인 열정으로 이어졌다. 김응조 목사는 말세의 증거로서 온 세계에 복음이 전해진 것을 말한다. 이것은 마태복음 24장 16절의 말씀에 근거한 것으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해진 다음에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주장이다. 김응조 목사는 이미 온 세상에 복음이 전해졌으므로 이제 곧 종말이 온다고 주장한다. 이런 종말과 선교의 결합은 19세기의 복음주의자들에게 잘 나타나 있다. 즉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19세기 말에 나타난 이른바 학생자원운동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촉진하기 위해서 이 세대안에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자는 전천년설적인 선교론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사실 이런 신학에 근거하여 동양선교회는 일본의 방방곡곡에 복음전도를 계획하였고, 여기에 김응조 목사는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런 신학적인 배경아래 그는 열정적인 부흥사로서 복음을 전하였다고 생각된다.

다섯째,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은 그를 정치적으로 본다면 우파에 속하게 만들었다. 일제시대 재림사상은 성결교회로 하여금 일본에 대하여 이중적인 자세를 갖게 만들었다. 하나는 친일적인 자세이다. 일본은 당시에 러시아의 공산주의를 두려워하였고, 여기에서 반공을 중요한 기치로 내세우게 되었다. 기독교는 이 점에서 일본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이렇게 기독교가 일본의 입장을 지지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전천년설이다.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전천년설의 붉은 용이 공산주의라고 생각하였다. 다른 편으로는 일본과의 갈등이다. 물론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의 주인이 천황이냐 아니면 예수냐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전천년설의 시온주의도 한몫을 하였다. 전천년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종말의 징조라고 가르쳤고, 이것은 반 시온주의를 강조하는 독일과 같이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있는 일본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재림사상은 일본정부와 손을 잡게도 하고, 일본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게 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이 강하게 등장하게 되는 배경에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재림의 징조로 이해한 종말론자들에겐 1948년 실제로 이스라엘이 독립하자 이것이야말로 자신들의 주장이 틀림이 없다는 확신으로 받아들였다. 재림사상을 전한다고 박해를 받은 사람들로서는 이것보다 더 큰 위로는 없었다. 김응조 목사가 재림론을 가장 활발하게 전하고 다닌 것은 바로 이 때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재림의 징조로서 여러 번 강조하였다.
        

"무화과나무는 유태나라를 가리킴이다. 유태인의 동향은 시대상 지침이요, 예언 연구의 중추이다.……1948년 5월 15일에 이 기(유태국기)를 세우고, 대통령 와이즈만 박사의 영도하에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으나 후에 유엔에 가입하여 당당한 독립국가로서 세계의 일원이 되었다. 2천 년간 말라죽은 무화과는 기적적으로 부활하였던 것이다.……이 모든 것을 보거든 "인자가 문에 가까이 이르리라" 하셨다. 이 모든 예언이 역사적으로 우리 눈앞에 전개됨을 볼 때 주의 재림이 임박함을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의 침략이다. 해방 후 얼마 안가서 6.25전쟁이 일어났고, 남한은 공산주의와 싸워야 했다. 특별히 기독교는 원래 공산주의와 대립되는 종교였다. 공산주의는 기독교를 공격했고, 기독교는 공산주의에 대항했다. 특별히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은 공산주의를 계시록의 붉은 용으로 묘사하였다. 이 점이 역사적인 전천년설과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의 주요한 차이점이다. 역사적 전천년설은 계시록의 붉은 용을 천주교 세력으로 보는 데 비하여 세대주의자들은 이것을 공산주의로 보려고 하였다. 이런 생각은 6.25 이후 공산주의를 가장 큰 적으로 생각하는 한국사회에 매우 적합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냉전체제에도 맞는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서 김응조 목사와 한국의 보수주의는 정부와 발을 맞추어 반공을 내세우게 되고, 이런 각도에서 소련의 정교회와 손을 잡은 WCC를 매우 위험한 세력으로 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이 미국의 보수적 우파의 정치관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대주의가 미국의 보수적 기독교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미국의 보수주의와 보수적인 기독교는 다같이 친 이스라엘 정책과 반 공산주의 정책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 점에서 한국의 보수주의가 어떻게 한국의 반공정부와 손을 잡을 수 있는가는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가장 비정치적인 전천년설이 사실은 가장 보수적인 정치적인 이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7. 맺는 말

이상에서 우리는 근대 교회사에 나타난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을 역사적으로 살펴보고, 그것이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위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19세기 후반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한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은 한국교회와 한국성결교회에 널리 받아들여져 왔고, 이것이 거의 그대로 김응조 목사의 재림론에 반영되어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것은 신학적인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실천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에 나타난 보수주의의 핵심에는 바로 이 전천년설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것이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본질의 사수라는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또한 한국교회의 수많은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한국교회에서 전천년설이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단지 서구의 선교사들이 이런 신학을 가져왔기 때문이 아니다. 한국적인 상황이 전천년설을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이 땅에서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고,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희망을 갖기보다는 절망을 느꼈다. 공산주의의 위협은 계속되어 왔다. 또한 서구에서 밀려드는 새로운 신학은 한국교회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교회는 교권 싸움을 계속하였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전천년설은 많은 보수주의적인 신앙인들에게 안식처와 위로가 되었다.

지금 한국교회는 한국사회를 이끌고 나아가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을 악마의 역사로 보는 부정적인 세계관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구현하는 보다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는 김응조 목사의 재림사상으로 대표되는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종말론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계승해야 하는가 하는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다. 분명 천년왕국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새 세상이 열린다는 전천년설의 주장은 성서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이 반문화적으로 흘러 신학의 학문적인 노력을 게을리하거나, 순수한 교회를 지향한 나머지 교회분열로 나가거나 한다면 안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19세기 말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을 지지하면서도 동시에 세계선교를 위해서 노력했던 피어선은 캠벨 몰간(Cambell Morgan)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면서 재림을 믿는 신자의 사명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달리는 경주는 하늘나라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얻기 위해서이다.……한 가지 일은 "저 죽어가는 자 다 구원하시고"를 부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멸망하는 자들에게 내려가서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