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조의 신학 사상(1)

- 해방 뒤 그의 생애를 중심으로 -

 

한숭홍(장신대 교수)

목회와 신학 1991년, 10월호

 

  해방과 더불어 다시 부흥운동에 나섰다 이(1945년)는 내 나이 벌써 4자를 넘어서 50세가 되었다. 인간 활동은 50부터라는 옛사람의 말도 있거니와 나는 이제부터라고 믿고 새출발 하였다.

 

Ⅰ. 들머리

해방과 더불어 한국기독교 교단마다 교회재건운동은 매우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신사참배 거부로 장로교와 감리교의 수많은 교회와 기독교 학교들이 폐쇄되기도 했고, 성결교와 동아기독교 교단 등은 재림사상으로 말미암아 강제 해체되어야 했던 교회수난의 시대는 끝났다. 교단마다 숨어서 지켜왔던 신앙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되자 먼저 통회하는 자세로 하나님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힘을 모아 형제들의 반기독교적 친일행위를 용서하며 그들이 저지른 우상숭배의 죄를 용서하고 교단 재건에 힘을 합했다.

따라서 일제 말기의 교회핍박으로 설 곳을 잃고 산촌에 머물며 민족의 수난을 눈물의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숨어살던 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목사들도 해방과 더불어 다시 각각 소속 교단에 복귀하면서 새로운 출발에 힘을 쏟았다. 일제의 어용 교회단체였던 일본 기독교단에 딸린 조선교단에 가입하여 일제 압잡이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팔아 먹으면서 우상숭배의 선봉에 섰던 목사들과 교회대표들과 이들의 친일교회정치에 반대하며 성서적 교회정책을 주장, 고수하며 지조를 더럽히지 않고 옥살이를 하다 순교한 많은 성도와 목사들 그리고 목숨만은 부지하며 병든 몸으로 해방과 더불어 출옥한 이들 모두는 우선 교회재건과 하나님 앞에 자복하는 통회의 제단을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Ⅱ. 펼침

영암 김응조 목사도 인생 후반기에 접어든 50대의 생을 “새출발”의 전기로 생각하며 힘찬 발걸음을 내디딘다. 그는 해방 뒤 자신의 심정과 활동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해방과 더불어 성결교는 그 어느 교단보다도 활발하게 교회재건에 정력을 쏟았다. 성결교는 사실 원점에서 출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롭게 조직되어야 했다. 1936년 성결교 연차총회에서 교단분열로 하나님의 교회라는 한 파가 갈라져 나가면서 총회는 연회로 바뀌어졌다. 총회장직이 없어진 교단에서는 이사장에게 총회장에 준하는 직무를 맡겨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1940년에는 성결교단을 유지해오던 선교사들마저 철수하고 1943년 12월 29일 교단해체령에 따라 교단이 해산되어 버렸기 때문에 해방을 맞아 과거의 성결교 교단 목사들이 함께모여 재건을 시도했다는 것은 사실 새로운 출발점에서 시작한 부활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1945년 9월 10일 재건총회가 열렸다 해방 후 성결교 재건상황을 이천영의 성경교회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결교회가 어둡고 고(苦)롭던 3년의 밤이 지나고 8,15해방의 먼동이 텄다. 지하(地下)에 동면(冬眠)생활을 하던 교직자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잣 벌레가 굽히는 것은 장차 전진할 자세(尺擴之屈將而爲伸)라는 말과 같이 3년간 엎디여 기도로 영력(靈力)을 기르던 주(主)의 종들의 활동(活動)의 때는 온 것이다.

해방의 기쁨과 교회재건의 희망에 찬 교회 지도자들의 움직임은 비단 성결교단 뿐만 아니라 다른 개신교 교단도 마찬가지였다. 교회는 이런 북새판에서도 부흥회를 갖고 흩어진 신앙자세를 가다듬고 하나님을 배반했던 죄를 자복하며 성령의 감화, 감동을 고대하기에 이르렀다.

김응조 목사는 해방과 더불어 먼저 신앙부흥을 통한 하나님의 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자신의 신앙신조와 확고한 복음전도인의 자세로 교파를 초월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그의 자서전 은총 90년에서나 그의 생애와 신학을 간단히 쓴 크리스챤신문에서도 해방부터 1950년 625사변 때까지의 기록은 언급하고 있지 않아 해방 뒤 5년 동안의 행적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은총 90년 표제지 뒷면에 90년간 약력란에서 “1945. 9. 10-1950. 6. 24 : 조국해방(祖國解放)과 동시에 초교파적 부흥운동으로 장, 감, 성, 침(長, 鑒, 聖, 浸) 4교파(四狡派)를 중심 부흥운동을 함”이라고 간단히 적혀있다. 성결교단 해체 이후 거의 7-8년동안 그는 부흥회를 인도하며 지냈으나, 특히 해방 뒤 5년 동안에는 “새출발”의 자세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정력을 쏟았다.

해방 뒤 제2의 삶을 시작하는 각오로 새로운 기분과 희망으로 가득찬 김응조 목사는 조직에는 별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일제때 중부지방 감리목사로 조직의 한 책임을 맡았고 일제의 지도, 지시를 받았던 조직의 책임자라는 직책상의 역할 때문에 본뜻과는 다르게 당해야했던 여러 가지 악몽같은 과거의 오류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조직일선에 가담하여 나서지 않은 듯하다. 아마 그는 겸허한 자세로 통회의 모습을 간직하고 묵묵히 그러나 불같이 뜨겁게 오직 신앙과 성화, 성결을 강조했는지 모른다 일제에 십자가와 신앙절개 마저 팔아먹고 그들의 앞잡이로 행세하던 많은 친일파 목사들 신사참배 목사들이 해방과 더불어 재빨리 변신하여 민족주의자인 체하는 작태가 신앙일변도의 종말론자 김응조 목사에게는 너무도 뻔뻔스럽고 파렴치한 것으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가는 곳마다 신앙의 기적같은 교회부흥을 선도했으며 복음전파 말고는 다시 어떤 것에도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 교회는 빨리 원상회복을 했으며 양적 증가도 눈에 띄게 나타났다.

해방을 따라서 각교회가 문을 열고 교회재건에 노력한다. 닫혔던 문이 열리고 교역자는 일터를 찾아오고 신자는 각기 본교회로 찾아온다. 청년들도 교회로 모여오고 옥중에서 전도를 받은 사회에 유수한 인물들이 교회를 찾아온다. 정부의 요인들도 거개가 신자이다. 실로 교인이 아니면 출세 못한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선교사들이 속속 돌아와서 선교사업에 활동한다.신자들은 경쟁적으로 교회당을 신축하고 사회사업에 솔선한다. 실로 눈부신 활동이다. 그러나 양적 부흥이 있는 곳에 질적 부흥은 무엇인가 공허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전쟁은 한국민족과 역사의 비극으로 기록되고 있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기독교계에서는 해방으로 되찾은 조국을 복음화하겠다는 굳은 자세로 열심히 활동했으나 무신론을 표방하는 공산주의자들의 남침은 민족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도 엄청난 피해를 안겨주었다. 점차 성장하던 교회도 다시 피난길에 흩어지며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순교로써 복음을 지켰으나 교회지도자를 잃은 신도들과 교단은 다시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김응조 목사는 서울에서 피난을 못간 채 맞이한 6,25를 직접 겪으면서 생사의 기로에서 하나님의 끝없는 은총을 체험하게 되었다. 9,28 서울 수복 때 쫓기던 인민군에게 붙잡혀 스파이로 몰려 죽을 뻔했다. 도망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뒤 그는 자신이 살아있음이 부활인 것처럼 실감되었다. 그 당시의 기분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항상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했고 극적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확신하였기 때문에 그의 신앙은 늘 불같이 타올랐고 그의 삶은 주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끊이지 않았음을 믿었다. “한국 동란 때에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 김응조도 1,4 후퇴 때는 피난을 갔다. 그리고 피난지 부산에서도 그는 신앙의 불길을 활활 태웠다 그는 이렇게 당시 상황을 진술하였다.

피난 시절 김응조는 민족의 비극으로 슬픔과 자기상실의 허무주의에 빠져 내일없는 생활을 하고있는 사람들의 심령을 다시 생동력있도록 하는 일은 신앙부흥회라고 생각했던 것같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들이 청하는 곳에서 부흥회 인도를 계속했다. 그는 자신의 집회에서 많은 감화, 감동을 받고 심령의 위로와 삶의 용기를 찾는 것을 무엇보다 주님에게 감사하며 바쁜 사역의 일을 계속했다.

한편 일제말엽 일제가 강제로 폐간한 성결교의 신앙지 [활천(活泉)]이 해방 후 복간된 다음 몇호만을 내고 재정난으로 쉬고있던 때에 전쟁이 터졌다. 피난 때에 모인 1952년 피난총회는 무엇보다 활천을 속간하는 것이 지금 이러한 절망의 시점 생명력의 소진상태에서 매우 적절한 사업이라고 결의하여 출판을 시작했다. 속간사에는 이런 글이 실려있다.

이처럼 활천 속간은 복음 진리 신앙을 이끌어가는 잡지로 그 활력소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생기를 주고 모든 영혼에 공기를 북돋아주는 활천”으로서 성결교 “교단 재건에 생명수(生命水)가 된 것”이었다.

1953년 5월 활천 속간호가 첫선을 보였으며 총회는 집필진으로 이명직(李明稙), 김응조(金應祚), 문이호(文履活), 황성택(黃聖澤), 이천영(李泉泳)등을 선출하여 위임했다. 김응조 목사는 부흥회 집회 인도와 활천지 집필위원으로 월간지에 신앙의 글을 쓰면서 총회사업에 힘을 모았다. 교단측에서도 영향력 많은 그의 힘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김응조의 신앙과 신학노선이 그대로 활천을 이어 내려갔다.

서울신학교는 전쟁으로 문을 닫은지 1년만인 1951년 부산에서의 총회결의에 따라 피난 신학교를 개교하기로 했다. 이 결정에 따라 1951년 6월 14일 동래온천교회에서 신학과를 개학하였다. 교수진은 피난 중이었으므로 거의 없는 상태였고, 찾아온 신학생들도 영육이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이었다. 식비가 없는 학생들이 학비를 낼 수도 없었으며, 더욱이 숙소마저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강의실은 숙소요, 예배실이요, 기도실이었으며, 연구실이기도 했다. 그래서 1952년 봄에 금정산 기슭 빈터에 새교사를 짓고 이전하여 차츰 학교모습을 찾아갔다. 학생이 200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을 가르칠 교수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교수진을 새로 구성하기에 이르렀고 김응조 목사도 교수로 임명되었다.

50년대 김응조의 활동은 두 가지로 특징지을 수 있다.

첫째 그는 오직 신앙을 내세우며 내세적 신학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이런 종말론적 신학사상은 6,25전쟁으로 더욱 강조되었고 그의 강론과 부흥집회 설교들은 시대의 상황에서 방황하던 절망의 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다. 그는 이로써 이름을 얻었고 그의 조용한 사역 의지는 불같이 활활 타는 열기로 가득찼던 것이다. 그가 한국기독교사에서 대부흥사의 한 인물로 기록되는 것은 그에게 잠재된 감동적 언변과 그에게 내린 성령충만의 은총이 아니고는 불가능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둘째 그는 6,25를 계기로 해방 후 5년 동안의 조용한 시간을 청산하고 기관과 기구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참여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활동가며 정력에 넘치는 교회사역과 기관책임자였던 김응조가 이제 다시 교단과 한국기독교를 위한 한부분의 일이나마 담당하려는 것은 어쩌면 당시로서는 필연적이었는지 모른다 지도자가 없고 또 자기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때에 그만이 개인적 삶에 파묻혀 개인적 신앙인의 길을 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교단의 기관지에 집필을 하고 교단 신학교에서 교수를 하며 교회 연합집회를 인도하며 적극적이고 바쁜 매일을 항도 부산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는 교단에서 그의 지도능력이 높이 평가되고 존경받기에 이르렀을 때에 그에게는 교단 최고의 책임이 주어졌다. 1957년 성결교회 희년이 되는 해에 그는 성결교 제11대 총회장으로 피선되어 교단을 책임지고 이끌어가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이처럼 그는 부흥사로 교수로 총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오늘의 성결교 신학형성에 큰 부분을 담당했던 것이다.

1957년 10월 그는 희년 사절로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6개월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그는 간증과 한국 교회의 신앙을 설교하였다. 전쟁으로 파괴된 예배당 재건을 위한 모금도 했다. 그 당시를 그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그는 그가 받은 당시 미국 교회의 분위기를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1960년대는 김응조에게 더욱 많은 활동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어쩌면 성결교회사에서 그의 행동에 대한 극단의 평가가 내려질 수도 있는 모험도 감행한 시점이었다. 지금까지는 그에게 대한 신학적 평가나 교회정치적 평가가 한국기독교사에서 이렇다 하게 내려진 바 없으나 앞으로 평가작업이 누구에 의해서 진행되더라도 김응조의 1960년대 활동은 매우 논란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신학노선 문제에서 교단분열의 현실로 그의 생애 궤도가 이어졌기 때문에 그 책임의 문제를 묻는 역사적 평가일 것이다.

교단 분립에 관해서 김 목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고집장이” 김응조의 신앙은 항상 보수주의 강경노선이었다. 그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이나 에큐메니칼 신학에 반대하며 극단의 칼빈주의적 신앙과 신학경향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성결교단이 신학방향을 설정하는 마당에 NCC에 머물려는 세력과 NAE(한국복음동지회)에 머물려는 세력 사이의 갈등과 분열을 직시하면서 분열―비방―불법―통합으로 이어지는 한 흐름을 방관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할 때라고 생각하고 증경총회장으로서 성결교의 원로로서 자신의 신앙노선을 행동으로 나타냈다. 사회정치적 현상과 교회정치적 이해관계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져서 신학교는 진통과 교단분열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이제 분열은 현실적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했으며 누가 먼저 분열과 분파에 앞장섰느냐가 관심거리였다. 성결교회의 역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순복음을 보수하겠다는 김응조의 고집은 그를 새로운 교단, 새로운 신학교의 책임을 지도록 소명하였다. 이 문제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이천영의 성결교회사와 김응조의 자서전에서 몇곳을 직접 찾아 보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기성측의 역사진술에 대하여 우리는 또 다른 진술을 대조하여 분석함으로써 당시 교단분열의 분위기를 정확히 관찰해야 할 것이다.

김응조 목사는 자신에 대한 이러한 지탄과 비판을 다음의 글에서 간접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ICCC에 가입하게 된 동기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960년 12월 부산에 임시 합동총회를 열고 가입을 결정하였다. ICCC는 세계에 124개 단체가 가입한 세계 기독교 연합체이다. 절대 보수로서 WCC를 상대해서 일어난 단체이다.

그는 이렇게도 진술하였다.

진리보수에 있어서 한국교회사는 장로교의 경우 박형룡 박사를 “한국의 메이첸” 혹은 “제2의 메이첸”이라고 부르듯이 성결교 신앙고백을 따르는 사람들에게서는 김응조 박사를 “한국의 맥킨타이어” 혹은 “제2의 맥킨타이어”라고 불러도 별로 오류가 없을 것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신앙보수주의를 고집했기 때문에 “고집장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으며 철저한 성서주의와 칼빈주의적 신앙중심주의 때문에 정통주의자로 분류되기도 했다.

박형룡이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을 고집하며 신앙의 객관적 실체를 주장했던 반면에 김응조는 순복음과 성령의 역사를 확신하며 신앙의 주관적 실체를 주장했던 것이다. 두 사람이 한국기독교 발전에 끼친 영향도 매우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러나 박형룡이 성서의 권위를 강조함으로 말미암아 정통주의에 빠져있다면 김응조는 신앙의 열화를 강조하므로 말미암아 성화주의에 빠져있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수 있다.

교단분립으로 뛰쳐나온 예성은 신학교 건물도 없는 형편에 신학교육을 해야했다. 그는 1962년 5월 8일 미국 훼이스 신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를 받기 위하여 출국하였다. 그러나 그의 출국목적은 학위받는 것 뿐만 아니라 신학교 설립기금을 모으는 것과 그해 8월에 화란 암스테르담에서 열리는 ICCC세계대회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금은 예정되로 되지않았다. 그는 한편으로는 낙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이번 기회에 신학교가 하나 생길 줄 알았더니 생각과는 천양의 차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앞일을 주님게 맡겼다 그의 기도는 성몽으로 환청되어 들려졌다.

성결교신학교는 1962년 9월 20일 설립되었다. 그 경로를 그는 이렇게 약술하고 있다.

1974년 8월 이곳에 6층(6층중축) 1500평 새교사를 현대식으로 건축하니 한국에 둘째가라면 서러우리만치 훌륭한 신학교가 되었다.

우선 우리는 김응조 목사의 개인적 야망이나 생애 가운데 과실을 평가하거나 비판하기에 앞서, 한 개인으로서 그것도 재벌로서가 아니고 오직 목회자로서 분파하여 나온 새교단을 본궤도에 올려놓았고 더나아가 신학교를 설립하여 그의 신앙노선을 따르는 목회자들을 키워내었던 그 능력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학교 하나를 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데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여 신학대학을 육성했던 그의 교육사업은 그의 신앙과 더불어 어떤 모습이나 형태로든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가 성결교 교단 분열의 총수처럼 기술된 역사기술 뒷면에서 우리는 그의 신앙과 정열이 하나님의 사업에서 구현된 실상을 찾아 그의 인물 자체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아래와 같이 소개했다.

김응조 목사는 1974년 1월 60년 동안 동거하던 사모와 사별한 뒤 그해 7월 김효순(金孝順) 전도사와 재혼하여 여생을 ①신학교 교수 ②영암 선교사업 ③각 교회로 다니면서 설교로 돕는 일로 대외활동을 하는 일에 보냈다. 그와 동시에 왕성한 저술활동도 계속했다. 한국의 3대 주석가로 공인되는 그의 영해작업은 방대한 양과 깊은 신앙으로 쓰여진 대작이다. 그가 1926년부터 1983까지 부흥회를 인도한 것은 426개 교회였으며 교파를 떠나서 그의 집회가 계속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1937년 [실천신학 목회학]의 출판을 시작으로 1985년까지 41권이나 되는 신학서적들을 저술하였다. 이 저서들은 자서전이나 설교집은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분량면에서 4판 인쇄지면으로 16,967쪽에 이르며 원고지 분량으로 약 85,000-90,000매에 해당하는 글을 썼던 김응조는 과히 일생을 손과 발과 입의 사람으로 하나님에게 헌신한 표본이라고 하겠다.

그의 주저서는 [구약성서대강해전] 3권(1959, 1960, 1960), [신약성서대강해전] 3권(1961, 1961, 1962), [성서적 정통신학](1969), [구약역사철학](1970), [성서대강해전] 12(1980,1981), [사중복음](교리서, 1985)등을 꼽을 수 있다. [나는 기도해서 얻었다](1971)는 책은 103번이나 기도해서 얻은 자신의 간증을 모은 신앙간증서이다. 그리고 [성서적 정통신학](1969)에서는 성결교 신학의 핵심인 ①중생(重生), ②성결(聖潔), ③신유(神癒), ④재림(再臨)의 교리적 해석을 성서를 중심하여 풀이한 책이다.

 

Ⅲ. 마무리

우리는 김응조에게 신앙의 다양성이 없다고 평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신학은 깊이가 없기 때문에 학파를 이룰 수 없다고 단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서 과학주의에 빠진 기교적 신학놀이나 신학의 논리를 사회이념의 도구화에 사용하거나 반대로 사회이념을 그리스도의 진리처럼 둔갑하려는 현대의 많은 학설과는 다른 순수한 복음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신학은 변질되지 않은 순정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그의 생애와 신학에서 그의 신앙과 사역에서 그의 헌신과 고집에서 부정적인 면보다는 오히려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면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게서 기독교인의 신앙양태를 보는 것이며 기성화된 신학의 도구주의가 아니고 진지하게 믿고 믿음의 확신 가운데 영적 체험을 갖는 참된 신앙인의 자세를 볼 수 있다. 여기에 성결교 1세기를 동행했던 한 인물의 크기와 넓이가 함께 있는 것이다.

그는 1991년 4월 17일 오전 7시 50분 향년 96세를 일기로 소천했다. 그의 삶은 한국기독교사에서 한획을 그었으며 특히 “성결교=김응조”로 연상될 정도로 성결교의 상징이며 표현으로 우리의 기억에 남는 분이다.

 

 - 주요저서 -

[실천신학목회학](1937), [부인설교집](1939), [말세와 예수재림](1954), [성서아동 설교집](1937), [사막의 생수](1954), [부흥의 불꽃](1954), [다니엘서강의](1953), [설교예제 5백문제](1955), [기독전](1956), [바울전](1956), [성서절기설교](1959), [하늘의 만나](1967), [하나님의 장막](1968), [기독교 2천년사](1968), [황야의 과객](1968), [성서난해구해석](1968), [신구약성서답안](1968), [구약성서대강해] 제3권(1959,1960), [신약성서대강해] 제3권(1961,1962), [성서적 정통신학](1969), [구약역사철학](1970), [모범 설교 500제](1937), [하늘의 매일 메시지](1971), [나는 기도해서 얻었다](1971), [성서대강해제12권](1980,1981), [사중복음](1985),  

- 설교집 -

   [생수를 주리라](1988)

 - 자서전 -

   [은총 90](1983)

 

(주)

1. 김응조, 은총 90년 p66

2. 김응조, “나의 생애와 신학”(5), 크리스챤신문(1980. 6. 28), 제2면

3. 이천영, 성결교회사(서울:기독교 대한 성결교회 출판부 1970 p93

4. 김응조, 은총 90년 p 67

5. 김응조, “나의 생애와 신학”(5), 크리스챤신문(1980. 6. 28), 제2면

6. Ibid,

7. Ibid,

8. 이천영, 성결교회사 p112.

9. Ibid, p 113

10. lbid, p112

11. lbid, pp 112113

12. 김응조, “나의 생애와 신학”(5), 크리스챤신문(1980. 6. 28), 제2면

13. 김응조, 은총 90년 pp 69-70.

14. 김응조, “나의 생애와 신학”(5), 크리스챤신문(1980. 6. 28), 제2면

15. 김응조, “나의 생애와 신학”(6), 크리스챤신문(1980. 7. 5), 제2면

16. 이천영, 성결교회사 p 157.

17. lbid, pp 151-152.

18. 김응조, 은총 90년 p 98.

19. lbid, p 98.

20. 김응조, “나의 생애와 신학”(6), 크리스챤신문(1980. 7. 5), 제2면

21. 김응조, 은총 90년 p 105.

22. lbid, p 105.

23. 김응조, “나의 생애와 신학”(6), 크리스챤신문(1980. 7. 5) 제2면

24. 김응조, 은총 90년 p 125

25. lbid, 40pp 248-255(나의 순회 부흥집회, 1926년에서 현재까지).

26. 저서목록은 은총 90년 pp 246-247에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