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레의 생애와 신학

Ⅰ. 요한 웨슬레의 생애의 개관
Ⅱ. 요한 웨슬레의 회심 동기와 체험
Ⅲ. 요한 웨슬레의 神學

Ⅳ. 현대에 주는 의미

 

Ⅰ. 요한 웨슬레의 생애의 개관

요한 웨슬레(John. Wesley)가 태어날 당시 영국은 청교도 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또한 합리주의의 물결이 계몽주의 형태로 표출되고 있었다. 그리고 토마스 페인에 의하여 불신앙의 사상이 영국 전역을 강타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설교는 냉랭하고 대부분의 도덕적인 내용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18세기에 영국에서 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인물 중의 한사람이 요한 웨슬레였다. 이 복음주의 운동이 발전되고 확장되어 결국에는 감리교회를 이루게 되었다.

요한 웨슬레는 사무엘(Samuel)과 수잔나(Susannah) 사이에서 19남매 중의 15번째로 1703년에 영국 엡워스(Epworth) 지방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설교자였으며 교회에서 충성된 봉사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웨슬레 가문의 계보를 살펴보면 그의 조부였던 바돌로메 웨슬레는 그의 집안에서 최초로 옥스포드에서 학업을 연마했다. 그리고 도체스터의 요한 화잇씨의 영향과, 결혼하여 사무엘을 낳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웨슬레의 부친이었다.

사무엘은 그의 나이가 20세가 될 때 그의 독립 교파를 떠나 영국 교회로 교직을 옮긴 후에 옥스포드 대학에서부터 칼리지에 급비생으로 입학 그는 기골이 장대한 쾌남아였다.

요한 웨슬레는 어렸을 적에 그의 어머니인 수잔나로부터 여러 가지의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에게 글씨를 쓰는 법, 논문 쓰는 법 등을 웨슬레는 어릴 적부터 철저하게 교육받게 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교육의 영향은 또한 그의 장년기의 집필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웨슬레의 가정은 넉넉하지 못했다. 항상 빈곤에 시달리는 생활을 하게되었고 그의 아버지인 사무엘 마저도 주위의 인심을 잃은 터이라 그의 가정 생활은 어려운 편이었다. 웨슬레가 어렸을 때에 그의 가정에 큰 화재가 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화재 속에서도 많은 그의 가족들은 단 한명의 부상자도 없이 모두 무사히 구출되게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 웨슬레는 하나님께 감사했고 그의 설교에서도 이 구원의 사건을 많이 인용하곤 했다. 웨슬레의 아버지인 사무엘도 웨슬레의 교육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그의 재학 중에 보낸 서신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렇듯이 그의 유년 시절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씩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0세 되던 때에 요한 웨슬레는 차터 하우스 스쿨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가 아주 어렸기 때문에 이시기는 그에게 있어서 상당한 어려움의 시기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시기에 그에게 있어 어려움의 시기만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유명한 음악가인 헨델과 펩쉬를 만나게 되었고 또한 특별한 교제와 친분 관계도 가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음악을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도 이루어졌던 사실을 알 수 있다.

1720년 첫여름에 차터하우스를 떠나 옥스포드에 있는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그는 언술에 있어서도 뛰어났고 작문에도 상당한 소질을 소유하게 되었다. 1724년 웨슬레의 가족은 우릇으로 이사를 하게되었다. 물론 그 당시 역시 그의 가정은 부유하지 못했다. 이로부터 5년 후에 그는 링컨 대학의 특대 교우생으로 뽑히어 금전상의 어려움은 면하게 되었다.

1725년 웨슬레의 나이 22세 되는 원기 왕성하고 발랄할 때 그의 생애에 커다란 전환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이때에 자신의 장래에 대하여 번민하게 되었고 또한 심사숙고한 끝에 성직을 맡기로 결심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아직도 신의 불꽃이 희미하였으며 영적 경험을 사모하는 마음이 적었다.

그가 감명을 받은 책은 토마스 아켐피스(Tomas a Kempis,1380∼1471)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테일러(Jeremy Taylar,1613∼1677)의 "거룩한 삶과 죽음"이라는 책과 로우(William Low,1686∼1761)의 "중대한 부름"이라는 책과 "그리스도인의 완전론"이란 명저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또한 이러한 것들의 영향으로 1725년에 웨슬레는 그의 모친과 함께 "예정설"을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요한 웨슬레가 안수 받아 집사가 된 것은 1725년 9월 19일 주일 옥스포드에 있는 크리이스 처치 교회당에서 옥스포드 감독 요한파터에게서였다. 1726년 3월 17일 웨슬레는 링컨 대학의 특정 장학생이 되었다. 이로부터 25년 이상을 이 대학교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지냈다. 웨슬레는 또한 면학가였다. 링컨 대학에 있으면서 히브리어, 아랍어, 라틴어, 논리학, 윤리학, 철학, 물리학, 웅변학, 시가 신학등 그의 연구 방면은 상당한 범위에 걸쳐 있었다. 또한 그는 그 당시 웅변가로서도 상당한 명성을 떨쳤다.

1729년 웨슬레는 옥스포드 대학의 부름을 받아 다시 모교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당시에 그의 동생으로 챨스 웨슬레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웨슬레는 찰스와 함께 옥스포드 등에서 신성 클럽을 만들어서 성경 읽기를 구휼 운동에 참여했다.

감리회의 창설을 말할 때 요한 웨슬레를 생각하나 찰스 웨슬레의 공적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웨슬레는 처음부터 재능과 재질과 그의 영성을 인정받아 이 단체의 회장으로 취임되었다. 이들의 최초의 사업은 성경 연구였다. 이들은 일명 "신성구락"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리만큼 신앙의 경건함을 중시하였다. 이들의 모임은 보통 다음과 같은 일을 했다. 첫째 희랍어 고전문학을 연구했고 성경 공부를 한 뒤 간단한 저녁 식사로 모임을 마치곤했다. 이들의 첫 열매는 "구휼운동"이었다. 옥중의 사람들에게 부채자들에게 병자들에 그밖에 여러 가지 봉사 사업에 노력하였다.

이 작은 단체는 비록 해산되어 그 존재는 사라졌으나 성실과, 높은 이상과, 신의 은총을 겸한 이 세 청년 즉, 웨슬레 형제와 휫필드의 신앙과 생활은 처음에는 한 대학을 깨우쳤고, 그 다음에는 영국 전역에 믿음의 불을 일으켰고, 나중에는 바다를 건너 북미 대륙과 전세계에 거룩한 신의 불꽃이 일게 하였던 것이니, 이 불꽃이 처음 반짝인 곳은 경건한 청년 몇이 뜻을 합하여 모였던 신성구락부(The Holy Club)였다.

1735년 4월 25일 웨슬레의 부친인 사무엘은 72세의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사무엘이 죽은 이후 엡윗교회의 목사직을 웨슬레가 맞았으나 끝까지 하지 못하고 더욱더 큰 꿈을 앉고 옥스포드로 돌아오게 되었다. 옥스포드로 돌아와 웨슬레는 동생 찰스 웨슬레와 휫필드(1714∼1770)와 함께 또다시 강력한 신앙의 불꽃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또한 1735년 10월 18일 오글레돕 장군과 함께 220톤의 "시몬즈"호를 탔다. 이때부터 그의 해외 선교는 시작되게 되었다.

첫번째 그의 해외 선교는 처음에는 좋았으나 착수한 지 만 2년이 좀 지났을 무렵 그에게는 불행한 연애 사건이 생기어 이 사건과 함께 1735년 12월 2일 캐롤리아로 가는 2,3인의 친구를 동반하여 귀국의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1738년 2월 1일 웨슬레는 본국에 도착했다. 결론적으로 웨슬레의 조지아(Georgia) 선교는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조지아 선교의 일이 그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경험이었다. 그의 조지아 선교는 또한 여러 면에 있어서 많은 유익을 끼쳤으니 뒤에 오는 선교사들에게 겸비한 마음과 굳건한 의지를 가질 수 있게 한 점이라든지, 휫필드로 하여금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가 유력히 일할 수 있는 충동을 준 것이라든지, 뒤에 오는 카톨릭 선교사를 선도하여 북미 대륙에 동 교회를 설립함에 실패가 없게 한 점 등은 다 웨슬레 선교가 끼쳐 준 공헌이다.

그는 조지아 선교 후 휫필드의 경험을 살려서 야외 설교에 박차를 가했다. 이후 웨슬레는 브리스톤에서의 전도 활동에 큰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야외 설교에 참여한 많은 신자들은 웨슬레의 설교를 듣고 울부짖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는 이도 있었고 심한 경우에는 실신하는 이도 있었다.

물론 케이커 교도들은 이러한 현상을 조소적인 태도를 가지고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모두 성령에 인도하심에 의해서 이루어 졌음은 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다. 웨슬레는 그 당시 영국 교회로부터 이단자라는 격렬한 말을 들었다. 하지만 웨슬레는 끝까지 자기는 영국 교회에서 분열되어 나오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또한 영국교계에서는 웨슬레를 비난하는 공경하는 소책자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웨슬레는 끝까지 믿음으로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또는 자기는 사람들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의무가 있다고 말하면서 또한 유명한 "온세계는 나의 교구이다."라는 말을 힘차게 역설했다. 그의 말대로 웨슬레는 1724년부터 런던, 브리스톨, 웨일즈, 뉴케슬 등지를 순회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의 소식을 전하였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어렸을 적부터 정신적인 지주가 되셨던 수잔나 웨슬레는 위대한 종교 운동가를 낳고 길러낸 일 이외에도 웨슬레와 함께 전도 사업에 자기 몸을 헌신하였다. 또한 가난한 살림살이와 수다한 자녀들로 더불어 파란 많은 생애를 살다가 1742년 7월 23일 73세의 일기로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떠났다.

웨슬레의 전도와 설교는 결코 간단하고 손쉽게만 진행되지는 아니하였다. 도중에 많은 폭도들로부터 습격을 당하는가 하면 돌팔매질까지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악랄하고 과격한 폭도들까지도 웨슬레의 기도와 설교를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둘씩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실로 이러한 일들은 웨슬레를 통한 성령의 역사가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감리교 사에 있어서 저 유명한 그의 신도회(Society)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이고 상호 유기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하였기에 이 체계는 오늘날까지도 감리교회에 존속하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속회(Class meeting)이다. 이 속회 제도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1742년 브리스톨에서였다. 속회는 한 신도회를 보다 작은 단위의 집단으로 나누어 거기에 지도자 한사람 씩을 두어 지도 감독하게 한 것이다.

또한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전도인의 기본적인 성격은 물론 신앙이다. 하지만 지식의 함양도 전도인에게 있어서는 빼놓을 수 없는 기본적인 성격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리하여 1766년 리쯔회의에서는 '가장 유익한 것은 서적을 읽는 것이며 ……… 꾸준한 노력으로 아침 시간을 독서에 쓰라. 24시간 중에 적어도 5시간을 독서에 쓰라………독서에 취미를 기르라. 그렇게 못하겠거든 전도 사업을 그만두고 그대의 원직업으로 돌아가라'고 독서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또한 웨슬레가 말한 전도자가 갖추어야 할 점은 첫째 금·은등을 절대로 받아서는 절대로 안된다.라고 강력하게 역설하였다. 이렇듯 웨슬레는 그의 종도사업에 철저한 강령을 만들었다.

1769년에 북아메리카에 메도디스트교회를 창설하였는데 그때 나이는 이미 70고령에 이르렀다.

요한 웨슬레가 70의 고령에 이르렀을 당시 그는 노드경에게 자기는 매년 5천 마일의 여행을 하였으며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물론 웨슬레의 여행은 대개가 馬上旅行이었다. 그는 습관처럼 항상 말 위에서도 독서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길로 그에게 있어서 마상 여행은 즐겁고 낭만적인 여행은 결코 아니었다. 때로는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고 또한 매섭고 세찬 바람에 살을 에인적도 있었고 눈으로 뒤덮인 산을 넘다가 눈구덩이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웨슬레는 전도자나 설교자로서도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한 사회 사업가로서 저술가로서도 재주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70세의 고령의 나이로도 쉬지않고 주를 위해 끝까지 일을 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주를 위해 헌신하였다.

1791년 3월 2일 오전 6시 88세의 생을 일기로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심혈을 기울여 쌓은 탑은 해와 달과 더불어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요, 그의 위대한 정신은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여러 백만의 교도의 머리 속에 또한 가슴과 마음속에 오고오는 세대와 함께 남아 있을 것이다.


Ⅱ. 요한 웨슬레의 회심 동기와 체험

1. 웨슬레의 신학적 발전에 끼친 올더스케이트 체험의 의의

1738년 5월 24일 「그날 저녁에 나는 마지못해 올더스케이트(Aldergate)의 거리에서 모이는 집회에 나갔더니 어떤 루터의 로마인서 주석의 서문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9시 15분전쯤 하여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일으키시는 변화를 설명하고 있을 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 한분만을 의지한다고 느꼈으며 그가 나의 구원을 위해 죄를 없게 하시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하여 주셨다는 확실한 증거를 받았다.」

이상은 웨슬레가 올더스케이트에서의 체험을 자신이 밝힌 글이다.

웨슬레의 생활과 그의 설교가 당시의 영국 국민에게 끼친 영향을 생각할 때 그가 그날로부터 그의 마음 전체를 웨슬레의 종교적 체험과 그의 생활은 물론 그의 사상의 분기점이 된다. 거기서 그는 처음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의 참뜻을 배웠기 때문이다.

올더스케이트가 이에 앞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에서 웨슬레가 진정으로 배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믿음을 가지게 될 때 사람은 내증을 얻게 되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 안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지 않고 고의적으로 죄를 범함으로써 그 귀한 믿음을 소멸시킨다면 낮이 있은 뒤에는 필연적으로 밤이 오듯 하나님의 교제는 끊어지게 되고 내증도 가질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2. 웨슬레의 초기 의인관의 붕괴

웨슬레의 초기 의인관을 와해시킨 주요한 요인은 그 자신 안에 있었으며 이것은 불확신, 의심, 때로는 순수한 공포의 형태로 나타났다.

자신의 구원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었으며 영원한 애정도 그 자신의 활동과 자신의 마음의 의향과 자신의 의지력으로 능히 좌우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놓였다고 확신하여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어떤 도덕적인 퇴보나 영적인 패배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자신과 자기 의존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이와같은 믿음의 관점에서 볼 때에 이상을 조금이라도 낮추거나 실제적인 성취를 이룩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비참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구원 자체가 근거한 바로 그 기초를 파괴하여 버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비와 행위와 경건한 예배를 통하여 이와같은 자신을 언제나 굳게 가졌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조지아 선교시 그는 어떤 어린이에게 세례 베풀기를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어린애의 양친이 머리에 물을 끼얹는 일에 반대하였기 때문이었다. 물로써 세례를 주는 것은 병자에의 안수를 제외하고는 모든 경우에 있어 행해지는 영국 교회의 법이었던 것이다. 그가 서버나의 어떤 여자에게 반하여 그녀와 결혼하기를 간청한 후에도 그 문제를 모라비안 교회의 장로들에게 물어 보았다. 장로들이 그들의 결정에 따르겠는가 하고 웨슬레에게 물어 보았을 때 그는 그 결정이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하면서 "예, 따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웨슬레는 언제나 자신의 영적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을 가질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영적 발전에 위함을 주거나 방해를 주리라고 생각한 그 어떤 것도 조심스럽게 경계하였다.

그의 미국 항해와 조지아에서의 목사 생활과 아메리카 토인들과의 접촉으로서 그는 비로소 그가 주장한 교리가 부적당함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보라 내가 가난한 사람에게 밥을 주기 위하여 내 있는 힘을 다하였고 모든 사람들보다 더많은 수고를 하였다. 나는 내 친구나 명예나 안일이나 나라까지도 다 내버렸다. 나는 생명을 내걸고 외국 땅을 헤매었으며 몸을 골짜기에 내 맡겼고 뜨거운 열에 태웠고 노고와 피로에 지치고 여위었으며 또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내 몸을 내어맡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들이실까 내가 지금까지 행한 모든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있을까? 은혜 받는 온갖 수단을 언제나 쓴다면 가능할까? 나는 나 자신을 알지 못한다. 내가 사람을 감화시키는 힘이 강하고 도덕적 의는 책망할데가 없는가? 기독교의 모든 진리에 대한 합리적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이 모든 것을 인하여 내가 그리스도 인의 거룩하고 성스러운 특색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까?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요 우리가 율법과 계명을 지켜야 한다면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것이 되고 정당하고 선한 것이 되지만 믿음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배설물과 같은 것이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기에 합당할 뿐이다."

그러면 믿음과 행위가 구원을 얻는 방법이 아니면 그 진정한 방법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방법은 무엇일까?

3. 모라비안 교도의 영향

대서양 횡단 여행을 하는 도중에 웨슬레는 처음으로 모라비안 경건 주의자들과 접촉하였다. 그는 그들의 품행, 겸비, 인내성, 욕설을 참는 마음 등이 매우 신중함을 발견하였으며 특히 용기 있고 아무런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지 않음을 보고 탄복하였다.

웨슬레는 모라비안 교도들이 화평과 즐거움 속에 살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 교회의 원시적 소박함과 그들이 죽음을 태연하게 달게받음을 보았다.

그가 조지아에 도착한 후에 스팽겐베르크(Augustus Gottlieb Spangenberg, 1704∼1792)가 자신의 입으로 그의 옛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하실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無知蒙昧하다. 나는 어린아이다. 내 아버지께서 잘 아시니 그가 부르실 때면 언제 어디라도 갈 각오가 있다."

그가 조지아에 있을 때 스팽겐베르크가 물었다.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성령의 증거를 마음 가운데에 가졌는가? 하나님의 성령은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그대의 영에게 증거 하던가? 그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가? 그대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대를 구원 하셨다는 것을 아는가? 그대는 그대 자신을 아는가?"라고. 지금까지 웨슬레는 자신의 영적 생활의 실태를 이렇듯이 심각하게 검색하는 질문을 받아 보지 못하였다. 이 문답이야 말로 웨슬레의 조지아 선교에 앞선 항해 중에 얻은 최대의 수확이 있다고 할 것이니 스팽겐베르크 목사와의 대화 중에 웨슬레의 마음속에서는 섬광이 한번 번쩍이었다.

그가 영국으로 돌아와서 옥스포드에 있을 때 피터뵐러(Peter Bohler)는 그에게 "나의 형제여 그대의 철학은 더욱 세련되어야 하겠습니다."라고 일러주었다. 그때부터 약 2주일 후에 뵐러는 "믿음을 가질 때까지 믿음을 전하라 그러면 믿음을 얻을 것이니 그 다음에는 그대가 믿음을 가졌으므로 그 믿음을 전할 것이다."고 권면하였다. 영국 교회에서도 역시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로로 힘입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모라비안 교도들은 이것을 좀더 인격적인 면에서 파악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전체로서의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으나 중요한 것은 그가 한 인격으로서 그대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이다."라고 가르친다.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사람이 의로운자로 받아들여지고 죄책에서 자유해졌다고하는 법적인 선고 이상의 것이다. 이제는 죄가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나누어 놓지 못한다. 도리어 죄만이 사람과 하나님의 어린양을 감동시켜 사람을 긍휼히 생각하고 양의 피를 힘입어 사람을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가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심과 동시에 우리를 성화 시키고 모든 불의로부터 우리를 성결하게 하신다. 모든 것은 우리 위에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역사이신 까닭에 우리 자신이 하는 일이란 하나도 없다. 1732년 1월 24일 헌 후드 교회에서 Upper Lusayia의 회장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졌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오신 그리스도만을 언제나 강조하였습니다. 우리가 올바로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이루어지리라는 것만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역설합니다."

4.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

웨슬레는 그의 인격이 여하하고 또 그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겠는지를 자문자답 하기에 지쳐 버린 나머지 하나님께서 구원의 조건을 제시하실 뿐 아니라 인간 안에서 구원을 실제로 이루신다고 모라비안 교도들도 주장한 바 있는 종교 개혁자의 교리에 귀의하게 되었다. 그가 1738년 5월 24일 밤 루터의 로마인서 주석의 서문을 듣고 루터의 사상을 분명히 깨달았다.

그는 언제나 선한 행위를 할 때마다 불쾌한 감을 가지거나 억지로 하게된다는 것을 자기 자신의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기에 사람은 행위를 가지고 결코 선을 쌓을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하여서는 다른 곳으로 가서 찾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믿음에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그 믿음은 인간 안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이시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살아 있는 확고한 신념이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하고 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천만번이라도 거기에 목숨을 내걸 수가 있다.

이와같이 하여 웨슬레는 올더스케이트는 중생의 체험을 한지 18일 후인 1738년 6월 11일에 옥스포드 광장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란 제목의 유명한 설교를 하였다. 또한 그가 모라비안 교회의 중심지 헌 후드에서 순례 여행을 끝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바로 그 다음날인 1738년 9월 17일주일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고 죄인들에게 회개할 것을 외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감리교회 부흥 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그 이유는 감리교라는 이름이 1729년부터 웨슬레와 그의 옥스포드 클럽 동료들에게 불리워졌고 후년에 웨슬레 자신도 그 해를 사회적인 현상으로서의 감리교회의 기원 연대로 정하였으나 1738년에 웨슬레가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외치기까지는 감리교회의 세력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거나 혹은 감리교회 회원 외의 사람들에게는 별로 영향 준 바가 없는 하나의 적은 클럽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받을 가치가 있는 한 가지 선행도 할 수가 없고 어떠한 품격도 갖출 수가 없다는 것을 웨슬레는 그의 설교에서 언제나 역설하였다. 죄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역사에서 오는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란 "말로 다 할 수 없는 선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라는 말밖에는 아무런 할 말이 없다. 이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죄를 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위는 행위 자체가 악이다. 이는 썩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힐 수 없으며 사람의 마음이 완전히 타락하여 사악하기 때문이다. 선한 행위가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5. 회심에의 결론

웨슬레에게 있어서 은혜는 구원의 근원이요 믿음은 그 조건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하나님에게서 부터만 오며 하나님만이 양자의 유일한 원인이 되신다. 모라비안 경건주의의 영향과 올더스케이트에서의 그 자신의 체험의 결과를 웨슬레는 새사람이 되었다. 즉, 그의 믿음의 중심이 변하여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며 모든 인생을 자신의 영적인 자아 확장으로 평가하던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전 인류를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그의 사랑의 대상으로 보고 사랑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그의 종교의 중심이 변함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의인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인간이 언제나 두려움과 떨림으로 선행을 쌓는 악전고투를 하여야 구원을 성취할 수가 있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게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의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창발적으로 역사 하시는 행위이며 인간에게 값없이 주시는 믿음의 선물이며 죄인을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며 예수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새로 짓는 것이라고 웨슬레는 생각했다.

인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임재하시게 되면 의롭다 함을 받는자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자는 참으로 중생하게 된다. 그는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생활을 하게된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게 감추어진 새생활이다. 의인의 교리는 이기적이고 연약하고 천한 본연의 인간에게 호소하게 하여 인간은 여기서 힘을 얻어 그가 원하는 이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6. 웨슬레 회심의 의미

첫째로 웨슬레의 회심은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말한다.

앞에서 말한 웨슬레의 가문이 주는 신앙적 유산과 신학적인 그의 신앙에 확신을 주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성직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내적인 갈등과 공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가 미국 조지아 주에 인디안 선교를 위해 떠날 때에도 실상은 자기 자신의 변화를 기대하였으나 인디언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회심하지 못하고 허탈한 상태로 영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런던 올더스케이트의 작은 집회에 참가하여 마음이 뜨거워짐을 경험하였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님으로 영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오랫동안 기독교적 분위기에서 살고 지도자로 자처하였지만 그리스도가 자기를 구원하기는 주님으로 자기의 삶의 중심으로 믿고 고백하며 실천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처음으로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의 새로운 자기 발견이고 자기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의 전향을 의미한다.

웨슬레는 이 회심의 경험에서 멈추지 않고 여러번 재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고 거듭나므로 그리스도처럼 완전에 이르는 신앙적 훈련과 헌신을 일삼았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강조하였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이것을 기독교 사상의 극치로 본 것이다.

그의 변화는 자기 중심 곧 자기 교만과 신앙적 회의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으로 모시는 인격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변화된 인격의 신앙을 형성해야 하겠다. 인간 중심주의 권위주의 배타주의 형식주의를 떨쳐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 살아가는 말과 행동의 일치를 지향하는 인격적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다.

둘째로 웨슬레의 회심은 새로운 교회를 탄생케 하였다.

당시 영국 교회는 상류층 중심으로 제도화되고 경직된 상태로서 생명력을 잃는 시체와도 같았다. 그러므로 산업 혁명의 물결에 따라 밀려다니는 하층 구조에 속한 사람들은 교회로부터도 소외 당하고 있다. 이제 회심을 체험한 웨슬레는 제도적 교회가 그리스도의 빛을 잃었을 뿐아니라 소외 계층의 정신적 신앙적 요청에 응할 수 없는 불구자임을 실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처음에 영국 교회 자체를 복음으로 새롭게 하기 위하여 학문과 토론과 목회적 실천으로 노력을 경주하였으나 그 결과는 오히려 영국 교회부터의 파면이라는 처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국 교회와의 관계를 지속하려고 속회와 신도회에 참여하는 교인들에게 반드시 모교회에 가서 성만찬을 받도록 권고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속회와 신도회에서 신앙 훈련을 철저하게 실천하였다. 훈련받은 평신도 지도자로 하여금 속회의 구성원들의 신앙을 지도하고 생활 지침을 가르치며 그들의 문제에 대한 상담자가 되게 했다. 뿐만 아니라 교육받은 목회자가 부족하므로 영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집회소에서 평신도 지도자들을 훈련시키는데 그 중에는 여성 지도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웨슬레와 같은 시대에 유명한 부흥사 휘트필드가 있었는데 그는 웨슬레보다 부흥 운동을 먼저 시작하였고 인기도 대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향은 당대에 끝이 났고, 웨슬레의 종교 개혁은 오늘도 그 빛을 발하고 있다. 그 이유는 웨슬레는 평신도 훈련에 전력투구하였고 휘트필드는 스스로만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잘 훈련된 평신도는 사회의 각분야에 흩어져서 복음의 선교사로 열심히 활동하여 생기 발달한 감리교회를 창설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교회가 미국교회를 낳았고 우리나라 감리교회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셋째로 웨슬레의 회심은 새로운 사회 변화를 초래하였다.

당시 영국 사회는 엄격한 청교도 윤리에 대한 반작용으로 윤리적 부패가 극에 달하였는데 상류 계층일수록 더욱 심하였다. 또한 초기 자본주의의 무자비한 착취가 난무하므로 노동자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절대 빈곤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유아 사망율이 최악의 상태였다는 것과 노동자의 평균 수명이 30세였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 해주고 있다.

요한 웨슬레는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의 런던의 교회에서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고아원과 진료소를 개설하고 신용협동조합과 섬유 공장을 운영하였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을 위한 세금 감소와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사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평신도들로 하여금 각자가 활동하는 사회의 여러 부분에서 양심운동, 인간화운동,민주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영국 사회 전체를 구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렇듯 웨슬레의 위대함을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을 변화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영국의 사회와 역사를 새롭게 하도록 스스로 미래의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크리스천은 선구자적 예언자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

 

Ⅲ. 요한 웨슬레의 神學

1. 요한 웨슬레의 신학 형성의 배경과 그 운동의 특징

1) 18세기 신학적 영국 국교회의 상황

18세기엔 칼빈주의적인 특성을 갖고 있었으나 말엽에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책임 관계 면에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만민을 위한 것이나 개인의 구원 여부는 개인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곧, 믿음을 하나의 선행으로 보았다. 웨슬레 부모의 신학 역시 구원을 위한 인간의 노력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로 보지 않고, 인간의 도덕적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선행이라고 생각하여 인간 행위로 보았다.

2) 종교적, 도덕적 상황

웨슬레 당시, 18세기 신앙은 자연신론이 성행하여 하나님은 창조주일 뿐 세상의 과정에는 관심 갖지 않고, 우주와 세상은 그 자체의 운명에 맡겨져 있다고 믿었다. 당연히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같은 초월적인 것을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초자연적 요소는 제거하고, 신앙을 이성에 예속시키는 일을 강조했다. 18세기 도덕적 상황은 한마디로 부패 그 자체였다. 문학은 저속하고 철학은 이성의 장난처럼 되어 버렸다. 교회도 부패해 있어 성직이 뇌물에 의해 좌우되는 일도 잦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기독교를 공개적으로 무시하게 되었다. 흑인 노예의 판매가 크게 행해지고 있었던 것을 들어 우리나라의 인신매매와 비교할 수 있다면 음주 향락 폭행이 심한 것과 더불어 현재의 한국 실정과 흡사하다.

3) 웨슬레의 신앙 체험

웨슬레는 목사관에서 엄격한 경건의 훈련을 받으며 자라났다. 웨슬레의 부모는 엄한 규율에 의해 자식들을 양육한다. 기독교는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종교라고 가르쳤으므로 웨슬레 신학 형성에 영향을 준 것은 도덕적 영적 노력과 천국을 위한 행함의 자세라 볼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의 청년 시절의 신앙이 인간 중심적인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는 사람은 선행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고 자신의 의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신성 클럽 활동과 미국 조지아 주의 선교도 결국 자기 영혼의 구원과 자기의 의를 세우기 위한 노력에 불과하다. 후에 그는 이시기를 아들로서가 아니라 노예로서의 신앙을 갖고 있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이런 인본적 신앙이 1738년 5월 24일 복음적 신앙 체험을 기점으로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완전히 변화된다.

4) 웨슬레 신학 운동의 특징

웨슬레 신학 운동은 자신의 복음적 회심 체험 및 성서적 구원의 확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리하여 성서적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려는 운동이었다. 구원을 위한 인간 스스로의 노력은 큰 좌절만 가져다주는 것을 웨슬레는 체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모든 일에 있어 성서적 그리스도 인이 될 것을 결심하고 어디에 있든지 있는 힘을 다해 분명하고 오랜 전통을 가진 성서적 기독교에 대한 설교를 하기로 결심했다. 이 면에 있어서는 웨슬레의 신학 운동이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동기와 비슷하다.

웨슬레의 신학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비슷하며 웨슬레 신학 운동의 특징의 첫째는 정화 운동에 있다.

웨슬레의 신학 운동은 당시 도덕적 타락과 부패로 편만해 있던 개인과 교회를 정화시키고자 일어난 운동이다. 당시의 영국 교회는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무능했었다. 사회의 고위층은 종교에 대해 냉소적이었고 대중은 교회의 영향권 밖에 있었다. 국가 지도층의 부패와 사회가 온갖 범죄가 난무한 상태였다. 그래서 웨슬레는 이 사회를 도덕적으로 회복시키며 교회의 정신을 가져오게 하는 책임과 부담감을 느꼈다. 그는 계속해서 동역자들에게 구한다. "여러분의 한일은 한가지일 뿐입니다. 곧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웨슬레 운동은 처음부터 당시 영국에 있던 순수 기독교를 소멸시키고 있던 외식주의와 형식주의에 반항하는 운동이었다.

웨슬레 신학의 두번째 특징은 창의적 종합에 있다.

웨슬레 신학은 신약 성서에 있는 중요한 요소에 한 학파의 장점들을 창의적으로 종합한대 그 특징과 공헌이 있다. 웨슬레는 종교 개혁자들이 주장한 신약성서에 나타난 주요한 요소들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면서 교회의 각 전통이 지니고 있는 장점들을 결합시키곤 하였다. 웨슬레는 성결의 개념을 로마 카톨릭의 강조에서 가져왔고 그의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만으로 라는 종교 개혁자들의 강조를 채택했다. 웨슬레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와 경건 주의자들이 강조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개념을 창의적으로 종합하여 기독자 완전의 성서적 교리를 수립한 것이다.

2. 웨슬레의 신학

1) 웨슬레 신학의 성서

웨슬레는 자신의 한 책(성서)의 사람이라고 자칭했고, 신앙 체험을 중시했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성서는 그의 신학적인 글이나 교리적인 글의 원천적인 자료이다. 웨슬레에게 있어서는 성서가 그의 신학의 기초가 될 뿐만 아니라 최고 권위였다.

웨슬레는 "성서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한 책이고 그릇됨이 없다."고 믿었다. 또한 웨슬레는 우리가 구원받기에 필요한 진리가 성서 안에 충족히 포함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가 성서를 연구한 것도 곧 구원의 길을 찾기 위해 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바로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기를 원하셔서 친히 하늘에서 이 땅위에 오셨고 예수 그리스도로 계시하고 지금은 그것을 성서에 기록했다고 믿었다. 따라서 웨슬레 신학의 최고의 권위는 성서였다.

지금까지 우리가 상고한 대로 웨슬레는 성서의 권위를 강조함에 있어 전통적인 개신교의 입장-성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최종 권위이다.-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신비주의자들의 강조점을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라는 산말씀-창의적으로 종합했다.

2) 웨슬레 신학의 체험

그는 신학을 성서에서 시작하여 늘 신앙 체험에 호소한다. 웨슬레에 있어 체험은 성서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에 호응하는 것으로서의 체험이다. 그러므로 웨슬레가 말하는 체험은 감정적인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은총에 사람이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성을 존중하고 경험을 고립된 것으로 보기보다 성도의 교제 속에서-교회에서의- 경험을 존중했다.

3) 구원론

웨슬레 신학에 있어 구원론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그의 신학은 전도와 설교의 현장에서 수립되었다. - 그리고 그의 설교의 강조 점이 성결에 있었듯이 그의 구원론이 성결론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웨슬레는 구원이라는 말을 두 의미로 사용하였다. 일반적으로는 현재의 구원과 궁극적인 구원을 포함하여 이를 본연의 그리스도의 구원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웨슬레는 흔히 이 구원을 현재의 구원에 국한시켜 의인과 성화를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성화에 그의 강조점을 두어 구원론을 전개하였다. 또한 구원을 넓은 의미에서 인간에게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포함하여 설명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런 구원은 선행적 은총으로부터 시작하여 영화의 사건으로 종결된다. 그는 죄를 질병에 비유하고 구원을 치유에 비유하였다. 구원의 간계를 죄 문제와 연결시켜 이해할 때 웨슬레의 구원론을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 원죄로 인한 죄책은 하나님께서 감사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선행적 은총,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무조건적인 공로로 해결된다. 그러므로 선행적 은총 아래 있는 인간은 원죄의 부패성만을 지니고 있다. 이 부패성 때문에 이 실존적 인간은 죄를 짓게 된다.

㉡ 죄로 인한 죄책은 의인에서 용서를 받아야 한다.

㉢ 그리고 누적된 죄의 부패성은 성화의 과정에서 씻음을 받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웨슬레는 이 성화가 신생의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어(부분적 씻음)성화의 과정에서 온전한 성화(온전히 씻음)로 그 성장이 계속되어 마침내 영화로 완결된다고 보았다.

㉣ 이 영화의 사건에서는 죄로 인한 모든 흔적 곧 사람이 지니고 있는 모든 제약성과 허약성에서도 해방을 받는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웨슬레의 중요한 관심은 현재의 구원에 있었다. 의인은 곧 죄책에서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리로 회복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의인의 은혜 받기 위한 조건은 "회개하고 믿는 것이다."웨슬레는 믿음의 중요한 요소를 분명한 신뢰와 신임에 두었다. 그리고 사람이 의롭게 되며 실제적 변화로 신생이 있다. 이를 중생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신생을 성화의 과정에서 볼 때 성화의 시작이다. 신생의 표적으로는 설교"신생의 표적"에서 믿음,소망,사랑을 들고 있다.

4) 성화관

웨슬레의 성화관은 그 당시의 여러 학파들과 비교해 볼 때 다음과 같은 세가지 견해가 종합되어 독특한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로, 그 당시 모라비안파의 극단적인 것을 지양하는 점진적인 성장의 개념이다. 우리의 신앙은 사람이 출생한 후 성장하는 것과 같이 거듭난 후에도 성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이것은 그가 인간의 선악에서나 믿음에서나 또는 성경에 있어서 모두 단계가 있다고 보았고 인간은 거듭난 후에도 아직 내적인 죄가 남았다고 기인한다.

둘째로, 웨슬레에게 있어서 이와같이 점진적인 성장의 개념은 순간적인 요소가 종합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의 칼빈주의자의 성화론과 구별되는 점이기도 하다.

셋째로, 웨슬레는 성화의 점진적인 과정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로서 순간에 보다 고차적으로 끌어올리는 단계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가 주장한 성화의 과정에서의 성장은 독특한 것으로

㉠ 회개와 믿음으로 신생함과 함께 성화가 시작되며

㉡ 신자로서의 회개와 믿음으로 온전한 성화 곧 성결하여지며

㉢ 마침내는 영화하는 순간적인 단계에 이른다고 보았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로서의 성화는 종말론적인 목표를 향하여 계속 상승하는 것이다. 웨슬레가 성화 과정에 순간적인 단계가 있다고 주장한 것은 성화가 인간의 수양으로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가 올더스케이트에서의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3. 웨슬레의 선교운동의 특징과 현대적 의의

웨슬레의 선교운동은 역사적으로 그 의미가 지대했다. 현대의 신학자들에 의해 웨슬레의 신학이 현대 신학에 지대한 공을 했음이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세계 복음화 대회에서의 신학적 입장은 웨슬레의 선교 운동이 놀라운 구원 역사를 이룬 사실이 현재의 선교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구체적으로 당시 문화 사회 경제 및 종교 등에 끼친 그의 선교운동의 영향이 너무도 놀라운 혁명적인 것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곡해되어지고 성경의 권위가 무시당하면서 각종 이단 사상과 세속적인 풍조가 종교관에까지 영향을 주어 교제는 물론 사회까지도 극도의 혼란에 빠뜨려 놓은 위급한 이때에 과거 영국에서 일어났던 영적 혁명이야말로 지금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기독교를 공개적으로 무시하던 18세기 영국을 변화시킨 것은 웨슬레의 선교운동이었다.

웨슬레의 선교운동의 특징은 무엇인가?

웨슬레의 선교운동의 특징은 먼저 웨슬레 자신의 회심에서 출발한 성서적 기독교 긍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웨슬레 선교운동이 그의 회심에 대한 확신에서부터 출발되어졌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 선교에 있어서도 귀중한 교훈을 줄 것이다. 선교의 이론이 우선이라기 보다는 먼저 전도자 자신에게 중생의 체험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전도자가 구원의 확신이 없을 때 다른 사람에게 그 확신을 심어 줄 수 없고 자신이 구원받은 감격이 없으면서 남들이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격하도록 만들 수 없다. 이런 감격에서 나온 헌신과 정렬이 아니고서는 변질된 열성 곧 구원이 목적이 아닌 물질이나 명예 등을 목적한 열성 또는 그런 것들을 우선하고 영혼 구원은 부수적으로 생각하는 열성이 될 가능성이 많다.

이러한 체험은 웨슬레에게 "세계는 나의 교구"라는 비전과 그에 따르는 헌신적 생활을 갖게 하였다. 웨슬레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한 목표와 비전 자체가 아니요 거기에 따르는 그의 헌신적 생활인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선교 모임이 세계 선교나 여러 가지 계획과 비전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그 일을 열정과 순수한 헌신적 자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선교 모임이 세계 선교나 여러 가지 계획과 비전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그 일을 위한 열정과 순수한 헌신적 자세가 보이지 않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찍이 웨슬레가 말한바 "하나님밖에는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고 그리스도 그 십자가밖에는 무서워하지 않고 죄밖에는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밖에는 아무도 모르는자 백명만 있으면 온 세계를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말은 세계를 교구로 한 비전을 실현시킬 참된 일꾼들을 찾고 있던 그의 갈망과 가장 구체적인 방법을 보여 주고 있다.

그의 열성은 너무도 잘 아는 이야기이지만 하루에 평균 두 세번씩 설교하였고 매일 90마일씩 전도 여행을 하였다. 회심 후 51년간의 전도 생활을 보면 설교를 4만 2천 4백번 하였고 마상 여행을 25만 마일을 한 셈이다. 그리하여 그가 사망한 해에 영국에 294명의 설교자와 71,668명의 감리교인이 있었고 미국 등 외지에 있는 감리교인을 합하면 교인 약 12만명과 511명의 설교자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숫자적인 경이가 웨슬레의 전도 운동을 대변해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에 못지않은 아니 이를 성취시킨 불타는 그의 구령 열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웨슬레 선교 운동의 두번째 특징은 그의 평신도를 동원하는 조직적인 전도 활동이었다고 본다.

1739년부터 5년간의 순회 곧 전도 여행은 웨슬레에게 있어 전도 전략을 수립하게 하였다. 이 조직이 바로 평신도를 동원하는 전도 운동이었다. 이 조직체의 책임자는 목사가 아닌 평신도였다. 그리고 평신도 설교자를 훈련시켰다. 뿐만 아니라 여자 평신도 전도자를 등용하였다. 오늘날에는 평신도 운동이 활발해지고 있지만 18세기 웨슬레 당시에만 해도 로마 카톨릭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어 사제의 권위를 강조하는 영국 사회에서 평신도가 설교를 한다거나 더욱 여자가 설교한다는 것은 당시 종교계에 대한 도전이요. 일종의 대혁명이며 나아가 사회를 크게 경악케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원래 조그만 신도회라는 모임으로부터 시작된 전도 운동으로 이것이 후에 큰 성과를 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4인의 목사와 45인의 평신도 전도인들로 한 팀씩 만들어 성서적 기독교를 그 땅위에 심기 위하여 쉬지 않고 뛰었다. 그 결과 런던에 2천명 가량의 신도가 모여졌고 속회 제도가 원만히 이루어졌으며 신도회의 연합회 헌장이 발표되었다.

오늘의 선교에 있어서도 교회의 선교 구조가 평신도 중심으로 개조되어야 한다는 말을 늘 듣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선교를 위한 교회의 훈련과 보다 새롭게 진취적인 방법을 개발해야 하는 일이 아울러 요청되고 있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가는 인구와 도시화, 산업화, 분업화하면서 사회가 다양해져 가며 주일에 교회에 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 없는 특수 직장 인들도 많아져 가는 오늘의 특수한 상황이 또한 평신도 중심의 기능적인 선교를 요청하고 있다. 우리는 나 하나 또는 내 교회 하나 만을 아는 근시안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거시적인 안목을 가지고 세계의 일터를 내다보면서 보다 넓게 그리고 보다 멀리까지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선교 구조 개편이 시급한 것이다. 또한 이를 위한 지도자 훈련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세번째 특징은 그의 그의 선교운동에 성결의 복음이라는 건설적이며 훌륭한 신학 사상이 뒷받침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18세기 신학에도 조직신학이 없었으므로 그는 특별히 조직신학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설교를 통해 그의 신학적 교리를 가르쳤다. 웨슬레를 단순히 열정적인 부흥사요 조직적인 전도자로서만 알고 있는 것은 불충분하다. 그의 설교를 주의 깊게 읽어보게 되면 그가 단순히 종교의 체험에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위대한 신학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과거에는 부흥운동이나 선교운동에 무슨 특별한 신학적 뒷받침이 필요하겠는가 생각했으나 최근에도 이 문제를 대단히 중요시하게 다루게 되었다. 즉, 신학의 뒷받침과 그 깊이가 없는 전도는 전도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신학을 공부해야 하며 오늘날 세계 선교는 깊은 신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웨슬레의 설교를 읽으면 그 설교도 오늘날의 흔한 부흥 설교와는 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설교는 신학 연설이라고 할만큼 깊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설교가 18세기 영국에 그토록 놀라운 부흥을 가져왔다는 사실에 우리는 새롭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면 웨슬레의 중심 사상은 무엇이 있나? 한마디로 성결 기독자의 온전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교리는 종교개혁의 슬로건이었고 개신교의 기본 교리라 할 것이다. 웨슬레의 구원론은 성결을 강조한다.

그러면 이 성결론이 오늘의 선교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그 의의는 무엇인가? 예정론에 의한 구원의 확신은 우리를 긍정적인 의미에서 적극적인 헌신의 생활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부정적인 의무에서 이해될 때 "나는 이미 택함 받았으니 내가 무슨 짓을 하든지 버리시지 않으신다."는 방심과 나태와 외식적 생활로 이끌기 쉽고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기 쉽다. 따라서 웨슬레는 부도덕과 극도의 타락 속에 있는 사회의 구원을 생각하였다. 중생이라는 일회적 사건으로 모두 끝난 것이 아니고 성결을 향한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와같이 웨슬레의 성결론은 우리의 선교의 방향과 목표를 분명히 하여준다. 웨슬레의 선교운동은 곳곳에서 회개를 일으키며 많은 결신자를 얻었으나 몇명의 구령이 그의 업적의 전부가 아니었으며 웨슬레의 운동이 영국 사회를 구원하였으나 그가 인권 운동이나 사회 혁명을 주장하는 운동을 했던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일찍이 역사상에 없었던 웨슬레의 사회 구원의 역사는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 그것은 거듭 말하거니와 그의 성결의 복음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실에 그치지 않고 계속하여 성결을 향해 정진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사회를 정화시키고 사회를 구원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기독자의 사회 참여라던가 사회 개혁을 강조하는 때가 과거에 있었던가? 그러나 그러한 강조가 과연 얼마나 사회를 구원하였는가? 한 권력에 대한 반항 운동은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인해 점점 어지러워 가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 필자가 보는 견지에서는 벽에 부딪쳤고 얼마 안 있어 키를 돌릴 것으로 보인다.

웨슬레는 훌륭한 신학자요 동시에 전도자로서 선교에 끼친 공헌과 사회 개혁에 끼친 업적이 너무도 뚜렷하다. 이제까지 웨슬레의 선교운동의 특징을 크게 세가지로 살펴보았으나 문제는 이제 우리에게 있다. 그는 훌륭한 신학으로 사회를 이끌었다. 또 그는 뜨거운 열정으로 그리고 온 세계를 향한 비전을 가지고 조국을 구했다. 우리는 선교 개념을 정돈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확신을 회복하여 사회 도피적 고립주의나 이와 반대로 개인 구원을 부정하고 사회 구원만 외치는 행위 곧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곡해와 불신을 지양하고 성결의 역사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Ⅳ. 현대에 주는 의미

이상에서 우리는 성화론이 기독교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의 깊이를 보여 주는 것으로 귀중한 의의가 있음을 밝혔다. 이런 성화론은 특히 웨슬레의 해석에 있어 그 의의를 더 깊게 하고 있다.

인간의 죄를 가볍게 보는 철부지 낙관주의가 현대 신학의 일부를 점하고 있는가 하면 이에 반발하여 죄의 깊이를 보는 이들이 비관주의에 빠지는 수도 있다. 이들이 죄의 진상을 성서적으로 본데서는 공로가 없지는 않으나 비관주의에 빠져 구원의 복음이 박력을 잃게 됨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구원론을 말할 때 그들은 의인의 교리에 그치고 만다. 여기서 우리는 "악한 인간을 변화시킬 하나님의 해결은 없는가?"라고 묻게 되며 "하나님의 은총은 의롭게 하는 데까지만 행동하는 값싼 것인가"하고 반문하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웨슬레가 설명하는 하나님의 성화의 역사가 우리의 주의를 끈다. 웨슬레는 죄의 깊이를 그들 못지않게 보는 동시에 그보다는 더욱 깊은 구속의 은총을 투시함으로써 신자에게 소망을 안겨 주고 있는 것이며 이는 바로 값비싼 은총을 재천명한 것이다. 더욱이 그 은총의 역사를 미래에 남겨 놓고 체념하는 듯한 종교 개혁자들에 비하여 웨슬레는 보다 실존적인 관점에서 현재 여기에서의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봄으로 은총의 낙관론을 천명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이 성화론 이야말로 기독교 원리에 근본적인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성화론을 제거한 윤리나 사회 복음은 엄밀한 의미에서 성서적 근거를 상실한다. 인본주의적인 윤리에 대체할 근거는 성화론 이외에서는 찾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성화론에 나타난 웨슬레의 신학은 그가 그리스도 인의 생애를 인간의 무능성에서 보다는 능력에서 그리고 인간의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약속에서 이해하고 있으므로 은총의 낙관주의라 할 수 있다. 웨슬레의 강조는 불안한 미래보다는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현재 승리자로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불안과 공포로 비관에 잠긴 인간을 향한 복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화론의 복음이야말로 오늘의 교회 생활에 활력을 주는 원동력으로서 그 교리의 재강조가 요청된다고 믿는다.

웨슬레의 메시지는, 오늘날까지 감리교회에 남아 있는대로, 두가지 강조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평등하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며 둘째는, 이 복음이 제시하는 도덕적 이상이었다. 그는 선언하기를, 성서는 죄로부터의 구원이 아닌 다른 구원을 말한 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거룩한 삶(성화)을 호소하였고, 이 성화는 "사회적인 성화" 즉, 타인을 위한 사랑과 봉사라고 역설하였다.

구원에 있어서 성화의 위치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은총과 인간의 책임과의 관계를 규명해야 된다. 웨슬레의 신학 사상중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조 종남은 웨슬레의 설교에 근거하여 웨슬레가 주장하는 신인협동설을 반펠라기우스 주의(Semi-pelagianism)와 같이 자연인이 하나님과 협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을 근거로 하는 협동과는 구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이들은 웨슬레가 인간의 책임을 주장하였다고 해서 마치 웨슬레는 '은총의 신학자'가 아닌 양 오해하고 있는 듯합니다. 최근에 재발견된 웨슬레는 종교개혁의 원리를 재천명한 철저한 '은총의 신학자'입니다. 더 나아가 웨슬레는 은총의 역사를 역동적(dynamic)으로 이해하고 신앙생활과 전도 활동에 적응시키는 면에 있어서 종교 개혁자의 신학을 실생활에 적응시킴으로써 신학에 피와 살을 붙인 신학자입니다. 우리는 웨슬레의 그 놀라운 신앙 운동 뒤에 그의 깊이 있는 신학이 뒷받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와같이 웨슬레는 철저한 은총의 신학자이다.

웨슬레를 종교 개혁자들과 비교할 때, 종교 개혁자들의 구원론의 핵심인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믿음을 통해서" 인간의 구원이 성취되어진다는 점에 있어서는 웨슬레도 일치한다. 그러나, 그 은총의 역사 방법 곧, 이 은혜가 어떻게 작용하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과거에 그의 은총관은 영국교회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노력과 선행으로 어느 단계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혜가 역사 되어 구원받는다는 반 펠라기우스(Semi-pelagianism)적인 견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올더스게이트의 사건 이후 근본적으로 변화되어 은혜만이 구원의 근본이며 구원의 조건은 믿음뿐임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 주장은 웨슬레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salvation by Faith)이라는 설교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면 죄인인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자기가 지은 죄의 지극히 적은 것이라도 그 죄를 대속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공로를 가지고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에게 공로가 많고 또는 거룩함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진실로 인간은 그 자신이 아주 불결하며 죄에 물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두 죄에 대하여 대속이 필요한 것입니다. 좋지 못한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이 사람의 마음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가증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시초에 자기의 형상을 따라 사람의 영혼에 주셨던 영광스러운 의가 결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하나님 앞에 내놓을 아무 공로도 없고 의도 없으니 하나님 앞에서 입을 굳게 닫을 수 밖에 없습니다. 만일에 이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한다면, 이것은 '은혜 위에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가장 큰 은혜, 곧 구원을 우리에게 주신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말로 다 할 수 없는 이 선물에 대하여 감사하는 말 외에 다른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실로 '우리가 아직 죄인이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심'으로 된 것입니다. '은혜를 인하여 너희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느니라.' 은혜는 구원의 근원이요, 믿음은 구원의 조건입니다."

웨슬레는 선행적 은총(Gratia Prevenius, Preventing Grace, Prevenient Grace)이 개념에서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완전한 간격(Separation)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편에서 먼저 값없이 모두에게 은혜를 주심으로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는 은혜를 예비적으로 받고 있다고 설명한다. 웨슬레에 의하면 사람이 은혜를 못 받아서 구원을 못 받거나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반역하기에 그렇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웨슬레는 빌립보서 2장 12-13절을 본문으로 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름에 대하여" (on working out our own Salvation)라는 설교에서 이 사실을 잘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웨슬레에 의하면 성서는 먼저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는 진리를 설명한다. 사실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선한 일을 하겠다는 생각(to will)을 하거나 행할(to do)수도 없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두번째로 성서는 다른 한편에서, 사람은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룰 "책임"이 있다고 사실을 웨슬레는 강조한다. 구원을 못 받았다면 그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은 선을 행하라는 분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세번째로 웨슬레는 그의 설교에서 그러면 이 두가지 면에서 연결된다고 보았다. 즉 "첫째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너희도 일할 수 있다(You can work)는 것이요, 둘째로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너희도 일해야만 한다(You must work)"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총, 누구에게나 값없이 주시는 은총의 역사가 있기에 인간은 회개하고 믿어 구원에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것이 가능하도록 역사 하였기에 인간도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웨슬레에게 있어서 은총의 역할과 인간의 역사(또는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관계는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고 둘 다(both/and)를 택하고 창의적으로 종합한 것이다. 그러나 이 관계에 있어서 주도권을 하나님의 은총에 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의 의를 위하여 공로(merit)를 내세우거나 자랑할 이유를 갖고 있지 못하다.

이와 같이 주장함으로써 웨슬레는 펠라기우스 주의에 빠지지 않고 인간 자신의 구원을 위한 인간의 책임을 주장할 수 있었다. 동시에 웨슬레는 어거스틴 주의나 칼빈 주의가 직면한 난관에 빠지지도 않았다. 더 나아가 웨슬레가 주장한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 사이의 협동(working relationship)은 카톨릭의 협동설(synergism), 다시 말해서 반 펠라기우스 주의와도 또한 구분된다. 왜냐하면 웨슬레는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기 때문에 그러므로 당신은 일할 수 있습니다."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타키(L. Starkey)는 그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웨슬레의 입장을 구별하기 위하여 이를 복음적 협동설(Evangelical Synergism)이라고 지칭하였다. 콕스(Leo Cox)는 이를 신단동설의 구조 속에서의 협동설(Synergism in the framework of monergism)이라고 특징지어 불렀다.

< 참 고 문 헌 >

1. 宋 興國, 요한웨슬레, 大韓基督敎書會, 1983.12.30.
     
2. 바실밀러 著,주 상지 譯, 요한 웨슬리의 생애, 생명의 말씀사, 1982.3.20.
   3. 조종남, 요한 웨슬레의 신학, 서울 : 대한기독교 출판사, 1992.3.30.
   4. 윌리암캐논 著, 남 기철 譯, 웨슬레신학, 기독교대한감리회교육국, 1986.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