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의 경제윤리의 성서적 배경:

경제 문제에 대한 예수의 입장과 웨슬리

 

김영봉


--이 논문은 웨슬리의 경제 윤리와 예수의 경제적인 가르침을 비교한 것인데, 실상 웨슬리의 경제 윤리 자체에 대한 논의는 간단하다. 필자가 신약학자이므로, 더 많은 지면을 예수의 경제관에 할애하였다. 이 논문은 <웨슬리 신학과 오늘의 교회> (기독교 대한 감리회 홍보 출판국)라는 논문집에 실려 있다. 이 논문을 통하여 독자들은 예수의 경제 윤리와 그 신학적 배경에 대하여 알 수 있을 것이며, 아울로 웨슬리의 경제 윤리가 얼마나 예수의 신학에 근접해 있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1. 시작하는 말

존 웨슬리가 경제 문제에 대한 폭 넓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설교자로서 경제 윤리를 가르치는 데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영국사회의 실물 경제에 대해서도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입장들을 피력하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실물 경제 이론과 관련해서도 연구할 가치가 있는 경제학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이 논문에서 우리는, 그가 가르쳤던 경제 윤리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웨슬리의 경제 윤리가 가지고 있는 성서적 뿌리에 대하여 연구하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경제 문제에 대한 예수의 입장과 가르침들을 살펴 봄으로써, 웨슬리의 경제윤리가 그것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를 탐색하고, 예수와 웨슬리의 경제윤리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물을 것이다.

2. 웨슬리의 경제 윤리

웨슬리의 경제 윤리는 몇 편의 그의 설교들 안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아 온 설교는, 그의 {표준설교집} 안에 들어있는 "돈의 사용"(The Use of Money)이라는 설교이다. 이와 함께, "부의 위험"(The Danger of Riches)이나, 역시 {표준설교집} 안에 들어있는 "선한 청지기"(The Good Steward)라는 설교들도 중요한 자료로서 여겨져 왔다. 이러한 일련의 설교들 안에 반영된 웨슬리의 경제 윤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모든 재화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이므로 사람은 그것을 소유하려하지 말고, 선하게 관리해야 한다. 설교 "선한 청지기"에서 웨슬리는, "청지기"라는 말처럼 현재의 인간의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달리 없다고 말한다. 청지기 사상은 다음 발표의 주제이므로, 여기서는 그냥 넘어 가겠다.

둘째, 청지기로서의 인간이 가져야 할 마땅한 경제 윤리는 다음의 세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근면(industry), 검소(frugality), 제한없는 구제(boundless generosity). 이것을, 그는 "돈의 사용"이라는 설교에서 남긴 유명한 명제를 통하여 밝히고 있다. "불의한 재물"(눅 16:9)에 대한 신실한 청지기가 되기 위하여 다음의 세 가지 단순한 법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가. "할 수 있는 대로 벌어라."

물론, 이 말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벌어 들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 설교에서 웨슬리는 건전한 직업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정당한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렇게 본다면, 웨슬리의 이 표현은 약간의 오해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많이 버는 것만을 목적으로 생각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웨슬리의 생각에 더 가까운 표현은 "건강한 노동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근면과 노동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 "할 수 있는 한 저축하라."

웨슬리는 모든 종류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거부한다. 그러나 동시에 지나친 금욕 생활에 대해서도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다. 우리 자신의 건강과 생활을 위해서, 그리고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정당한 지출이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이나 사치스러운 장식 따위를 위해서 돈을 쓰는 것은 마치 바다에 돈을 버리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런 요청을 통하여 웨슬리는 검박한 생활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어라."

웨슬리에 의하면, 위의 두 단계는 이 마지막 단계를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 일하고 모든 재물을 어떻게 사용할까?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눅 16:9)는 말씀에 근거하여, 그는 그 모든 재물이 이웃을 위해서 쓰여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을 행함으로써 물질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되, (유대인들처럼) 십분의 일도, (바리새인들처럼) 십분의 삼도, 십분의 오도 아니라,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all)을 주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웨슬리의 경제 윤리는 비판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든다면, 노동을 그것 자체의 가치로서 보기보다는 돈을 버는 수단으로 보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웨슬리는 또한 더 많은 생산을 위한 재투자에 대한 여지를 허용하고 있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행위의 잣대로 사용되고 있는 "경제적인 효용성"에 호소한다면, 그의 경제 윤리는 얼마든지 비판될 수 있다.

이러한 비판들은, 비록 그것들이 정당한 비판임에도 불구하고, 웨슬리의 경제 윤리 사상이 가지는 탁월성을 결코 손상시키지 않는다. 무려 2세기 반 이전의 상황에서 피력한 사상이 오늘날에 그대로 만족스럽게 적용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낭만적인 생각일 수 있다. 웨슬리는 경제 상황 전체를 다 다루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다만,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요구하는 근본적 태도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을 뿐이다. 경제 문제에 대하여 복음이 요청하는 근본적인 태도로서, "청지기 사상"과 "근면/검약/구제의 원칙"은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말씀들과 행적들을 살피면서, 물질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살펴 볼 것이다. 이러한 살핌을 통하여 우리는 웨슬리의 사상이 얼마나 탄탄한 성서적 바탕을 가지고 있는지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나 누가 혹은 야고보같은 사람들의 경제 윤리도 살펴봄직 하나, 그것은 다음의 과제로 두고, 예수에게 집중해 보고자 한다.

3. 예수의 경제 윤리

1)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이 사상은 예수의 세계관의 중요한 일부였다. 구약의 신앙을 이어받은 그는,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음을 믿었음에 틀림이 없다. 공중의 새도,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의해서 살아간다(마 6:26, 28).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생명 자체도 하나님께 있을 뿐 아니라, 이 지상에서의 삶도 역시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의존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시며, 그것을 공급해 주신다(마 6:32-33).

인간을 청지기로 보는 사고는 특히 누가복음 안에 있는 비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웨슬리가 "돈의 사용"과 "선한 청지기"라는 설교의 본문으로 삼았던 "불의한 종의 비유"(눅 16:1-9)와 그것에 덧붙여진 말씀들(눅 16:10-13)이 그 예이다. 이 비유와 말씀들이 예수의 육성(ipssissima verba)을 담고 있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이 비유는 예수의 비유들 가운데서 제일 이해하기 힘든 비유이기 때문이며, 그에 따른 말씀들 역시도 단편성 때문에 높은 역사성을 가진다. 이 비유는 주인을 하나님으로, 청지기를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12절의 말씀이다. 이 말씀이 예수의 말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필자는 그렇다고 생각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이 말씀 안에는 "남의 것"과 "너희의 것"이 대조되어 있다. 무엇이 남의 것이고, 무엇이 내 것인가? 앞뒤의 맥락에서 비추어 보면, 이 지상에서 가지는 것은 모두 남의 것이며, 하늘의 보화가 진정한 내 소유가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지상의 재물은 누구의 것인가? 비유에 비추어 본다면, 그것은 주인 즉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이 일정한 기간 동안에 인간에게 맡겨 준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옅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본문은 "세금에 대한 질문"(마 22:15-22//막 12:13-17//눅 20:20-26)이다. 양식비평적으로 볼 때, 이 이야기는 전형적인 선포설화(paradigm)이다. 이 양식의 특징은 전반부의 이야기(narrative)는 마지막에 나오는 예수의 선포에 대한 준비라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이야기의 초점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는 마지막의 선포에 있다는 것이다. 이 본문이 전체적으로 역사적 사건이라는 데에는 거의 이의가 없어 보인다. 더 많은 논란은 이 마지막 선포의 의미에 있다. 이 말씀은 그 동안 피상적으로 이해됨으로써,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리에 대한 성서적 근거로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이것이 오해라는 사실은 유대적 사고를 잠시만 살펴 보아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정치적인 영역과 종교적인 영역은 결코 분리될 수 없었다. 이 세상을, 황제가 다스리는 영역과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으로 나눈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 하에 있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모든 유대인들의 바램은 하루 속히 로마의 철권이 깨어지고 하나님의 다스림이 자리를 잡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다스림과 황제의 다스림은 결코 병존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황제에게 속한 것이라고는 있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가이사의 것은"이라는 말은 "가이사가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유대적 사고방식에 의한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 가이사가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그의 것이 아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대답은, 피상적으로는 질문하는 사람들이 펴놓은 올무를 피하면서, 내용적으로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힌, 매우 외교적인 표현이다. 이 대답에서 예수가 의도한 것은 이런 것이다:"가이사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가이사에게 주어라. 그러나 정말 가이사의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 아닌가? 가이사조차도? 그러니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돌려라!" 이렇게 본다면, 이 말씀은 정교분리와는 전혀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가이사의 것이 있다는 착각을 암시적으로 부인하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사고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맡겨진 것이라는 예수의 사상은 물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달란트/므나의 비유"(마 25:14-30//눅19:11-27)에서처럼 주어진 사명에 적용되기도 하며,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마 21:33-46//막 12:1-12//눅 20:9-19)에서처럼 하나님의 선택(election of God)과 그 책임에 적용되기도 했다. 이처럼, 예수의 생각에 있어서, 인간의 모든 영역--그의 생명, 사명, 물질 등--이 예외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다. 이것을, 누가는 "청지기"(oikonomos)라는 특별한 용어를 사용하여 더욱 명료하게 청지기 신학을 전개시켜 주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면, 인간의 마땅한 태도는 당연히 선한 관리인의 태도일 것이다. 인자가 도래하기 이전까지 인간이 선한 관리인으로 성실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은 복음서 전승의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생각이다. 위에서 지적한 비유들의 초점은, 신실한 관리에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이 사명이든 재물이든 생명이든, 주인이 되찾을 때까지 신실하게 관리하는 것이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2) 재물에 대한 예수의 태도

그렇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이 맡겨 주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재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는 어떤 태도를 보였으며, 어떻게 가르쳤는가? 이것이 우리가 다음으로 다루게 될 문제이다.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복음서의 전승이 자주 서로 모순되는 듯한 태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 재물/가난/부에 대한 예수의 태도와 가르침을 일별해 보는 것으로 시작을 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우리로 하여금 이해 가능한 결론에 이르도록 안내해 줄 것이다.

가. 예수가 그의 지상 사역 동안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가 자신의 사역의 가장 우선적인 수혜자를 가난한 자로 삼았다는 것은 "축복선언"(마 5:3//눅 6:20)에 잘 나와 있다.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다스림(basileia tou theou)이 가져다주는 축복은 먼저 "가난한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주의 깊은 독자라면, 마태복음은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말하는 반면, 누가복음은 "가난한 자"라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 해방신학적인 전통에 기울어져 있던 사람들은 누가의 형태가 예수의 원래 말이며, 마태의 형태는 신앙적으로 편집한 것이로 말하면서 마태를 무시 내지는 비판해 왔다. 하지만, 이것은 피상적인 판단이다. 당시의 사회/경제적인 상황과 종교적인 상황은 서로 맞물려서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스스로 죄인으로 생각하도록 몰아 세웠다. 왜냐하면 그들의 물질적인 가난이 그들로 하여금 종교적인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가난한 심령" 즉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더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에 대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훨씬 더 열렬히 응답했던 이유이다. 따라서 마태의 형태나 누가의 형태나 결국은 동일한 그룹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셈이다. 누가는 외적인 면을 보고 말했던 것이고, 마태는 내면적인 면을 보고 말했던 것이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그 부류의 사람들과 연대하여 살았다. 그의 식탁의 주변에는 늘 가난한 사람들이 넘쳤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제자들에게 요청하였다(눅 14:12-14).

나. 예수 자신도 가난한 삶을 살았다. 예수 자신이 가난한 계층에 속했는지, 아니면 중산계층에 속했는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는 살아가는 동안에 스스로 가난한 자로 살았다. 이러한 삶의 상황은 다음의 유명한 말씀 안에 잘 반영되어 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마 8:20//눅 9:58).

이 말씀은 집 하나 없이 떠돌아 다녀야 했던 예수의 삶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예수를 따라 나서겠다고 나선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한 까닭은, 예수의 제자가 되는 일은 가난한 삶을 사는 것임을 말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목수로서의 자신의 생업을 버렸으며, 제자들이 공급해 주는 것으로 살아갔다. 그가 마지막 남긴 것은 겉옷뿐이었다. 그것 마져도 숨지기 전에 남의 것이 되었다(마 27:35//막 15:24//눅 23:34; 비교, 요 19:23). 공생애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는 가난의 삶을 살았다.

다. 예수는 재물에 대한 전적인 포기를 자주 가르쳤다. 그 뿐 아리나, 예수는 제자들에게도 가난한 삶을 요청하였다. 제자들에게 준 선교 명령 안에서 그는 견유학파 전도자들과 유사한 형태의 무소유의 전도를 요청하고 있다(마 10:9-11//막 6:8-10//눅 9:3-5). 그는 제자들을 부를 때, 그들의 소유를 버리고 따르도록 했다(마 4:18-22//막 1:16-20//눅 5:1-11). 예수는 또한, 그렇게 지상의 모든 것들을 버리고 자신을 따라 나선 제자들에게 풍성한 보상을 약속한다(마 19:27-30//막 10:28-31//눅 18:28-30). 이러한 요청은 그 후로도 제자들의 삶의 방식으로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전승을 통해서 보는 대로라면, 사도들은 대부분 방랑 전도자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삶에 대한 요청은 그의 주변에 늘 있었던 제자들에게만 요청된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영생을 얻는 길을 알기 위해 찾아 온 부자에게 한 예수의 대답은 오늘의 독자에게 뿐 아니라 그 부자 자신에게도 충격적이었다(마 19:16-22//막 10:17-22//눅 18:18-24). 예수에 의하면, 영생을 얻기 위해서 그에게 부족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재산을 소유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막 10:21//눅 18:22)는 말은 그 의미상 "한 가지 첨가할 것이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없다. 그것은 "정말 필요한 것 한 가지가 없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의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전적인 재산 포기의 요청이 열 두 제자의 범위를 넘어서서 보편적으로 주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라. 재산에 대한 포기의 요청과 함께 자주 지적되는 것은 부의 위험성이다. 부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는 이미 구약성서에서부터 이미 자주 등장하는 주제였다. 이 주제는 특히 예언서들에서 자주 나타난다(사 1:22-23; 3:14-16; 58:6-7; 암 2:6-7; 4:1; 5:10-12 등). 예언자들은 특히 불의한 부의 축적, 부의 이기적 사용, 부에서 기인되는 교만, 부로서 초래되는 타락 등을 문제 삼는다. 이러한 전통은 신구약 중간기에도 계속 이어지는데, 스스로를 "가난한 자의 공동체"(1QpPs37)라고 불렀던 쿰란 공동체가 그 전형적 예이다. 이 공동체의 규율(Community Rule)에 의하면, 사유 재산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스스로 가난할 뿐 아니라, 고아와 과부같은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부의 위험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들을 보면, 그가 예언자적인 전통 위에 굳게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은 특히 그의 비유들 안에 잘 드러나 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눅 12:13-21)는 누가복음에만 나와 있기는 하지만, 그 대화의 형식이나 말씀의 격언적 성격은 이 이야기의 역사성을 매우 높여준다. 질문자의 질문에 대하여 직접 대답하지 않고, 그 대답을 발판으로 좀 더 차원 높은 문제로 비약하는 방식이 예수의 대화 스타일과 일치한다. 재산을 나누어 달라는 요청에 대하여, 예수는 탐욕을 경계하면서, 많은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면 무엇이 생명을 보존해 주는가? 이어서 나오는 비유가 그 대답을 준다. 어리석은 부자는 재산의 확보가 그의 생명을 확보해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예수의 생각은 달랐다. "네 영혼을 도로 찾으실"(눅 12:20) 하나님에게 생명은 달려 있다는 것이다.

부의 위험성은 "두 주인에 대한 비유"(마 6:24//눅 16:13)에서 잘 경구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이 말씀의 역사성에 대하여 의심할 이유는 거의 없다. 한 사람의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은 과장이다. 실제로 한 종이 여러 주인을 섬기는 일은 가능하다. 바로 여기에 예수의 비유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뒤틀림"(twist)이 있으며, 여기에 이 비유의 요점이 숨어 있다. 사람의 경우는 둘 혹은 그 이상의 주인을 섬기는 것이 가능한데,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는가? 맘몬(mammon)은 "돈", "재산" 등을 가리키는 말로서, 어원으로 보면 "믿는다"('mn)는 말과 관계가 있다. 즉, 맘몬을 섬기는 것은 종교적인 충성을 요청한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종교적인 믿음의 대상은 둘이 될 수 없다. 종교적인 믿음이란 전인격적인 신뢰를 요청하는데, 그것은 오직 하나의 대상만을 향해야 한다. 그 믿음을 맘몬과 하나님께 함께 둘 수 없다.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한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많은 사람들은 맘몬에 참된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믿고 섬긴다. 하지만 예수의 요청은 다르다. 그것은 맘몬의 속임수라는 것이다. 참된 생명은 하나님에게 있다.

물질적인 부는 이렇듯 인간을 노예화시키고, 헛된 희망을 가지게 한다. 하나님께 가야 할 믿음과 복종을 가로챈다. 이것이 부의 위험이다. 그 뿐 아니라, 부는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눅 6:24)라고 선언했고,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막 10:25//눅 18:25)고 말했다. 이 말씀은, 예수의 화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고, 제자들까지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예수의 육성을 보유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부자는, 한 마디로 말해서, 가망이 없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는 부의 의험성을 경고하는 또 다른 예이다. 이 비유의 해석에 있어서 자주, 나사로의 가난에 초점이 맞추어지곤 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초점은 부자에게 있다. 나사로는 마치 조연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대조적으로 부자의 행동과 운명을 부각시킨다. 예수가 부자의 부도덕한 면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이미 예레미아스에 의해서 잘 설명되었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이야기들이 예수 당시에 많이 있었기 때문에, 청중들은 이미 부자의 부도덕성을 전제하고 들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어떻게 부도덕했는가? 가장 두드러지는 문제는 거지인 나사로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는 데 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호의호식을 하면서 지냈다. 부를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했다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재산에 대한 태도가 내세의 운명을 갈라놓는 기준이란 말인가? 그러한 해석이 종종 있어왔다. 가난과 부 자체가 보상과 징벌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비유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로 생긴 것이다. 이 비유는 구원론("어떻게 하면 천국에 가는가?")이나 내세론("천국과 지옥은 어떻게 생겼나?")을 가르치기 위해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이 비유는 부를 이기적으로만 사용하면서 자만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대한 경고를 목적으로 한다. 즉, 부를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고, 아무런 사회적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결정적인 위험이 다가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부는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 예수는 금욕주의자도 아니었고, 금욕주의를 가르치지도 않았다. 위에서 말한 것이 예수의 태도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면 오해이다. 우선 지적할 것은, 예수의 무리들이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있던 추종자들의 재정적 도움에 의존했었다는 것이다. 가룟 유다가 예수 그룹의 재산을 관리했다는 전승(요 12:6; 13:29)은 비록 요한복음에만 나와 있으나, 분명히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무리는 어느 정도의 돈을 움직이고 있었을 것이다. 이 돈은, "베다니에서의 도유사건"(마 26:6-13//막 14:3-9//요 12:1-8; 비교 눅 7:36-39)에서의 유다의 발언이 암시하듯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쓰이거나, "오병이어의 이야기"(마 14:13-21//막 6:30-44//눅 9:10-17//요 6:1-15)가 암시하듯이, 예수의 사역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썼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돈은 자발적인 헌신자들의 공급에 의해서 마련되었다.

예수는 또한 부자들의 초청에 기꺼이 응하였다. 일반적으로 부유한 계층에 속했던 세리 레위가 초대했을 때에도(마 9:9-13//막 2:13-17//눅 5:27-32), 바리새파 사람 혹은 바리새파 지도자가 초대했을 때에도(눅 7:36-39; 14:1), 나사로 남매가 초청했을 때에도(눅 10:38-42), 세리장 삭개오가 초청했을 때에도(눅 19:1-10) 예수는 기꺼이 응하였다. 그 결과, 그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마 11:19//눅 7:34)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물론, 이 표현은, 별명이 대개 그렇듯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 없다. 왜 금식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마 9:14-17//막 2:18-22//눅 5:33-39)이 심각하게 제기되었던 사실도 역시 이것을 지지해 준다. 따라서 예수는 재산에 대하여 자유로운 태도를 가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금욕주의자는 아니었다는 것이 분명해 진다. 적대자들이 헐뜯듯이 호화로운 음식을 탐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세례 요한처럼 살지도 않았다.

앞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재산에 대한 철저한 포기를 요구했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서 안에서 또 다른 전승을 발견한다. 그의 구제에 대한 가르침(마 6:2-4)은 어느 정도의 재산을 계속 보유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양과 염소의 비유"(마 25:31-46)에서도 예수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위하여 물질적인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것은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30-37)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경향은 회심한 추종자들에게 예전의 재산을 그냥 보유하는 것을 허용하는 경우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 예가 삭개오의 이야기(눅 19:1-10)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집에 방문한 것을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의 징표로 받아들인 삭개오는,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했다. 이 결단에 대하여 그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응답했다. 절반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뜻이다. 부자 관원에게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말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에게는 금욕주의를 전파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바. 결론적인 정리: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모순적인 사실을 설명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한 편에서는 재산에 대한 전적인 포기를 요청하는가 하면, 다른 한 편에서는 재산의 보유를 허용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일반적으로 말해서, 예수는 전적으로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재산의 완전한 포기를 요청했다는 것이다. 복음서의 전승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예수는 추종자들에 관한 한 "두 바퀴 체제"(two-tiered system)를 사용했다. 즉, 안으로는 자신들의 생업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있었고, 밖으로는 과거의 삶의 자리를 그대로 지키면서 예수를 추종하는 자들이 있었다. 12명의 제자들이 안에 있는 바퀴를 주로 형성했으나, 그들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들 외에도 예수의 전임 제자가 된 사람들은, 여자들을 포함하여, 더 많았을 것이다. 이들에게는 보편적으로 재산의 전적인 포기가 요청되었다. 그들은 복음의 수혜자들이 공급해 주는 것에 의지하여 살아가야 했다. 제자들에게 준 예수의 선교 명령(마 10:5-15//막 6:7-13//눅 9:1-6)이 이것을 요청하고 있으며, 전도자에 대한 가르침(마 10:40-42//막 9:41)도 역시 이런 점에서 주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양과 염소의 비유"(마 25:31-46)의 원래 삶의 자리도 역시 선교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40절)는 단순히 곤경에 처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런 곤경에 빠진 사람을 말한다. 이들에게 한 일이 곧 예수에게 한 일이 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마 10:40; 막 9:41; 눅 10:16; 요 12:44-45; 13:20)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예수의 추종자들의 일부는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고 선교에 전념해야 했다.

바깥 바퀴를 구성했던 다른 추종자들은 자신들의 생업을 유지하면서 예수를 따르도록 요청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재물에 대한 일종의 "회심"이 요청되었다. 우선, 재물에 대한 내적 태도의 변화가 요청되었다. 사람의 생명이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니며, 재물은 인간의 전적인 헌신을 강요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동안 재물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기대와 헌신을 포기해야 한다. 섬김의 대상은 하나님뿐이다. 재물은 하나님이 잠시 동안 맡겨 주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책임은 주어진 재물을 선하게 관리하는 데 있다. 모든 희망과 기대와 헌신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렇다면, 내적인 태도만 바꾸면 아무리 많은 재물을 소유해도 무방한가? 그렇지 않다. 기독교 신앙은 내적 태도를 우선시 하지만, 그 내적 태도에 근거한 외적 행동 또한 무시하지 않는다. 하나님만을 섬기며 재산을 선하게 관리하는 청지기로 회심을 했다면, 그는 자신의 재물을 옳게 사용해야 한다. 어떻게 사용되는 것이 선한 사용인가? 우선,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과 공유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아낌없이 자신의 재물을 주어야 한다. 또한 선교를 위해서 자신의 재물을 전적으로 포기한 제자들을 위해 물질을 공급해야 한다. 어느 한도까지 해야 하는가? 랍비들의 권고처럼 20%정도이면 충분한가? 예수의 대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계가 없다. 할 수 있는 만큼, 필요한 만큼 주어야 한다.

둘째, 예수는, 전임 제자로 부르는 경우 이외에도,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의도적으로 재산의 전적인 포기를 요청하였다. 이 경우에는 대개 문자적인 의미보다는 수사적인 의도가 더욱 강하다. 하나의 예로서, 앞에서 본 젊은 부자 관원의 이야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이 이야기에서 예수는 재산을 전부 포기할 것을 요청하였다. 예수께서 정말로 그가 글자 그대로 따를 것을 요구했을까? 이 요청은 수사적인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 관원은 종교적인 의무 이행으로 모든 것이 충족된 것처럼 생각하였다. 그래서 십계명을 다 잘 지켰다고,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재산을 다 버리라고 요청한다. 이 요청은 이 관원의 거짓된 자신감을 철저하게 좌절시키고, 재물에 굳게 묶여있던 희망을 절단시키려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삭개오의 경우를 감안해서 추측을 한다면, 만일 그 관원이 그렇게 하겠다고 나섰다면, 예수는 그에게 구원을 선포하고 보냈을 것이다. 이 요청은 일종의 시험이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각 개인에게 있어서의 재물의 중요성이다. 그 재물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쓰여지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선물일 수도, 재앙일 수도 있다. 따라서 전임 제자와 관계없는 재산 포기 요청들은 그 요청에 숨어있는 예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세심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4. 예수의 경제 윤리의 신학적 배경

가난과 부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들은 그 내용과 성격에 있어서 매우 독특하다. 예수 자신의 삶과 가르침들이 그 형식 면에서 당시의 견유학파 방랑 설교자들과 유사한 면을 보여주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양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외양이 같다고 해서 그 내용도 같으라는 법은 없다. 양자 사이를 구별해 주는 가장 큰 차이는 그러한 행동과 가르침이 나오게 된 사상적 배경에 있다.

예수는 어떤 사상적 혹은 신학적 배경에서 이와 같은 삶을 살고 또 그렇게 가르쳤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자주 제기되는 것이 예수가 기대했던 종말의 임박성이다. 최종적인 파국에 직면해 있는 자로서 더 이상 재물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이 모든 가르침의 바탕이 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만일 이 주장이 옳다면, 위에서 일별한 예수의 경제 윤리는 대부분 그 효력을 잃어버리고, 오늘의 우리에게 아무런 구속력을 가지지 못한다. 예수가 기대했던 임박한 파국은 기대한 대로 속히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가르침이든 그 배후의 전제가 중요하다. 그 전제가 틀리면, 그 전제에 근거해 있는 가르침들도 정당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예수의 종말론의 한 면만을 본 결과로 초래된 오해이다. 예수는, 알버트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나 요한네스 바이쓰(Johnnes Weiss)가 처음 말했던 것처럼, 파국이 임박했다는 기대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세례 요한이나 쿰란 종파의 종말론이었다. 그들은 임박한 파국을 기대하면서 세속을 떠나 자신들을 심판에 대하여 준비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반면, 예수의 종말론은 "야훼의 날"이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시작된 종말론적인 구원의 역사가 완성될 미래(인자의 날)를 기대하였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현재 인간의 세계 안으로 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예수의 사상의 대 전제는 세례 요한과 쿰란 종파의 경우에서처럼 임박한 파국이 아니라 지금 시작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현실이다.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의 현실을,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이미 구스타프 달만(Gustaf Dalman)이후에 폭 넓게 인정되고 있듯이, 하나님 나라라는 말은 아람어(malkuta)의 의미 상 "하나님의 통치"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는 말은 이제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의 세례 이야기에서 잘 그리고 있듯이, 예수의 사역을 통하여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하늘이 열리는" 사건이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혔던 관계가 이제 뚫리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다스림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예수의 치유 사건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와 인도 아래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또한 그의 제자들을 이와 같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 안으로 초청했다. 이제 하나님 나라 안에 든 사람들은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믿고 살아간다. 머리카락까지 다 세시는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하고 다스리는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재산을 모으고 그것에 의존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과거의 삶의 방식이다. 하나님과의 열린 교제 안에 사는 사람들은 재산에 연연하지 않는다. 있으면 선하게 관리하지만, 없으면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기대고 살면 된다. 예수 이후에 하나의 덕목으로 자리잡은 "자족"은 견유학파나 스토아 학파가 공통적으로 가르쳤던 덕목이기는 하지만, 그 근거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자족의 배후에는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이 있다. 그것은 이 믿음에서 오는 "결과"였다. 그러나 희랍 철학파들의 자족은 마음의 평정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다스림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예수 자신의 삶의 양식을 설명해 준다. 그 믿음은 또한 제자들의 재산 포기의 근거이다. 제자들에게 준 선교 훈령에서 예수가 요청한 것은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의존(radical trust)이었다. 일반 추종자들의 경우에도, 필요하다면 재산의 전부라도 내어 줄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믿음이다. 부를 축적하는 행동이 비판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계속하여 부를 의지하는 것은 현실로 활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뜻이다. 부를 의지하는 것은 곧 불신앙과 맞먹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미 야훼의 날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부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지금 가난한 사람이 복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에서 말한 모든 경제 윤리에 대한 가르침을 우리가 얼마나 따를 수 있느냐의 문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다스림을 얼마나 현실로 믿고 사느냐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

5. 종합적인 결론: 예수와 웨슬리의 경제 윤리

위에서 우리는 재물에 대한 예수의 입장과 가르침들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논의에서 우리가 놀라움으로 발견하게 되는 점은, 서두에서 잠깐 살펴 본 존 웨슬리의 경제 윤리가 예수의 가르침 위에 굳게 서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재물에 대한 태도와 사용에 있어서 웨슬리는 예수의 철저성(radicalism)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 스스로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살았으며, 감리교도들에게 그러한 삶을 요청하였다. 그의 삶의 질이나 가르침의 내용이 예수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우리는 위의 논의에서 확인하였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다스림을 현실로써 믿고 그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물론, 웨슬리는 예수의 가르침을 아무 생각 없이 문자적으로 지키지 않았다. 그는, 예수의 사상을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의 상황에 재적용하여 창조적으로 확장을 하고 있다. 그가 가르쳤던 "근면의 윤리"나 "절약과 저축의 윤리"는 이러한 창조적 확장의 결과이다. 이러한 윤리적 자세는 당시 막 시작되고 있던 시장경제, 자본주의 시대에 있어서 매우 적절한 태도였다. 웨슬리 시대에 예수 시대의 삶을 그대로 재연하는 것은 지나치게 어리석은 일이다. 변화하는 시대는 다양한 새로운 상황들을 야기시킨다. 그리고 그 상황에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윤리적인 결단을 해야 한다. 웨슬리는 그러한 작업을 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21세기의 문턱에 서 있다. 이 시대는 예수의 시대는 고사하고, 웨슬리가 살던 시대와 다른 복잡성을 가지고 있다. 이 시대에 바람직한 경제 윤리는 어떤 것인가? 이 질문은 우리에게 또 다른 창조적인 작업을 요청한다. 예수의 경제 윤리와 웨슬리의 경제 윤리는 이러한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데 있어서 지침을 제공해 준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그리고 웨슬리의 설교에서 우리는, 경제 윤리적 판단(econo-ethical decision)에 있어서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다스림 아래에서 산다. 가난은 이 다스림을 믿고 사는 사람의 삶의 방식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하나님이 맡기신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대하여 청지기이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재물을 절대화하지 말아야 한다. 자칫 경제를 절대화하기 쉬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이다.

넷째,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이 책임을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차적인 관심을 저버리는 일이다.

다섯째,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거나 혹은 그것을 지원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이 요소들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오늘의 현실에 적절한 경제 윤리를 세우는 데 있어서의 고려되어야 할 것들이다. 이러한 요소들과 상황의 상관 관계 속에서 우리는 윤리적 판단을 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 일은 어떤 획일적인 표준을 제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창조적이고 성실하게 대응함으로써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다양한 경제적인 상황들을 만날 때마다, 오늘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다스림을 믿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자세는 무엇인가를 물으면서, 정직하게 대답하고 정직하게 실천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