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레 신학의 핵심

조종남(전 서울신대 학장)

 

I. 들어가는 말:

웨슬레 신학은 그 출발과 형성에서부터 특징을 지니고 있다. 웨슬레는 본인이 어떻게 하면 진짜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이 되느냐 하는 심각한 실존적인 탐구에서 마침내 '가슴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신앙 체험'을 하고 확신과 열정을 가지고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의 신학은 이런 선교의 광장에서 개진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은 어떤 연구실에서 논리적인 개진을 통하여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의 설교의 광장에서 형성된 것이다. 웨슬레는 신학이 실제의 신앙생활과 체험으로 옮겨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웨슬레의 신학은 추상적인 논리에 빠지는 과오를 범치 않을 뿐 아니라, 어떤 학자가 말했듯이, 전통적으로 이어 내려온 신학과 교리에 피와 살을 붙여서 인간의 삶 속에서 말하는 산 신학(living theology)을 만든 것이다. 사도 바울이나 초대 사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신학을 개진한 것과 흡사하다.

웨슬레의 표준 설교집의 서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그는 설교를 통하여 '성서에서 발견한 구원의 도리(the way to heaven)'를 설명하려는 것이 그의 주요한 관심이었다. 그러므로 웨슬레 신학의 핵심은 바로 의 구원론에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그의 설교와 구원론의 전제가 되는 '하나님의 은총 곧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그리스도의 대속'과 구원론 그 자체였다고 말할 수 있다.

웨슬레는 인류의 구원이 하나님의 사랑 곧 구속의 은총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사람이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웨슬레가 '세계가 나의 교구'라고 위치며 전도하게 됨에는 바로 이 구원의 은총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확신함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의 깊이를 깨달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데 우리를 의롭다고 하실 뿐 아니라 새롭게 변화(transformation) 시킨다고 강조하였다. 종교 개혁자들이 전자(의인,Justification)를 강조하였다면, 웨슬레는 성화(sanctification)를 더 강조하였다. 사실 웨슬레의 구원론은 성화론 중심의 구원론이다. 윌리암 홀돈이 지적한대로 웨슬레야말로 성화의 교리를 어느 신학자보다 강조하고 괌 범위하게 개진한 학자일 뿐 아니라, 이 성결의 복음을 통하여 18세기 영국 교회와 사회를 새롭게 한 전도자이다.

II.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은총

스케빙톤 우드가 지적한대로 "웨슬레의 설교에서 종교 개혁자들이 내세웠던 '은총으로만(sola gratia)'믿음으로만(sola fide)의 표어가 메아리 쳤다." 웨슬레는 복음을 말함에 있어 먼저 우리 자신이 죄인으로서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자기구원을 위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라는 것을 전제하였기 때문이다.

2.1. 자기를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죄인

웨슬레가 인간의 죄를 심각히 인지한 점에서 그는 종교개혁자와 맥락을 같이한다. 웨슬레에 의하면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생명을 상실했고 영적인 생명의 관계를 상실했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과 의지와 자유의 기능은 부패되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사랑과 순종은 자기사랑과 자기의지로 대치되었다.

아담은 전 인류를 대표하는 시조(federal head)임으로, 아담이 범죄 하였을 때 그 영향은 온 인류에게 미쳤다. 그러므로 웨슬레는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진노의 자식이 되었다고 보았다. '진노의 자식'이란 원죄의 죄책을 함축하는 말이다."아담의 죄로 인하여 죄책이 모든 사람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웨슬레는 변론하기를, 지금까지 어느 시대 어느 사람이든지 심지어 영아들까지도 죽음을 맛보았다는 사실은 이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였다. 왜녀하면, 죄로 인하지 않고서는 죽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영아가 죄인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리스도가 온 인류의 구주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만약 우리가 영아의 원죄를 부정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순전하고 죄책도 없는 피조물을 형벌 한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그러므로, 영아도 원죄를 물려받은 죄인이며, 따라서, 결국 그리스도가 없다면 멸망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웨슬레는 인간의 죄를 강조하는 면에서 어느 학파 못지않게 강하다. 그는 말하기를, "이것이 이방종교와 기독교를 구분하는 첫 근거(the first ground)라고 한다. 그리고 이 진리는 "은혜를 받은 영안(grace healed eyes)에만 알려진 진리요, 이방인과 눈이 먼 자연인은 식별치 못하는 진리로서, 이방인들은 자기의 부패를 깨닫지 못한다고 했다. 이것이 웨슬레다. 그러기에 웨슬레는 '은총 만이요(sola gratia)'를 주장하는 정통 신학자이다. 일부에서 웨슬레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한다 하여 그가 마치 자유주의 신학자이니, 인본주의 신학자이니 하는 말은 웨슬레를 올바로 이해 못한 데서 나오는 주장이다.

그러면 웨슬레는 그 당시의 칼빈주의자들과 어떻게 다른가? 웨슬레는 그의

동역자들의 그와 같은 질문에 답하면서, 죄를 강조하는 면에서는 칼빈주의의 끝에 (very edge of Calvinism) 이르렀다고 했다.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은총을 어떻게 역사 하시느냐(how to operate)에서 머리칼 하나의 차이(a hair's breadth difference)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여기에 우리는 웨슬레가 개진한 은총관의 특징과 그 선교학적 공헌을 발견하게 된다.

2.2.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총

그러면 웨슬레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를 어떻게 보았는가? 위에서도 말했거니와, 웨슬레는 그의 신학을 설교의 광장에서 개진했다. 설교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가르침(the whole council of God)'을 설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책임과의 관련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 이런 출발점에서 웨슬레는 설교 도장에서 청중이 죄인이라는 것을 지적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였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값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의 은총'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듣는 자의 호응(회개와 믿음)을 호소하곤 하였다. 웨슬레의 인간론은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데 있어서 언급되어야 되는 실존적인 상황(existential reference)이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웨슬레는 인간의 죄 문제를 구속론적 구조(soteriological setting)에서 본 것이다.

웨슬레에 의하면 인간은 이미 은혜의 상태, 즉 선행적 은총의 역사아래 있다. 타락한 인간은 이미 은혜의 계약(a covenant of grace)아래 살고 있다. 웨슬레에 의하면 인간은 "선행적 은총에 의해서 이미 원죄의 죄책이 제거되었다."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원죄의 죄책은 인간이 태어나자마자 제거되었으며, 모든 사람에게는 초자연적으로 약간의 자유의지가 회복된 것이다. " 그러므로 웨슬레가 말하는 인간의 복음에 대한 호응(곧 자유의지와 채임)은 은총의 역사아래서 이해된 것이다.

웨슬레가 인간의 책임을 말하는 근거가 결코 페라기우스 주의Pelagianism)적인 인본주의적인 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반 페라기우스 주의(Semi-Pelagianism)적 입장도 아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에서, 곧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에 기안한 것이다.

웨슬레에 의하면, 이 은총은 선행적일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다. 그러므로 웨슬레의 은총관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전하는 전도로 연결된다. 또한 선교에 있어서 교회의 책임을 올바르게 찾게 해준다. 즉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에 근거하여 낙관적인 소망을 갖는 동시에 교회가 선교하여야 할 책임을 짊어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잇다.

2.3. 모든 인류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 곧 은혜는 그의 그리스도의 대속관에서 더 강하게 나타난다.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이 일반 은총 (common grace)과 구속의 은총 (Saving grace)을 구분할 뿐 아니라 단절하는 데 반하여, 웨슬레는 하나님의 은혜의 계속성을 주장한다. 웨슬레에 있어서 선행적 은총은 회개케 하는 은혜(Convincing grace, Repentance)로 연결된다. 따라서 선행적 은혜는 구원의 은혜 (saving grace)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웨슬레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리스도의 대속( The Atonement of Christ)과 연관시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강조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 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모든 믿는 자에게'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에서 "아담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라" 고 웨슬레는 말한다. 이는 모두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점에서 웨슬레는 이중 예정론에 근거하여 제한된 그리스도의 대속을 주장하는 칼빈주의를 비판한다. 웨슬레는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고 강조하는 데는 칼빈과 의견을 같이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어떻게 작용하시느냐 에서 웨슬레는 의견을 달리한 것이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은혜 작용을 이중 예정론으로 설명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예정은 단 일회적인 하나님의 결정(an immutable and eternal decree)에 의하여 어떤 이들은 구원으로, 어떤 이들은 유기(멸망)로 정해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들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대속은 오로지 구원으로 예정된 사람들을 위한 제한된 대속 (limited Atonement)이다.

이에 반하여 웨슬레는 그리스도의 대속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로 정하셨다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제한하는 것은 실제 전도 생활에 큰 지장과 모순을 초래한다고 지적하였다. 그의 설교 "값없이 주시는 은혜" 에서 지적한대로, 만약에 그런 제한된 대속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이 헛수고가 아니겠는가? 모든 사람에게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설교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러면 기독교가 모든 사람의 종교가 될 수 없지 않은가? 이런 교리는 성도가 선을 행하기 위하여 열심을 내지 않게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이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손상시킨다. 예수님을 위선자와 사기꾼으로 모욕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왜녀하면 예수님 자신만큼은 그 예정을 아실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누구든지 자신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시며 초청을 하시니 말이다. 그러면서 웨슬레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들을 열거하면서 이중 예정론과 제한된 대속설을 비판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웨슬레의 주장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사람이 하나님께 응답할 책임이 있다는 주장과 함께 전도의 필요성을 강조하게 한다. 그의 가슴의 뜨거운 구령 열은 바로 이런 신학에 뒷받침되어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외치며 만민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로 옮겨졌다. 이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의 능력이 됨으로 웨슬레의 전도는 회개와 믿음의 결단을 촉구하는 전도로 나타났다.

III. 설교의 핵심인 성화(성결)와 기독자 완전

그러면 웨슬레의 선교 또는 설교에서 나타난 핵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웨슬레는 한곳에서 다음과 말하였다.

나는 거듭거듭 아주 쉽게 우리가 주장하는 교리들이 무엇인가를 외쳤습니다. 바로. . . 이 교리들에 의하여 우리들은 이교도(heathens), 그리고 명목적인 신자(nominal Christians)와 구분됩니다. 이 교리는 우리가 말하는 모든 교리를 포함합니다. 이 주요 교리는 회개(Repentance), 믿음(faith), 성결(holiness)의 교리입니다. 회개가 마치 종교의 현관과 같다면 믿음은 문과 같고, 성결을 종교자체 입니다. . . 여기서 종교자체라는 것은 곧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웨슬레가 주장하는 메도디스트의 표적은 바로 성결, 곧 "마음과 생활의 성결"을 주장하는 구원을 강조함에 있었던 것이다. 웨슬레는 이 교리야말로 하나님께서 메도디스트에게 부여하신 거대한 기탁물(the grand depositum)로서 하나님께서 이것을 전하기 위하여 우리 메도디스트를 일으키신 것으로 안다"고 했다. 그러면 웨슬레가 가르친 성결론의 특징은 어떤 것인가?

3.1. 성화는 점진적이요 또한 순간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그러면 이 성화의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성화(성결)의 과정에 대하여, 첫째로 웨슬레는 로마 카톨릭의 입장을 비판하면서, 이는 사람의 행위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다른 한편 당시의 모라비안 파들이 은혜를 신비주의적으로 주장하면서 사람이 거듭나는 순간에 아주 완전히 성화 되어 더 이상 성장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웨슬레는 이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마치 어린이가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거듭난 신자가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그가 인간이 거듭난 후에도 아직 내재적인 죄가 남아있다고 보며, 또한 성화에는 단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이런 면에서 웨슬레는 당시의 칼빈주의자들의 밭에서 성화론을 개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점진적인 성장과정에 순간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있음을 말하였다. 사람이 점진적으로 죽음에 이르지만 그에게 죽는 순간이 있듯이 신자가 이 체험에 도달하는 한 순간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웨슬레는 성화의 점진적인 과정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로서 보다 고차적으로 끌어올려지는 단계가 있다고 보았다. 웨슬레에 의하면, 성화는 1)회개와 믿음으로 신생함과 함께 시작되며(이를 그는 초기의 성화, Initial sanctification라고 부른다), 그 과정에서 2)신자의 회개와 믿음으로 온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 이를 흔히 성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에 이르고, 마침내는 3)영화(glorification)의 순간에 완결된다고 보았다. 동시에 그는 강조하기를 4)성화의 과정(process of sanctification)은 그 시작부터 이 목표를 향하여 목적론적(teleological)으로 계속 성장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각 학파의 좋은 점들을 창의적으로 종합하고 있음을 본다.

웨슬레가 성화의 과정에 순간적인 단계가 있다고 주장한 것은 성화가 인간의 수양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능하며 또한 신자가 이 땅 위에 살고있는 현재 여기(here and now)에서도 가능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은혜의 낙관론자였다. 이점에서 웨슬레의 성화론은 특징을 지니고 있거니와, 동시에 신학적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그럼 이 핵심적 논쟁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3.2. 온전한 성화(성결)는 동기와 사랑에서의 완전이다.

웨슬레는 신자가 온전한 성화의 단계에서 모든 내재적인 죄에서 씻음을 받으며 하나님의 불으심에 종사하기에 합당한 능력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를 기독자의 완전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당시에 칼빈주의 자들이 그랬듯이 어떤 사람들은 신자가 육을 가지고 있는 한은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전제한다. 따라서 인간이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동안 사람은 무지, 실수의 가능성 등 인간의 연약성(infirmities)을 지니고 있기에 죄인일 수밖에 없다고 단정한다. 그들은 인간의 연약성 자체를 죄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화를 통한 죄에서의 씻음에 대하여는 부정적이다. 웨슬레가 '온전한 성화를 말하며 '죄에서의 온전한 씻음'을 주장하는 것을 맹렬히 공격했다. 여기에 우리는 웨슬레가 말하는 '온전한 성화 또는 기독자 완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똑똑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웨슬레는 온전한 성화를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논리적이기도 하다. 방이 밝아졌다 하면, 이는 빛이 밝게 한 것이지만 동시에 어두움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사도행전 158-9절에서 베드로도 초대 신자들이 성령 충만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마음의 청결함을 받았다는 면도 증언하고 있다. 그러면 웨슬레가 의미하는 온전한 성화는 어떤 상태인가?

웨슬레는 이를 믿음의 관계에서 설명한다. 웨슬레가 죄에서의 씻음을 말할 때에, 그는 신자가 인간의 한계성 또는 연약성(infirmities)에서 벗어나, 실수, 무지, 타락의 가능성에서의 완전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 완전은 영화의 순간에서 이루어지는 '절대적 완전'이다. 이점에서 웨슬레는 개혁신학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웨슬레는 목회적 측면에서 이 '완전''상대적인 완전'과 '절대적 완전'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리고 신자는 이 상대적인 완전 곧 온전한 성화의 은혜를 죽기 전에도 추구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성서가 약속을 하고, 권고하고 있으며, 또한 주님과 사도는 신자가 이 은혜에 이르도록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 다. 또한 오순절의 성령 충만을 체험한 신자들에게서 그 증거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웨슬레가 말하는 완전은 철학적 완전이나 '절대적인 완전'이 아니라 성서가 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성서적 완전'이요 '상대적인 완전'인 것이다.

웨슬레는 이 은혜체험을 통하여 신자가 하나님이나, 천사와 같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웨슬레가 말하는 '기독자의 완전'이란 신자가 인간의 연약성(infirmities)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으로서의 완전이다. 웨슬레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불완전한 것들, 곧 무지, 실수의 가능성 등 인간의 연약성(infirmities)이 죄를 짓는 계기를 마련하지만 그 자체를 죄라고 볼 수 없다고 믿었다. 사실, 유한 한 것을 죄로 보는 것은 희랍의 이원론에서 기인한 것이지, 성서적 견해는 아니다. 하나님이 유한한 피조물을 보시고 '좋더라' 하셨지, 악하다고 하시지 않으신 것과도 같다.

웨슬레는 "기독자 완전"이란 저서에서 말하기를, 기독자 완전은 곧 의도의 순수성 (purity of the intention), 마음의 할례요, 또 다른 각도에서 볼 때, 이는 온전한 성별(full consecration), 그리고 또 다른 각도에서 볼 때 이는 완전한 사랑(perfect love)이라고 했다. 그 본질을 '순전한 사랑' 또는 '완전한 사랑'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보았다. 사랑은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바로 죄적인 것을 모두 추방하며,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채워 사람의 모든 말과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서가 말하는 기독자 완전의 전부는 바로 완전한 사랑(perfect love), 곧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웨슬레는 기독자 완전을 하나님과의 신앙의 관계, 또는 동기에서 이해한 것이다. 행동의 결과에서의 완전을 말한 것이 아니다. 곧은 나무 막대기가 물 속에 비치 우는 것을 보면은 굽어 보이듯이, 사람의 동기가 아무리 순수하더라도 그가 인간의 연약성을 지니고 있는 한 그 행동의 결과가 완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자의 완전' 또는 '성결'을 이해할 때, 이 교리에 대한 많은 오해를 제거할 수 있다. 곧 사랑이라는 것은, 정적(static)인 것이 아니고 동적인 인격적 관계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사랑의 실재는 인격적인 결단과 관계에서만 이해된다. 은혜나 죄를 물건처럼 생각하여(thing-thinking approach) 이해하면 안 된다. 하나님과의 동적인 관계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럴 때에 우리는 웨슬레가 말하는, 성결에서의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 그리고 완전하지만 동시에 더 성장하여야 되는 성결의 성격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곧 사랑은 '순수'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무한히 성장하는 것이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신자들의 '사랑의 풍요함'을 인하여 감사하면서, 동시에 그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기를 위해 기도한 것처럼. 그러기에 기독자 완전은 완전한 것이나 동시에 부단히 더욱 완전으로 나아가야 하는 기독자 완전인 것이다.

또한 사랑이라는 것은 윤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사랑으로 표현되는 성결 또는 기독자 완전은 윤리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웨슬레가 말하는 성결은 마음과 생활에서의 성결이지 신비적인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웨슬레가 강조하는 성결론은 전도와 봉사 곧 호리시틱한 전도(Holistic Evangelism)의 원동력이 되었다.

3.3. 전도와 사회봉사의 원동력이 된 성결론

이와 같이 성결 또는 기독자 완전의 본질을 사랑으로 보며 강조하는 웨슬레에게 있어서 성결은 사회적 성격을 띠고 있다.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단순히 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종교 (social Religion)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단순한 성결은 없고 사회적 성결 (social holiness)이 있을 뿐이다. 기독자 완전의 길이와 넓이 그리고 깊이와 높이는 바로 '사랑으로 역사 하는 믿음' 이다. . . . 사실에 있어, 자기 형제를 사랑하되, 말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셨듯이 사랑하는 자는 그 누구나 '선한 일'에 열심을 아니 낼 수가 없다. 그의 영혼에는 형제들을 위하여 사역하고 함께 있어 주기를 열망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기회가 있을 때에는, 주님이 그랬듯이, 선한 일을 하려고 할 것이다.

웨슬레에 의하면 사랑의 행동은 곧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난 것이다. 행동으로 이어지는 사랑을 떠나서의 성결은 그 내용이 넘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대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행하여야 할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사랑은 폭 넓은 사랑( comprehensive love)이다. 따라서 우리의 사랑도 그러한 사랑이라야 한다. 그러므로 메도디스트는 첫째로 복음을 전파하여야 하며 또한 사랑의 봉사를 하여야 한다고 웨슬레는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메도디스트는 전도와 아울러 경제적으로 어려운 자들을 도와주며 공장 사역과 교육을 통하여 어두운 사회를 밝게 변화 시키는 일을 하였다. 웨슬레는 당시의 노예문제, 감옥의 상태 또는 산업에서 가진 자들의 착취행위에 대하여 항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웨슬레는 메도디스트는 교회와 사회를 변화 시키는 성결의 누룩의 역할이 있다고 믿었다. 성결에 대한 이와 같은 웨슬레의 강조는 그의 전도와 사회참여를 통하여 18세기 영국 전역에 크나 큰 영향을 끼쳤다.

3.4. 성결은 믿음으로 순간순간 주를 의지함으로써 유지되는 완전이다.

하나 더 고찰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웨슬레가 성결한 신자도 무지, 실수의 가능성 등 인간의 연약성(infirmities)을 지니고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성결(정결)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이면에서 많은 학자들이 웨슬레는 불가능한 가능(impossible possibility)을 말한다고 비판한다. 웨슬레는 주장하기를, 성결한 신자는 무지, 실수의 가능성 등 인간의 연약성을 지닌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정죄함 없이 거룩한자(성도)로 설 수 있다고 말한다. 과연 사람이 그런 연약성을 지니고 죄악 세상에서 살려면 범죄하지 않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사실상, 범죄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말하기를, 웨슬레의 성결론은 하나의 이상(ideal)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어떤 성급한 성결론 자들은 이런 반론에 응수하기를, '실수(mistake)는 죄가 아니라고 변명을 하기도 했다. 우리가 알 것은, 양자 모두 웨슬레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변론이다. 이런 질문이나 반론은 웨슬레의 신학방법론을 이해 못하고서는 해답될 수 없다.

웨슬레는 그의 설교에서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짓는 죄 곧 유의적 죄(자범죄, The voluntary transgression of the known law of God)를 주로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했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웨슬레는 신자가 무의식적으로 범하는 죄도 죄라고 인정한다. 이를 전자와 구분하여 '무의적 죄 (The involuntary transgression of the perfect law of God)'라고 불렀다. 이 죄는 자신이 알았던 몰랐던 간에 하나님의 법을(the perfect law of God, known or unknown)범한 죄다. 이 죄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효험 없이는 하나님의 형벌을 면할 수가 없다고 웨슬레는 말한다. 혹자가 웨슬레는 자범죄 만 인정하고 후자는 죄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다면, 어찌 사람이 죄를 범하지 않고 살아 갈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 웨슬레에 의하면 성결의 은혜를 받은, 완전한 기독자(the perfect)도 그들의 연약성으로 인하여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완전한 자라도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웨슬레는 말한다. 그러면은 루터가 말하는 대로 신자는 의롭다 함을 받아도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attor)이라는 의미인가? 신자는 성결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는 말인가?

여기에 양자의 입장이 아주 흡사한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웨슬레는 논리적인 추리나 추상적인 접근(speculative approach)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그의 신학적 인간론에서 그랬듯이, 구속론적인 콘택스트에서 무의식 중에 범죄 하는 신자의 무의적 죄(involuntary transgression of the perfect law of God)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웨슬레는 성결한 자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순간 순간 의존하는 순간 그가 무의식 중에 범하는 죄는 우리 죄를 씻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성결을 유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죄에서 계속 씻으시는 것이다. 웨슬레는 '신자의 회개'라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신을 사랑하여...당신의 죄를 그의 몸으로 친히 감당하신 예수를 계속하여 믿으시오! 그는 항상 효험 있는 그 보혈로 인하여 당신을 모든 정죄 함에서 구원하십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은 상태에 계속 머무르게

됩니다. . . .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나에게는 순간 순간 당신의 죽으심 의 공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주여,

나에게는 순간 순간 당신의 죽으심 의 공로가 효험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우리를 위한 그의 중보의 기도를 믿음 으로 말미암아 순간 순간 새로워져서 아주 깨끗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 리에게는 지금 정죄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 활을 깨끗하게 씻으시므로 전에 있었던 형벌에 대한 두려움도 지금은 없기 때 문입니다.

바로 이 같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순간 순간 우리 위에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느낍니다. . . 이 믿음에 의해 우리는 영적 생활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웨슬레는 무의적으로 범죄 하는 신자의 고백과 믿는 자에게 효험 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효험과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 풍성함을 강조한 것이다. 바울이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고 한 것처럼. 웨슬레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종교개혁자들보다는 보다 더 깊이 그리고 다이내믹하게(dynamic)보는 은총의 낙관주의자였다.

이러한 이해와 강조의 차이는 우리의 생명력 있는 눈(eyes)과 물질인 안경(eye glasses)에 적절히 비유된다. 안경은 아무리 철저히 물로 닦아서 써도 조만간 먼지가 안는다. 청결함을 유지할 수가 없다고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물질을 다루듯이 이 교리를 접근하면(thing-thinking approach in theology), 신자는 순간적으로 씻음을 받아도 그 성결을 유지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결론 내릴 것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의 눈은 먼지가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그 정결한 상태를 유지한다. 그것은 먼지가 눈에 안 들어와서가 아니라, 이 눈에는 눈물이 항상 흘러 먼지를 씻기 때문이다. 성결한 자가 자신의 연약성 때문에 무의식적인 죄를 범할지 몰라도 그가 그리스도를 계속 의지함으로 주의 보혈의 효험으로 계속 씻음을 받아 성결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웨슬레의 이해는 바로 이렇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웨슬레가 말하는 성결한 삶은 신자가 자기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내재적인 죄와 자기 무능을 회개하며 예수를 믿음으로 온전히 성결 해 질 뿐 아니라, 바로 그 믿음으로 순간 순간 주를 (회개와 믿음으로) 의지하고 걸어감으로 유지되는 성결이다. 따라서 성결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다. 이는 소극적 의미에서 그가 하나님 앞에 두려운 없이 서게 할 뿐 아니라, 적극적인 면에서는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살아가는 헌신과 사랑의 삶인 것이다.

3.5. 교회 갱신과 부흥의 원동력이 된 성결론

이와 같이 웨슬레가 그의 구원론에 있어 성화론을 강조함으로 신자와 교회의 생활에서의 새로워짐을 촉구하게 되었다. 18세기의 교회의 갱신과 사회변화는 바로 이 효과를 역사적으로 증명한다.

웨슬레가 주장한 온전한 성화(성결) 또는 기독자의 완전은 신자를 향한 도전이었다. 신자는 모름지기 초보의 믿음에 머무르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 앞에 깨끗할 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랑의 생활로 나아가야 한다. 이런 설교의 메시지는 18세기 영국 교회와 사회를 부흥케 하였다. 이런 운동은 19세기 미국에서의 성결 오순절운동에서 다시 꽃을 피웠다. 이런 성결의 메시지와 강조는 명목상의 신자 (nominal Christians)들이 성령 충만의 생활을 추구하게 하였다. 이 성결의 메시지는 명목적인 신자들로 가득 차있는 오늘의 교회에 큰 도전과 호소가 될 것이다.

IV. 맺는 말

간단히 요약해서 웨슬레 신학은 하나님의 은총에 감격하여 선교하는 도장에서 형성 된 것으로, 그의 신학과 설교 메시지의 핵심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웨슬레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웨슬레는 '세계를 나의 교구로 여긴다"고 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전도할 것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은총의 선행적이요 계속적인 역사로 인하여 인간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받아 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이해함으로 웨슬레는 설교에서 하나님의 은총의 강조와 동시에 사람의 책임을 아울러 주장했다.

두 번째로, 웨슬레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외치되, 사람과 교회 및 사회를 변화 시키는 성결론을 중심 하는 구원을 외쳤다. 그가 강조한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 하는 믿음'이었다. 삶과 사회를 변화 시키는 성결의 복음이었다. 우리 죄인을 위하여 예수그리스도안에 마련하신 구원은 온전한 구원, 온전한 복음 (the whole Gospel, Full Gospel)이다.

최근에 로잔 세계복음화 운동에서 보듯이, 우리 (모든 교회)는 온 세계에게 복음을 전하데, 온전한 복음(The Whole Gospel)을 전하여야 한다. 이렇게 새로이 재발견된 복음운동에서 우리는 웨슬레의 메시지가 메아리치고 있음을 본다. 이런 메아리는 오늘의 강단에서 다시 울려 18세기, 19세기에서 보았던 뜨거운 부흥과 교회와 사회의 갱신을 보게 되기를 기원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