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 신학의 신학적 공헌과 현대적 의의

 조종남(전 서울신대 학장)

 

Ⅰ. 들어가는 말:

한국 교회는 그간 여러 면에서 성장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러나 선교 2세기, 21세기에 접어드는 오늘에 있어 뜻 있는 분들은 한국 교회를 염려한다.

첫째로, 한국 교회는 새로워져야 한다. 그 동안 한국교회가 물량적인 성장을 가져오긴 했지만 내적인 갱신이 없다는 것이다. 역사가 교훈 하듯이 갱신 없는 교회 성장은 부패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 한국 교회에 생기를 불어 일으키듯이 믿음을 강조하고 성령을 강조하는 운동도 일어나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 부흥을 가져 왔다. 귀한 일이다. 그러나 이도 역시 기사 이적, 권능을 강조하나 그에 따르는 거룩한 생활이 없기에 사회의 빈축을 사고 있는 듯 하다. 믿음과 생활의 이원화 현상이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위와 같은 이분화 현상은 선교에서 전도와 사회참여의 양극화 현상을 초래하기도 한다. 보수 경향이 있는 교회에서는 교회의 사명은 전도에만 있는 듯 주장하는 가하면,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사회참여를 주된 교회 사명으로 주장하기에, 원치 안는 양극화 현상이 일고 있다. 전도를 강조한다고 해서, 오늘에 심각한 문제가 되고있는 경제문제, 인권문제, 환경 문제 등에 대하여 신학은 잠잠하여야 하는 가?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서의 신학은 제 몫을 다하고 있는가?

세 번째로, 신학하는 태도도 달라져야 하겠다는 것이다. 한국의 신학 활동이 교회 생활과 격리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문제이다. 필자가 한국신학대학협의회 회장으로 있을 때, 신학자들이나 신학교육기관의 대표들끼리 모여 "오늘의 한국신학"에 대하여 협의하는 가운데 지적된 사실은, 한국에서는 신학하는 사람은 신학하는 사람들끼리 그리고 목회하는 사람들은 그들끼리 활동해서 이 둘 사이에 연결이 없다는 것이었다. 신학이 선교사역과 격리된 하나의 학문으로서의 신학으로 변질되는 경향이 생겨났다. 그러므로 아무리 신학을 한다 해도 그 신학은 직접 목회와 선교와 신앙 생활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요청되는 신학은 실제 신앙 생활과 전도와 선교에 연결되는 학문이라야 한다.

이런 관심에서 우리가 웨슬리 신학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의 있다고 사료된다. 웨슬리의 신학운동 자체가 교회 갱신의 신학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의 거성의 한 사람인 신학자, 칼 헨리 (Carl Henry)는 근대 교회사에서 교회갱신의 표범은 바로 웨슬리에서 본다고 말했다 루터란 신학자, 윌리엄 홀던(William Horden)이 지적한대로 웨슬리 신학은 18세기 영국의 교회 갱신과 부흥에 건설적인 사상을 뒷받침해 준 신학이었기 때문이다.

II. 위대한 신학자로 재발견된 웨슬리

와인쿠프(Wynkoop)박사가 지적했듯이 웨슬리는 주장하는 신학의 대의 (substance of the doctrine)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내려온 중요한 교리들을 그대로 긍정하고 있다. 그 면에서 웨슬리는 정통신학자요, 또한 셀(George Cell)의 말한 대로, 웨슬리는 종교개혁의 신학을 재천명한 사람이다.

그러나 웨슬리 신학은 그 신학이 강조하는 점, 또 중요한 관심을 갖고 개진해 나가는 방법론의 특징(circumstance of the doctrine)에서 다른 신학과 구별된다. 즉 웨슬리는 교회의 전통으로서 이어내려 온 교리의 대의(Substance of the doctrine)를 성서의 빛 아래서 신앙체험을 통하여 신앙생활에 적응성 있게 풀어 보려고 애쓴 분이다.

웨슬리의 생애에 대한 권위자인 타이어맨(Tyerman)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웨슬리 신학은 다른 학파, 즉 고대학파나 근대학파나 어떤 학파에서도 얻어온 것이 아니다. 웨슬리는 남의 것을 베끼는 사람이 아니었다. 웨슬리는 그들의 신학을 받아들이기 전에 신학의 유일하고도 순수한 원천인 성서를 통하여서 그의 교리를 찾았다. 그리고 성서에 있는 교리와 성서에 표현된 신앙의 고백과 체험을 오늘에 적응성에 있게 가장 잘 표현해 보려고 애썼다. 그러면서 웨슬리는 그것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씨름하는 신앙 체험에 비추어서, 오늘의 신앙 생활에 적응성 있게 해석을 하였다. 웨슬리는 신앙 체험을 중요시한 신학자였다."

웨슬리는 신학이 하나의 상아탑에서의 논리와 체계(system)로 머무는 학문이 아니라, 실제의 신앙 생활과 체험으로 옮겨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웨슬리는 어떤 학자가 말했듯이, 전통적으로 이어내려 온 신학과 교리에 피와 살을 붙여서 산 신학(living theology)을 만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존 웨슬리 신학의 매력(lure)이며, 그의 신학이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반문할 것이다. '그런데 왜 오랫동안 웨슬리는 위대한 신학자로 인식되지 않고 있었는가?

1974년에 미국의 드류 대학교(Drew University)에서 유럽과 미국·캐나다에 있는 개신교와 가톨릭 학자들이 모여서 웨슬리 신학에 대한 강연회를 가졌는데 유명한 웨슬리 학자인 아우틀러(Outler)는 두 가지를 지적했다.

웨슬리는 윌리암 포프(William B. Pope), 토마스 서머(Thomas O. Summer)와 같은 전통적인 웨슬리 학자들에 의하여 훌륭히 소개되었지만, 이는 미국의 인디언 섬머(Indian Summer)처럼 잠깐 빛을 보다가 사라지고 말았다. 이는 미국과 영국을 휩쓸고 있던 이성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이 올 때에 웨슬리가 말한 자유의지를 감리교 신학자들이 지나치게 강조하며 당시의 인기에 영합하여 나아감으로 감리교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에 빠져버리는 과오를 범한 때문이다. 유니온 신학교에서 박사학위 논문으로 나온 차일스(Chiles) 박사의 책 『미국 감리교회의 신학적 변천(Theological Transition in American Methodism』에 보면 이런 변천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칼빈주의 학자들이 웨슬리를 깊이 공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웨슬리를 찬양하고 존경하지만 웨슬리를 공부하거나 그의 글을 읽지 않았다는 것이다.

웨슬리 신학은 신학자들을 위한 신학자(theologian's theologian) 가 아니었다. 웨슬리는 대중을 위한 신학자(Folk-theologian)였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방대한 철학체계에 근거하여 신학을 개진하지 않았으며, 또한 치밀한 논리적 전개로 신학을 사변적으로 조직하지도 않았다. 그는 전도와 설교를 통해 신학을 전개했다. 오히려 웨슬리는 설교를 할 때도 쉽게 하려고 애썼다. 이와 같이 웨슬리는 의도적으로 사변적인 접근방법(speculative approach)을 피하고 쉬운 방법으로 전도의 도장에서 신학을 개진한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이런 평범한 전도자에게는 신학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이런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이런 평이한 이야기 식으로 서술한 글 속에 설득력 있는 깊은 신학이 있다고 새롭게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런 사고의 변천에 따라 최근에 이르러 웨슬리가 전도자였기에, 또는 철학적이며 사변적인 조직신학 책을 저술하지 않았기에 신학자가 아니었다는 오해는 일소된 듯 하다.

루터교 신학자 윌리암 호던은 자신이 쓴 「최근의 신학의 동향」이라는 글에서 "나는 존 웨슬리가 신학자가 아니오 전도자인줄만 알고 있었는데 연구해보니 웨슬리는 능력있는 신학자임이 확실하다"고 했다. 그는 부언하기를 18세기 웨슬리의 설교가 그렇게 놀라운 교회 부흥과 사회 갱신을 가져왔는데, 그것은 그의 설교 메시지는 건전한 신학(Constructive theology)이 뒷받침하고 있었기에 그랬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특히 최근에 신학을 선교적 관심에서 논하게 될 때 웨슬리는 새로운 각광을 받는다. 오늘날 폭 넓게 받아드려지고 있는 「로잔 언약」(Lausanne Covenant)의 내용을 보면 웨슬리 신학적 입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말한 대로 "현대 신학을 말함에 있어 웨슬리는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III. 웨슬리 신학의 공헌과 현대적 의의

그러면 웨슬리 신학이 교회와(전통적인 면에서) 신학에서 특징 있게 공헌한 점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3.1. "믿음만으로"와 "거룩한 생활"을 통합시켰다-성화론

웨슬리의 신학적 접근의 특징은 모든 학자가 말하듯이, 그가 성서에 있는 교리(substance)를 신학화(theologize)함에 있어서 창의적인 종합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것은 성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는 교리인 "믿음만으로"(Sola Fidei)와,"거룩하게 살아야 한다"(Holy Living)는 두 가지의 주장을 균형 있게 통합하는 성화의 교리를 정립한 것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는 성서 전체에 흐르고 있는 줄거리이다. 이것을 성서에서 발견하고 강조한 것이 종교개혁자들이요 그 후예들이다. 그러나 이것을 강조하다 보니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성화 문제에 대해서는 자연히 등한시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고찰해 볼 때 성화의 개념(idea of holy)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로마 가톨릭은 선행으로써 거룩한 삶(holy living)을 강조하여, 마치 구원은 선행(good work)으로 받는 것처럼 가르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결국은 도덕주의(Moralism)에 빠질 위험성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은 선행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선행에 대한 반발로 나온 종교개혁자들의 반동(reaction)은 나름대로의 문제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래서 18세기에(오늘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도덕 폐기론(antinomianism)을 말하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한국교회가 반성할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의 한국교회가 열심은 있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믿음과 실생활은 단절되어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거룩한 삶'에 대한 구원론적 신학적 뒷받침이 없는 데서 오는 문제점이다.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신학은 교인들에게 고민을 안겨 주고 신앙 생활을 건설적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이중예정론을 말하는 개혁주의에서는 '믿음만으로'를 강조하여 구원을 받는 믿음마저도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주는 은혜라고 하면서 거룩한 삶에 대한 개인의 책임(involvement)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 반면, 신플라톤주의(New Platonism)의 영향을 받은 개혁주의에서는 인간의 육신과 인간의 제한성(human infirmities)을 악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온전한 성화'라는 개념을 거의 체념하다시피 잊어버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여기에 웨슬리는 역사적으로, 전통적으로 간직해 내려온 '거룩의 개념'(idea of sanctity)과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믿음만으로'(evangelical principle)라는 주장을 통합시킨 것이다. 웨슬리는 이 문제를 그의 유명한 성화론(Doctrine of Sanctification)에서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이 생활까지 미치는 깊이와, 동시에 거룩한 삶을 강조함으로 '믿음만으로'와 '거룩한 삶'의 두 면을 양극화시키지 않고 은총의 역사의 테두리 안에서 종합시킨 것이다.

웨슬리는 종교개혁자들과 함께 믿는 자는 칭의(Justification)를 받음과 동시에 거듭나는 (Regeneration)것이며 이 거듭난 자는 성결한 생활을 시작한다고 가르친다. 웨슬리의 강조는 바로 이 중생으로 시작되는 성결한 삶에 있었다. 그에 있어서 구원은 실제적 변화를 의미한다. 곧 구원은 죄악으로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renewing of the image of God in humanity)을 포함한다. 웨슬리에 의하면 중생함으로 죽었던 영적 감각(spiritual senses)이 되살아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벧후1:3-4)"가 되어 하나님의 사역을 반영하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어진 기능과 책임을 이행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최근에 런뇽박사 (Theodore Runyon)가 지적했듯이, 중생함으로 되살아나는 '정치적 형상(Political image)'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의 관리자이듯이, 거듭난 신자는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일을 반영하는 대리자로서 환경을 관리 보호할 의무가 있음을 말한다. 이런 신학적 이해는 오늘에 있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환경학(ecology)에 대한 신학적 접근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웨슬리는 중생으로 시작된 성화(성결의 삶)는 성장해 나가 온전한 성화에 도달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웨슬리에 의하면 온전한 성화는 곧 온전한 사랑의 삶(love in action)을 의미한다. 이 사랑은 모든 죄된 것을 마음에서 추방하며 또한 사람의 마음을 사랑으로 채워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롬 13: 10)이다. 온전한 신자는 사랑의 관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중단없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자이다. 그러므로 웨슬리에게 있어서 믿음의 생활은 곧 사랑의 생활이요,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것을 닮아 살아가는 삶" 자체이다. 따라서 웨슬리의 성화는 곧 사회생활 속에서의 거룩한 삶(social holiness)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웨슬리의 신학은 개인 전도와 사회참여의 이원화 또는 양극화 경향을 극복한 것이다. 그 뿐아니라, 성화에서의 온전한 사랑을 강조하는 웨슬리신학은 기독인의 사회참여와 의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웨슬리의 선교운동은 처음부터 전도와 사회갱신 운동이었다.

19세기 미국의 부흥운동에 영향을 받은 교회들은 성령충만을 강조한다. 그들은 성화론을 성령론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리하여 성령의 인도 아래 있는 거듭난 성도(거룩한 자)가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승리로운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에서 강조되는 성령충만은 단지 권능을 받고 기사 이적을 행하는 것으로 강조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웨슬리는 위에서 온전한 사랑의 (소극적이요 적극적인) 두 면을 언급했듯이 성령충만은 능력 뿐만 아니라, 내재적인 죄에서 씻음을 공히 강조한다. 어떤 면에서는 후자를 더 강조한다. 그래서 신자의 회개를 강조한다. 이면에서 웨슬리의 성화론은 진정한 한국교회의 갱신에 공헌할 수 있다고 사료된다. 그러기에 웨슬리의 전도는 성결전도(holiness evangelism)이며, 이 운동이 18세기의 영국교회와 19세기의 미국교회에 큰 갱신, 부흥운동을 초래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한국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3.2. "은총만으로"와 "인간의 책임"을 통합시켰다.-복음적 협동설

존 웨슬리는 은총관에서 또 한가지 놀라운 창의적인 종합을 이룸으로 기독교 전통에 큰 공헌을 했을 뿐 아니라 오늘의 선교신학계가 갖고 있는 딜레머(dilemma)를 해결하는 데 큰 공헌을 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슬로건(slogan) 가운데 하나가 은총만으로, 곧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하여 받는다는 교리였다. 그러나, 이 은총이 어떻게 역사 하느냐를 구체적으로 설명함에 있어, 전통적인 개혁주의는 이를 이중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으로 설명하여 칼빈주의의 특징을 이루었다. 이들은 소위 5대 교리를 전개하였는데, 아주 논리적이다. 그러나 이 교리는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대로 홀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역사하신다고 결론지음으로, 신단독설(divine monergism) 또는 결정론(divine determinism)에 빠지고 만다. 그렇다면, 사람의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신약성서에 고백된 신앙의 표현과 일치하느냐 하는가? 아니, 우리의 신앙 생활이나 목회나 선교에서 하나님의 '은총만으로'라고 주장하기에, 사람의 역할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성서에 나타난 가르침은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사람의 책임과 결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를 신학자들이 한쪽에만 치우침으로 이 두 주장을 양극화시키고 말았다. 한 예를 본다면 펠라기아니즘(pelagianism)이 바로 그런 것이다. 이들은 인간에게 자유와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타락과, 은총만이라는 교리를 퇴색시킨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의 주장이 나왔다. 이것은 하나님의 도움과 인간의 협력(Synergism)을 주장이다. 이들은 인간이 타락하였지만 부분적으로만 타락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과 협동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인간이 온전치는 못하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하나님의 은총을 약화시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유일한 계시의 의미를 충분히 강조하지 못한다. 또한 성서의 고백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성서는 '은총만으로'를 말함으로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는 구원에 있어 인본주의적(humanistic)인 요인을 배제하고 있다.

여기에 웨슬리는 오랫동안의 신학적 딜레마를 해결하여, 우리의 신앙 생활과 선교에서 역동적으로 뒷받침될 수 있으며 성경에 있는 신앙의 표현에 일치하는 은총의 역사를 설명했다. 여기에 웨슬리 신학의 위대한 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웨슬리는 은총론을 어떻게 전개했는가? 웨슬리는 아담의 원조로 인한 인간의 전적 타락을 주장한다. 그는 '은총만'이라는 종교개혁자의 신학의 대의를 긍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이 어떻게 역사하시느냐에 대해서는 그들과 해석을 달리한다. 이는 그가 신학을 철학적으로 다루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셨는가 하는 것을 성서에서 찾아서, 체험에서 확인된 것으로 신학을 개진했기 때문이다. 하버드의 신학자 라이트(G. E. Wright)가 지적한대로 "신학은 내가 형이상학적으로 추리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사건을 통해서 어떻게 다루셨는가를 그대로 설명하여(Biblical theology as recital) 그것을 우리에게 적응시키는 것이다."(G. E. Wright, 『God Who Acts』)

이에 웨슬리는, 사랑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타락했을 때, 한편으로는 정죄하셨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그의 사랑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해서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도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다. 이 말은 멸망하는 것을 그대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은총의 역사를 시작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이를 웨슬리는 선행적 은총(preventing grace)라고 불렀다. 하나님은 선행적 은총으로써, 다 멸망받아야 하고 전적으로 무능하게 된 인간에게 값없이 은총(free grace)을 주셨기에 사람은 하나님이 회개하고 거듭나라고 부르시는 음성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 곧 자유의지가 어느 정도나마 초자연적으로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웨슬리에 있어서 구원은 철두철미, '은총만으로'인 것이다. 그러므로 웨슬리에 의하면 실존적인 인간은 이미 은총아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할 수(ability)가 있으며, 따라서 응하여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존 웨슬리는 빌립보서 2장 12-13절을 본문으로 한 그의 설교 「우리의 구원을 성취함에 있어서」(On Working Out Our Own Salvation)에서 이 문제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런 은총관에서 웨슬리는 사람이 자기 본래의 능력으로 선을 행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적 사상에 빠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사람이 타락한 죄인이기 때문에 책임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는 극단적인 신학의 잘못을 피한 것이다. 이는 중대한 공헌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견해를 스타키(Starkey) 박사는 그의 박사 논문에서 복음적 협동설(Evagelical Synergism)이라고 불러, 일반적으로 말하는 신인협동설과 구분한다.

한국교회가 선교 2세기를 향하면서 선교에 보다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과제 앞에서 웨슬리 신학은 큰 공헌을 하리라고 기대한다. 왜냐하면 위에서 살핀 대로 웨슬리의 은총관은 선교 신학에 건설적인 기초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웨슬리 신학은 오늘의 선교에서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는 접촉점(point of contact)─ 계속성과 불연속성에 연관된 신학적 난제를 건설적으로 해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연속성을 주장한다면 범신론자, 낭만적 인본주의자들처럼 자연과 은총을 동일시해 버리는 잘못에 빠지기 쉽고, 반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연속성(discontinuity)을 강조한다면 칼 바르트(Karl Barth)나 크레이머(Kreimer)처럼 선교에서 접촉점이나 대화의 공동 기반 또는 변증적인 접근(apologetic approach)의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난관에 부딪히기 쉽다. 이것이 타문화권 선교(cross-cultural mission)에서 직면하게 되는 쟁점이다. 이 점에서 웨슬리는 하나님과 인간(자연) 사이의 긴장(불연속성)을 유지하면서 하나님께서 먼저 역사를 시작하시고 이미 타락한 사람 속에서도 역사하고 계시다는 은총의 관점에서 접촉점을 찾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웨슬리는 자연과 은총을 동일시하지 않으면서도 선교에 있어서의 접촉점을 제시한다. 이로서 그는 선교신학에서의 딜레머를 건설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신학적 기초를 제공한 것이다.

웨슬리 신학은 인간의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요청을 말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를 말함으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소망을 준다. 그런가 하면, 이 복음은 듣는 사람이 듣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인간의 책임을 말하기에 교회의 선교하여야 하는 특권과 아울러 책임과 사명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므로 웨슬리 신학은 선교 2세기를 맞이하여 해외선교, 타문화권 선교를 하고자 하는 한국교회에 건설적인 신학적 뒷받침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3.3. 신학과 전도를 통합시켰다 - 실용적 신학

앞에서 말한 대로 웨슬리 신학은, 설교를 통해서 또는 전도 현장에서 웨슬리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확신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강조함과 동시에 이 복음을 만민에게 전해야 한다는 그의 신학적 확신은 그의 신학을 열렬한 전도와 선교하는 교회로 직결시켰다.

사실, 신학도 궁극적으로는 선교에 연결되어야 한다. 신학의 과제(task)는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잘 해석하고, 둘째 오늘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선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점검하면서, 셋째 기독교 복음을 지성적으로 제시하고 그들을 설득시키려는 선교에 있는 것이다. 곧 신학은 이론만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를 지향하는 선교와 직결된 신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웨슬리가 한때, 어떤 지역에서는 전도를 하지 말라고 위협을 받았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 세계가 나의 교구라고 생각한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기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어디로 보나 당연하고 올바른 일, 곧 나에게 주어진 의무이다. 내가 알기로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일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축복하신다. 그러므로 나는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 충실하고자 한다."(『Wesley Letters Ⅰ』, p. 286)

이것이 바로 존 웨슬리의 신학하는 태도였고 결의였다. 웨슬리는 신학자요 동시에 전도자였다. 칼 헨리가 지적했듯이 신학의 깊이와 뒷받침 없는 선교와 전도는 위험하다. 그런가 하면, 동시에 전도로 연결되지 않는 신학은 불필요하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 신학은 전도에 열심 있는 신앙의 불을 끄는 학문이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오늘에 요청되는 신학자는 신학자-전도자라요 단순한 신학자가 아니다.

이면에서 신학자이면서 열렬한 전도자였던 사람은 사도 바울 다음으로 존 웨슬리일 것이다. 웨슬리는 당시 영국 교회로부터 설교할 강단을 빼앗기는 일이 있어도 전도는 양보할 수 없었다. 그는 노천으로 나가서 전도했다. 그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회가 있든지 없든지 복음 전파에 힘썼다. 그는 영국 전역뿐 아니라 네덜란드, 아일랜드, 미국에까지 이르는 전도를 했다.

오늘의 한국의 신학교육이 실제 선교의 현장과 단절된 듯하며, 목회자와 신학자는 따로 논다는 교계의 비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웨슬리의 신학하는 태도가 주는 교훈은 크다고 할 것이다.

3.4. 신앙 체험을 강조하여 신앙 생활에 활력소를 가하다

웨슬리 신학이 성서에서 교리를 연역하여 신학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그의 신앙 체험이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웨슬리 신학의 개진과 그의 신학의 정립은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 체험과 실존적인 신앙의 순례 길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체험이란 슐라이에르마허의 체험과 구분되어야 한다. 웨슬리가 말하는 체험은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호응하는 것으로서의 체험이다(Personal involvement in God's saving Grace).

웨슬리는 어려서부터 철저한 크리스챤(Altogether Christian)이 되려고 열망하고 다짐했던 사람이었다. 이를 위하여 그는 옥스퍼드 대학(Oxford University)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전도 활동도 했다. 그러나 웨슬리에게는 '가슴이 뜨거운' 신앙 체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러던 중 17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잇에서 있었던 집회에서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역사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웨슬리 신학은 그때부터 새로운 입장에서 전개되어 나갔음을 본다. 즉 은총의 신학을, 그의 신앙 체험을 통하여 확신을 가지고 긍정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웨슬리는 늘 하나님의 은총을 사람의 체험과 연관시키고, 또한 논리를 생활과, 교회를 사회와 연관시키면서 실제적인 산 신학을 정립하였다. 신학에 살과 피를 붙여 인간의 삶에 들어오게 하였던 것이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감격이 없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다. 신학을 공부해서 하나님을 말하고 은총을 말하는데 전도하고 싶은 열정이 없다면 그 신학은 다이나믹한 것일 수 없다. 이에 체험을 강조하는 웨슬리는 확신의 도리(Doctrine of Assurance)를 개진하여 기독교계에 놀라운 공헌을 했다.

"성도의 확신", 성도 안에 있는 "영광의 소망"은 초대교회의 신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것이다. 이 확신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활력소'가 되었던 것이다. 초대교회는 핍박 속에서도 그 소망과 확신으로 힘차게 걸어 나갔다.

교회사를 보면 로마 천주교에 와서는 이 '확신의 도리'가 성례전 신학(Sacramentalism)과 연결시킴으로써 하나의 형식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한편, 개신교의 개혁주의 신학(Calvinism)에서는 예정론이라는 하나의 교리에 연결시키나, 여기에는 힘이 없다. 그런가 하면 이런 형식주의와 이론주의에 반발하는 신비주의는 그 반발(reaction)로서 아주 주관적이고 신비적인 데로 빠져버리고 말았다.

여기에 웨슬리 신학은 성령이 증거하시는 역사에서 이 확신의 도리를 정립하였다. 성령의 간접적 증거라는 객관적인 것과, 영의 직접적인 증거라는 주관적인 것을 종합함으로써 성서의 신앙을 표현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초대교회가 그렇게 감격적으로 고백한 확신의 도리와 활력소를 웨슬리는 이 체험을 강조하는 확신의 도리에서 참되게 표현한 것이다.

오늘에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라고 하지만, 명목적인 신자에 머무르고 있는 신자가 많은 이 때에, 신앙체험을 강조하는 웨슬리 신학의 부활을 우리는 기대하여 마지않는다.

IV. 맺는 말

이상에서 우리는 웨슬리 신학의 특징과 이룩한 공헌을 살펴보면서, 선교 2세기를 향한 한국교회에 기여할 잠재적 가능성을 개관할 수 있었다.

차일스(Robert Chiles)는 유니온 신학교 박사논문에서, 웨슬리가 기독교에 크게 공헌한 점은 교회를 개혁했다거나 변질시킨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자체를 새롭게 한 교회 갱신(Church renewal)에 있다고 지적했다. 웨슬리의 신학운동은 18세기의 영국 교회와 사회에 괄목할 만한 갱신을 가져왔다. 성서적인 기독교(Bible Christianity)를 긍정하고 재현시켜 보겠다는 그의 신학운동은 여러 면에서 새로움을 가져왔던 것이다. 무기력했던 교회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부패했던 교회 양심에 깨우침을 주었고, 교회 선교를 활발하게 해주었으며, 해외선교까지도 이끌어주었다.

그 뿐아니라, 웨슬리의 선교는 당시의 문화와 정치 모든 면에서 새로운 차원을 가져왔다. 기독교를 공개적으로 무시하던 18세기 영국을 변화시킨 것은 웨슬리의 선교운동이었다. 그러기에, 이건 목사님은 "웨슬리는 죽음의 관에 갇혀 있던 기독교를 부활시킨 것이다"라고 했다.

선교 2세기를 향한 한국교회에 이와 같은 운동이 일어나기를 기원한다.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신학이 꽃을 피우기를 기원한다.

웨슬리는 메소디스트를 교회 안에 있는 작은 교회(Ecclesiolae in ecclesia)로서 성결의 누룩(leaven of holiness)이라고 불렀다. 오늘의 메소디스트가 성결의 누룩으로 그 사명을 다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