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A. 문제 제기 및 연구목적

18세기 중엽에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의 지도 하에 영국을 풍미했던 웨슬리 부흥운동은 종교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웨슬리 부흥운동의 사회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최근까지도 찬반 논란이 계속되고 있어 새로운 조명이 필요하다.  

한국 기독교계는 웨슬리 부흥운동의 사회적인 영향에 대한 이해가 더 결여 되어 있다. 최근 들어 감리교 측에서는 김홍기 교수를 필두로 웨슬리의 사회적인 측면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웨슬리의 입장을 따르고 있는 기독교대한 성결교회에서는 최근에 이르기까지 웨슬리 부흥운동의 사회 개혁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어 지지 않고 있다.   

이는 기독교인들의 사회적인 관심의 미숙에서 연유된 것이기도 하겠지만 웨슬리에 대한 편협한 시각에서 연유된 측면이 더 강하다고 해서 무리가 있겠는가? 웨슬리는 늘 영적인 세계에 대한 의식 속에 살았고 개인적인 회심을 통해 개개인의 영혼들을 하나님과 교제케 하려 노력했기에 그는 거의 세상사에 대해서는 이해가 없고, 그에게 사회 문제는 관심사가 아니었으며, 대중들의 마음과 노력을 삶의 생동적인 문제들을 피해 무덤 너머 천상의 축복을 꿈꾸는 일에 고착케 했다는 편견들이 웨슬리 운동의 사회적인 측면에 대해 눈을 흐리게 했다고 말한다면 잘못된 이해인가?

웨슬리는 과연 교회와 개인구원의 문제에만 관심을 두었고 당시 영국의 사회, 정치, 경제 등의 문제들에는 관심이 없었는가? 그의 부흥운동에서 발견되는 인간들의 친교, 협동, 그리고 인간 사회문제에 대한 봉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사회에 대한 크리스챤들의 책임에 대하여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종교이다. 기독교를 개인적인(solitary) 종교로 향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이다”라고 한 웨슬리의 산상수훈에 대한 설교의 중요한 언급을 단순히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그는 최초의 메도디스트 찬송가(1739) 서문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회적이 아닌 종교를 알지 못하며, 사회적 성결이 아닌 성결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명령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의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이다”라고 기술했다. 이 부분에서 웨슬리의 성결 개념이 개인적인 구원과 성결의 문제라고만 치부할 수 있겠는가? 웨슬리에게는 ‘사회적인 것’은 없고 ‘영적인 것’만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관점에서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부정, 불의, 부도덕, 그리고 반종교에 대한 혁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중심에 계급에 대한 증오가 아닌 인간애적인 사랑을 지닌 혁명이었다”는 브레디(J. Wesley Bready)의 주장은 많은 공감대를 이루게 한다.

 본 연구는 이처럼 웨슬리의 부흥운동이 영국의 사회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시각을 가지고 웨슬리 운동의 사회 개혁적인 측면에 대해 고찰하므로 한국 기독교에 웨슬리 운동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을 제시하며, 기독교 운동의 바람직한 한 모델을 제시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기독교의 세상 속에서의 “빛과 소금”의 역할이 더 없이 중요하게 강조되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 웨슬리 부흥운동의 사회활동은 좋은 지침이 될 것이다.

 

B. 연구사

    웨슬리의 사회개혁자로서의 논의는 최근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앞 부분에서 밝혔다. 이 문제에 대한 논의의 흐름을 개괄해 보기로 하겠다.

   웨슬리에 대한 사회개혁자로서의 논의의 문을 연 인물은 프랑스의 역사가 엘리 할레비(Elie Halevy)이다. 그는 1913년에 그의 저서 영국 메도디즘의 탄생을 통해 18세기의 영국은 웨슬리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혁명의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가설을 세웠다. 그는 메도디스트에 의해 보여진 폭발적인 종교적 열정주의가 참으로 혁명적인 정치력을 촉발시켰다고 해석한다.  

   1930년대에는 이 문제에 관해 피이트(Maximin Piette)의 프로테스탄트의 발전 속에서의 존 웨슬리(1937)와 영국의 사회역사가인 브레디(J. Wesley Bready)의 영국: 웨슬리 이전과 이후(1938)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피이트는 그의 책을 통해 할레비의 논제를 최초로 공박하였다. 웨슬리 운동은 사회적 혁명이나 정치의 문제들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개인의 잠재력이나 능력에만 관심을 쏟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피이트의 이러한 결론은 의문의 여지가 많다. 그는 개인의 잠재력이나 능력과 그것이 어떤 사회적인 영향력에 연관될 수 있다는 가능성 사이에 분명한 선을 두려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브레디는 그의 책에서 웨슬리의 부흥운동 이전과 이후의 영국 상태를 비교 연구하여 웨슬리가 영국 사회변혁에 미친 영향을 높이 평가하였다.

   1940년대에는 린드스트룀(Harald Lindstroem)의 웨슬레와 성화(1946)가 출판되었다. 그는 그 책을 통해 최초로 웨슬리의 성화론에 대해 포괄적이고 조직적인 연구를 제공했다. 그는 웨슬리의 성화론에 있어 성화가 윤리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처럼 그가 성화론을 구원론의 중심에 세우고 웨슬리의 성화론의 윤리적 의미를 주장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의 논지는 사회적인 성화에로까지는 발전하지 않고 있다.     

   1960년대에는 콜린 윌리암스(Colin W. Williams)의 오늘의 웨슬리 신학(1960)과 케언즈(Earle E. Cairns)의 성자들과 사회(1960)가 출판되었다. 윌리암스는 그의 저서에서 웨슬리의 완전교리에는 윤리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성화의 점진적 과정과 사회적 윤리를 연결시킨다. 그에 의하면 완전이란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을 통한 신자들의 삶의 변형에 대한 약속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계속해서 윤리적인 명령에 종사하게 된다. 윌리암스는 린드스트룀보다는 더 포괄적으로 성화에 대한 이해를 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사회적인 성화와의 관련성이 미약하다고 볼 수 있다.

케언즈는 같은 해에 출판된 그의 책에서 18세기 중엽에 웨슬레의 지도 하에 영국을 풍미했던 웨슬리 부흥운동의 종교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으나 그 운동의 사회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동일한 이해가 부여되지 않았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영국을 프랑스와 같은 혁명의 위기에서 구한 것은 정치제도나 경제조직이 아니라 메도디즘의 부흥운동이었다는 할레비의 주장을 긍정했다. 1739년 이후에 있게 된 영국 사회의 역동성은 그 부흥운동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 부흥운동에는 영혼구원은 물론 문화에 대한 봉사도 병행되어 있었다는 것이 그의 논지이다.   

   1970년대에는 웨슬리의 사회적인 측면에 대해 젬멜(Bernard Semmel)의 메도디스트 혁명(1973)과 슈네베르거(Vilem Schneeberger)의 웨슬리의 사회행동의 신학적 뿌리(1974)가 출판되었다. 또한 마르크바르트(Manfred Marquardt)의 1975년도 박사학위 논문이 웨슬리의 사회 윤리: 그 실천과 원리들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젬멜은 웨슬리 운동을 통한 종교적 부흥이 혁명적인 폭력에 역으로 대응적인 역할을 잘 해냈다고 주장하여 엘리 할레비의 이론을 지지하였다. 그에 의하면, 구원을 발견한 사람들은 선한 삶과 기독교적인 성향으로의 성장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는 복음적 알미니안주의의 요구가 전통적인 질서와 현 질서 사이를 큰 소요적인 격변 없이 연결시켜 주는 가교적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 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특성이 사회.정치적인 결과들을 낳았다고 보고 있다.

   슈네베르거는 그의 책에서 믿음과 사랑이 웨슬리 신학의 중요한 두 기둥임을 강조한다. 그는 이 믿음과 사랑 양자는 모두 하나님 뿐 아니라 이웃과도 필연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은 이웃에 대한 의무로까지 이어지는데 이웃의 한계는 모든 세상이라고 한다. 만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나의 섬김을 받아야 하는 이웃이라면 여기서 사회적인 인식과 책임이 직접적으로 제공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웨슬리의 신학에는 사랑의 실천이라는 주제를 통해 사회와의 연관성이 강함을 강조했다.

   마르크바르트는 그의 책을 통해 웨슬리 부흥운동을 기독교 윤리와 실천의 합일체로 소개하였다. 그는 웨슬리의 윤리는 책임성과 연대 양자를 내포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불가분의 것으로 이는 세상에 대한 굳건한 책임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1980년대 들어서는 웨슬리의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논쟁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981년에 런연(Theodore Runyon)은 성화와 해방이라는 책을 편집하여 웨슬리의 성화 사상과 해방신학과의 연관점을 모색하였다. 그 책에는 여러 학자들의 글이 발표되었는데, 우선 편집자인 런연은 웨슬리의 성화 개념이 해방신학과 공통적이고 비판적인 접근방식을 공유하는 것으로 본다. 그는 성화 이해의 목적론적인 성격에 근거해 이러한 주장을 전개한다. 웨슬리의 성화관에는 진보에 대한 명백한 희망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희망은 개인의 질적인 변화는 물론 우리가 사는 세상의 변형도 요구하는 개혁의 동인인데, 그는 이것이 신앙인을 사회의 활동무대로 이끌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런연(Runyon)의 주장은 웨슬리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자들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보니노(Jose Miguez Bonino)는 런연을 지지했다. 그는 웨슬리의 영적이며 주관적인 것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경건주의적 성결의 종교로 이끌고 말았지만, 그러나 웨슬리가 구체적 행동을 주장한 것은 성화의 삶은 단지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한다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반면에 켄트(John Kent)는 같은 책에서 엘리 할레비와 버나드 젬멜의 입장을 부정한다. 그는 18세기 웨슬리의 ‘경건주의적인 문화’는 사회를 전체로 생각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웨슬리를 ‘개인적 성화’ 캠페인자로 보며, 웨슬리의 사회 성화적 관점의 사회적 중요성을 부정한다.

   그러나 힌슨(Leon Hynson)은 1884년에 출판된 민족을 변화 시키기 위하여: 웨슬리 윤리의 신학적 근거에서 웨슬리에게 있어 성화된 삶이란 사랑을 통해 구체적인 행동으로 전환되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시도함으로 웨슬리의 사회 성화윤리 발전에 공헌했다. 그는 웨슬리의 초기와 후기의 사회 정치적인 입장에 대해 명확한 구획선을 긋는다. 웨슬리의 사상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웨슬리가 그의 공적인 사역이 성숙해진 후년에는 분명히 비정치적이 아니었음을 주장한다. 이렇게 하여 힌슨은 웨슬리 신학이 사회.정치적인 유산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접촉점을 열어 주고 있다. 그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강력한 사회적인 사상임을 주장한다.

   1990년대에 들어 와서도 이러한 논란은 지속되고 있다. 랙(Henry D. Rack)은 그의 합리적인 열성주의자: 존 웨슬리와 메도디즘의 발생(1989)을 통해 웨슬리나 초기 메도디즘 그리고 웨슬리의 신학적인 견해에는 사회.정치적인 관련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관점하에서는 웨슬리나 메도디즘이 여하한 중요한 개혁을 주도하거나 시도하지 않았고, 웨슬리는 산업자본주의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어떠한 해결책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된다. 그는 메도디즘이 18세기 영국의 개혁에 중요한 기수로 기능 했다는 실제적인 역사적 증거들을 찾는 일에 실패하고 있다.

   1990년에 키퍼(Luke L. Keeper)는 이러한 부정적인 주장들에 대해, 그들은 메도디스트(Methodist)가 성취한 것들에 대해 충분한 영예를 부여치 않고 있다고 반박했다. 메도디스트들의 자선행위가 수 많은 사람들을 개선시켰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분위기를 조성케 하여 불행한 자를 돌보는 것을 정치의 이상(ideal)이 되게 했는데, 그들은 이러한 것을 발견해 내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메도디즘이 사회변화의 진척율을 느리게 하기는 했지만, 영국인들의 마음에 부합하는 평화스러운 변화에 대한 방법을 제시하여 궁극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1994년에는 매독스(Randy L. Maddox)의 책임적인 은혜: 존 웨슬리의 실제적인 신학이 출판되었다. 그는 그 책을 통해 웨슬리의 윤리에는 강력한 사회 정치적인 변화에 대한 관심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웨슬리가 후기에는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더 위대한 통치와 일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정치적인 해결책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음을 강조하는데, 그는 웨슬리의 선행은총(Prevenient Grace) 사상을 토대로 하여 그 동인을 분석한다. 웨슬리의 선행은총 사상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목적 성취에 있어서의 ‘세속적’인 형태와 ‘거룩한’ 형태 간의 이분법을 기각케 했다는 논지이다.      

   1998년에는 런연의 새로운 창조: 오늘의 존 웨슬리 신학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웨슬리의 구원론을 ‘하나님 형상의 온전한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논하고 있다. 그는 웨슬리의 성화 교리가 오늘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에 기여한 공에 대해 누구도 훼손하지 못할 것이라고 웨슬리의 성화교리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구원을 의인 또는 회심과 동일시하는 프로테스탄트의 경향성에 대해 중요한 시정을 이루게 했다는 것이다. 웨슬리의 성화론은 하나님과의 화해와 새로운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적 세계 모두의 재창조가 하나님의 목표임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관점이다. 그는 이러한 시각에서 오늘날 대두되고 있는 인권이나 환경문제 등에 대해 웨슬리 신학을 통한 해결방안 모색을 제언하고 있다.

   한국 신학계의 경우는 1980년대 후반부터 웨슬리의 사회적인 측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에는 웨슬리 신학에 대해 여러 서적들이 저술 또는 번역 출판되었지만 주로 개인적인 성화에 초점을 둔 것들이었다.

   1987년에 웨슬리의 사회적인 성화에 대한 내용의 두 책자가 번역 출판되었다. 힌슨의 To Reform the Nation이 웨슬리의 윤리사상이라는 이름으로 출판 소개되었고, 또한 런연의 Sanctification and Liberation이 웨슬리와 해방신학이란 책명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자들은 한국 기독교계에 웨슬리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문을 열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 책들은 웨슬리의 윤리나 사상적인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가 낳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다루어 지지 않고 있다.         

   1992년에 마르크바르트의 책이 존 웨슬리의 사회윤리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이 책은 웨슬리의 사회활동과 사회윤리에 대한 짜임새 있는 연구서로 한국 기독교계에 웨슬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 주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본다. 본 연구자도 이 책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음을 밝혀둔다. 하지만 이 책은 웨슬레의 사회활동이 19세기 영국의 사회변화에 미친 영향과 열매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1990년대에 들어서 감리교에서는 웨슬리의 사회성화 측면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1993년에는 김홍기 교수가 존 웨슬리 신학의 재발견: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성화의 역사적 재조명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보충한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웨슬리의 사회적인 성화사상에 대해 그 배경과 내용을 고찰하며 한국의 민중신학과 비교하고 있다. 그는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화는 성결과 사랑을 뜻할 뿐만 아니라 자유와 해방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그의 논지 하에 민중들의 해방을 추구하는 민중신학과의 대화를 모색하며 비교 연구하고 있다. 이 책은 웨슬레의 사회적인 성화사상에 대한 한국인의 체계적인 최초의 연구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1995년에는 김홍기 교수에 의해 존 웨슬리의 희년사상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웨슬리를 희년이라는 시각에서 조명한 것으로 웨슬리를 한국교회의 통일 희년운동의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웨슬리가 절대적 신국의 모습은 초월적이고 미래적이지만 상대적인 의미에서 사회적으로도 지상의 천국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입장을 피력한다. 웨슬리의 그러한 면이 희년사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책은 시도는 훌륭했으나 지나치게 희년이라고 하는 전제에 매여 있고, 웨슬리의 실천적인 부분에 대한 연구가 세밀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1996년에 역시 김홍기 교수에 의해 존 웨슬리의 구원론이 나왔다. 이 책은 웨슬리의 성화 측면에 대한 그의 연구의 종합적인 결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그간 한국 신학계의 성결 중심의 구원 이해 구조를 벗어나 성결과 사랑이라는 양면 구조적으로 웨슬레의 구원론에 접근하고 있다. 웨슬레의 성화론의 소극적 차원이 오히려 성결적 요소요 적극적 차원이 성육신적 요소, 곧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관점으로 연구하여 웨슬레의 구원론은 사회적 구원을 포함하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이 책은 웨슬레의 구원관을 육신과 영혼, 개인과 사회를 포괄하여 온 우주의 회복이라는 광대한 차원으로 넓히고 있다. 김홍기 교수의 이러한 저작들은 웨슬리의 사회성화에 대한 사상적인 면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다루었으나, 그에 비해 18-19세기 영국에서의 웨슬리의 구체적인 사회성화 실천과 그것이 이룩한 결실에 대해서는 충분히 다루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대한 성결교회의 경우에는 1975년에 강근환 교수가 웨슬리의 사회개혁에 대한 영향에 관해 역사적 방법으로 고찰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웨슬리의 사회적인 측면에 대한 한국 기독교계의 최초의 연구라는 뜻 깊은 의미를 지닌다. 그는 이 논문에서 틸리히(Paul Tillich)의 관점을 빌어 종교와 문화와의 상관 관계성 측면에서 종교가 문화에 미치는 영향의 심대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이 논문은 웨슬리의 사회개혁에 대한 연구이지만 웨슬리의 사회 개혁운동 측면을 강조하기 보다는 사회에 있어서의 종교의 위치와 역할에 더 중심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연구 후로는 기독교대한 성결교회 측에서는 웨슬리의 사회 성화적인 면에 대한 연구가 나오지 못했다. 조종남 박사, 한영태 박사, 그리고 이성주 박사의 웨슬리에 관한 연구서들이 나왔지만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성결이라는 관점에서의 접근서들이다. 모두 의미 있는 연구서들이지만, 웨슬리의 사회적인 성화라는 측면에 대한 연구는 아니라는 부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이 분야에 대해 이성주 교수의 “웨슬리의 사회윤리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는 웨슬리가 선교 뿐 아니라 지역사회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사회참여에 노력한 점을 발견하여 그것을 현장 목회에 적용하려는데 이 연구의 목적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좋은 시도임에 틀림 없으나 그는 이 논문에서 웨슬리의 사회적인 측면을 깊이 있게 연구하기 보다는 웨슬리와 해방신학은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더 비중을 두고 있다. 물론 이 문제가 중요한 점이기는 하지만, 그의 그러한 집착이 웨슬리의 사회적인 측면에 대한 객관적인 시야를 흐리게 하고 있다. 이 논문은 윤리적, 사상적, 그리고 역사적인 측면 모두에서 웨슬리의 사회적인 성화 측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라고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다.        

 

C. 연구방법

  본 연구는 웨슬리 부흥운동의 사회개혁 측면에 초점을 두고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이는 그간 한국교회에 자리했던 웨슬리 부흥운동의 영적인 측면에 대한 강조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간 동일한 이해가 부여되지 못했던 부분을 새롭게 조명하여 새로운 해석의 장을 제공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간의 연구들이 주로 사회 역사적인 방법, 사회 경제사적인 방법, 조직 신학적 방법, 그리고 윤리적 측면에서의 접근 등 각각 별개로 이루어져 왔다면 본 연구에서는 사회 역사적 측면과 조직신학적 측면의 양자적 접근을 시도하고자 한다. 이러한 방법을 택한 이유는 그 동안 이러한 방식의 연구가 별로 없었기에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것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이렇게 할 때 웨슬리 운동의 사회적인 측면이 더 명료하게 부각될 수 있다는 기대에서이다.

 본 연구자의 이러한 방식과 가장 유사하게 연구된 것이 마르크바르트의 존 웨슬리의 사회 윤리이다. 그리고 김홍기 교수의 그간의 연구서들을 종합하면 또한 유사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본 연구는 앞의 연구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마르크바르트가 주로 윤리적인 부분에 초점을 두고 연구를 진행했고, 김홍기 교수가 사상적인 면에 주로 초점을 두었다면 본 연구는 웨슬리 운동이 영국 사회에 구체적으로 이뤄낸 결실들에 주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본 연구자는 웨슬리가 행한 18세기의 행적들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단편적이라고 생각한다. 웨슬리의 사회적인 실천과 그러한 사상이 19세기의 영국 사회의 변화에 미친 영향과 결실이 더 크고 중요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역사는 언제나 당대에서는 참된 평가를 하기 어렵다. 후에 나타난 결과를 보아야 그 공과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본 연구는 웨슬리 사후의 19세기 영국의 사회변화에 대한 추적을 통한 평가에 비중을 두었다.

 본 연구에서 웨슬리 부흥운동의 범주를 주로 웨슬리와 메도디스트 운동에 국한시키고 있지만, 때로는 광의적으로 18세기 영국에 일어 났던 복음주의 부흥운동까지도 포괄시키고 있음을 밝혀 둔다. 웨슬리가 18세기 복음주의 부흥운동 전반의 동력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크게 6장으로 나누어 진행될 것이다. 제 I장 서론에서는 연구 목적과 이 문제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 및 주요 학자들의 연구를 1913년부터 최근까지 개관해 볼 것이다. 그리고 연구 방법과 다른 연구들과의 차이점이 제시될 것이다.

 제 II장에서는 웨슬리 부흥운동의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 볼 것이다. 이 부분에서 우선적으로 웨슬리가 처해 있던 당시의 정치, 사회, 경제, 그리고 종교상황에 대해 고찰해 볼 것인데, 이는 웨슬리 운동 후에 있게 된 사회변화와의 대비를 위한 의도이다. 이어서 웨슬리 부흥운동에 영향을 준 기독교 운동들에 대해 고찰하게 되는데 이는 웨슬리 운동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이다. 끝으로 웨슬리의 회심과 부흥 운동자들에 대한 고찰은 웨슬리의 사회개혁 활동은 그의 올더스게이트의 복음적인 회심의 빛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본 연구자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제 III장에서는 웨슬리의 사회개혁 활동에 대한 신학적인 터전을 사회 변혁적인 측면에서 고찰해 볼 것이다. 여기에서는 웨슬리의 사상에는 사회 변혁적인 요소가 있음을 밝히게 될 것이다.

 제 IV장에서는 초기 메도디스트 구조의 사회적인 요소들로부터 웨슬리와 메도디스트들이 구체적으로 전개한 사회개혁 활동들을 역사 실증적인 방법으로 고찰할 것이다.

 제 V장에서는 웨슬리 부흥운동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19세기 영국의 사회 변혁에 미친 영향과 그 결실에 대해 역시 역사 실증적인 방법으로 추적하여 고찰하게 될 것이다.

 제 VI장은 본 연구의 결론 부분으로, 여기에서는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로 얻어진 중요점을 요약하고 평가한 후에 그것을 토대로 한국 교회에 대한 방향을 제안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