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존 웨슬리의 사회개혁의 신학적 토대

A. 선행은총(Prevenient Grace)과 인간의 책임

 

 앞에서 웨슬리 부흥운동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그러한 배경에서 시작된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사회개혁에 대해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러한 웨슬리의 사회개혁 활동은 단순히 당시의 역사적인 필연에 의해 움직인 것만은 아니다. 웨슬리의 신학적인 사상에 분명히 사회변혁적인 요소가 있고 그것이 웨슬리로 하여금 사회개혁 활동에로 움직이게 했다고 본다.

그러면 웨슬리의 신학사상에 내재되어 있는 사회변혁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 웨슬리 사회개혁의 신학적인 토대는 무엇인가? 그것을 밝히는 것은 본 연구가 탐구해 나가고자 하는 바의 목표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웨슬리는 철저히 주관적, 내적인 확신을 추구했던 사람임과 동시에 또한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마르크바르트(Manfred Marquardt)가 적절히 지적한 대로, 웨슬리가 이성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은 그가 사용한 언어뿐만 아니라 그의 설교의 논증적인 문체, 그리고 그의 모든 언급들이 이성에 의해서 검증되고 또 더 나은 통찰을 통하여 설득되도록 마음을 여는 그의 태도에서 증명된다. 웨슬리는 성서적인 기독교의 합리적인 요인에 비중을 두었다. 그는 종교적인 인식의 과정 안으로, 또 윤리적인 의무들을 도출해 내는 과정 속으로 이성을 끌어들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웨슬리는 그의 시대의 사회적인 도전들에 적절하고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었으며, 자신의 행동에 동참하는 동지들을 얻고 윤리를 위한 보편적인 효력을 부여할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웨슬리의 사회 개혁적 행동을 가능케 하고 또 이를 강화해 준 합리적 근거, 즉 신학적 근거를 규명하는 것은 그의 사회적 행동의 양식을 규명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어떤 신학적 동기가 웨슬리로 하여금 사회 개혁에 깊이 헌신하게 하였는가?

 

A. 선행은총(Prevenient Grace)과 인간의 책임

웨슬리는 한편으로는 루터나 칼빈과 같은 종교 개혁자들의 은총관에 서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과 구별되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웨슬리의 윤리적, 사회적 행동의 가장 핵심적 근간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의 ‘선행은총’ 이해라고 할 수 있다.

1. 선행은총

웨슬리에게 있어서 교회와 사회 혹은 교회 공동체와 사회 공동체와의 관계에 대한 기초는 선행은총에서 발견될 수 있다. 이 은총은 보편적으로 부여된 공동 터전을인식하는 기초이며, 공동생활의 서로 다른 질서들 간의 상호작용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웨슬리가 선행은총을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깨우기 위해 찾으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기도 전에 ‘우리 앞에 오는’(pre-venio) 은총을 의미한다. 즉 우리가 회심의 경험을 하기 이전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웨슬리는 이 선행은총의 교리를 통해 먼저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인간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그 어디에서도 이처럼 은총의 주도성(priority)이 강조되는 곳이 없다. 여기에서 웨슬리는 재창조적(Re-creative)인 성령의 활동이 없이는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시기 위해 인간의 상황 안으로 개입하신다는 그의 확신을 나타내 보인다.

선행은총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효력이 발휘되는 편재적(偏在的)인 구원의 도달이다. 선행은총은 본래의 창조를 통해서가 아니라 재창조(Re-Creation)를 통해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행은총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개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모두에게, 그리고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행은총은 보편적이며, 모든 사람에게 구속 안에 있는 변형시키는 은총의 가능성과 잠재성에 도달하는 기회를 유효하게 한다. 인간은 죄 있는 존재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무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실질적으로 그들을 찾아 나서신다. 하나님은 인간 존재에 대한 변형을 원하시기에 화해의 가능성을 만드신다. 이 가능성은 변형을 선취(先取)하며 현재적으로 효력이 발휘되는 구체적인 희망을 만든다.

다른 한편으로 선행은총은 ‘인도하는 은총’(leading grace)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들을 움직여 회개의 자리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활동이다. 웨슬리는 선행은총이 우리를 인도하는 세 가지 방식을 말하고 있다. 1) 선행은총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최초의 감지력을 창조한다. 2) 선행은총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어겼다는, 작으면서도 일시적인 가책을 일구어 낸다. 3) 선행은총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우리의 첫 소원을 일으킨다.

하지만 웨슬리에게 있어서 은총의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에게 있으므로, 인간은 스스로 자랑할 수 없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이렇게 설교한다.

“당신의 선하신 즐거움을 따라 너희 안에서 소원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 이시니라.” ‘당신의 선하신 즐거움을 따라’라는 귀절과 ‘행하게 하신다’는 말을 연결시켜 보면, 인간의 공로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사라지게 되고 하나님께 그의 공로에 합당한 모든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자랑의 여지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의 표현은 그런 모든 헛된 속임수를 제거하며 전적으로 그분 자신 안에서, 그분 자신의 단순한 은총 안에서, 그분의 과분한 자비 안에서 일하시는 그분의 동기를 명백히 보여 줍니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다면, 어찌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아니 받은 것처럼 자신에게 영광을 돌릴 있겠습니까?… 선을 행할 힘이 끝날까지 남아 있는 것을 안다고 한다면, 그리고 선을 행할 바로 생각과 선한 의욕을 끝가지 이끄시는 힘도 위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고 느낀다면... 더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결론은 “자랑하는 자는 안에서 자랑하라”가 됩니다.

2. 인간의 책임

한편으로 웨슬리는 다른 종교 개혁자들처럼 하나님의 은총의 주도성, 곧 은총의 선행적 활동에 큰 비중을 두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웨슬리는 그들과 달리 인간의 책임, 곧 하나님께 응답하여 협동할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크게 열어 놓았다. 아우틀러(Albert Outler)가 지적하였듯이, 웨슬리의 은총관은 세계가 시작되기 전에 만물의 첫 원인으로 작용한 하나님의 선택적 의지, 다시 말해 예정 의지를 강조했던 칼빈주의자들의 은총관과 차이가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의 절대성과 은총의 불가항력성(Irresistibility)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아우틀러가 웨슬리의 구원론을 가리켜 “성령론 중심적 구원론”(pneumatocentric soteriology)이라고 명명한 것처럼, 웨슬리는 삼위일체의 셋째 위격(位格)으로 강조점을 옮겼다. 웨슬리의 은총론의 주요한 동기는 ‘영원한 결정’(eternal decree)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치유하는 능력(healing power)에 있다. 그리고 은총이 효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 의지의 협력이 따라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은총은 하나님의 사랑의 변형시키는 영향력(Transforming Influence)으로 경험된다.

웨슬리는 서방 교회의 전통에 따라 법적인 용어(forensic language)를 사용했지만, 동방교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치유적인 은유(therapeutic metaphor)도 자주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런연이 웨슬리의 선행은총을 “치유하는therapeutic) 은총”이라고 부른 것은 매우 적절하다 하겠다.

아우틀러가 지적하였듯이, 선행은총은 이러한 책임성의 실재 때문에 실제적이고 정당한 인간의 참여를 허용한다. 그러므로 선행은총은 책임적인 참여를 허용하며, 우리에게 결정 능력을 부여한다. 선행은총은 자연적인 양심을 변화시키고, 회개와 의인으로 인도하는 설득의 은총으로 기능한다. 선행은총은 구원에 필수적인 전제 조건(sine qua non)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 움직이는 주도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은총은 변형(變形)을 초래하기 위해 인간의 정신, 인간의 양심과 함께 역사한다. 이러한 면에서 양심은 자연적인 기능이 아니라 선행은총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다. 양심은 결코 사적이고 내적인 기능이나 자기 폐쇄적 독백 속에 있는 혼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하나님과 인간에게 반응한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그의 의지에 거슬려, 그리고 그의 응답적인 협동이 없이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과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협력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자주 강조하였다. 인간은 도덕적 존재, 자기 책임적 존재이기 때문에 제한된 자유의지의 영역 혹은 어느 정도의 자기 결정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그는 선악을 결정할 수 있다. 이 결정이 인간에게 구원을 열어 준다거나 죄를 없애며 영적 생명을 낳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결정은 어떤 의미에서 구원에 필수적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구원을 베푸시되 인간이 그를 위해 결정하고 그와 함께 협력함이 없이, 다시 말해 인간이 그의 은혜의 활동에 응답함이 없이 베풀기를 원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마치 나무나 돌 조각처럼 구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선행은총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 결정하고 협력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에 근거하여 모든 인간 안에서 그의 은혜로써 역사하시기 때문에 인간도 역시 활동할 수 있고 또 활동하여야 한다. 우리의 협력 없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협력 없이 우리를 구원하길 원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스스로를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하기까지는,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쓰기까지는,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가능한 한 우리의 소명과 선택을 견고히 하기까지는 우리를 구원하길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인간도 일할 수 있고, 하나님이 일하시니 인간은 일해야 한다”라는 문장은 웨슬리에게 있어서 마치 하나의 교리(dogma)와 같은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일하시는 한, 여러분은 자신의 구원을 이룩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따라 여러분의 공로가 없어도 여러분 안에서 소원하시고 행하시므로, 여러분은 모든 의를 성취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일하시니 그러므로 여러분도 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일하시기를 그만두실 것입니다…. 이러한 교리와는 반대되는 쪽으로 기울기를 좋아하였던 어거스틴은 심지어 “Qui fecit nos sine nobis, non salvabit nos sine nobis”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인간 없이 인간을 만드신 분께서 인간 없이 인간을 구원하시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영생을 취하지 않으면,” “인간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길 힘쓰지 아니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의 십자가를 지지 아니하면,” 그리고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기울이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처럼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기울이게 역사하는” 선행은총은 크리스챤들로 하여금 사회-정치적인 상황과 공공 정책에 참여할 있는 길을 열어 준다. 선행은총은 사회에 도덕적인 책임을 부여하며, 교회에 사회적인 사명을 부여한다.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과 인간 양심의 역할에 대한 보편성을 강조하는 교회는 사회를 향하여 발언하고 행동하여야 한다. 교회의 메시지는 인간의 책임성에 대한 생생한 제언을 수반한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구원이 도달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선행은총은 교회 내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사회 내의 그의 사역과 서로 연관될 있도록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