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사랑으로 역사(役事)하는 믿음

 

웨슬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사회적인 행동을 하도록 동기를 준 또 다른 신학적 원리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단지 영혼을 구원하고 사람들을 성결로 인도하기 위해서인가? 그의 관심은 육신적, 심리적, 정신적, 지적으로 전체적인 것이었다. 웨슬리와 그의 운동을 형성한 원리는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이었다.

 

1. 믿음과 율법

사랑으로 활동하는 믿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웨슬리는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믿음에서 차지하는 율법의 의의와 가치를 재평가할 수 밖에 없었다. 율법이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위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율법은 믿음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는가? 종교 개혁자들은 이 문제를 놓고 고심하였다. 그들은 바로 이 문제 때문에 로마 카톨릭 교회와 결정적으로 결별하였을 뿐 아니라 서로들 간에도 상이한 견해를 드러내었다. 율법의 기능에 대한 입장이나 태도에 따라 인간의 행동 원리도 크게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웨슬리의 사회적 행동이 ‘믿음과 율법’의 관계에 대한 그의 견해에 의해서도 큰 영향을 받았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오직 신앙주의자(Solafideist) 혹은 반율법주의자(Antinomist)였던가?

다른 종교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웨슬리도 의로움에 앞선 행위를 거부한다. 인간은 율법의 행위 없이도 단지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다. 의로움에 앞선 행위에 대해서 웨슬리는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첫째는 만일 인간이 선한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역사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의무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의롭지 못한 인간이 하는 행위는 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을 갖기 전에 행했던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저주 외에는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모든 행위는 선할 수 없다. 그러기에 의로움에 앞서 행해진 행위는 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웨슬리도 ‘오직 믿음으로만’을 강조한다. 인간은 행위에 근거하여 의로워질 수 없다. 선한 행위로 하나님의 용서를 얻지는 못한다.

하지만 웨슬리는 신앙에 관해 말할 때마다 신앙이 율법을 폐기하지 않고 완성한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가장 높은 경지에서 보면 율법은 순결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거룩하다. 그렇지 않다면 율법이 근원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소산이라고 없을 아니라, 더욱이 본질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을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은 모든 죄와는 상관없이 순결한 것이고, 어떤 악도 근접할 없이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이 자체라든지 죄의 원인이 된다고 하는 불경스러운 가정을 사도 바울은 그처럼 몹시 미워하면서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결코 그럴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그분 자신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뜻하시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 자신이 율법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 율법은 옳을 뿐만 아니라 선한 것이다.

웨슬리가 이해하는 율법은 십계명에 요약된 도덕법 혹은 윤리법을 말한다. 사랑의 계명이 중심이 되는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의 가장 내적인 본질을 보여 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의지의 복사, 하나님의 마음의 표시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영원한 것이다.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인간은 율법을 성취하도록 자유롭게 되었다. 죄로 말미암아 생겨난 하나님과의 분리는 폐기되었고, 하나님의 영은 실로 율법의 완성을 의미하는 영의 열매들(사랑, 충성, 인내, 겸손 등)을 맺게 할 수 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율법은 하나의 삶의 규정만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마지막 심판 때에 영생과 영벌을 판단하실 규범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웨슬리는 루터를 비판해 마지 않는다. 웨슬리는 루터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에 대한 유능한 해설자로 간주했으나, 성화의 교리에 있어서는 가장 무지하고 혼란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웨슬리는 루터의 갈라디아 주해를 읽고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나는 몹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책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절찬 속에 추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니면 때로 기껏 책에서 인용된 개의 뛰어난 문장들만 읽고는 책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던가! 그러나 이제 스스로 판단할 있고, 내 눈으로 직접 읽은 지금 나는 무어라고 말해야 좋을 것인가? 저자는 아무 것도 입증하지 않고, 꽤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도 해결하지 않고 있다. 많은 인용구들에 관한 그의 설명은 천박하며 애매하고 혼란스러울 아니라, 전체에 걸쳐 깊은 신비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다. 한 가지만 예로 든다면, 어찌하여 그는 옳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이성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화해 불가능한 적이라고 헐뜯는가?… 그리고 율법을 죄와 죽음과 지옥, 혹은 악마와 같은 것으로 연상케 하며, 그리스도는 우리를 모든 것들로부터 동등하게 해방시킨다고 가르쳐 선한 행위와 하나님의 율법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내가 염려하는 바, 여기에 모라비안파들의 중대한 과오의 참된 원천이 있다. 그들은 ‘좋거나 나쁘거나’ 루터를 따르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침내 ‘행위 없이, 율법 없이, 계명 없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웨슬리에 의하면 율법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의 기능을 한다. 1) 율법은 세상의 죄를 확인시켜 준다. 하나님의 성령이 율법을 통하여 죄인들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 율법의 일반적인 역할이다. 율법은 사방에 비취어 죄를 깨닫게 하며, 인간이 죄인임을 느끼게 한다. 2) 율법은 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하여 살아나게 이끌어 준다. 여기서 율법은 엄격한 교사의 책임을 맡는 셈이다. 율법은 사랑으로 이끄는 것보다는 힘으로 우리를 몰고 간다. 3) 율법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은혜로 의롭게 된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 남아 있는 죄를 깨닫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있게 하며, 그리스도의 피가 매순간 깨끗하게 씻어 주시도록 돕는다. 율법은 그들로 하여금 주님의 율법이 명하는 것을 행하게 하며, 은혜 위에 은혜를 더 받을 희망을 확인시켜 준다.

2. 믿음과 사랑

앞에서 보았듯이 웨슬리에게 있어서 율법은 단지 죄를 드러내고 죄인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기능 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은혜 위에 은혜를 더 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완전한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 그런데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완전한 사랑’(요일 4:18)이다.

그러므로 더욱 확실한 것은 이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그들은 성서적으로 완전한 사람입니다.

완전한 사람의 영혼은 모두 사랑이요, 그의 가슴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훨훨 타오른다. 그의 삶은 사랑의 수고로 가득하고, 무슨 말이나 무슨 일을 하던지 그는 사랑 가운데서 행한다.

그런데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는 말은 성결(holiness)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즉 ‘완전’과 ‘성결’은 동일한 사실을 일컫는 두 가지 다른 명칭일 뿐이다. 그러므로 웨슬리에 의하면 거룩한 사람은 곧 완전한 사람이요 완전한 사람은 곧 거룩한 사람이다. 그리고 웨슬리에 의하면 칭의와 마찬가지로 온전한 성결도 율법이나 인간의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결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유일한 조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웨슬리의 칭의론 만이 아니라 성결론도 철저히 하나님의 주도성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도 우리는 웨슬리가 얼마나 철저히 ‘은총의 신학자’인가를 엿볼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 편으로 웨슬리가 ‘선행은총론’을 통하여 인간의 응답적인 협동과 참여, 자유와 책임도 크게 강조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보았다. 믿음은 인간을 결코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내면의 눈을 뜨게 하고 우리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게 한다.

웨슬리에 의하면 의롭게 하는 믿음의 직접적인 열매는 평화, 기쁨, 그리고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믿음의 속성과 떠날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믿음은 즉각적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는다. 믿음을 가지는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한다. 믿음은 사랑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사랑을 위해 섬긴다. 왜냐하면 믿음은 ‘사랑의 하인’이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그것이 비록 기독교인의 믿음이든지, 택함을 받은 사람의 믿음이든지, 혹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믿음이든지 믿음 자체는 사랑의 시녀에 불과한 것이다. 믿음은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것이지만 그것이 율법의 목적은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영광을 오직 사랑만이 갖도록 했으며 사랑은 하나님의 모든 율법의 목적이 된다. 사랑은 세상이 시작될 때로부터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하나님의 모든 섭리의 유일한 목적이 것이다.

그런데 웨슬리에게 있어서 사랑의 원천은 인간 자신이나 이성 혹은 인간의 믿음에도 있지 않다. 그것은 자신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 이 사랑의 본질은 할 수 있는 대로 자기에게서 영원하신 아버지 되심을 비우시고, 창세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누리셨던 그 영광을 벗어버리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여 사람의 모양을 입으시고, 자기를 낮추되 ‘죽기까지,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사랑에 있다. 이성이 아무리 순화되고 증진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의 창조주에 대한 감사 이외의 다른 근원에서 흘러나올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사랑함은 그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종교의 큰 강령이며, 기독교의 진정한 핵심이다.

그리고 웨슬리에게 있어서 하나님 사랑은 필연적으로 이웃 사랑으로 이어진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분가분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를 저주스러운 죽음을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그도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웨슬리는 이웃 사랑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계명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도 모든 인간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고, 친히 이웃 사랑의 모범을 보이셨다.

하지만 웨슬리에게 있어서 이웃 사랑은 신적인 요청과 명령일 뿐 아니라 성령의 증거에 속한다. 즉 이웃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수동적인 순종이나 그리스도의 모방(Imitatio Christi)에만 그치지 않고 성령의 내적인 활동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여 그의 아들을 너의 화목제물로 주셨으니 하나님의 아들이 너를 사랑하사 그의 보혈 안에서 너를 죄에서 씻었느니라”라고 증거하실 때, 비로소 우리는 그가 우리를 먼저 사랑한 까닭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로 인하여 우리 형제도 사랑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에게 사랑이 빠져 있다면 우리는 경건의 행위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영혼과 육체의 힘을 다하여 이웃에게 선한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임무는 하나님께 헌신하고 이웃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적극적이라는 말에 강조를 두고 있다. 사랑은 이웃에게 나쁜 일을 행하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웨슬리에게 이웃의 개념은 매우 광범위하다. 그는 모든 사람이 사랑의 대상임을 반복하여 강조하였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란 “모든 인간, 곧 아담의 모든 자녀”, “공기를 호흡하며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사랑을 받지 못할 만큼 가치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기에 웨슬리는 특별히 사랑할만한 대상을 달리 한정하거나 규정하지 않았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이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며 구체적으로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이다.

모든 사람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으로 여기고 가서 이와 같이 합시다. 옹졸한 마음과 당파심을 버립시다. 이런 것은 정서와 행동이 우리와 매우 가까운 소수인을 제외하고는 인류에 대한 마음을 무감각하게 위축시키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에 대한 사랑은 자기사랑의 반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을 제한하지 말고 모든 인간을 포괄하십시오…. 모든 인간은 당신의 선한 뜻을 요구할 권한이 있습니다. 당신은 사람에게 빚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나의 섬김을 받아야 하는 나의 이웃이라면 여기서 사회적인 인식과 책임이 직접적으로 제공된다. 웨슬리는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중시할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헌신하지 않는 가난한 계층까지도 섬김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것이 메도디스트 복음전도 운동을 성공시킨 요인으로 설명될 수 있다.

3. 사회적 종교

웨슬리가 하나님 사랑과 그에 기초한 이웃 사랑을 믿음의 목표와 성화의 완성으로 삼았다면 결국 그에게 있어서 사랑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사랑”일 수 밖에 없으며, 기독교도 본질적으로 ‘사회적 종교’가 되고, 그리고 성결도 ‘사회적 성결’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자명해진다. 웨슬리는 온전한 사랑은 세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늘 언급했다. 온전한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는 가운데서 성장한다. 고독한 그리스도인은 변칙적인 것이다. ‘거룩한 고독’은 ‘거룩한 간음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왜곡이다. 거룩한 생활을 증진하기 위하여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삶을 사는 것은 복음의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거룩한 삶은 세상 안에서 영위 된다. 평화를 조성하는 삶과 삶의 자비를 베푸는 삶은 성도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으로부터 물러남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고 속이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사탄이 왜곡한 것이요, “지옥의 큰 엔진”(grand engine of hell)이다.

신비주의 저술가들의 정적주의(quietism)를 강하게 반대하면서,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세상으로부터의 격리는 신앙을 잃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기대를 실현하고 온유함과 화평케 하는 일을 실천하는 유일한 길은 세상과의 관계를 통해서이다. 산상수훈의 이상은 날마다 세상과 접촉하는 가운데서 실현된다.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은혜를 받았던 간에 이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웨슬리는 세상에 참여하면서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소금”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설교하였다.

여러분들(겸허하고 심각하며 온유한 그리스도인들, 의를 갈망하고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며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당신들)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여러분들의 본질은 주변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소금에 절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성스런 맛의 본질이 깃들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접하는 모든 것에 번지고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로 스며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가 여러분들을 모든 사람과 함께 존재하게 하여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을 여러분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려는 이유인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들의 모든 신성한 품성과 말과 활동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세계에 있는 부패가 어느 정도 제어될 것이고, 작은 부분이나마 일반적인 전염에서 구출될 있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순결한 것을 드릴 있습니다.

웨슬리는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사회갱신을 위해 진력하도록 부름 받았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비록 불완전하고 잠정적인 것일지라도 자기의 공동체 생활에서 야기되는 변혁을 보고 기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