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의 성결사상



윤철원(서울신학대학교 교수)


자신의 한계 인식:성서적 성결의 출발점

목회자들처럼 성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과제를 꼽으라면, 언제나 성서의 본문과 대면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성서가 말하는 성결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도 우선 성서의 본문이 그것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탐구해야 할 것이다. 성결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공통적으로 가장 고귀한 것으로 꼽는 언어이며, 신앙의 핵심으로 인식되는 가치이며, 하나님이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덕목이다. 그렇다면 성결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결은 단순히 구호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엄청난 희생과 열정이 동반된다는 말이다. 신학의 과제는 언어의 나열이 아니다. 신학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들추어내는 뼈아픈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먼저 현실의 사례를 하나 들어보면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다.

1999년, 모 방송이 주말마다 방영하는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교양프로에서 '냉전의 포로들'이라는 타이틀로 비전향 포로들의 생활을 그린 적이 있었다. 그들 중 86세의 최남규 옹은 6. 25 전쟁에 참전하기 전에는 고향의 대학에서 지리학 교수로 있었던 북한의 엘리트였다. 한국전에 장교로 참전한 최 옹은 포로가 되어 그만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고, 30년을 지낸 후 86세로 석방된 지금 치매와 중풍으로 쓰러져 병원에서 치료받는 중이었다. 거의 죽음의 문턱에 서있는 한 노인... 그와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지내는 석방된 포로들은 그의 아픔과 고통에 몹시 가슴아파하고 있었다. 그는 전혀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고도 엄청난 일이 곧이어 일어났다. 한 동료가 고향이 어디냐고 묻자, 최 옹은 명천(明川)이라고 똑바로 답변한다. "그 집에 가야지요"라고 말하자, "통일이 된 다음에"라고 말꼬리를 흐린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분명 고향 가는 것이었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 그가 지내던 방에 붙은 한 장의 풍경화는 한 인간의 그리움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웅변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는 고향 산하의 경치가 멋지게 그려진 그림에 자신의 사진 한 장을 붙여 놓고 제목을 "환상"이라고 붙여 놓았다. 의식을 잃어버린 한 노인의 무의식 속에 의식보다 더 선명하게 살아 있는 것, 우리는 그것을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사람들 각자가 꼭 쥐고 사는 게 무엇일까? 놓으면 큰 일 날 것 같은 그 무엇 말이다. 최 옹의 경우는 바로 가족이 살고 있는 고향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30년동안 서로 헤어져 살아가는 이산의 고통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사람은 강한 지 모른다. 꿈을 꾸면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바로 그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기반이리라.

우리의 삶의 자리로 관심을 돌려보도록 하자. 우리의 고정된 습관이나 선입견은 자주 돌발적인 사태에 직면하곤 한다. 이 경우는 바로 그 예를 극명하게 증명해 준다. 내가 신학교에 다닐 때는 신학과 학생의 수가 50명이었다. 그 중에서 여성은 단 한 명... 그러니 고등학교를 거의 남자 반에서 자란 학생들의 대학 생활은 퍽퍽한 한숨소리로 시작되곤 했겠지 뭐!!! 그런데 2학년에 들어섰을 때, 그야말로 꿈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모 여대에서 약학을 전공한 여학생이 회심하고 교역자가 되겠다고 편입을 온다는 것이다!! 정말 기대가 많이 되었다. 한번 상상을 해 보라. 얼마나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 지를. 그러나 그 여학생을 처음 만나 보았을 때 우리의 기대와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아뿔싸! 그 꿈에 그리던 우리들의 히로인은 나이 50된 권사님이 아닌가? 우리가 쥐고 있는 꿈은 어쩌면 환상일 지 모르고, 우리가 가진 것은 한낱 허망한 것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우쳐준 그 사건(?)을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베드로의 회심은 곧 그의 성결 체험

신약성서의 성결 사상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본문은 단연 누가 문서(Luke-Acts)일 것이다. 캐드베리(H.J. Cadbury, The Making of Luke-Acts, 1927) 이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동일한 관심으로 연구할 한 저자가 쓴 두 권의 작품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토론의 이슈로는 유대교 문제가 꼽힌다. 이 문제는 많은 신약학자들(J. Jervell, T. B. Tyson, R. Brawley) 사이에서 계속 논의되고 있다. 그만큼 유대교와 관련된 문제는 신약성서를 해석하는 데 가장 민감하게 다뤄야 할 주제이다. 우리가 살필 베드로의 회심 사건도 유대교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그 의미가 더 분명하게 살아난다.

신약성서의 성결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도행전 10장 9-16절에 나오는 베드로의 회심 사건을 해석해보자. 사도행전 10장 9-16절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자신의 주장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는 베드로의 회심 사건이다.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가 유대교의 그늘로부터 서서히 구원의 세계성을 강조하는 특성을 드러내며 독립해 가는 모습을 기록한다. 이것은 사도행전 1장 8절에 드러난 누가의 신학적 지리학(Lukan theological geography)에서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땅 끝. 이러한 이동성은 본문에 등장하는 베드로에게서 잘 표현된다. 베드로는 기도하기 위하여 옥상으로 올라갔다가 환상과 계시를 받는다. 그 때의 베드로는 엑스타시스(e[kstasi")의 상태(10절), 즉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만남으로써의 환상 가운데 있다.

베드로는 "하늘이 열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11절)고 말하면서, 이 계시의 궁극적인 근원이 하나님임을 강조한다. 누가는 베드로가 경험한 환상을 묘사하면서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에 담겨 있던 내용물"을 열거하는데(12절), 그 앞에 판타(pavnta, 모든 것)를 넣음으로써, 그 안에 온갖 종류의 부정한 것과 정한 것들이 혼재되어 있음을 암시해준다. 그 보자기에 들어 있는 부정한 짐승들은 이방인들을 상징한다. 즉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이 부정한 것들을 잡아먹으라고 지시하는 것은 이방인들을 배척하거나 피하지 말라는 의미가 된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13절)는 환상과 함께 전해진 음성은 곧 하나님의 계시이다.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한 것을(a} oJ qeoV" ejkaqavrisen) 속되다고 말하지 말라"(15절)고 말한다. "주여!"(kuvrie, 14절)라고 베드로가 부르는 것을 통해서도 그는 하나님의 권위 앞에 서 있음을 본문은 분명히 말한다. 하늘로부터의 음성 곧 하나님은 그 보자기에 싸인 동물들을 잡아먹으라고 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음식에 관한 규정인 정결법(Kosher law)을 따지지 말고 먹으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것들이 부정하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이런 새로운 규정은 베드로 같은 유대교의 특수성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는 거의 가능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의 대단한 저항은 14절의 메다모스(mhdamw`", 절대 불가)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베드로의 태도를 통해서 베드로 그 사람 '참 고집 세다'는 식으로 본문을 읽는다면, 우리는 그 본문의 진의를 전혀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작 이 본문은 우리에게 그 경험을 사유화하라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성서해석의 새로운 방법론인 문학 비평(literary criticism)은 성서가 독자에게 어떤 경험에 관하여 말한다기보다는, 그 경험 자체를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의 상상력(우리 안에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능력과 이미지를 감지하는 능력)에 끊임없이 호소한다고 제안한다. 성서의 본문은 실재(reality)를 우리들에게 이미지(image)로 살려낸다. 그래서 설교자는 성서를 읽을 때 성서의 경험적인 측면에 민감해지는 습관을 가져야하는 동시에 그런 목적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훈련해야 한다.

사도행전 본문은 우리에게 베드로의 태도를 통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종교(유대교) 전통, 자기의 신학적인 고집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명령도 겁없이 거부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호되게 비판한다. 구약의 요나서에서도 이러한 모습은 드러나는데,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촉구하라"(욘1:2)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이러 저리 도망한다. 자신의 특수한 신학적 고집에 찌든, 즉 유대교만의 구원이라는 신념에 사로잡힌 요나는 사도행전 10장의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명령도 거부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베드로의 교만과 아집에 대하여 비판한다. 이것은 문자적인 율법 조항에 대한 신뢰가 아닌 하나님의 본래적인 의도를 알고 행동하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약성서가 강조하는 성결 사상의 본질을 파악하게 된다.
16절은 이 일이 세 번 반복해서 일어난 후 그 보자기가 다시 하늘로 올려졌다고 한다. 도대체 이 상징은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 세 번이나 반복된 환상이지만, 베드로는 그가 본 환상을 철저하게 수용하지 못한다(17절).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아직도 그가 본 환상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베드로의 환상은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라는 로마의 백부장과 깊게 연관되어 있음이 본문을 통해서 곧바로 확인된다. 환상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는 마침 고넬료가 보낸 두 명의 메신저를 만나게 된다. 하나님이 주신 베드로 초청에 대한 신탁(oracle)이 19절 이하, 즉 고넬료가 기도하는 중에 본 환상 가운데에서 밝히 드러난다.

여기서 지적할 것은 고넬료와 베드로는 모두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환상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기도는 성결하게 살아가려는 신앙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의지를 깨닫게 되는 유일한 통로가 된다. 하나님은 이들이 기도할 때 그들에게 말씀한다. 예수가 기도하는 가운데 그의 모든 사역을 행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인 것을 분명히 알려준다. 하나님은 역사를 일으키며 새로운 장을 펼치실 때마다 기도하는 자를 통해 그의 뜻을 나타낸다(눅 3:21-22; 6:12-16; 9:18-22; 9:28-31; 22:39-46; 행 1:14; 13:1-3).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세계에서 중시되어야 할 덕목인 모방(mimesis)이라는 동기를 짐작하게 된다. 하나님을 닮아갈 때 거룩해지는 것처럼(cf. 엡 5:1, mimhtaiV tou` qeou`), 기도하는 예수의 모범을 닮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하게 된다. 17절 이하에서 베드로는 이 환상이 지나가고 의식을 회복한 후에 이 환상과 계시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는데, 그 때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방문한다. 이 때 성령은 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고넬료의 집으로 가라고 지시한다(19절).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을 맞아들이고,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인 것을 확인한 베드로는 그들과 하루를 유하고 다음날 가이사랴로 출발하게 된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난 후 고넬료의 집에 도착한 베드로는 고넬료와 그들의 만남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결과 베드로는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 없이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는 것을 믿게 되었고, 과거에 자신이 지향했던 유대교의 배타성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세계 구원에 대한 비전을 새롭게 깨닫게 된다. 베드로가 견지한 이러한 신학의 패러다임 전환은 성결에 대한 우리의 비전에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다.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로서의 성결

지금까지 신약성서에서 강조하는 성결 사상을 사도행전 10장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21세기의 현실에서 우리가 적용할 성결은 어떤 내용이어야 할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결을 실천하려면, 맨 먼저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의 가슴을 열어 제쳐야 한다. 씨슬톤(A. C. Thiselton, New Horizons in Hermeneutics: The Theory and Practice of Transforming Biblical Reading)이 제시하는 두 지평의 융합은 '본문의 의미'와 '그 의미가 현실 독자에게 제공하는 새로운 의미'의 결합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소리와 인간의 행동이 교차하는 바로 그 지점이 신학과 신앙의 세계가 지향할 자리가 된다. 이런 측면에서 베드로의 행동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의사소통(communication)의 새로운 관계를 갖는 귀중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베드로의 하나님에 대한 전적으로 다른 관계 설정은 베드로로 하여금 성결의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게 만든다. 우리의 생각, 편협함, 심지어 학문까지도 주님을 위하여 벗어 던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길에서 온전한 책임을 감당하는 성결한 행동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철저한 행동이 신약성서의 성결 사상을 체현(體現)하는 것이 된다. 성서는 우리들에게 맹목적이거나 관념적인 이야기를 나열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많은 말로 그것을 설명하기 좋아하며, 분석하기를 선호하나, 성서의 본문은 우리들에게 단지 말을 걸어오며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그 말을 듣고 신속하게 행동하도록 촉구한다.

신약성서는 이런 실천적인 행동으로 확장되어야 할 성결 사상을 제시해준다. 특히 정결과 불결함의 경계를 넘나드는 하나님의 의지 속에서 우리는 성결이란, 사람들이 버리지 못하는 그 한계를 뛰어 넘는 진지한 행동과 결단임을 자각하게 된다. 즉 깨끗하거나 더러운 차원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직시하는 것이 바로 성결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강조함으로 신앙인의 바른 정체성을 선양할 시대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성결을 지향할 때 한국 교회의 정체성은 거기서 더욱 더 돋보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