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레시아

 



1. 우리가 '파레시아'를 말해야 이유?

필자가 신약성서에서 (신앙인의 삶과 행동에서) 가장 중요하고 무게있게 다루어져야 할 단어를 하나 뽑는다면, 그것은 단연 '파레시아'이다. 이 단어는 다름 아닌 '확신'과 '담대하게 말함'을 뜻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행동양식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 단어가 구체적으로 토론되지 못했음은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특히 1997년 새해를 맞는 우리 성결가족들과 함께 이 단어의 의미를 찾아보고, 다시 음미해 보고자 한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온갖 비리와 갈등과 자기만족에 둘러싸여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가면을 쓰고 앉아서 갖가지 이득과 영달을 위해서, 신앙의 중요한 마디까지 팔아버리는 부정직하고 비성서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자기 반성이나 회개를 하는 경우를 찾아보기는 는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탄식하기도 하고 비아냥거리기가 일쑤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하고 반복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신앙인들이 모두 잠들어 있고, 자기 자신과 긴밀하게 연관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성서는 신앙인이 침묵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부정의와 싸우고, 어렵고 가난한 이웃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담대함을 보이라고 훈계한다 이처럼 강하게 도전하는 단어가 바로 '파레시아'라는 말이다.

2. '파레시아'의 중요성

'파레시아'라는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모두 40회 등장한다 (명사형 31회, 동사형 9회). 그 가운데 사도행전에는 12회 나오고, 요한복음서에는 9회 나온다. 특히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파레시아'는 사도들의 복음 선포와 관련되고, 바울의 경우에는 재판상황이라는 지극히 왜소해질 수 있는 환경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대담함을 보인다. 사실 1세기 지중해 문화에서 재판을 받는다는 것은 수치에 해당했다. 그러나 바울은 도리어 '파레시아'라는 반대개념을 사용한다. 이 경우 누구도 방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었는데, 94년에 필자가 한참 '파레시아'에 대한 자료를 찾으러 다니던 때인데, 우연히 독일 튀빙겐대학교 개신교 신학부 도서관에서 한 권의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책이 바로 '파레시아'로 명명된 칼 바르트(K. Barth)의 80회 생일 (1966. 5. 10) 기념논문집이었다. 전반부의 10편의 논문은 '하나님의 말씀의 자유'(Die Freiheit des Wortes Gottes)로, 후반부의 l1편의 논문은 '응답의 자유'(Freiheit zur Antwort)로 이 책은 분류되어있다. 이처럼 명명된 이유가 다름 아닌 바르트의 생애가 '파레시아'의 실현하려고 애쓴 삶이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해 보면서, 1997년에는 한국교회에 이와같은 담대하고 확신에 찬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나타나기를 기원해마지 않는다

3. '파레시아' 쓰여진 상황들

헬라어 사전류를 찾아보면, '파레시아'는 말하는 '자유'와 '확신'과 '신뢰' 그리고 '말의 권위' 등을 의미하며, 또한 '고위층 앞에서의 용기와 담대함'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파레시아'가 쓰여진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파레시아'는 정치적 개념으로서 대중 앞에서 무엇인가를 말할 권리를 의미했다. 이 말은 아테네에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그러므로 헬라인들은 그들만이 이같은 특권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그러므로 이 권리는 노예나 피난민에게는 당연히 주어지지 않았다.

2) '파레시아'는 정치적 측면에서 개인적 측면으로 전환된다. 즉 철학적인 도덕을뜻한다. 이같은 전환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발견되는데, 그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진리를 위해서 좀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을 파레시아라 말했다. 이런 측면에서 소크라테스도 역시 '파레시아'의 하나의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디오게네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파레시아'라고 답했던 것이다. 즉 현자의 재산이 바로 '파레시아'인 셈이다.

3) 개인적인 관계에서 우정을 뜻했다. 에피큐러스 학파의 멤버들은 서로서로에게

참으로 솥직했다. 즉 우정의 표현수단으로서의 '파레시아'인 것이다. 솔직하게 충 고해 주고 비판할 수 없는 상태는 진정한 우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4. 신약성서 해석의 하나의 도구로서의 '파레시아'

그렇다면 우리가 신약성서를 해석하는데 이 단어가 왜 증요하다는 것인가? 사도행전의 예들을 증심으로 살펴보자. 사도행전에서 이 '파레시아'는 베드로가 담대하게 말하는 2:29에 처음 나온다. 4:11이하에는 산헤드틴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히 복음을 증언하는데, 사람들은 그들이 무식한 자들이라고 중얼거린다. 4:23이하는 사도들이 유다인과 이방인들 앞에서 어찌 그리 담대할 수 있는가를 증거한다. 즉 사도행전에서 '파레시아'는 항상 회당과 유다인에게 설교하는 것과 연관되어 쓰인다. 요한 일서 5:14에서 성도들의 기도 가운데 '파레시아'가 포함되나, 반면 행4:23-31에서는 기도의 결과로서 '파레시아'를 갈구하는 기도를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

'파레시아'의 전형적인 예는 26:24-26에 나온다. 바울이 이렇게 변명하니, 베스도가 큰 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하고 말했다. 그러나 바울이 대답하였다. "베스도 각하, 저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맑은 정신으로 참 밀을 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 일을 잘 알고 계시므로, 제가 전하께 거리낌 없이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모습에서 고대 철학자들의 대담함과 겁없음을 읽을 수 있다. 로마제국의 총독 베스도와 로마제국의 죄수인 바울 간의 대화는 '파레시아'가 고위층의 면전에서 사용됨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귀절 28:31은 저자의 목적을 표현하면서 책의 결론을 나타내는 하나의 전형적인 모델을 제시한다. 바울이 로마에서 연금되어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복음을 담대하게 증언했다. 갑작스런 사도행전의 마침 때문에 학자들 중에는 누가의 제3권설 주장하여 목회서신을 누가의 제3부로 제안하기도 했지만,우리는 이 '파레시아'라는 한 단어만으로 누가가 자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왜냐하면 누가가 여기서 선언하고자 한 바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 당시의 세상의 끝이라고 믿어진 로마제국의 심장에서 담대히 선포되고 선전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 말고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그리고 또한 누가에서도) 목적했던 바가 또 무엇이었겠는가?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마침은 잘 짜여진 벽걸이와 같은 완벽한 걸작인 것이다. 이처럼 위대한 작품을 가능케 한 단어가 바로 '파레시아'였다. 사도행전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확연히 알게 하는 이 '파레시아'가 신약성서의 한 권인 사도행전을 해석하는 도구로서 사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이 '파레시아'가 계속적으로 성도들에게 가르켜지고, 설교자를 통해서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될 때, 한국교회는 진정으로 성서적 교회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