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명예와 수치(Honour and Shame)

 

1. 고대 세계의 명예와 수치의 구조

신약성서가 형성된 1세기의 사회를 고대 지중해 사회라 부른다. 그 사회는 명예와 수치에 의해 지배되었다. 명예란 어떤 한 사람이 속한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로 부터 인정받는 긍정적인 가치를 의미한다. 즉 타인에 의한 사회적 인정을 말한다. 그러므로 수치는 그와 반대되는 부정적인 가치를 말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신분을 인정받지 못할 때, 그는 수치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명예가 개개인 자신의 내부로부터 외부로 표출되는 것이라면, 수치란 외부로부터 (즉 공중의 불인정) 개개인의 내부로 향하는 특징을 갖는다(인정받지 못함의 개인적 승인).

2. 구금, 속박과 수치

감옥은 고대 세계에서 붙여진 불명예와 수치의 강한 연합의 장소로 자연스럽게 불려진다. 이같은 사실은 고대 아테네 사람들의 행동 이면에 숨겨져 있는데, 그들은 국가의 감옥을 궁정의 방으로 불렀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그들은 감옥의 추함을 좀더 부드러운 용어로 포장하려 했다. 키케로 역시 감옥을 최악의 불명예의 장소로 불렀다. 이처럼 구속당함은 고대 사회에서 개인적인 재앙의 수치와 불명예와 아주 밀접하다.

3. 역사적 바울의 구금과 수치이해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고대 세계에서 죄수가 됨은 공적으로 무시되는 것임은 자명하다. 죄수들은 공동체와 친구들과 가족에게 수치와 모욕을 당한다. 가끔은 관계가 영원히 단절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아예 죽는 것을 의미했다.

이같은 관심사에서 우리는 "죄수 바울은 여전히 이같은 상황에서 활동하고 있었는가?"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이 물음에 대한 성서의 답변은 "그렇다"이다. 특히 바울의 옥중서신에 의하면, 감옥의 수치와 매임은 바울에게도 역시 수치의 상황과 마찬가지였다. 빌립보서 1:12-18에서 바울은 그 자신의 수치에 대한 관심을 언급한다. 거기서 바울은 구금된다는 것은 선교의 끝이 아니라 복음을 위한 실제적 섬김이라고 말한다. 빌 1:20 (참조, 딤후 1:8)에서 바울의 선언은 그것을 말하고 있다.

"내가 간절히 기대하며 바라는 것은, 내가 어떤 일에나 수치스러워하지 않고, 전과 같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나의 몸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4. 사도행전에서의 죄수 바울의 상황

사도행전에서도 바울의 구금와 매임의 수치에 대한 탐구 또한 우리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지 않는다. 1세기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죄수 바울은 실제적인 신분을 십분 활용하여 긴급한 상황에서 탈출을 시도했어야 옳았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과 실라)의 경우는 아주 달랐다.

16장은 소위 사도 바울의 서방 선교의 시발을 알려주는 마케도니아의 진입 시기에 벌어진 사건이다. 로마의 식민지 도시 빌립보 (16:12)라는 곳에서 점을 쳐서 주인에게 큰 이득을 안겨주는 여종 하나를 만나게 되고, 거기서 그녀를 조종하는 귀신을 축출하는 사건이 묘사되어 있다.

그녀의 주인의 고발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사람들 (바울과 실라)은 유다인들인데, 우리 성을 요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 로마 시민으로서는 수용할 수 없고 실천할 수 없는 부당한 관습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16:20-1)

이와 같은 고발을 접한 로마 제국의 치안관들은 바울(과 실라)을 매로 치고 감옥에 감금시킨다(16:22-4). 이것은 분명한 수치의 상황이고,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왜 바울이 그의 로마 시민권을 언급치 않았는지?"에 모아진다. 그러나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바울(과 실라)이 실컷 얻어맞고 감금되어 있다가 밤에 큰 지진이 일어난 사건 이후, 로마의 치안관들이 석방시켜 줄 때에 가서야 그의 명예인 로마 시민의 신분을 언급한다. 이것은 결국 그의 불명예를 완벽하게(?) 선전해 놓고나서 자신의 신분을 알려주는,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과 같은, 어쩌면 헛수고와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더구나 감옥이나 재판정으로 끌려가는 것은 1세기 사람들의 불명예를 대중들에게 선전하는 역할을 더욱 더 강화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약성서 저자 가운데 가장 문학적이라고 인정되는 누가는 왜 이처럼 멍청한 짓을 이렇게 과감하게 시도하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복음 선교를 위해서는 하층 시민으로 취급받는 수치를 기꺼이 참는 바울의 모습을 선전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바울(과 실라)은 그(들)의 신앙적 결단 때문에 신분 추락의 과정에서 심각하게 상처받는다. 여기서 누가는 바울과 실라를 선교사인 죄수들로서 언급하고 정당화시킨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당하는 수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로마 시민권은 여기서 '복음의 전달매체'의 기능을 수행한다.

바울은 로마 제국에서 그의 특권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이 세상의 온갖 수치도 기꺼이 감내했다. 결과적으로, 바울은 어떠한 수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의 역할을 선택한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의 복음 때문에 받게된 그의 수치는 궁극적으로 천국의 명예의 수용을 의미한다. 사람들에 의해서 훌륭한 평판을 얻지 못하면 삶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1세기의 상황에서 바울의 모습은 오늘 날도 변할 수 없는 명예와 수치라는 도식 안에서 우리들에게 새롭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파악하도록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