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自足

 



1. 예수와 바울

예수와 바울은, 매우 다른 이유에서이지만, 신약문서들의 많은 부분에서 출현하는 가장 압도할 것 같은 인물이다. 우선 예수는 모든 신약문서의 주제이다. 모든 신약문서에서 예수는 그 안에서 생명이 주어지고, 그를 통해서 생명이 갱신되고 풍부해지는 존재로 선언되고 예배된다. 그리고 바울은 어떠한 누구보다도 신약문서들을 많이 기록한 저자이다. - 그것도 최초의 저자인 것이다. 더불어 바울은 사도행전의 많은 부분에서 주인공이기도 하며, 우리는 초대교회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 더 바울에 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예수 자신의 지상 생애와 가르침에 관한 것보다 바울의 설교와 선교에 관하여 훨씬 더 많이 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다 보니, 우리는 초대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최고의 사도로 간주되었던 바울이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다는 것조차 가끔 잊곤한다. 이처럼 바울은 기독교의 문서뿐 아니라 그의 사역을 통해서도 확실하게 기독교의 기둥을 세우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우뚝 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같은 미사여구나 설명도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일생은 멋진 삶으로서의 일생이 아니었고, 어찌하든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라면 불원천리(不願千里)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곤 했던, 그야말로 예수의 진정한 부하였다. 이처럼 열심있던 바울이기에 현대 성서학자들의 관심 또한 그에게 모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요즘 신약학의 동향을 살펴보면, 누가의 관심도 대단하지만, "바울을 빼놓고는 무슨 논의를 하겠다는 것인가?"라고 물을 정도로 바울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다. 또한 누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연구에서도 누가가 이해한 바울로 연구자의 관심이 모아지곤 한다는 것은 바울의 위치가 기독교의 중추라 해도 과언이 아님을 다시 한번 시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의 선교사역을 반추해 보면, 그는 언제나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어느 한 곳에만 부각되는 것이 아니라 신약성서의 많은 양을 차지하는 사도행전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친서인 서신들에서 자주 언급되는 점이다(특히 사도행전의 바울 재판부분/ 그의 고생담인 고후 11:23-29). 그렇다면 우리가 사도 바울을 선교사 바울로 이해하기보다는 죄수 바울로 이해하는 것이 신약성서에 나타난 바울의 모습을 더 정당하게 이해하는 것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적 바울이 과연 어떤 사람이었길래, 이와 같은 고통의 길도 마다하지 않고 걸어갈 수 있었는가?

2. 자족의 비밀을 깨달은 바울

그는 우선 유다인으로서 바리새파의 일원으로 율법에 정통해 있었고, 당대의 대학자인 가말리엘 1세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학자였다. 그는 또한 길리기아(Cilicia)의 수도였던 다소(Tarsus)시의 시민으로 헬라 시민권을 소지했으며, 조상 때부터 전해진 것으로 알려진 로마 시민권을 소유한, 그야말로 엘리트 가운데 엘리트였다. 또한 그의 친서들을 통해서 바울이 상당한 헬라의 문학 교육과 유다인 랍비로부터 성서주석 방법을 배웠을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 그가 어찌 복음앞에서 고난도 어려움도 이길 힘이 생겼을까? 물론 그가 소명받은 다메섹에서의 부활한 그리스도와의 만남, 즉 부활체험이 그를 복음 전도자로 만들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외에 바울이 이처럼 담대하게 역경과 고난을 감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이에 관하여 우리는 자족의 비밀을 통해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바울은 사회적 특권층에 속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공된 가죽을 다루는 일(예를 들면, 천막짓기 등)에 종사했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자신의 신분에 안 맞는 천한 직업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레코-로만 세계의 견유-스토아학파의 철학자(Cynic-Stoic philosopher)의 유형과 바울의 유형을 비교할 수 있다(L.C. A. Alexander는 최근의 논문에서 초기 교회와 그 당시 (철)학파와의 비교를 통해서 교회는 당시의 철학파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강조했다). 너무나 잘 알려진대로, 스토아주의자들은 금욕을 중시하며 삶의 목표를 덕으로 삼았다. 또한 견유학파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디오게네스(Diogenes)는 최소한의 생활 필수품으로 살아가는 자족(만족함)의 삶을 강조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햇볕을 쬐고 있는 디오게네스를 가로막고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말해보라"고 했을 때, 디오게네스가 응답한 "햇볕을 차단하지 말고 비켜달라"(Diogenes Laertius, Lives of Eminent Philosophers, vi. 37)는 것은 그의 만족함의 생활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좋은 예이다. 그렇다면 이 철학자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생계를 꾸려갔을까 궁금해진다. 그 방법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학생들의 수업료를 받고 생계를 해결하는 방법.

2. 부유한 후원자의 집에 전속학자(專屬學者)로 들어가 거주함으로써 해결하는 방법

3. 가장 어울리지 않는 방법인 구걸(求乞)을 통해서 간단히 해결하는 방법

4. 마지막으로 일정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자신의 육체적 필요를 충족시킬 만큼만 벌고 나머지 시간은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할애할 수 있는 가장 진보된 방법등이 있었다.

위의 방법들은 어느 것 하나 제외됨이 없이, 자족의 내용을 실천하려는 철학자들의 노력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위의 네 번째 경우처럼 바울이 가죽을 가공하는 일을 했다면, 자신의 생계를 자신이 꾸려가는 경우에 해당될텐데,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매우 궁금해진다. 우선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제자들에게서 수업료를 바라는 돈만 아는 그런 류의 철학자도 아니고, 유복한 후원자가 있어서 그에게 의존하여 살아가는 그런 천박한 철학자도 아니라는 것이다(cf. Ronald Hock). 다시 말하면, 그야말로 남의 도움없이 자신의 노력과 방법으로 자신의 세계를 건설하려는 열심이 그에게서 발견된다고 하겠다. 바울이 오직 빌립보 교회에서만 선물(금전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 이외에서는 전혀 도움을 받지 않았다(빌 4:14f. 고후 11:8-9)는 사실은 이와 같은 내용을 반증해주는 것이다. 물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면 성도들의 물질적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고전 9:4-18).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순수한 동기에서 선교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무보수로 봉사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도인 바울이 대부분의 교회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의 생계를 꾸리며 독립을 유지한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빌립보서 4장 11절 이하에서 자신이 고백하기를 "부요한 데서든지 궁핍한 데서든지 자신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고백하는 바와 같이, 검소함과 자립의 이상적 현실을 추구한 꿈의 사도로서의 결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3. 신앙인의 길

예수 팔아서 돈벌이하는(?) 사람들이 많은 요즈음,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그런 류의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철저한 반성과 자각의 결단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매일 매일 회개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세로 그 일을 감당해야 할 것이며, 평신도들도 역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 1:24)에 동참하는 자세로 언제나 진지한 신앙의 모습을 구축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성도란 누구인가? 성서가 가르치기를, 그들은 궁핍함과 고난 속에서도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찬송할 수 있는 사람이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음(롬 8:18)을 굳게 믿고, 천국에 고향을 두고 최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땅의 이방인들)이다. 오늘의 한국교회에는 이런 신앙인들이 너무나도 절실하다. 그래야 교회도 살고, 이 나라도 산다. 역사와 하나님 앞에서 책임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

궁핍한 시대, 역사에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던 로마제국의 식민지 시대에, 이 세상의 구원자인 예수는 팔레스틴에 와서 그들의 역사에 영원한 구원의 빛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이 우주 속에 큰 영광과 희망의 빛을 나타내 보여주었다. 바울은 바로 '그리스도 찬가'(빌 2:5-11)가 노래하는, 모든 것을 비워버린 그분 그리스도를 제대로 파악했으며, 그분이 보여준 자족의 비밀을 진정으로 실천했던 사도였다.

한보 청문회니 대통령의 차남 때문에 온통 쑥밭이 되어버린 이 땅에 지금 그 바울의 실천이 절실한 것이다. 의(義)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자기의 것을 버리고 자족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풍성한 것으로 더욱 더 채우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