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친구

 



 

신약성서가 쓰여진 시대의 배경인 로마 제국(帝國)은 그야말로 다양성(多樣性)이 상존하는 그런 사회였다고 보여지는데, 우리가 그 사회를 다르게 불러본다면 그 사회는 종적(縱的) 사회(vertical society)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의 문서들을 대할 때 그 당시의 사회상을 이해하면서 우리의 독서를 수행한다면 더 많은 것들을 파악할 수 있으며, 또한 그 독서를 통해서 훨씬 많은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종적 사회'라는 의미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 가정(사실 바울이 선교하면서 설립했던 교회도 가정중심이었고, 가정의 중요성이 신약에서 강조된다)을 중심으로 말한다면, 가장(家長)이 중심축(中心軸)이 되며, 그 다음은 가장을 보좌하여 경제적으로 혹은 행동(노동 등)으로 그를 돕는 친구와 가신(家臣) 그룹들, 그 다음은 노예(奴隸) 등으로 이어지는 그런 조직적인 관계를 말하며, 그런 개념을 가정 공동체라고 부르게 된다.

이처럼 중심으로서의 축은 대단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성서의 많은 부분에서 위에 있는 상위존재에 대해서 복종할 것을 권고받는다(예: 옥중서간의 내용으로서의 가훈표(家訓表)가 그 대표적 사례일 것임). 이것은 다름아닌 그 당시의 사회상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기능을 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현재의 상황에서 그런 류의 성서의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도 암시해주는 바가 적지 않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우리는 참으로 흥미있는 호칭을 성서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친구'라는 것이다. 너무나 흥미있게 읽게되는 친구에 대한 대목은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빌라도와 로마 황제와의 관계에 대한 유다인들의 언급이다. 요함복음 19장 11-12절에는 다음의 말씀이 기록되어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위에서 주지 않으셨더라면, 나를 해할 아무런 권한도 네게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사람의 죄는 더 크다." 이 말을 듣고서,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 주려고 애썼다. 그러나 유다 사람들은 "이 사람을 놓아주면, 총독님은 황제 폐하의 친구, 새번역에는 충신으로 번역됨)가 아닙니다. 자기를 가리켜서 왕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황제 폐하를 반역하는 자입니다."하고 외쳤다.

적어도 요한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빌라도를 궁지에 몰아넣어 예수를 죽이게 할 수 있었던 문학적인 장치는 바로 그 '친구'라는 언사였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친구가 뭐길래' 이런 중대한 일을 치루도록 빌라도를 자극했을까? 궁금해지는 이유가 있다. 초두에서 말한것처럼, 로마 사회는 가정 공동체라고 불릴 만큼 가장 중심의 제국이었고, 황제는 가장(pater familias)으로서 그 책임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그 밑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책임을 지는 입장에 선다. 그렇다면 유다인들은 황제의 친구인 빌라도를 정말 제대로 공략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우리가 성서를 읽으면서, 부정적인 기록에서든지 혹은 긍정적인 기록에서등지,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신뢰할 수 있다면, 오늘의 이 상황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물어볼 말이 있다.

우리 시대에 진정으로 이런 권위(權威)의 조직과 복종(服從)의 관계가 성립되고 있는가? 우리가 속한 조직에서 이와 같은 지도력(指導力)이 있으며, 진정한 의미의 선생(先生)이 있고, 원로(元老)의 굵은 한 목소리에 기가 죽는 그와 같은 몸짓이 있는가 묻고 싶다. 이런 권위의 체계를 무조건적으로 숭앙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현실에는 이같은 존재가 절실히 필요하고 요구되기에 심각하게 말하는 것이다.

요즘 말로 서로가 서로에게 경쟁감을 느끼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목을 누르고 있는 상황에서 희열을 느끼고 있다면, 그곳에서 어떻게 신앙을 논할 수 있겠는가? 현재의 우리 시대는 신앙을 논하기 이전에 인간성을 논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피폐해진 현실 속에서 그리워지는 것은 다름아닌 도토리들의 행진이 아니라 큰 호박이 한번 굴러주는 것이리라. 지금 우리에게는 큰 스승과 영성과 지도력을 겸비한 그야말로 가장(家長)으로서의 어른이 절실한 시대이다.

이런 시각에서 빌레몬서의 오네시모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참으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가 빌레몬의 노예였다면, 어찌 바울과 만나기 이전에는 신자가 되지 않았을까? 신자인 빌레몬이 그의 가장인데 노예인 오네시모는 비신자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상황이 그래도 재정적인 것을 총괄하는 수준의 높은 자리의 노예였을 가능성이 많아진다. 자기의 소리를 낼 수 있을 만큼의 그런 노예?

사실 그 당시의 노예들의 수준은 다양했다. 예를 들면, 황제 노예들은 학자, 행정, 역사 기록 등의 책임을 맡을 만큼 능력을 발휘했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이레니우스의 기록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바와 같이, 오네시모는 그러한 수준의 노예로서(그러나 가장의 권위에는 복종하지 않을 정도로?) 활동하다가, 바울을 만나 회심을 체험하고 나서 에베소의 주교가 되었다는 기록은 상당한 신빙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빌레몬서는 가히 혁명성을 담고 있는 그런 신약 문서라고 여겨진다. 아무도 그런 주장을 공식적으로는 펼 수 없는 상황에서 바울은 노예를 형제로 받아들이는 복음적인 수용(收容)을 통해서 '공동체 내부로부터의 개혁'을 과감히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밀을 담고 있는 성서는 참으로 다양하게 읽혀질 수 있는 것이다. 올 여름에 사닥다리의 독자들은 성서의 바다에 깊이 빠져 들어가서 영적인 쾌감을 만끽하게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