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러나 옥문은 열렸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 사도행전 16:25-26

기도생활을 재검토해야 ...

세상이 온통 어수선하고 무질서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현실이다. 이렇게 희망이 없는 시대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기도 말고 그 어떤 다른 내용이 신앙 생활의 중심일수 없음은 두말 할 거도 없다 초대 교회 사도들의 중요 과제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이었을 만큼 기도는 기독교의 태동기부터 핵심을 이루는 사항이었다(행6:34)

그러나 기도 생활은 어떤 위기 상황에서만 하는 고백적 행위라고 치부하는 것이 일반적인 듯 싶다 이런 부끄러운 생각은 나만이 가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이런 말을 하는 지도 모른다. 내 생활 전부는 기도의 연장이며 나는 삶 속에서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고민은 내가 기도하는데 왜 개 기원이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는가에 대한 반문일 것이다. 이 경우 우리가 다시 심도 있게 질문해야 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의 지 안에서 '순종하며 기도하는가를 재검토하는 것이다. (눅3:21, 6:12, 9:28-29, 10:21-22, 23:46 등)

불의가 기승을 부릴때마다

대통령의 아들이 구속되고 '용들'이 싸우며 한총련이 과격하게 투쟁하는 등 작금의 우리 나라 현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저 어안이 벙벙해진다. 누구를 믿을 수 있으며 누가 진정한 우리 지도자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탄식하며 내뱉는 말은 '모두가 도둑놈이야' 믿고 살아온 내가 병신이지...

그러나 신앙인인 우리가 역사의 한 순간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포기하며 절망할 일인가? 지금까지 우리 각자가 살아오면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 분의 능력으로 모든 불의가 드러나고 정의가 무엇인가를 깨달았던 때가 없었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기독교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교회와 신앙인들을 통해서 절망 속에서 아니 죽음 속에서도 희망과 생명을 움트게 하셨음을 왜 자주 망각하며 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불의가 기승을 부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되뇌인다. 하나님께서 또 일을 시작하시는군요! 인간은 당신의 손 안에서 뛰어 다니는 왜소한 존재가 아닌가요? 하나님께서 손을 펴시면 겨우 움직이기라도 하는 것이고 손을 꼭 쥐고 계시면 인간들의 썩어진 속은 몽땅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요? 이렇게 여러 생각을 하다보면 우리는 다시 우리 생명과 소망은 오직 하나님 말씀밖에 없다는 감사의 고백을 드리게 된다.

말씀을 새롭게 읽기

본문의 바울과 실라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준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라는 격려의 말씀으로 본문을 읽도록 도전한다. 그러나 우리 는 이 말씀의 시작 부분을 대충 기적적인 내용으로만 읽어 왔다. 그러나 이 말씀을 새롭게 읽음으로써 신앙인의자세를 살피려고 한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멋있게 사역하는 사람은 바로 사도 바울이다. 특히 사도행전의 바울 모습을 보라. 바울은 우리가 확인하고 확신하는 것처럼 그야말로 제대로 된 예수의 제자였다. 그러나 인간의 눈으로 본다면 바울의 삶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멋진 모습은 아니다 그를 보고 사도가 아니라고 비난하면서 대적하는 많은 적대자들이 있었다. 바울의 옥중 서간을 보면 바울의 모습은 그야말로 선교사라기보다는 오히려 로마의 죄수라고 해야 옳다 실제로 선교 사역기간 동안 바울은 잦은 구금 생활을 한다.

신약 성경이 기록되던 사회의 가장 중심적인 가치 판단 기준이 다름 아닌 명 예수와 수치라는 구조였음을 기억해 본다면 바울이 가장 수치스런 죄수의 모습으로 재판을 받는다는 것이 (행21-28장에 나오는 바울의 모습)얼마만큼 큰 파장을 일으키는 것인가를 이해하게 된다 죄수 신분은 모든 것에서부터 단절됨을 뜻하고 최고의 수치를 말한다. 바울과 실라는 사실 그런 수치를 당하지 않아도 되는 로마 시민권자였다. 이런 최고의 시민권을 소유했기 때문에 바울과 실라의 수치는 더욱 돋보이게 된다.

그러나 ... 열렸다!

일은 밤에 일어났다(눅11:5, 행20:7, 27:27) 그것도 한 밤중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모든 것이 끝장난시간에 발생한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만 같다. 맞다! 하나님께서 드디어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문제의 초점은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있다. 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긴장하며 말씀을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칫하면 잘못 읽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파울과 실라가 옥문을 열어 달라고 기도했다고 본문은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 는 그렇게 읽어오고 있다. 그들은 옥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서 하나님과 대화하며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 곧 이어 본문은 말한다. 그들이 주께 찬미를 드렸다고 그들은 참된 하나님 종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들이 옥에서 탈출하고 나서 그것이 감사해서 하나님을 찬미 한 것이 아니다. 옥에서 탈출시켜 달라거나 방면시켜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기도의 제목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우신다.

현대인들이 바쁘게 사는 것은 마귀들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더 바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신앙인들이 기도할 시간을 갖지 못하도록 우리가 이처럼 바쁘게 살아가는 것은 성경적으로 보아도 정당하지 않다.

신앙인들이여! 빠르기를 늦추고 묵상 기도를 올리는 시간을 늘리도록 하자 감옥의 형편이 어디 기도드릴 형편이었을까? 그 때나 지금이나 감방이란 곳은 냉랭하고 침침한 곳의 대명사가 아닌가. 그곳에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기도한 바울과 실라의 모습을 상기해 보자 그리고 다시 힘을 내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연습을 시작하자 그러면 희망이 솟아오른다.

영원히 수치스런 자일 수 밖에 없는 감옥의 죄수는 우리에게 무슨 도전을 주는가? 제 아무리 환경이 어렵고 희망이 없더라도 하나님을 찬미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게을리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옥문이 열리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 감옥문을 여셨다. 이 점이 본문의 강조점이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그분과 대화하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그 분께서 도우신 다 해결하신다. 항상 기도하고 찬미하라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어려움과 고난도 지진으로 옥문을 열어 제쳐 주시듯 넉넉히 해결해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