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춘의 여론 읽기

뜻풀이

 

원로를 위하여

한겨레(2001.8.21)



이 땅에 원로는 있는가.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허전한 슬픔으로 다가오는 물음이다. 누구나 공감하는 원로가 없는 시대는 모든 사람의 비극이다.

지나친 비관이었을까. 가뭇없던 원로가 115명이나 나섰다. 더구나 한 목소리다. “광복의 날에 즈음하여 오늘의 난국을 생각한다”는 성명이 그것이다. 원로에 대한 예우일까. <동아일보>는 1면 머리로 보도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도 대서특필했다. 세 신문의 표제 또한 한결같다. “적과 동지 이분법 심각.”

115명의 원로는 토로한다. “불신과 반목 속에서 `흔들리는 나라'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불안 탓일까. 서릿발 추궁이 따른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새로운 변화의 그림을 그리면서, 역사창조의 대열에 나서고 있습니까?” 곧바로 답한다.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옛 역사의 `낡은 장부'를 뒤적이면서 적과 동지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가르는 데 온 힘을 쏟아 붓고 있는 살벌한 풍경입니다.”

곰곰 따져보자. 기실 원로의 자문자답은 현실을 꿰뚫고 있다. 다만 그 성명이 탈세를 저지르며 반민주세력을 대변해온 신문권력을 겨냥한 것이라면 그렇다. 하지만 언론개혁을 촉구하는 민주세력이 과녁이라면 이는 비극을 넘어 희극이다. 보라. 누가 먼저 적과 동지를 나누었는가. 누가 오늘을 `내전'이라며 양극화를 부추겼는가. 적이라는 말에는 두 맥락이 있다. 은유적 표현과 실제상황이 그것이다. 가령 우리가 냉전세력을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할 때 그 적은 은유이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냉전세력을 잡아 가두는 법은 없잖은가. 그러나 누구를 빨갱이라 할 때 그 적은 실제상황이다.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있잖은가. 기득권세력들의 사상공세는 오늘 이 순간도 진행형이다. 하여 정중하게 되묻고 싶다. `옛 역사의 낡은 장부'인 색깔몰이를 뒤적여 “적과 동지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가르는 살벌한 풍경”에 정녕 비판받을 사람은 누구인가.

새퉁스레 원로들은 `우리가 지향하는 성숙한 세상'을 선언한다. “진보와 보수 그리고 중도가 모두 제 색깔을 당당히 드러내는 한편 공론의 광장에서 합리적 토론을 통하여 공동선을 추구하는 세상”이란다. 거듭 묻고싶다. 참으로 그렇다면, 오늘 115명의 원로들이 가장 먼저 할 일은 무엇일까.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이다. 과연 오늘 이 땅에서 모두가 제 색깔을 당당히 드러낼 수 있는가. 현실과 동떨어진 미사려구는 둘 중 하나다. 순진 아니면 불순이다.

무릇 민주주의의 적은 여느 사회나 똬리틀고 있기 마련이다. 만일 그 적이 민중을 학살하고 나선다면 지성인 또한 은유에 머물 수 없다. 마땅히 싸워야 한다. 실제로 지난 세월 숱한 분들이 열린 사회의 적들과 싸워왔다. 오늘 115명의 `원로' 가운데 박정희 폭정과 전두환 학살극 앞에서 성숙한 사회를 위해 싸운 분은 얼마나 될까. 적과 동지의 이분법은 원천적으로 잘못이기에 폭압자·학살자와도 웃으며 살자는 깊은 뜻이 있었던 걸까.

문제는 지금 이 순간도 열린사회나 성숙한 사회를 가리트는 세력이 엄존한다는 데 있다. 진정 원로라면, 탈세로 구속되는 순간까지 마치 탄압 받는 순교자인양 어루꾀는 신문권력을 꾸짖어야 옳다. 기득권을 조금도 나누지 않으려 21세기에도 빨갱이 몰이를 서슴지 않는 수구세력들의 집단이기주의를 준엄하게 나무랄 일이다.

좌우가 공존하는 성숙한 사회를 가꾸자는 것이 성명을 낸 참뜻이라면 성명은 `적'을 거꾸로 선택했다. 엇되지만 분명히 밝혀둔다. `원로'가 아닌 남녀노소는 “지금 새로운 변화의 그림을 그리면서, 역사창조의 대열에 나서고” 있다. 2001년 여름을 달궈온 신문개혁운동이 그것이다. 반세기 넘도록 신문권력은 원로가 될만한 분들에게 숱한 흠집을 내왔다. 앞으로 올 원로를 위해서라도 오늘 신문개혁은 절박하다.

원로선언은 가을의 들머리에서 그렇지 않아도 쓸쓸한 우리에게 되묻게 한다. 이 땅에 원로는 있는가  

 

가뭇없다 : 보이던 것이 도무지 보이지 않아 찾을 길이 감감하다, 소식이 없다, 흔적이 없다, 아주 감쪽같거나 자취가 없다

새퉁스럽다 : 어처구니없고 엄청나게 새삼스럽다

새퉁이 : 밉살스럽고 경망한 짓을 하는 사람

가리틀다 : 남의 횡재에 끼어들어 무리하게 한 몫을 청하다, 잘 되어가는 일을 안되도록 틀다

어루꾀다 : 남을 얼렁거리어서 꾀다(방언)

 

엇되다 : 좀 건방진 태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