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춘의 여론 읽기

뜻풀이


김대중 정권과 장상

한겨레(2002.7.23)

 

마지막 기회다. 정치인 김대중을 사랑하며 키워온 사람들의 여론을 경청하기 바란다. 정권 내부의 핵심부터 전면 개혁하라. 이 세 마디는, 오늘의 ‘여론읽기’가 아니다. 옹근 1년 전 칼럼이다. 부패와 결전을 공언했던 집권 중반기에도 촉구했다. “마지막 당부다. 그 결전엔 자신의 살을 도려내는 결기가 서리서리 묻어나야 한다.”

김 대통령! 그를 비판하기가 더는 내키지 않는 까닭이다. 어떤 기대가 가능한가. 게다가 집권 말기다. 하지만 여론에 귀막기는 여전하다. 그래서다. 곧장 고언한다. 역사 앞에 석고대죄하라. 작게는 호남 민중 앞에, 크게는 그가 줄곧 대변하겠다고 약속한 ‘서민’ 앞에 속죄하라. 호남 민중은 단순히 동향이어서 밀어준 게 아니다. 대통령 아들이 재벌들로부터 수십억 축재놀음을 벌이며 호의호식할 때 이 땅의 노동자들은 정리해고의 칼바람에 피눈물을 삼켰다. 듣그럽겠지만, 김 대통령은 호남과 ‘서민’을 철저히 배신했다. 그럼에도 아태재단 해체 여론을 궁땄다. 맏아들의 의원직 고수를 비호했다. 장상씨를 총리로 지명한 개각에서 자성의 빛을 찾기란 더더욱 어렵다.

장상 지명자! 그 비판도 썩 내키지 않는다. 첫 여성 총리라며 두남두는 여성 여론 때문이다. 자칫 여성문제에 어리보기로 몰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자.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여성운동의 내일을 위해, 여성 총리는 물론이고 여성 대통령을 위해, 그렇다. 만일 그가 남성이라고 가정해보라. 아들의 미국 국적과 병역면제, 학력 ‘오기’와 부동산 투기 의혹, 97평으로 아파트 변조, 두 아들 앞 수천만 원 통장. 스스로 사퇴해야 마땅한 ‘사람’이다. 아니 그 이전에 대학총장으로서도, 신학자로서도 걸맞지 않다. 그럼에도 여성 총리라 괜찮다면 참으로 성 차별 아닌가. 친일파 김활란을 가장 존경해 기념사업을 추진했고, 사학재단의 이익을 대변해 사립학교법의 민주적 개정을 막으려고 한나라당을 들락거린 인물이 현 정권의 마지막 총리이어도 과연 괜찮을까? 더구나 장씨와 이희호씨의 친분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아들에 대한 비뚤어진 ‘사랑’과 서민들로서는 아연할 수십억 재산. 장씨와 김 대통령 내외의 공통분모다. 도덕적 불감증에 빠진 듯한 언행도 닮았다. 언죽번죽 잘못을 합리화하는 달변으로 여론의 눈총을 비켜가는 것도 그렇다.

우리에게 더 큰 비극은 그럼에도 장씨의 인사청문회가 희극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는 데 있다. 청문회를 앞두고 이른바 야당인 한나라당이 ‘수위’를 조절하고 있지 않은가. 병역특혜나 부동산 의혹, 그리고 미국 국적 불똥이 자칫 이회창 후보에게 튈 수 있어서란다. 그렇다. 이 후보도 비뚤어진 가족 사랑이나 챙길 것 다 챙겨온 기득권자라는 점에서 장씨와 비금비금하다. 심지어 일부 ‘부자신문’은 ‘세계화 시대’에 국적·병역문제가 뭐가 문제냐는 ‘직필’을 서슴지 않는다.

정계·언론계·학계에 똬리 튼 기득권 세력의 도덕적 타락은 시나브로 부끄러움마저 잃고 있다. 과연 오늘 국회에 어느 정당이 장씨를 올곧게 질타할 수 있을까. 딴은 김종필·박태준·이한동씨로 이어온 김 정권의 총리 열전 끝자락에 장씨가 있다고 나무랄 일만은 아니다. 장씨의 지명은 역설적으로 김 정권의 정체를 한결 확연히 드러낸 측면도 있다. 하여 정권 내부의 핵심부터 개혁하라는 말을 할 뜻은 이제 없다. 자신의 살을 도려내라는 촉구는 더더욱 가당찮다.

다만 김 대통령에 묻는다. ‘장 총리-박지원 비서실장’ 체제로 노후 보내듯 임기를 탕진할 셈인가. 아니다. 그럴 때가 아니다. 차라리 하야가 낫다. 제발 여론을 바로 읽기 바란다. 속죄할 때임을 조금이라도 깨달았다면 참회하는 모습을 보이라. 감옥에 가둔 노동자·학생들을 즉각 석방하라. 더이상 노동자들의 뜻을 무시하거나 짓밟지 말라. 용서받을, 마지막 기회다.

옹근 : 본디 그대로의

결기: 지그시 참지 못하고 발끈 성을 내거나, 벌컥 행동하는 성미

듣그럽다: (소리가) 요란하여 듣기 싫다. 시끄럽다

궁따다: 모른 체하고 딴소리를 하다.

두남두다: 잘못된 것을 두둔하여 도와주다. 가엾게 생각하여 돌보아주다. 편들다. 역성들다.

어리보기: 얼뜨고 투미한 사람.

언죽번죽: 남을 흉보는 입의 놀림

비금비금하다: 견주어 보아 서로 비슷하다

시나브로: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