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춘의 여론 읽기

뜻풀이


촛불과 불길

한겨레(2004.3.15)

 

“한국 국민이 보여준 민주주의의 진전에 깊은 인상을 받고 있다. 한국은 많은 다른 나라들의 귀감이다.” 스웨덴 총리 예란 페르손이 서울로 오기 전 밝힌 소감이다. ‘말기 국회’가 대통령 권한을 정지시킨 쿠데타를 보며, 페르손은 참으로 ‘깊은 인상’을 받지 않았을까.

그래서다. 민주주의를 찾으려는 민중의 촛불 아래서 새삼 스웨덴을, 교육과 병원이 무료이고 무덤까지 복지를 이룬 민주주의를 새기는 까닭은. 언제부터인가 스웨덴은 ‘가장 살고 싶은 나라’로 꼽혀 왔다. 권한정지 직전, 노무현 대통령도 페르손 총리에게 ‘고백’했다. “한국인은 모두 스웨덴을 부러워하고 배우려 한다.” 대통령 취임 1년을 맞았을 때, 그는 국회의원 시절부터 스웨덴을 이상으로 여겼다고 밝혔다. 대통령만이 아니다. 심지어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을 비롯한 재벌 총수들조차 ‘스웨덴 모형’에 눈길을 준다.

비단 ‘한국’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도 스웨덴에 관심이 높다. 무엇보다 김정일 위원장이 그렇다. 페르손은 2001년 5월에 서울과 평양을 함께 방문한 뒤, 김 위원장을 “매우 솔직하고 업무 지향적이며 대화가 통하는 인물”로 평했다. “참고할 서류를 많이 갖고 있었지만 그걸 보지 않고 직접 답변”한 김 위원장은 곧 김일성대학의 인재들을 스톡홀름에 보냈다.

기실 배우는 모습은 누구나 아름답다. 더구나 남과 북이 두루 스웨덴을 연구한다면 좋은 일 아닌가. 다만, 배우려면 제대로 배울 일이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조선노동당원들이 스웨덴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학습’에선 분명 짚고 넘어갈 대목이 있다.

보라. 고작 노동조합 조직률이 12% 안팎인 한국의 노동운동을 서슴없이 ‘강성’이나 ‘노동귀족’따위로 훌닦는 대통령이 노조 조직률 80%에 이르는 스웨덴을 이상으로 여긴다면, 참으로 민망스러운 일 아닌가. 재벌은 또 어떤가. ‘노동귀족’ 정도가 아니다. 아예 노동조합 자체를 살천스레 부정하는 삼성그룹이 스웨덴을 들먹이는 모습은 실소를 머금게 한다.

다행스럽게도 스웨덴을 똑똑히 이해하려는 노력은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싸목싸목 진행되고 있다. 국제사무직노조연맹의 한국협의회는 노조간부는 물론이고 진보 정당과 사회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스웨덴 모형의 한국 적용 가능성을 깊이 있게 타진하고 있다. 물론, 스웨덴과 한국의 단순 비교는 학문적 호사에 그칠 수 있다. 가령 페르손 총리가 이 땅에서 정치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사회민주당 총재인 그는 벅벅이 국가보안법 올가미에 걸려 ‘비전향 장기수’로 갇혀있을 터이다. 그렇다. ‘합법적 쿠데타’가 벌어진 한국의 국회에는 진보 정당이 의석 하나 없지만, 스웨덴에선 제1당이다.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더러 정권을 잃기도 했지만 70여년을 집권했다. 민중이 가난과 질병에서 벗어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지며리 일궈왔다.

페르손보다 조금 앞서 서울에 온 스웨덴 노동운동가와 포장마차에서 찬 소주를 나눌 때다. 공공노조연맹 국제담당 서기인 칼 카우손은 한국에서도 스웨덴 복지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되묻는 논리는 단순하고 명쾌했다. “의지와 철학의 문제 아닌가.” 그렇다. 스웨덴은 일찌감치 자신의 길을 찾았다. 스웨덴의 ‘국민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기억이 나를 본다>에서 노래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길을 찾아야만 한다/ 모든 문제는 자신의 언어로 소리치는 법/ 진실의 흔적을 따라 탐정처럼 길을 가라.”

스웨덴과 정반대로 진보 정당이 집권은커녕 의석 하나 없고 수구반동이 활개치는 공화국에서 묻는다. 한국의 길을. “모든 문제는 자신의 언어로 소리치는 법” 아닌가. 저 썩어문드러진 정치판과 뒤틀린 공론장을 바로 세울 우리의 길, 그 길을 찾을 때다.

하여, 타오르는 촛불 아래서 다시 묻는다. 저 눈물의 촛불이 차갑게 타올라, 모든 가식의 누더기를 사르고 마침내 민중의 메마른 앙가슴마다 뜨거운 불길로 번져갈, 그 아름다운 날은,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훌닦다 : 남의 잘못이나 약점을 들어 몹시 나무라다

살천스레: 매섭고 쌀쌀하게

싸목싸목: 천천히 조금씩 걷는 모양 

 

벅벅이: 틀림 없이 그러하리라고 추측의 뜻을 나타내는 말  

 

지며리: 1.차분하고 꾸준히,
 
2.차분하고 탐탁스레

앙가슴: 양쪽 젖 사이의 가슴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