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춘의 여론 읽기

뜻풀이


유령의 피울음

한겨레(2004.4.5)

 

 

착하기만 한 눈빛들이었다. 곰비임비 도착한 10여대의 버스마다 가득 탔다. ‘서울시영버스’라는 글자도 보였다. 버스에서 내려 시근시근 구덩이를 팠다. 의심은 했지만 설마 했다. 저들도 사람 아닌가. 하지만 아니었다. 인두겁을 쓴 자들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여남은 명이 아니다. 500여 명. 모두 스러졌다.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핏물이 도랑을 이룬 생지옥엔 이불, 옷, 솥단지만 나뒹굴었다. 1951년 봄, 경남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였다. 반세기가 흘렀다. 목격자의 증언으로 다시 구덩이를 팠을 때다. 숟가락과 금니, 그리고 교복단추가 나왔다. 빛 바랜 그 단추는 서울에서 학교 다녔던 이름 모를 청년의 원한을 서리서리 머금었다.

2004년 4월5일, 바로 그곳에서 추모 위령제가 열렸다. 누가, 왜 그랬는지 진실은 묻혀있다. 하루 앞서 4일에는 지리산 다른 자락에서도 학살된 수백여 민중을 추모하는 위령제를 봉행했다. 3일에는 제주도에서 억울하게 숨진 3만 원혼들을 추모했다. 그랬다. 사월의 3·4·5일로 이어진 연휴에 이땅 곳곳에선 학살의 추모가 이어졌다. ‘황금연휴’가 아니었다. 금빛 아닌 핏빛이었다. 비단 지리산과 한라산만이 아니다. 온 산하에 지천으로 흐드러진 진달래처럼, 그 선홍빛 아래엔 피칠갑을 한 유령들의 피울음이 어김없이 묻혀있다. 한국전쟁을 앞뒤로 민간인 120만이 학살당했다. 친일파들에 쫓겨 빨치산이 된 사람들에 이르면 비극은 더 깊어진다. 사월 초하루에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은 눈을 감았다.

전쟁의 비극으로 ‘이해’하자는 말은 이제 접어두자. 그 시르죽은 소리는 학살의 만행자들이 반세기 동안 우리를 세뇌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전쟁이든, 민간인 학살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다. 120만의 유령들이 지하에서 토해내는 절규를 들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살아있는 우리다. 서양극 <오페라의 유령>이 화려한 무대에서 공연될 때, 이땅에서 생생하게 벌어진 학살극의 유령들은 컴컴한 땅밑에서 피울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애면글면 유족들과 시민사회단체의 노력으로 ‘민간인희생 진상규명법’ 제정운동이 불붙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 법안을 16대 국회는 끝내 모르쇠했다.

신문과 방송의 외면 속에 한나라당은 결사적으로 법안을 가리 틀었다. 당시 최병렬 대표는 “이 법안이 통과되면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보수세력이 전부 등돌리고 떠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홍사덕 총무와 이강두 정책위의장도 긴급의원총회를 열어 법안을 막았다. 이들 ‘3인방’의 논리는 기실 보수세력에 대한 모욕이다. 대체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자는데 어째서 ‘보수세력’이 반대한다고 예단하는가. 만일 반대한다면 더는 그들은 보수가 아니다. 결국 최병렬·홍사덕·이강두 3인방의 논리대로 한다면, 한나라당의 정체는 군사독재의 후예만이 아니다. 학살세력의 후계다.

특히 영남지역 주민 가운데 학살당한 원혼들이 많은데도 진실 규명을 거부한 한나라당의 오만을 냉철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저들이 대변하는 사람들이 영남의 민중이 아니라 수구세력임을 스스로 폭로하고 있지 않은가. 저들의 야만과 오만 앞에 민중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의 전국유족협의회는 최근 재출범을 선언했다. 언론은 그조차 외면했다. 재출범의 뜻은 결코 과거에 있지 않다. 선언문은 “학살이 국가 권력에 의한 인권침해의 뿌리가 되어 우리 사회를 썩고 병들게 하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생명과 인권을 중시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소중히 하는 인권사회로 거듭나도록 목숨이 다할 때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한 유족들 앞에 우리의 과제는 무엇일까. 아니, 유족 이전에 유령의 피울음에 귀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마침 우리 손엔 ‘무기’가 주어져 있다. 투표가 그것이다. 학살은 물론이고 의문사의 진실을 밝히는 민주입법이 가능하도록 국회를 바꿔야 한다. 사월은 혁명의 달 아닌가.

 

곰비임비: 계속 일이 일어나거나 물건이 거듭 쌓이는 모양, 계속.

시근시근 : 숨을 가쁘고 거칠게 쉬는 모양. (작은말)새근새근. (센말)씨근씨근.

인두겁 : 행실이나 바탕이 사람답지 못한 사람을 욕으로 이르는 말.

서리서리 : 1.서려 놓거나 서려 있는 모양.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2.(어떤 감정이) 복잡하게 서려 있는 모양.
  가슴에
서리서리 얽힌 회포. (작은말)사리사리

애면글면: 약한 힘으로 몹씨 힘든 일을 해내느라 온갖 힘을 다하는 모양

가리 틀다 : 남의 횡재에 끼어들어 무리하게 한 몫을 청하다, 잘 되어가는 일을 안되도록 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