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고풍 열기

 



지금 한국 영화계에서는 "친구" 열풍이 한창이다. 그 덕분에 방송에서 주로 하인이나 식당 아줌마의 입에 자주 오르던 부산 사투리가 전국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부산에서 자라나 성장한 필자가 대화와 설교 중에 부산 말씨를 숨기려고 해도 혀가 영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 경상도 사투리도 당당한 대접을 받는 시대가 되었으니, 열등감과 어색함을 지워야 하겠다. 친구야 대기 반갑데이! 그렇지만 우스개 같은 슬픈 소식도 들린다. 어떤 학생은 엄마한테 "내가 니 씨다바리가?"라는 말을 썼다가, 귀때기를 세게 얻어맞았다고 한다. "씨"라는 말을 오해한 성급한 엄마의 잘못이란다. 그래도 천대를 받던 고향 말투가 모처럼 인기를 얻는 것이 여간 반갑지가 않다.

필자는 영화의 전문가는 아니어서, 왜 "친구"가 이렇게 대단한 인기를 누리는지를 잘 알지 못한다. 세간에 들리는 말로는 사투리 때문이 아니라 복고풍 때문이란다. 몇 년 전에도 "서편제"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TV 방송도 온통 복고풍 일색이다. "허준"의 인기를 타고 "정약용"이 나오더니, 요즘은 "홍국영"과 "명성황후"가 숨가쁘게 등장한다. 어디 그 뿐인가? "태조 왕건"과 "여인천하"도 다 옛 시절의 추억을 밑천으로 삼아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다.

왜 새삼 복고풍이 이처럼 대단한 환영을 받는 걸까? 지금은 눈부신 21세기가 아닌가? 미래가 얼마나 화려하게, 얼마나 숨가쁘게 다가오는가? 미래를 따라잡기도 벅찬 세상에 왜 사람들은 갑자기 과거로 유턴(U-Turn)하는 걸까? 우리는 그 이유를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 즉 출애굽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망이 불투명하고 미래가 불안하게 다가오면, 사람들은 갑자기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래, 과거가 더 좋았어!"라고 말하면서 갑자기 과거를 미화하기 시작한다. 애굽을 탈출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서 진퇴양난이 되자, 애굽으로 되돌아가자고 모세에게 항의하였다. 비록 노예 생활이었지만, 지금보다는 더 잘 먹고 편안하였던 옛날로 되돌아가자는 항의였다. 우리네 살림살이가 힘들어질 때마다 종종 혹독했던 박정희와 전두환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차제에 필자는 여기서 갑자기 무거운 주제를 끄집어내고 싶다. 그럼 세상은 돌고 도는가? 기독교가 세상에 준 가장 큰 선물은 희망의 정신이 아닌가? 기독교만큼 메시야를 끈질기게 기다려 온 종교가 어디에 있는가? 기독교는 예언자적, 종말론적 종교가 아닌가? 기독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미래의 구원을 믿지 않는가? 그러므로 기독교는 궁극적으로 낙관적 종교가 아닌가? 하지만 가나안을 비롯한 대개의 동양 종교에서는 이런 직선적인 시간관보다는 윤회적, 순환적 시간관이 압도적으로 지배한다. 세상은 돌고 돈다. 영혼도 돌고 돈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질적으로 나아지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동양 종교는 대개 현실에 대해 염세적이고 비관적이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구원(해탈)을 추구하거나, 과거를 미화하거나 현실을 절대화하는 경향성을 갖는다. 그래서 역사에 덜 참여한다. 그래서 동양 종교를 믿는 대개의 나라들에서는 혁명이나 변혁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동서양이 한 마을(지구촌)이 된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떤 삶의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면 상황에 따라 이 둘을 번갈아 가며 선택해야 하는가? 필자가 보기에는 결코 단순한 양자택일의 사항만은 아니다. 쉬운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자동차 바퀴의 축을 보고 있으면, 바퀴가 제 자리에서만 빙빙 돌고 있는 것 같다. 세상은 윤회하는 것 같다. 그래서 불교는 바퀴를 윤회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눈을 조금만 크게 뜨면, 자동차는 앞으로 달리고 있다. 세상도 진보하는 듯이 보인다. 그런데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앞으로만 나아가면 결국 제 자리로 돌아온다. 그러니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지구 안의 생명과 문화는 계속 발전해 왔다. 시계와 달력을 뒤로 돌릴 수 없다. 그러니 앞으로만 가야 한다. 하지만 시야를 지구 밖으로 돌리면, 지구도 결국 태양을 중심으로 빙빙 돌고 있다. 그래서 낮과 밤이 번갈아 바뀌고, 사계절이 순환한다. 많은 천체들도 그 무엇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우주는 첫 탄생(폭발) 이후 계속 팽창하고 있다. 우주는 점점 더 커지고 있고, 날로 달라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주의 끝은 어떠한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우주이므로, 우주의 운명에 우리의 운명이 달려 있는 셈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우주가 계속 팽창할 거라고 예언하고, 어떤 이는 우주가 어느 상태에서 멈출 거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우주가 몇 십억 년 후에 원 상태로 수축되었다가 다시 팽창할 거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주는 팽창과 순환을 거듭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우주의 역사와 운명을 보면, 만물은 발전과 순환을 거듭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물은 단순히 전진하는 것만도 아니고, 단순히 순환하는 것만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에서 미래를 찾을 수 있고(오래된 미래), 미래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Back to the future). 성경도 상당히 오래된 옛 책이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과거의 상태 그대로 되돌아가려고 함이 아니라, 그 속에서 미래의 희망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가 불투명하고 불안할 때, 과거에 쓰여 성경 속에서도 교훈을 발견한다. 이처럼 우리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함께 산다. 과거는 결코 지나간 것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온고지신(溫故知新)과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는 결코 과거의 그대로를 오늘 재현할 수 없으며, 과거의 모습 그대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아무리 종교적인 보수주의자라고 하더라도, 과거의 모습 그대로 돌아가자는 사람은 없다. 화이트헤드(Whitehead)는 "원칙적인 보수주의자는 우주에 저항하는 사람이다"고 말하였다. 이 말을 필자는 다음과 같이 바꾸고 싶다: "무조건적인 보수주의자는 하나님에게 저항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 "야웨"라는 단어도 "나는 미래를 향해 너희를 인도하는 존재이다.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대로 될 자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하튼 과거 그대로 되돌아갈 수도 없고, 지금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도 없다. 외형적으로 세상이 전진하든 순환하든, 내일은 어제와 다르고, 미래는 새롭게 다가온다. 그러므로 과거를 거울로 삼든 미래의 꿈을 꾸든, 늘 새로워지는 방법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다. 우리는 매일 새롭게 결단하고, 새롭게 회개하고,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하나님은 망가진 과거의 낙원을 회복하시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셨다(계 21:1) 그러므로 우리도 자신과 세상을 늘 새롭게 갱신해야 한다. 늘 깨어 기도해야 한다.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