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학과 인간학



1. 신학에서의 인간학의 위치와 비중

 

신학의 일차적 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십계명(제 1 계명)과 주기도문의 정신에서 볼 때, 인간의 일차적 관심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신학의 일차적 대상도 하나님, 그의 영광과 거룩함, 그의 나라와 뜻이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도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마 6:33)고 예수는 말했다.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우선적 존중,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칼 바르트(K. Barth)가 일찍이 제기한 심각한 질문에 부딪힌다. 그는 "신학의 공리로서의 제 1 계명"(1933년)이라는 글에서 말했다: 공리(公理)란 다른 명제로써 증명할 필요가 없는 명제, 그 자체로서 진실한 명제를 말하는데,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라는 제 1 계명은 신학적 공리이다. 왜냐? 1. 그것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2. 그것은 시간적인 사건 즉 한 인격이 다른 인격에게 한 말로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3.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4. 계명(명령)을 주신 자는 해방자,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루터가 말하는 대로, 다른 신들이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이 걸려 있는 곳에, 그의 최후의 확신, 희망의 근거가 그의 생활의 원동력, 삶의 안식의 근거가 되는 곳에, 가장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사람들은 이런 최고의 유일성을 계시된 하나님과 혼동, 교체해서는 안된다. 신개신교주의 신학은 계시에 관해 말하는 동시에 인간, 이성, 체험, 역사, 피조적 실존, 민족, 윤리, 국가를 말함으로써, 성서 계시의 유일성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다. 계시가 경건한 자기이해(슐라이어마하), 절대정신의 자기활동(헤겔), 문화(리츨), 일반 종교사(트뢸취), 양심(홀, 히르쉬) 혹은 일정하게 해석된 현존재(불트만) 속으로 해소되었다. 그러나 신학은 모든 자연신학에서 떠나 좁은 곳, 고독한 곳으로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자신을 계시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바르트가 인간중심적인 사고의 위험성을 경고한 것은 옳다. 신학이 하나님 대신에 자기 자신을 취급함으로써, 신학의 주제를 그르치게 만들었다. 신학은 종교학이 되고,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진술은 인간의 자기이해가 되었다. 이로써 하나님은 사물화, 대상화되고, 인간은 그 자신이 경배하는 신앙의 대상, 우상이 되었다. 하나님과 인간은 혼동되었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진지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금 신학의 방향을 하나님에게 돌린 것은 바르트의 영원한 공적이다. 하나님이 일차적 관심, 예배의 주된 대상이 되지 않는 곳에서는 온갖 세상의 신들이 활개를 친다. 하나님에 관한 관심 외에는 모두 어린 아이의 위험한 장난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영원히 자유로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

그렇지만 바르트의 이러한 정당한 항변이 신학에서 인간학을 추방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영원히 명상하기를 촉구한 것은 아니다. 그의 말년의 강의('하나님의 인간성', 1959년)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희생시키지 않는 전제 아래서 인간도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임을 강조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인간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성을 취하였다. 그러므로 진정하게 이해되는 하나님의 신성 안에는 그의 인간성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이제 진지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인간의 탁월성은 인정되어야 한다. 인간과 그의 모든 활동은 긍정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초기의 바르트의 영향 아래서 신학에서 널리 인간학이 퇴조하고 인간과의 여하한 결합마저도 의심스럽게 취급된 것은, 바르트가 의도하지 않은 것이지만, 바로 그가 남긴 유감스러운 유산이다. 그리고 바르트가 인간론을 혐오함으로써, 그의 신학도 또 하나의 인간학적 제약성에 의존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질문해야 한다. 그가 단순히 하나님 자신과 함께 시작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그의 의지에 반해 신학의 주관주의를 최상의 꼭대기에 올려놓은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신학의 합리적 논증, 해명은 불가피하다. 신학논쟁의 인간학적 해명은 불가피하다. 오직 이런 바탕 위에서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그의 강조가 단순히 경건한 자의적인 주장이 아님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날의 신학은 점차로 인간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려는 경향성을 뚜렷하게 보이고 있다. 인간에 대한 현대인의 관심은 19세기의 합리론과 관념론의 인간론이 너무 협소한 것에 대한 반동이기도 하지만, 인간학적 관심에 구체적으로 길을 터놓기 시작한 것은 유물론과 진화론, 실존주의와 인격주의, 현상학과 철학적 인간학 등 때문이다. 그리고 신학도 본래 인간 구원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운명적으로 인간의 문제와 얽혀 있다. 특히 신학은 선포 혹은 전도의 대상인 인간의 상황과 접촉해야 하기 때문에, 신학과 인간학은 서로 다르면서도 인간의 자기이해라는 '접촉점'(브룬너)을 통해 서로 만나야 한다. 그리고 신학은 인간의 실존상황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답하기 때문에, 인간학과 '상관관계'(틸리히)를 가져야 한다. 더욱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신학은 인간학의 분야에서 입증된 인간 존재의 현상을 신학적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임으로써, 신학의 차원을 유의미하게 확장하여야 한다. 이것을 판넨베르크는 '기초신학적 인간학'이라고 부른다. 이 방법론은 먼저 인간의 현상(생물학, 심리학, 문화인류학, 사회학 등)에 주목한 후에, 이것이 종교적-신학적으로 적합한 의미를 갖는지 질문하면서, 비판적으로 이것을 신학에 적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