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공작인(Homo faber)

 

현대인을 지배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인간의 이념은 자연주의적·실증주의적·실용주의적 이론인 '호모 파베르'(工作人)이다. 이 이념은 무엇보다도 인간 일반의 특수한 어떤 이성능력을 부인한다. 여기에서 인간과 동물과의 아무런 본질적 구별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정도 상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인간은 다만 특별한 종류의 동물의 일종에 불과하다. 소위 사유하는 '정신', 즉 외견 상 충동하는 다른 중심적 의욕과 목적설정의 능력, 가치파악과 가치평가, 정신적 사랑은 인간 이하의 동물계에서도 작용하고 있는 동인들의 추가적 수반현상이며 무활동적인 의식의 반영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간의 일차적인 위치는 이성에 있지 않고 충동(衝動)에 있다. 즉 인간은 '충동적 존재'(Triebwesen)이다. 인간의 사상, 의욕, 고차적인 정서작용도 다만 일종의 '인간 상호간의 충동적 감정의 기호'에 불과하다. 정신이나 이성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독립해 있는 별개의 형이상학적 기원을 지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존재의 법칙 그 자체에 일치하는 기초적인 자율적 법칙성을 소유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우리가 이미 유인원(類人猿)에서 발견하는 최고의 심리적 능력의 발전에 불과하다. 우리가 인식이라고 일컫는 것은 자극과 유기체의 반응 사이에 점점 더 풍부하게 끼어 들어가는 형상의 계열, 혹은 사물이 스스로 만든 기호 내지는 기호의 습관적인 결합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존재이다 : ① 인간은 기호(언어)를 가진 동물이며, ② 인간은 도구를 가진 동물이며, ③ 인간은 뇌수(腦髓)를가진 존재이다. 다만 인간은 동물보다는 더 많은 에너지를 뇌수, 특히 그 피질(皮質)의 기능을 위해 소비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이념은 Democritus, Epicurus로부터 Bacon, Hume, Mill, Comte, Spencer, Darwin, Hobbes, Machiavelli, Feuerbach, Schopenhauer, Nitzsche, Freud, Adler, P.Schilder, McDougall, F.Oppenheimer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형태로 완성되어 왔다.

다만 인간을 '충동적 존재'로 환원하는 점에서, 이 이념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영양충동

역사는 근본적으로 '계급투쟁'과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고 보는 소위 Marx적(경제학적) 역사관은 영양충동의 체계 속에서 모든 집단사건의 가장 강력하고 결정적인 동기를 포착하며, 각 종의 정신문화 내용은 다만 변천하는 역사적 상황 하에서 이러한 충동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반현상, 우회현상이라고 본다.

Marx는 (Hegel에 반해)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고 본다 여기서 존재란 경제적인 생산관계를 뜻한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하부구조로서의 존재 위에 이에 따라 결정하는 상부구조인 의식(문화, 종교 등)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모든 의식현상(예술, 종교, 철학)은 다만 허위의식(Ideologie = 관념론)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는 다만 사회적·경제적 현실의 표현이다.


2. 생식충동

또 하나의 역사관은 번식과 생식의 체계의 교체 속에서 모든 독립된 변수를 본다. 이 자연주의적 역사관은 생식의 원래적 충동과 이 충동의 양적·질적 결과 속에서 역사의 원동력을 보는 충동이론을 따르고 있다.

Schopenhauer는 우주와 사람의 본질은 이성이 아니라 '의지'에 있다고 했다. 이성은 다만 의지에 봉사하는 종이다. 사람을 이끌어 가는 힘은 이성이 아니고 의지이다. 인간의 본질이 사유, 의식, 이성에 있다는, 고래(古來)로 모든 철학자가 지녀온 이 착각은 제거되어야 한다. 이 의식은 우리의 본질을 싸고 있는 표피(表皮)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무의식적·맹목적·본원적·본질적인 '삶에의 의지'의 충동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인간과 생물계를 이끌어 가는 힘은 생식본능이다. 생식본능은 가장 강렬한 생의 의지의 표현이다('性愛의 형이상학' ⇒ 사랑은 종족보존이라는 유일한 목적을 위한 하나의 기만수단이다!).

Freud도 사람을 이끌어 가는 근본적인 원동력을 성적인 본능(Libido)에서 찾았다. 이성적 인식욕구는 다만 리비도 한 가지에 불과하다. 우리의 문화가 리비도를 억제할 때 그 억제된 본능은 무의식 속에 들어가고, 이것이 승화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예술, 종교, 철학이다. 따라서 무의식 속에 있는 성적인 본능은 우리를 지배하는 근본적인 힘이다.

3. 권력충동

또 하나의 자연주의적 역사관은 권력정치적 역사관이다. 이것은 Hobbes, Machiavelli(정치적 권력투쟁 속에서 충동생활의 원동력을 봄), Nitzsche, Adler(권력에의 의지 속에서, 즉 정신화된 권력지향 속에서 충동생활의 원동력을 봄)에 의해 대변되었다.

Nitzsche : "이 세계는 권력에의 의지이며, 그 밖의 어떤 것도 아니다. '영원의 이념', '물(物) 자체', '피안' 등의 표현은 모두가 망상이나 환영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에게 아무런 자비도 베풀 수 없는 공염불(空念佛)에 지나지 않는다."

 

(평가)

Marx: 어떤 사상가도 맑스만큼 현대 세계의 정치구조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가 예언한 것처럼 가장 진보한 산업 국가에서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은 20세기의 여러 혁명을 낳았다. 그렇지만 어떤 사회도 진보한 공산 사회로 접근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심지어 명백한 공산주의 사회마저도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국가 자본주의의 사례라고 비난을 받았다. 맑스는 인간의 완전함을 신뢰했다. 맑스는 계급 없는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개인적 이해에 매달리지 않고 서로 협동하는 시대를 예견했다. 그는 완전한 사회에서는 풍요와 이타성이 생길 거라고 믿었다. 이러한 사회는 천국의 세속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의 외적 조건이 바뀌면, 탐욕과 이기심이 사라진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공산 사회에서는 모든 갈등이 정말 제거될 수 있는가? 맑스는 인간의 내면적 갈등은 고려하지 않았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 사회보다 더 뿌리깊다.

맑스는 인간 행위의 사회적 결정 요인에 지나치게 편향됨으로써, 생물학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간을 망각한다. 욕구와 필요가 사회의 산물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인간 본성의 생물학적 근거를 완전히 배제할 위험을 낳는다. 철저한 경제적 결정론은 극단으로 흐를 수 있다. 만일 관념이 경제적 이익에 관한 요구에 의해 생긴다면, 그리고 그러한 요구 앞에서 관념이 무력하다면, 어떻게 혁명에 대한 외침이 현실적으로 생길 수 있는가? 인간은 경제적 여건에 좌우되는 무기력한 존재로서 그러한 여건의 산물인가, 아니면 그러한 여건을 통제할 수 있는 존재인가? 분명히 환경이 인간을 만들지만, 맑스는 인간이 환경을 만든다는 것도 믿었다(트리거, 인간 본성에 관한 10가지 성찰 117쪽 이하 참조).

종교, 예술, 가치를 상부 구조, 경제 현상의 반영으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일방적이고 왜곡된 유물론적 이론이다. 혁명(생산 수단의 국유화)에 의해 인간의 심성에 뿌리박힌 이기적 성향, 착취 행위를 제거할 수 있다는 낙관적 견해는 불가능한 것임이 입증되었다. 그리고 역사의 진행은 맑스 자신이 예견한 것과 다르게 진행되고 있다.

Nitzsche: 비록 영원회귀에 도달하는 삶일지라도, 삶을 부정하지 않고 긍정하는 그의 해결은, 가지의 의지대로 창작할 수 있는 자유를 찬양하면서 빈 화폭으로 달려가는 예술가적 삶을 살려는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갖는다. 환경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증대하고 과학과 기술이 우리의 능력을 신장시키면서, 우리는 점차 이 세계의 지배자(니체가 자주 인용한 구절)가 되었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런 믿음이 진보에 대한 믿음과 결부될 때, 겨로가적으로 무제한적인 낙관주의가 등장할 수 있다. 선악의 전통적 범주를 배격하고 원죄와 죄의식의 개념을 유기함으로써, 인간의 행복이 증대된 것은 아니다.

그는 생의 무목적성을 부각시켰으며, 도덕의 주요 개념을 파괴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세계의 객관성을 문제시하였다. 삶이 어떤 방향을 갖는다는 확신은 삶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주장만큼이나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영원회귀에 관한 니체의 사상은 결과적으로 이 두 가지 견해를 거부한다. 우리는 방향도 없고 목적도 없는 끝없이 반복되는 지루함 속에 놓여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상은 인간이 처한 곤경에 대한 암울한 묘사로서 어떠한 처방도 될 수 없다. 오히려 니체는 권력 의지에 의한 지배욕을 옹호함으로써,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하나 더 추가하였다(트리거, 인간 본성에 관한 10가지 성찰 93쪽 이하 참조).

Schopenhauer: 맹목적인 의지만이 절대적 본질인 세계 내에서 어떻게 지력(知力)이 의지를 이길 수 있는가? 이것은 맹목적 의지 외에도 또 다른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게 아닌가?(H. J. Störig, 세계 철학사 下 참조)

Freud: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적 차원을 발견하고 심도 있게 연구한 예언자였다. 하지만 그는 인간을 성적인 충동 에너지의 다발로 보고, 사회 변동과 동떨어진 독립된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철학을 이데올로기적 상부 구조로 보는 것은 정신을 억압하는 데서 생긴 이론이다(빅터 프랭클). 프로이트는 의미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에게서 의미의 문제는 단지 병리학적인 증상의 의의만을 갖는다.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이론은 정신에 대해 적대적이다(칼 구스타프 융). 프로이트는 인간을 과거에 고착시키다. 그는 인간의 발전에 의미심장한 의미를 지니는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산업 사회의 기계적 인간관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과도한 병리적 현상과 상관이 없는 갈등은 아마도 자기 초월의 본질일 것이다. 그는 갈등이 인간의 개방성을 위한 표시이고, 인간의 자기 초월 능력과 과제를 위한 표시일 수도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프로이트이 세계관은 허무주의적이다. 프로이트가 종교를 환상이라고 비판하면서 하늘을 공허하게 만들었으나, 이로 인하여 땅 위에 사는 인간도 공허하게 되었다. 에릭 프롬에 의하면 프로이트는 세계와 존재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관계에 주목하지 못하였다. 그는 초자아가 어떻게 성립되는지만을 확정지었을 뿐이지, 진리와 사실의 문제를 제기하는 데 소홀하였다(김광식, 인간과학과 신학, 47쪽 이하 참조).

20세기의 어떤 사상가도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서로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에 관해 프로이트만큼 강력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새로운 신화'를 제안했고, 정신분석은 해악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는 인간 합리성의 산물을 불신하도록 만들었고, 인간 의식의 여타 산물에 관해 회의를 제기하였다. 프로이트는 종교를 한낱 환상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종교가 반드시 허위인 것만은 아니다. 도덕과 종교에 관한 그의 입장은 본질적으로 니체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트리거, 인간 본성에 관한 10가지 성찰 141쪽 이하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