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진화하는 인간

 

현대의 학문분야에서 인간을 '열린 존재'로 이해하는 데 큰 기여를 남긴 것은 역설적이게도 신학이나 종교학이라기 보다는 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물의 현상을 처음부터 고정된 체계로 보기보다는 개방된 체계로 볼 수 있도록 우리의 편협한 마음과 닫힌 눈을 열어준 것은 무엇보다도 우주론과 진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인간학과 관련하여 우리의 관심을 일으키는 것은 올바른 진화론적 이론에 대한 검증과 판단이 아니라 진화론적 인간이해이며, 그 중에서도 진화론적 우주관 혹은 인간관을 기독교적 가치관 혹은 교리와 결합하려고 시도한 떼이야르 드 사르댕(Teilhard de Sardin)의 이론이다.

떼이야르가 일평생 몰두한 것은 우주의 내적 구조와 발전에 관한 이론이었으며, 또 이 우주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와 임무에 관한 이론이었다. 우주를 내적으로 결합되고 전체성을 지닌 하나의 분명한 현상으로 서술하고 그 전체성 안에 내포된 의미를 탐구한 그의 '우주적 현상론'은 그 중요한 부분으로서 무엇보다도 세계 현상의 내면적 의미를 찾고자 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그는 지구를 우주의 전형적 표현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그의 탐구가 도달한 지구의 모습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진화하는 하나의 통일체로서 계속적이고도 끊임없는 제 사건과 제 상태의 흐름을 갖는 지구의 모습이었다. 진화의 과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그것은 곧 물질(지질권)과 생명(생명권) 그리고 정신(정신권)이다. 문제는 이 세 영역 간의 발생적인 연쇄관계였다. 즉 지질권에서 어떻게 생명이 발생하며, 생명권에서 어떻게 정신권이 발생했느냐의 문제인데, 떼이야르의 견해에 의하면 물질과 생명의 관계, 동물적 생명과 인간의 관계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있지만, 역시 근본적인 유대와 본질적인 결합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전이(轉移)에 관한 이론은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다. 그러나 떼이야르에 의하면 이 전이가 증명되거나 설명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이 전이가 얼마나 타당한지는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분야에서 만물이 어떤 정도를 넘어서면, 즉 임계점(臨界點)에 도달하면, 모든 종류의 비약 즉 상태변화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출현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진화의 과정은 점진적인 복잡화와 내면화의 방향을 향해 일어난다. 즉 만물은 더욱 조직적인 형태를 지닌 물질로 응축되어 가며, 이 복잡화의 과정에는 의식의 증대화가 수반된다. 즉 복잡화의 증대와 함께 정신현상의 증대 혹은 점진적 성장이 식별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생명이 점차적인 발전을 거쳐 오랜 후에 고도의 복잡화에 도달했을 때, 거대한 진화과정 안에서 또 한번 이와 꼭같은 결정적인 상태의 변화가 생겨야만 했다. 즉 물질이 활성화(活性化)한 후에, 생명이 인간화(人間化)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혀 새로운 현상이 생명에서부터 나타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인간의 출현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의식적 사고력이다. 인간은 반성하고 의식하는 존재라는 점 때문에 동물과는 건널 수 없는 틈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동물과 다를 뿐만 아니라 전연 별개의 존재이다. 그것은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상태의 차이에서 오는 질적인 차이다. 인간의 출현은 연속선 상의 불연속성, 상상할 수 없던 전혀 새로운 변화였다. 인간의 출현은 심적 집중이 최고도에 달하여 결정적인 상태변화가 생겨났을 때에 일어났다.

그러므로 아무리 인간이 동물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하더라도, 동물계의 보잘 것없는 어떤 부산물만으로 생각될 수는 없다. 인간은, 그 근원에서부터 볼때는, 동물계의 먼 역사 속에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우주 안에서 돌이킬 수 없는 전혀 새로운 하나의 정신현상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인간은 우주 안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은 진화의 최첨단에 서 있으며, 자신의 자연환경보다 탁월하고 존엄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주의 진화는 인간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진화는 진행 도중에 있으며,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하여 뻗어 나간다. 세계는 인간 안에서 또 인간을 통하여 더 큰 완성을 향하여 계속 움직이고 있다. 전적으로 미래를 지향하는 존재는 우주 안에서 오직 인간뿐이다. 당연히 미래에 대한 책임도 인간에게 있을 따름이다.

여기서 떼이야르는 자연법칙의 확실성과 불변성을 가정하고 있기에, 마치 결정론적 세계관을 보여 주는 듯하다. 그러나 이 법칙은 미래를 열어 주는 법칙이고, 또한 자연법칙은 인간의 자유와 상호작용을 이룬다는 점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는 결코 결정론적 역사관을 대변하진 않는다. 그는 우주의 진화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자유와 책임, 인간의 협력과 연대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인류진화의 과정이 더욱 더 다양화하고 특수화하는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진화의 인력인 사랑의 힘에 의해 자유롭고 친밀하게 교제하는 인류의 통일을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떼이야르의 사상이 신학에게 특별한 매력을 주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론적 진화해석에 있다. 그에 의하면 온 창조는 창조의 본래적 정점(頂点)인 그리스도에게 집중된다. 만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하고, 그리스도에 의해 통일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그는 초자연계만이 아니라 자연계의 목표와 절정이다. 그는 진화의 최종적 수렴점(收斂點)이요 진화의 오메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인류진화의 에너지, 원동력일 뿐만 아니라 그 종점이요 목표이기도 하다. 즉 우주발생은 생명발생을 거쳐 정신발생으로 끝맺는다. 그러나 정신발생은 그리스도발생에서 완성된다. 그리스도는 결국 인류를 하나님에게로 이끌고 간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 된다.

이와 같은 떼이야르의 인간이해는 인간에게 장엄한 통일성, 탁월한 존엄성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활동이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파루시아)를 촉진한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우주 안에서 인간은 가장 높은 지위를 누리며, 우주의 드라마 안에서 인간의 비젼은 우주 끝과 하나님에게까지 미친다. 전통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신학이 떼이야르의 사상과 근본적으로 심각하게 충돌한다고 생각하는 점은 진화론적 우주-인간 이해이다. 보수적 신학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성서기사를 과학적 본문으로 읽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전통적 교회가 수 십 세기 동안이나 자명한 진리로 인정된 지동설(地動說)을 성서본문을 근거로 억압, 반대해 왔듯이, 성서라는 무기로써 진화론을 무조건 매도하고 있다. 진화론은 과학의 검증대상이지 신앙의 판단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창조는 원칙적으로 태초의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와 관련된 것이고, 그래서 신앙고백의 대상이지 과학에 의해 입증도 반증도 되지 않는다. 그 반면에 진화는 유(有)에서 유(有)가 발생하는 법칙 혹은 유(類)에서 유(類)가 발생하는 법칙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신앙되어져 온 '계속적 창조'(creatio continua)는, 어떤 형태의 진화론이 더 합리적인 것인가와는 상관없이, 차라리 진화론적 창조관과 더 잘 조화된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과거의 선행적 조건이나 원인 없이 갑작스레 발생하지 않는다. 물론 인과론이 무너지거나 인과론으로 설명될 수 없는 영역이 있음도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연속성이 불연속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듯이, 불연속성도 연속성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절대적 불연속성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창조설화는 인간이 땅 혹은 흙에서 빚어졌다고 한다. 이처럼 인간은 그 유래상 땅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와 정성이 여기 작용했다고 한다(손으로 빚고 숨을 불어넣음). 이 설화는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는 질적으로 다른 고귀한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각별하게 강조하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아담)은 피조물인 땅(아다마)의 소산이자 그 열매이다. 그리고 땅과 인간 혹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성 혹은 연속성은 오늘 날 진화론의 패러다임이 아니고서는 달리 설명할 합리적 설명이 없다.

전통적인 창조론이 진화론을 반대하는 또 하나의 큰 이유는 진화론이 하나님의 창조행위 혹은 섭리를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진화론자가 무신론자는 아니며, 떼이야르는 경건한 카톨릭 사제이기도 했다. 진화는 결코 무신론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자연의 법칙을 규명하려는 학문일 뿐이다. 신앙의 자유는 여전히 남아 있다. 창조신앙에서 볼 때, 진화는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의 과정으로 수용될 수 있고, 이 때에 하나님은 진화를 통해 창조하는 분으로 고백될 수 있다. 자연법칙과 자유가 상반되는 것이 아니듯이, 창조와 진화, 하나님의 섭리와 피조물의 의지가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태초의 창조에 비해 계속적,진화적 창조는 하나님의 단독적인 행위가 아니라 피조물 안에서의, 피조물을 통한 하나님의 협동과 동반행위이다. 그러므로 계속적 창조에는 하나님의 자유와 함께 피조물의 자유가 열려 있다.

또 보수적 신학은 그 보수적 인간이해를 통하여 인간과 사회 전반을 매우 비관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종종 '열린 사회'의 적이 되곤 했다. 이 신학은 '위를 향해'(즉 하나님 혹은 피안적 천당으로) 열린 인간을 강조하면서도, '앞을 향해'(즉 인류의 미래와 이 땅에 오는 하나님의 나라로) 열린 인간은 매우 억눌러 왔다. 그리하여 이 신학은 결국 '위'(초월)에 대한 불신을 조장해 왔다(칼 맑스의 종교-하늘비판: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인간의 절망적 죄성과 그 비극적,구조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역사에 개입하고 역사를 교정하는 하나님의 인내와 관용, 용서와 구원의 은총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으로 '은총의 낙관주의자'일 수 밖에 없다. 그럴진대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더욱 더 우주와 사회, 인간의 진화와 완성을 믿는 경건한 진화론자가 되는 데 아무런 모순을 느낄 필요가 없다. 떼이야르가 바로 그러한 자에 속한다. 그는 신앙과 과학을 아무런 모순도 없이 통일시키고, 우주적 진화와 종교적 구원을 아무런 역설도 없이 일치시켰다('우주적 그리스도'는 바로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의 핵심적 사상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그는 성서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과 진화의 비젼을 하나로 통일시켜서, 과학의 이름으로 종교를 불신하고 종교를 아예 미신 정도로 취급하는 현대인에게도 열려 있는 종교적 메시지를 남길 수 있었다. 그의 '열린 우주'와 '열린 인간'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념은 오늘 우리에게 인간과 우주에 대한 무한한 신앙적 경외감을 갖게 해 주었다.

물론 그의 진화론적 인간이해에도 문제점이 없진 않다. 진화론적 문명이해는 덜 진화된 문명 혹은 인간에 대한 도태를 정당화하거나, 무분별한 진보주의를 낳을 수 있다. 이리하여 약한 인간과 문명 혹은 자연이 인간의 진화론적 진보주의의 희생물이 되거나 그렇게 되도록 강요받을 운명에 처할 수 있다. 진화 혹은 진보라고 해서 모두가 다 선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예수는 만물의 진화의 완성자만이 아니라 만물을 갱신함으로써 만물이 그 목표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만물의 구원자이기도 하다. 만물의 구원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면 비역사주의에 빠질 수 있지만, 만물의 진화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면 밀림 속의 살륙, 생존투쟁(生存鬪爭)과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냉혹주의에 빠진다. 하나님은 진화를 통하여 만물을 구원하지만, 바로 구원을 통하여 만물을 진화시키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진화(만물의 진보)의 관념은 구원(만물의 완성)의 관념에 의해 보완되어야만, 기독교 신학 안에서 적절히 그 고유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진화의 관념은 구원이 초시간적, 일시적 사건이 아니라 기나긴 역사를 통과하는 시간 속의 사건임을 밝혀 준 구원사(救援史)의 신학을 자연으로까지 확대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기독교 신학 안으로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더욱 더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