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과정 중에 있는 인간

 

만물이 변화의 과정에 있다고 가르치는 과정철학도 현대학문 중에서 '열린 인간'의 창조에 기여하는 학문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과정철학이라는 용어는 특히 1902년과 1930년 사이에 영국과 미국에서 전개된 화이트헤드의 철학에 중심을 두는 특정한 철학학파에 한정되는 용어이다.과정철학의 핵심은 "과정이 곧 실재이다"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현실적인 것은 하나의 과정 중에 있고, 과정 중에 있지 않은 것은 충분히 성숙된 현실이 아니다.

과정철학도 대개의 서양철학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철학 특히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는 동시대의 사상가인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와는 정반대로 실재의 근원을 유동과 변화에 두었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는 '형성'에 선행하며, 모든 변화의 바탕에는 영속적이고도 근원적인 실재가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 철학의 기초와 형이상학의 시조가 되었고, 헤라클리투스의 사상보다 더 강력하게 서구사상을 지배해 왔다. 그에 반해 헤라클리투스는 존재, 실재 혹은 실체, 본질 등의 정적 개념보다 형성, 과정, 진화 등의 역동적 개념을 더 강조해 왔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우리는 동일한 강을 결코 두 번 건널 수 없다"는 문장 속에서 잘 표현된다.

과정철학의 대변자인 화이트헤드(A. N. Whitehead) 헤라클리투스의 사상과 함께 플라톤의 철학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비록 플라톤이 과정철학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사상과 과정철학은 일치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흔히 '유기체의 철학'이라고도 불린다. 왜냐하면 그의 철학은 실재의 상호관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깨달음에 의하면 실재란 복합체 즉 유기체이며, 이 복합적 통일체 내의 각 요소들도 역시 유기적인 단위를 이룬다. 그러므로 유기체의 개념은 모든 실재를 관계성과 통일성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시간적 과정은 한 현실재에서 다른 현실재로의 전이(轉移)와 합생(合生)이다. '전이'의 과정에 대한 강조는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시간은 불균형하게 과거로부터 현재를 통하여 흐른다. 그러기에 시간의 실재를 부정할 수 없으며, 시간이 순환한다는 교리도 인정할 수 없다. 모든 순간은 새로운 것이고 반복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다. '합생'의 과정에 대한 강조는 '영원한 현재'의 경험을 강조한다. 모든 순간은 하나의 현재이며, 이런 의미에서 무시간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합생의 순간에서 과정의 매 단위는 주체적인 직접성을 향유한다. 다만 매 단위의 합생이 완성되면, 그것은 다시 과거가 되어 새로운 과정 안에 놓이게 된다.

화이트헤드는 인간도 단일한 본질로 보지 않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속되는 현실 사태의 연속성으로 본다. 그는 전통 철학에 의해 개체적 본체로 여겨진 인간을 복합적이고 시간적 본성을 갖는 지속적 대상으로 본다. 그러나 지속적 대상이라는 개념도 실재에 대한 추상적 개념이지 실재 그 자체는 아니다. 실재 자체는 일련의 연속적인 현실 사태들이다.

과정철학은 한 편으로는 서구 문화의 원자적 개인주의와 고립주의에 반대하고, 독립성을 능가하는 이상으로서 만물의 상호의존성에 우월한 가치를 부여한다. 인간의 구체적인 경험의 순간들은 다른 경험들을 포함하고 그것들에 의존하는 만큼 더 풍부해진다. 인간은 다른 경험들에 대해 개방하면 할수록 더 깊은 실존의 향유를 경험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른 실재들과 분리되어 있는 존재로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구체적인 예가 인간의 '몸'이라는 실재이다. 몸은 추상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독립적 자아가 아니라 외계와 연결되어 있다. 몸이란 인간이 세계 안에 자리를 차지하며 세계의 일부를 이루는 방식이다. '영혼'도 시간 속에서 지속하다가 영원으로 돌아가는 어떤 본체적인 형상이 아니고, 자아를 규정짓는 조정 사태들의 연속체이다. 즉 영혼은 개인의 경험들의 조정된 흐름, 생명의 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정철학은 다른 한 편으로는 지속적인 인격적 존재의 특징으로서의 윤리적 독립성, 현재의 자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책임도 여전히 인정한다. 인간은 선조로부터 인과적 영향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비록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진정한 회개와 전향을 일으킬 수 있다. 그는 미래를 선택할 수 있고, 그에 대한 책임을 경험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신학적으로 수용한 과정신학은 창조적이고 응답적이며 설득적인 사랑의 하나님을 강조함으로써, 전통적인 하나님의 개념 즉 불변하며 무감각한 절대자로서의 하나님, 지배적인 통제적 힘으로서의 하나님, 우주적 도덕가로서의 하나님, 현상의 묵인자로서의 하나님, 남성으로서의 하나님에 수정을 가한다. 그리고 과정신학은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응답적인 사랑에 열려 있는 영적 실존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을 강조한다. 즉 자신의 자아에 대한 책임감을 충분히 간직하면서도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에 대해 개방하는 삶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응답적 사랑에 대해 개방하는 자아는 자신의 죄에도 불구하고 용납됨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며, 자기집중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다른 사람들을 향해 사심없는 관심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정신학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열린 인간의 형태를 지원하고 공동체적 삶의 양식을 권장한다.

실재를 과정으로 보는 과정사상은 기독교의 하나님 신앙과 창조 이해와 일치하는 면이 넓다. 하나님은 창조와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활동하고 섭리하는 분이고, 만물을 새롭게 하는 분이라는 통찰은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핵심사항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세계를 창조하고 인도하는 분이라는 전통적 신앙고백은 하나님이 창조의 과정 안에서 피조물을 자신의 목표를 향해 설득하는 최종적 작용인(作用因)이라는 과정신학의 사상과 일치한다. 과정신학이 하나님을 이전의 세계 안에서 현실화되지 않았던 새로운 요소를 재현실화하는 분으로 보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중생(重生) 혹은 신생(新生)의 가능성, 궁극적인 새로움, 부활의 가능성을 믿는 기독교 신앙과 일치한다.

과정신학의 하나님은 자유와 피조물의 자기-창조성을 위한 여지를 열어 주는 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설득적 사랑에 힘입어서 끊임없는 창조적 변화, 새로운 가능성의 현실화를 위해 활동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순수 보수주의자는 우주의 본질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것이다"(화이트헤드). 이것은 창조의 보존과 갱신, 문화적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위임(委任),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제자로서의 삶으로 부르는 그리스도의 소명(召命), 피조물의 창조와 재창조(거듭남)를 위해 활동하는 성령의 역사(役事)에 대한 신앙과 일치한다.

그러나 과정신학이 '무로부터의 창조'를 부인하는 것, 하나님에게 악(惡)에 대한 책임의 일부분을 돌리는 것, 주체의 불멸(영생, 부활)이 아닌 주체의 영속적 소멸과 객체의 불멸을 믿는 것 등은 기독교 신앙과 조화시키기 어려운 부분이다. 아마도 이것은 과정사상이 과학적 통찰에 근거한 탓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과정신학은 진화론적 신학과 더불어 과학의 시대에서 과학적 사고와 삶의 양식을 추구하는 현대인에게 과학적 패러다임을 빌려 '열린 마음으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학으로 하여금 '열린 인간'을 창조하고 고무하도록 자극하고 고무한다. 그러므로 과정신학적 인간이해는 '열린 인간'의 한 유형으로서 신학을 설득하고 신학의 창조적 변형에 기여하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