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철학적 인간학

 

'철학적 인간학'(哲學的 人間學)이란 인간에 관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학'이라는 용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1596년에 최초로 '인간학'이라는 제목 아래 저서를 내놓은 자는 프로테스탄트 인문주의자인 카스만(O. Casmann)이다. 이것이 18, 19세기부터 생물학, 인종학, 민속학의 분야로 발전되었고, 19세기 후반부터는 인류학이 첨가되어 오늘 날에 이르러 이와 같은 분야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용어가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과 인간이 우주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가장 포괄적으로 연구하는 분야는 종교적 인간학 혹은 철학적 인간학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철학적 인간학은 이전의 생물학적, 물리적 인간학과 구분된다.

1. 막스 쉘러

20세기의 철학적 인간학의 시조(始祖)로서 지속적이고도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자는 막스 쉘러(M. Scheler, 1874-1928년)이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 니체, 베르그송, 딜타이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지만, 그의 철학에 큰 영향을 준 자는 현상학(現象學)의 대변자요 그의 스승이기도 한 훗썰(E. Husserl,1895-1938년)이다. 그의 철학적 인간학의 기본사상을 보여주는 책은 사망 몇 주 전에 쓰여진 소책자 '우주 안의 인간의 위치'(Die Stellung des Menschen im Kosmos, 1928년)인데, 비록 이 책은 100 페이지에도 미달하는 작은 책자이지만, 그의 유일한 철학적 인간학의 저서로서 현대의 철학적 인간학을 탄생시켰고, 그 이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 기념비적 명저가 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서양의 인간론의 바탕을 이루는 세 가지의 이념으로서 유대교적, 기독교적 인간이념(하나님의 피조물, 죄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상)과 고대 그리스적 인간이념(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상) 그리고 현대의 인간이념(진화론에 근거한 자연과학적 인간상)을 들고, 이 세 가지 유형의 인간학이 서로 아무런 공통점이나 상호보완적 성격을 지니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인간에 관한 통일된 관념을 갖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새롭게 규명하기 위한 야심찬 시도를 감행했다. 그는 한 편으로는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비교함으로써 자연체계적 개념에서 본 인간상을 규정하려고 시도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다른 생명체와는 달리 인간에게만 특수한 위치를 부여하는 본질적,철학적 개념에서 본 인간상을 규정하려고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그는 생명체의 심적인 세계의 여러 단계를 나누었다. 즉 그는 외적인 관찰의 대상으로서는 객관적 현상으로 나타나지만 내적으로는 마음(정신, 영혼)으로서 표현되는 생명체의 주관적,자각적 현상의 단계를 네 단계로 나누었다.

1) 최하의 첫 심적인 단계로는 식물의 본질을 이루는 무의식적,무감각적,무관념적 '감정충동'(感情衝動)이 있다. 이 단계에서는 감정과 (영양적, 성적) 경향성, 목표성이 아직 분명히 구별되지 않는다. 이것은 예를 들면 광선에 대한 식물의 반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반응은 항상 동일한 것이지만, 아무런 감각, 연상작용, 조건반사도 없다. 그래서 식물은 기억능력, 학습능력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 동물의 감정충동은 식물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성장과 생식을 위한 일반적 충동이다. 감정충동은 인간에게도 존재하고 있다. 모든 충동과 일시적 감정의 통일체를 의미하는 인간의 충동은 뇌수 계통에 자리잡고 있고, 일차적으로는 저항의 체험으로 나타난다.

2) 둘째의 심적인 단계는 '본능'(本能)이다. 이것은 무의식적,무감각적,무관념적 감정충동에 뒤따르는 두 번째의 심적인 본질의 형식으로서 하등동물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 본능의 특징은 의미-목적 지향성(자신이나 남의 완전함과 유익, 특정 목적에 합당함), 주기성(週期性), 반복성(유형적으로 반복하는 상황들만을 향해 관여하면서 언제나 종에 유용한 구실을 함), 유전성(경험과 학습에 의해 습득되거나 전문화될 수 없음)에 있다.

3) 셋째의 심적인 단계는 '연상기억'(聯想記憶)이다. 이것은 동일한 행동의 횟수에 의존하여 이전의 행동에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개변하여 가는 능력으로서 모든 동물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행동개변(行動改變)은 생활에 적합한 방식으로, 기교적으로, 서서히 그리고 끊임없이 일어난다. 이런 능력은 습관에 의해 획득되고 전문화될 수 있으며, 파블로프(I. P. Pavlov)가 발견한 '조건반사'(條件反射)라는 기억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기억의 원리와 모방과 모사(模寫)라는 두 현상들 간의 연관에 의하여 전통(傳統)이라고 일컫는 것이 비로소 생겨나는데, 일회적이고 개인적인 체험의 사건을 자각적으로 상기하고 다수의 상기작용들을 상호 간에 동일한 것으로 끊임없이 확인해 나가는 능력은 인간에게만 있는 고유한 능력이다. 그리고 연상의 원리는 본능과는 달리 개체의 생명체를 종적 예속성(種的 隸屬性)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생명을 풍요하게 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 즉 본능으로부터 해방된 충동은 쾌락의 원천이 된다(자위행위의 예). 그러나 생명의 기쁨이나 정신적 기쁨보다 순전히 기능적, 상태적, 감정적 쾌락을 더 지향하는 생활태도는 개인과 민족의 노후현상을 드러낸다. 하지만 인간은 정신적 쾌락과 기능적 쾌락을 구분하는 가능성을 동물보다 더 크게 갖고 있기 때문에, 비록 동물 이하의 상태로 떨어질 순 있어도 결코 하나의 동물일 수는 없다.

4) 넷째의 심적인 단계는 '실천적 지능'(實踐的 知能)이다. 이것은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여 이전의 행동의 횟수와는 상관없이 갑작스럽게 의미있는 행동을 하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연상기억과 구분된다. 이것은 선이나 복리를 다른 것보다 더 나은 것으로 선택하는 능력, 생식의 과정에서 동족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능력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러한 실천적 지능은 갑적스럽게 솟아오르는 통찰, 생산적,창조적 사유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동물(침팬지)에게도 아주 단순한 지능적 행동이 있다고 보는 자가 있는 반면에(W. Köhler), 동물에게는 기억과 본능 외에는 아무 것도 없고 지능은 인간의 전유물이라고 보는 자들도 있지만, 몇 개의 경우에는 동물에게도 부정할 수 없는 지능적 행동이 있다(동물들의 매장행위, 쾌적한 것보다 유용한 것을 택하는 우선적 선택능력, 선물, 융화, 우애와 같은 요소들).

이처럼 생명체의 심적인 현상의 제 단계를 구분한 쉘러는 이제 '우주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를 탐색한다. 동물도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인간도 다만 양적으로만 동물과 차이가 있을 뿐이지 질적으로는 동물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존재인가? 아니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동물과 차이점을 갖는가? 쉘러에 의하면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점은 단지 지능과 선택능력에 있지는 않다. 인간의 본질과 특수한 위치는 그보다 더 높은 단계에 있다. 즉 인간이 동물과 본질적으로 차이점을 갖도록 하는 새로운 원리 즉 미지수 X가 존재하는데, 이것을 쉘러는 정신(Geist) 혹은 인격(Person)이라고 부르고 있다.

정신 혹은 인격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쉘러에 의하면 모든 종류의 명령, 압박, 의존성, 구속성으로부터의 해방에 있다. 쉘러는 이것을 '세계개방성'(世界開放性)이라고 부른다. 동물은 충동과 환경 즉 세계에 고착되어 있는 반면에, 인간은 무제한적으로 세계로부터 벗어나 개방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는 환경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다. 식물과 동물은 자기의식이 없고 자기를 소유하거나 지배하지 못한다. 그 반면에 인간은 정신집중, 자기의식, 대상화의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 쉘러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집중, 대상화의 능력은 세계의 한 부분이 아니라 세계 밖에 있다. 정신 혹은 인격은 생명의 진화에 근거해 있지 않고, 오로지 만물의 최고 원인인 신(神) 자체에 근거해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자신과 이 세계를 초월할 수가 있는 것이다.

쉘러는 자연과학적 인간상과 그리스적 인간상과 기독교적 인간상을 통일시키고 종합한 인상을 준다. 그는 이 세 가지 인간상을 생명체의 심적인 현상의 도식 안에서 다같이 수용하면서도, 자연주의적, 동물적 인간이해로부터 시작하여 합리주의적, 이성적 인간이해를 거쳐 초이성적, 신앙적 인간이해로 진화하는 인간상을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는 충동적인 존재(식물)로부터 시작하여 본능적인 존재(하등동물)와 연상기억의 능력과 실천적 지능을 갖는 존재(고등동물)를 거쳐 이 모든 것을 지니면서도 이것을 벗어날 수 있는 정신적, 인격적 존재(인간)로 진화하는 인간상을 대변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기독교적 인간상에 도달한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전통적인 제 인간이해를 상호 보완하고 통일시킬 수 있는 하나의 의미있는 인간상을 제시했다. 그래서 그가 실증주의적 관점으로부터 출발하여 초실증적 영역 즉 인격과 정신의 영역에까지 이르는 폭넓은 인간상을 제시한 점은 인간학의 분야에서 그가 남긴 독특한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도 결국에는 인간을 무한히 '열려 있는' 존재로서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그의 '세계개방적 존재로서의 인간이해'는 앞 장에서 설명한 '진화론적 인간이해'와 '과정신학적 인간이해'와 함께 '열려 있는 인간'을 지원하고, 그래서 기독교의 인간이해를 지원한다. 기독교는 이러한 인간이해를 선교를 위한 '접촉점'을 설정하는 단초만이 아니라 질문(열림)과 대답(계시)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단초로서도 수용할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런 철학적 인간학은 기독교적 인간이해의 인식의 지평을 확대시키는 데에도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다시 부연해서 말하자면, 열린 정신적,인격적 존재로서의 인간이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기독교적 인간이해와 접촉하고 질문-대답의 구조 안에서 후자와 관련맺으며, 또 후자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해석학적 패러다임으로 활용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쉘러는 때로는 식물과 동물을 과대평가하거나 인간을 과소평가한 점 외에도, 인격의 개념을 너무 추상적으로 설명하거나 인격을 신적인 본성을 갖는 것으로까지 지나치게 절대화한 점은 비판의 여지를 남긴다. 그리고 그가 최종적으로 신의 영역 안으로까지 인간이해를 확장시킴으로써, 인간의 특수성과 존엄성을 한없이 높여 놓았다고 하더라도, 그가 이해한 신은 초기와는 달리 사물 이전이나 그 후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사물과 함께 있는 신이다. 즉 이 신은 영원히 세계를 현실화하는 가운데 존재하는 신, 미완성의 신, 생성되어 가는 신이다. 그리고 신이 생성되는 유일한 장소는 인간, 인간의 자기의식이다. 그러므로 이 신은 대상화할 수 없는 신이다. 따라서 여기서 유대교적, 기독교적 인격신론은 무너지고 신비주의적 범신론(汎神論) 혹은 만유유심론(萬有唯心論)만이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무로부터의 창조' 신앙도 무너진다. 신의 생성은 인간에 의존하고 인간은 신의 생성에 의존한다는 쉘러의 사상은 헤겔의 사상보다 더 철저히 세계내재적이다. 여기서 신도 결국에는 시간의 생성물이 되고 말며, 신을 생성시키는 시간 외에는 절대적인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셈이 된다.

2. 헬무트 플레쓰너

헬무트 플레쓰너(Helmuth Plessner)는 그의 책 '유기체의 제 단계와 인간'(Die Stufen des Organischen und der Mensch, 1928년)에서 쉘러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게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려고 했다. 그의 인간학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개념은 '탈중심성'(脫中心性)이라는 개념이다. 그에게도 '정신'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진 않지만, 이것 대신에 그리고 이것을 나타내는 다른 이름으로서 바로 '탈중심성'이라는 개념이 중심에 차지한다. 즉 그에 의하면 인간은 탈중심적 위상을 갖는 존재이다. 고등동물은 식물과는 달리 생명표현의 중심을 그 자신에게서 갖고 있다. 이 중심은 진화의 과정 속에서 중심적인 생명조직을 점차로 발전시켜 나가면서 더 강화된다. 그 반면에 인간은 이 중심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도 넘어선다. 즉 그는 자신의 중심을 자신 안에서만이 아니라 자신 밖에도 가진다. 동물의 생명이 중추적(中樞的)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이 중추성을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서 탈중추적이다.

이런 설명을 통해서 플레쓰너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거리를 갖고서 입장을 취하는 능력, 자기반성(自己反省)의 능력을 갖고 있음을 지적한다. 즉 인간의 중심은 그 자신으로부터 구별하고 자신과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전적으로 자신을 반성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이 제 2의 중심은 '순수자아' 혹은 '대상화될 수 없는 자아'이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을 소유하고 인식하며 체험할 수가 있다. 그 반면에 동물은 주위 영역과 자기 신체를 지배하고 체험하며 자기를 형성할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을 체험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동물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제 2의 중심, 순수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플레쓰너는 이 순수자아의 근원을 생명 밖의 어떤 원리 즉 신에게서 찾지 않는다. 즉 그는 모든 생명에 대립되어 있는 독자적이고 자립적인 원리를 끌어오지 않는다. 그에게서 탈중심은 인간의 진화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생명 자체의 구조적 수정이다.

탈중심성은 생명권을 이탈하여 그것과 마주 설 수 있는 인간 특유의 존재방식이다. 이 탈중심적 위상에서부터 인간을 볼 때, 인간은 삼중적 위상(位相)을 갖는다. 즉 그는 하나의 생명체로서는 '신체'요, 신체 속에서는 내면적 생명 즉 '마음'이요, 신체 밖에서는 양자(신체와 마음)와 관계를 맺는 '정신'이다. 이 삼중적 위상에 상응하여 인간은 세개의 세계를 갖는다. 즉 신체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물(物)의 세계로서 외계(外界)요, 마음은 신체 속의 세계로서 내계(內界)요, 정신은 인간 특유의 탈중심적 위상형성에 의해서 형성되고 존립하는 정신의 세계로서 공동세계(共同世界)이다. 그런데 정신은 인간의 탈중심적 위상형성에 의해서 성립하므로 양면성, 대립성 혹은 역설성(逆說成)을 나타낸다. 즉 정신은 세계 속에 있으면서도 세계와 대립하며, 자신 속에 있으면서도 자신과 대립하며, 주관이면서도 객관이다. 그리고 인간의 탈중심적 위상으로 인하여 인간은 다른 생물과 다른 법칙 속에서 산다.

1. 자연적 인위성(人爲性)의 법칙: 다른 생물은 그의 생물학적 중심 속에 완전히 몰입되어 있으나, 인간의 존재방식은 그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본성적으로 인위적인 삶을 지향하도록 규정된 존재이다. 즉 그는 다른 동물들처럼 자연적인 모습 그대로 직접적으로 살아갈 수 없고 인위적인 수단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살아야 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탈중심적 위상으로 인하여 인간은 균형이 잡혀 있지 않고, 시간적, 공간적 자리가 없으며, 구조상 고향이 상실되어 있으므로, 스스로 균형을 유지해야 하고, 그 무엇으로 되어 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문화적 존재가 된다.

2. 매개된 직접성(直接性)의 법칙: 동물은 그의 위상적 중심 속에 몰입되어 있으므로, 그의 삶은 직접적인 것이요 따라서 그 무엇에 의하여 매개된 것이 아니다. 그 반면에 인간은 그의 삶의 중심에서 이탈한 탈중심적 존재이므로, 그의 삶은 자기 바깥에 놓여 있는 점 즉 탈중심적 중심에서 의식되고 매개된 것이다. 인간의 문화적 창작활동은 바로 이런 법칙으로부터도 설명될 수 있다.

3. 유토피아적 입장의 법칙: 인간은 자신의 구조적 무근저성(無根低性) 즉 탈중심성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해 공허감을 품게 된다. 인간은 이런 공허감 속에서 자신의 일면성, 개별성, 이 세계의 개별성을 의식한다. 이리하여 그는 현존재 전반의 절대적 우연성을 통절하게 의식하게 되고, 이것을 통하여 인간은 결국에는 그 자체 속에 머물러 있는 필연적 존재 즉 절대자, 세계근거 혹은 신의 관념에 도달한다. 인간의 종교는 바로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설명될 수 있다. 종교는 자연과 정신이 인간에게 줄 수 없는 것 즉 궁극적인 것을 인간에게 가져다 준다. 즉 종교는 인간에게 궁극적 결속과 공속, 아늑함, 운명과의 화해, 삶과 죽음의 처소, 세계관, 고향을 가져다 준다. 결국 인간은 그 구조적 탈중심적 위상성으로 인하여 신앙을 필요로 하는 존재, 유토피아를 바라보고 동경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플레쓰너 쉘러가 '정신'이라는 개념으로 다소 모호하고 종교적으로 설명했던 내용을 '탈중심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그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탈중심성'의 개념도 쉘러의 '세계개방성'의 개념과 거의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그에게서도 정신은 자기집중의 능력과 함께 세계와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에게서도 인간은 다른 생물과 다른 독자적이고 특수한 위치를 부여받는다. 그도 인간을 구조적으로 '열린 존재'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쉘러의 인간이해를 물려받고 있다.

단지 쉘러에게서는 인간정신의 세계개방성이 세계 안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되어 가는 신(神) 안에 근거하고 있다면, 플레쓰너에게서는 인간정신의 탈중심성이 이런 초월적, 자립적 원리에 근거해 있지 않고 인간생명의 자체적 구조수정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왜 자신의 생명에게도 대립될 수 있고 해가 될 수 있는 이런 구조적 수정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인간은 왜 동물적인 생명을 초월하여 새로운 진화를 감행했는지 그 이유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이 부족하다. 그에 반해 쉘러에게서는 인간생명의 이러한 자기초월은 인간 안에서 영원히 생성되어 가는 초월적 신의 자기운동 안에 근거해 있다. 그러나 플레쓰너에게서는 인간의 탈중심적 위상이 필연적으로 형성되고 존립되는 기반이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쉘러에게서는 비록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도 훨씬 더 발전된 중심적인 신경조직을 갖추면서 자기집중의 능력을 점차로 강화시켜 왔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자신 안에서의 신의 영원한 생성 아니 신 안에서의 인간의 영원한 생성을 지향하고 있다. 즉 인간의 궁극적 특성은 동물에 반해 본질적으로 세계-자기초월(개방)적이다. 그러나 플레쓰너에게서는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탈중심적 중심을 갖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자기중심성과 탈중심성의 상호관계도 모호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가능한 한 종교적 전제(A poriori)를 버리고 철저히 실증주의적 관점(A posteriori)을 시종일관 유지하려는 태도에 있는 것 같다. 이에 대해서는 겔렌의 설명을 들어보는 것이 유익할 것 같다.

3. 아놀트 겔렌

아놀트 겔렌(Arnold Gehlen)은 그의 책 '인간 - 그의 본성과 세계 안의 위치'(Der Mensch - seine Natur und seine Stellung in der Welt, 1940년)에서 현대적인 철학적 인간학을 대표하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특히 네델란드의 해부학자 볼크(Ludwig Bolk)의 영향을 받아 인간을 '결함을 지닌 존재'(Herder의 용어임)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인체의 여러 기관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특성들은 하나의 정체현상을 빚고 있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태어날 때부터 이미 모든 면에서 미숙하고 의지할 곳이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외부환경의 공격에 방어할 수 있는 본능을 갖지 않기 때문에, 즉 인간의 본능이 저지되거나 퇴화되었기 때문에, 결함을 지닌 존재일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인간에게는 본능의 저하, 제약 대신에 지각과 학습능력이 보상으로 주어져 있다. 결함을 보충하기 위하여 인간은 '세계개방성'을 갖는다(이런 의미에서 그도 쉘러의 '세계개방성'이라는 개념을 수용한다). 먼저 인간은 지각세계의 개방성을 갖는다. 인간의 감각기관은 무방비상태로 개방되어 있어서 세계 내의 온갖 지각가능한 것이 인간을 향하여 밀려오고 쏟아져 들어온다. 인간은 세계 내의 모든 지각요인에 대해서 개방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은 표상세계의 개방성을 갖는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표상(表象)의 힘에 의하여 세계의 제한을 벗어나 공간적으로 자유로운 세계, 풍부한 내용과 가능성을 지닌 세계에 관여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세계의 개방성을 갖는다. 세계도 이에 대응해서 무한한 풍부성, 가능성, 다양성, 개방성을 갖고 있다. 인간에게는 폐쇄적으로 규정된 본능도식이 없기 때문에, 세계도 무한한 가능성 속에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처음에는 세계개방성을 당혹감과 부담감 속에서 소극적으로 체험한다. 그러므로 그는 우선 세계개방성이 주는 부담을 감면해야 한다. 그 다음엔 인간은 생활에 부정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을 자신의 힘으로 긍정적인 조건으로 변화시켜 나간다. 인간의 본능적 결함을 보상하는 것은 특히 언어와 문화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문화를 창조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는 언어 속에서 상징적인 우주를 창조함으로써, 그에게 닥쳐오는 다양한 자극으로부터 벗어난다. 인간은 그의 세계를 극복함으로써, 자신을 창조한다.

쉘러에게서 인간의 정신, 인격이 최고의 존재근거인 신에서 기인한 반면에, 겔렌에게서 인간은 엄격한 의미에서 자기창조적이다. 이런 점에서 그도 플레쓰너와 같은 입장에 서 있다. 인간의 세계개방의 능력을 위하여 굳이 신이라는 초월적 근거를 끌어대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이나 종교도 단지 인간의 창조물, 세계극복의 부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예술과 마찬가지로 환상에 근거하고 있다. "신들의 세계는 단순한 오성의 대상도 아니고, 이성의 대상도 아니며, 오로지 환상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쉘링)는 것이다.

겔렌도 인간을 개방적 존재, '열린 존재'로 보는 점에서, 쉘러 플레쓰너의 노선에 서 있다. 그러나 그는 그 누구보다도 실증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을 통일적으로 고찰하여 철학적 인간학의 체계를 집대성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인간의 특수성을 견지해 나갔다.

그러나 그도 실증주의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록 인간의 세계개방성이 인간진화의 하나의 필연적인 궤도수정이라는 점을 용인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세계개방성이 인간의 본능적 한계라는 결함을 극복하기 위한 창조적 부산물이라는 점을 용인한다고 하더라도, 종교를 단지 인간학적 입장에서 인간의 상상물로만 보는 것은 종교의 본질을 다 꿰뚫어 보았다고 할 수는 없다. 실증학문의 입장에서 볼 때, 신은 어디까지나 가설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는 개념이기에 애당초 배제할 수 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신에 대한 신앙은 단순히 생물학적 기원에서만 완전히 해명될 수는 없다.

그리고 인간이 본능구조의 상대적 결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중심적인 본능체계를 더 강력히 발전시키려고 하지 않고, 왜 이를 보상하는 문화적 창조행위에 몰두하는가? 보상은 문제의 적극적 해결책이 아니고 소극적 우회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동물보다 더 비겁하고 무능한가? 왜 인간은 자신의 생물학적 가치마저도 넘어서서 예술과 종교에 몰두하는가? 예술과 종교는 인간의 부정적 결함을 긍정적인 요소로 바꾸어 놓으려는 시도라는 겔렌의 주장은 이런 질문 앞에서 그 적절한 대답을 제시하기 어렵다. 그렇더라도 그에게서 인간이 본질적으로 '위를 향해' 그리고 '앞을 향해' 무한히 열려 있는 존재임을 실증적으로 규명한 그의 이론은 기독교가 반갑게 여길 선교와 신학의 '접촉점'이지, 그 무신론적 경향 때문에 무조건 배척할 이론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