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동양적 인간이해

 

1. 불교의 인간이해

불교에서 보는 인간은 정지되고 고정된 어떤 실체로서의 인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불성(佛性)을 내포한 존재이다. 단지 이 불성이 인간조건이라는 무명(無明)에 의하여 가리워져 있기 때문에, 선입견과 편견으로 짜여진 지금의 나의 고정관념을 마치 인간의 참된 모습으로 오해하는 데서 진실한 불성이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불성도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다. 불성은 중도(中道)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이렇다 하고 집착하자마자, 불성은 상실된다. 인간에 대해서도 이렇다 저렇다는 인간의 속성을 고집한다면, 이미 인간성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인간성의 무한능력을 인정하고 일체의 것에 대한 고정된 생각을 일단 부정하는 데서 참다운 인간성이 드러난다. 불교는 이러한 인간성의 구체적인 모습을 청정자성(淸淨自性), 자재(自在), 편만(遍滿) 등의 용어로 설명해 왔다.

열반경(涅槃經)은 불성의 네 가지 덕을 상(常), 낙(樂), 아(我), 정(淨)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떠한 실체가 아니다. 우리의 본성이 언제나 있고 즐겁고 변함없고 깨끗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성은 우리의 집착과 그로 인한 무명에 의하여 은폐되어 마치 현상에 나타난 모습 그대로를 진리인 양 착각함으로써 불성인 진리 자체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종교로서의 불교는 규범의 현실을 통하여 도덕적 인간성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현실적 고뇌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라는 인생론적 입장에서 인간성을 해명하고 있다. 특히 불교는 현실의 차별상의 다양한 인간존재의 양상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미 인간에게는 더럽고 추잡한 면이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 즉 인간이 아닌 타자인 초월자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인간적 조건에 의하여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진 무명에 의하여 일어난 가상(假相)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자아의 자주적 주체성을 강조한다. 인간이란 무제한적 능동성을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무한자재(無限自在)의 불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宋錫球, 佛敎의 人性論(大乘起信論을 중심으로)

* 성철스님 법어집(1집 7권) "자기를 바로 봅시다"(장경각, 1987) 참조

"선악의 시비는 허황한 분별이요, 현실의 참 모습은 영원하고 무한한 절대진리 위에 서 있습니다. 모순과 갈등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으며, 평화와 자유로 수놓은 행복의 물결이 항상 넘쳐 흐르는 탕탕무애한 광명이 가득 차 있습니다."(9)

"고통은 아주 없고 행복만이 꽉 찼으니 극락, 천당 빛을 잃고 부처님도 할 말이 없습니다... 성인과 악마는 부질없는 이름이니, 공자와 도척이 손을 맞잡고 태평성세를 축복합니다...대립과 투쟁은 사라지고 평화만이 넘치는 이 세계를 눈을 들어 역력히 바라보며 함께 찬양합시다."(13)

"일체의 본모습은 유무를 초월하고, 유무를 포함하여 물심이 융화하여 피아(彼我)가 상통합니다."(14)

"악하다 천하다 함은 겉보기뿐, 그 참모습은 거룩한 부처님과 추호도 다름이 없어서, 일체가 장엄하며 일체가 숭고합니다."(18)

"인간은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 오셨습니다."(19-20)

" 중도(中道)가 부처님이니 중도를 바로 알면 부처님을 봅니다. 중도는 중간 또는 중용(中庸)이 아닙니다. 중도는 시비선악 등과 같은 상대적 대립의 양쪽을 버리고 그의 모순, 갈등이 상통하여 융합하는 절대의 경지입니다. 시비선악 등의 상호 모순된 대립, 투쟁의 세계가 현실의 참모습으로 흔히 생각하지만 이는 허망한 분별로 착각된 거짓 모습입니다...시(是)가 즉 비(非)요, 비가 즉 시이며, 선악이 융합하여 선이 즉 악이요, 악이 즉 선이니 이것이 원융무애한 중도의 진리입니다...만법이 혼연융합한 중도의 실상을 바로 보면, 모순과 갈등, 대립과 투쟁은 자연히 소멸되고 융합자재한 일대단원(一大團圓)이 있을 뿐입니다.. 대립이 영영 소멸된 이 세계에는 모두가 중도 아님이 없어서 부처님만으로 가득 차 있으니..."(21-22)

"일체 만물은 서로서로 의지하여 살고 있어서, 하나도 서로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이 깊은 진리는...연기(緣起)의 법칙이니 만물은 원래 한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물과 불은 상극된 물체이지만, 물과 불을 함께 조화롭게 이용하는 데서 우리 생활의 기반이 서게 됩니다."(23)

"천지가 한 뿌리요, 만물은 한 몸이라. 일체가 부처님이요, 부처님이 일체이니 모두가 평등하며 낱낱이 장엄합니다."(27)

"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 이름일 뿐 본모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습니다...일체의 불행과 불안은 본래 없으니 오로지 우리의 생각에 있을 뿐입니다.. 선과 악으로 모든 것을 상대할 때 거기서 지옥이 불타게 됩니다. 선악의 대립이 사라지고 선악이 융화상통할 때 시방세계에 가득히 피어 있는 연꽃을 바라보게 됩니다."(29-30)

"보통 보면 선과 악이 서로 대립되어 있는데, 불교의 중도법에 의하면 선악을 떠납니다. 선악을 떠나면 무엇이 되는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그 중간이란 말인가? 그것이 아닙니다. 선과 악이 서로 통해 버리는 것입니다. 선이 즉 악이고, 악이 즉 선으로 모든 것이 통합니다."(44)

"헤겔의 변증법에서는 모순의 대립이 시간적 간격을 두고서 발전해 가는 과정을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모순의 대립이 직접 상통합니다...그렇게 되면 이것이 극락이고, 천당이고 절대세계다 그 말입니다."(46)

"아무리 좋은 보물도 깨끗한 거울 위에서는 장애가 되고, 거울 위에 먼지가 쌓일수록 거울이 더러워짐과 같이 지식과 학문이 쌓일수록 마음의 눈은 더욱 더 어두워집니다... 허공보다 깨끗한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마음의 눈을 활짝 열고 이 광명을 뚜렷이 바로 봅시다."(12)

"끊임없는 욕심에 눈이 가리워 항상 빛나는 본모습을 보지 못하고 암흑세계를 헤매며 엎치락뒤치락 참담한 비극이 계속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입니다."(14)

"현대는 물질만능에 휘말리어 자기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큰 바다와 같고 물질은 거품과 같습니다. 바다를 봐야지 거품은 따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20)

"착각된 허망한 분별인 시비선악 등을 고집하여 버리지 않으면 상호투쟁은 늘 계속되어 끝이 없습니다...시비선악의 양쪽을 버리고 융합자재한 이 중도실상을 바로 봅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원한 휴전을 하고 절대적 평화의 고향으로 돌아 갑시다."(21-22)

"불교에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절대로 구원이란 없습니다... 모든 존재가 전부 부처고, 모든 처소가 다 정토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사바세계가 있고 중생이 있는가?...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우주법계 전체가 부처 아닌 존재 없고 전체가 불국토 아닌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르고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내가 중생이다', '여기가 사바세계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84-86)... 자기가 본래 부처이지만 눈감고 있으면 캄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눈을 뜨겠느냐 이것입니다...가장 쉬운 방법이며 제일 빠른 방법이 참선(參禪)입니다. 화두(話頭)를 배워서 부지런히 부지런히 참구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방법이 또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눈을 무엇이 가리고 있어서 캄캄하게 되었는가?... 불교에서는 그것을 탐(貪), 진(瞋), 치(癡), 삼독(三毒)이라고 합니다.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이 삼독이 마음의 눈을 가려서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인 여기에서 중생이니 사바세계니 지옥을 가느니 하는 것입니다...그 삼독 중에서도 무엇이 가장 근본이냐 하면 탐욕입니다...탐욕만 근본적으로 제거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자연적으로 뜨이게 되는 것입니다.

탐욕은 어떻게 하여 생겼는가? '나'라는 것 때문에 생겼습니다...'나'라는 것이 중심이 되어서 자꾸 남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세상은 전부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나를 위해 남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지만, 불교는 '나'라는 것을 완전히 내버리고 남을 위해서만 사는 것입니다."(88-91)

참조: 모든 사람이 다 부처님이다 - 선가의 신행이론을 통해본 인간관 (pdf 파일)

 

2. 성리학의 인간이해

성리학(性理學)은 심성(心性)의 수양을 과거 어느 유학보다도 철저히 하면서 동시에 규범법칙과 자연법칙으로서의 이(理) 또는 성(性)을 깊이 연구하여 그 이(理)의 의미를 완전히 실현하려는 유학 중의 하나이다. 한마디로 성리학은 종래의 유학을 형이상학적으로 재구성, 발전시킨 것으로서, 사상적으로는 도교 특히 불교의 영향을 받고 그 영향을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발흥하였다. 그래서 성리학은 불교적인 사상체계와 닮은 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주희(朱憙)에 의해 집성된 성리학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근거하여 인간을 설명한다. 주자는 만물과 인간의 기원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존재구조와 우주의 존재구조는 동일하다는 분석이 된다. 이는 인간윤리의 근거를 우주생성론에 두는 매우 정교한 사유체계이다. 인간존재는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理와 氣의 종합을 통해 이루어진 존재인 것이다. 이 때 理로 인해 '本然之性'이 생기고 氣로 인해 '氣質之性'이 생긴다. 인간의 마음은 이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본연지성이란 만물에게 보편적으로 부여된 공통적인 것이고, 순선(純善)한 것이다. 이에 반해 기질지성은 사물마다 타고 나는 정도가 달라서 不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인간은 다른 사물들보다 뛰어난 기질을 타고 난 까닭에 가장 신령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주자의 성리학이 조선에 도입되기 시작한 때는 고려 충렬왕(13세기 후반)이지만, 본격적으로 이론적인 탐구가 전개된 때는 16세기이다. 가장 대표적인 학자는 퇴계 이황(1501-1570)이다. 퇴계의 인간이해도 '理氣二元論'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자의 인간이해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양자는 모두 物我一體觀的 입장에서 인간과 사물의 구조의 존재구조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다. 퇴계도 인간을 존재원리로서의 理와 심신의 구성요소로서의 氣가 종합되어 있는 존재로 파악한다. 즉 인간도 하나의 존재로서 氣를 받아 태어날 때 당연히 원리로서의 理를 내재적으로 가지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며 이는 순수하고 지선하다. 따라서 본성이 그대로 발동하여 情이 된다고 하더라도, 이 정에는 불선이 없다. 이것을 일컬어 퇴계는 '四端의 情'이라고 한다. '四端의 情'이나 '七情의 情'이나 理와 氣가 조화를 이루는 본래의 모습은 선하다. 다만 그것이 발할 때 서로 中絶을 지키지 못하고 균형을 어그러지게 되어 불선이 된다. 그러므로 항시 理와 氣가 어그러지지 않도록 마음을 잘 다스려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퇴계의 수양론의 핵심을 이루는 '敬'이다.

그런데 주자와 퇴계에 의하면 氣의 조화에 따른 현실적인 차별이 선천적으로 인간 안에 내재해 있기 때문에, 이 차별은 인간을 등급으로 나누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인간이해는 신분중심적인 사회를 인정하는 지배이념을 제공하였다.(李滉, 聖學十圖, 韓國思想全集 2, 韓國의 儒學思想, 삼성출판사, 1981.)

3. 민간신앙의 인간이해

민간신앙은 고도의 학문적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분명한 인간이해를 내세우고 있지는 않다. 단지 무속, 풍수, 도참, 점복, 예언 등의 저변에 깔려 있는 세계관을 토대로 이것들의 인간이해를 살펴 볼 수 있을 뿐이다.

먼저 민간신앙의 기본적인 세계관은 '天人相與'라고 하는 유기체적인 세계관이다. 즉 자연과 인간은 서로 감응하는 존재이며, 인간은 이러한 세계 속에서 인생의 행복을 축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현세성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민간신앙의 성격은 성리학의 현실중시사상과 일치하는 점이 있게는 하지만, 자연과 인간은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힘들에 의해 운영된다고 보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성리학과 갈라서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이 초월적인 힘을 주술 등과 같은 종교적 의례에 의해서 장수와 부귀영화, 안락한 생활을 보장해 주도록 할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자연계와 인생계를 움직이는 초월적인 힘들을 인간에게 유리하도록 조정할 수 있다는 사고는 민간신앙의 세계관이 '天地人三才思想'의 연장선 상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민간신앙의 인간이해는 기본적으로 자연과 인간을 연속선 상에서 파악하는 유기체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교와 비슷하지만, 대상적인 존재들로서의 신령을 신앙하고 공동체적인 도덕관보다는 개인의 안락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교와 차이가 난다.

민간신앙이 갖는 사회적 기능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규범문화인 유교문화가 갖는 종교적 약점을 보충하며 사회구성원들의 불안요소를 해소시켜 줌으로써, 사회를 안정케 하는 순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피지배계급인 민중들의 현실도피적인 사상을 체계화하여 사회개혁적인 민중운동으로까지 발전하도록 도와주는 역기능이다.

(柳東植, 韓國의 民俗, 宗敎思想, 삼성출판사, 한국사상전집 4,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