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기독교의 인간이해

 

1. 피조물로서의 인간

1. 우주 속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세계의 형상 : Imago mundi 로서의 인간)

구약성서의 창조기사에 의하면, 인간은 다른 모든 피조물들 중의 한 피조물로 나타난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인간은 주위의 다른 피조물(자연)에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 인간은 다른 피조물처럼 연약하고 사멸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인간(Adam)은 땅(Adama)과 결부되어 있고, 땅에 의존되어 있고, 땅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이다. 이처럼 인간은 철저히 자신을 다른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유한한 존재로 이해하며, 그들에 의존해서 살아야 할 존재로 이해한다.

그렇지만 창조는 특별한 시간의 순서를 갖는다. 즉 인간은 마지막 피조물이고, 하늘과 땅, 빛과 어두움, 땅, 식물과 동물은 인간의 창조를 준비하기 위해 창조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또한 최고의 피조물이기도 하다. 인간은 창조의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서 있으며, 창조자는 인간을 중심으로 삼아 세상을 인간의 거주지로 짓는다. 인간창조의 과정도 다른 피조물의 창조와는 다르게 장엄하고도 정성스러운 것으로 나타난다.

P기자의 창조설화에서 하나님은 인간창조를 위해 자기결의("∼ 하자")를 3 번이나 반복한다. 이것은 완전히 유례(유비)가 없는 창조활동을 나타내며, 이 점에서 우리는 인간의 유일하고도 독특한 우주 안의 위치를 확인한다(L. Scheffczyk).

그렇지만 인간이 창조의 목적이나 창조의 왕관은 아니다. 창조는 인간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 피조물이 하나님과 함께 인식하는 안식일을 위해 창조되었다. 안식일은 창조의 완성이요 왕관이다. 세계의 창조는 안식일, 곧 창조의 잔치, 전 세계의 구원, 영광의 나라를 지향하고 있다. 세계의 창조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세계의 메시야적 준비이다. 그러므로 창조의 내적인 근거는 하나님과의 계약(K. Barth)이 아니라 장차 올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이다.

그러나 안식일 이전에 인간은 하나님의 마지막 피조물로서 자기 안에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체현한다. 인간이라는 복잡한 체계는 삶의 진화의 보다 간단한 모든 체계들을 가지 안에 포함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다른 피조물들은 인간 속에 현존해 있다. 인간은 '세계의 형상'(Imago mundi)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모든 다른 피조물들을 대변한다. 그는 그들을 위해 살고 말하고 행동한다. 인간은 세계의 형상으로서 '제사장적인 피조물'이요 '성만찬적인 존재'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창조의 사귐을 책임진다(J. Moltmann). 창조물은 인간에게서 유일한 선물과 은혜이면서 동시에 의무와 과제이기도 하다(L. Scheffczyk).


2. 인간창조의 목적

인간이 창조된 목적은 무엇인가? 수메르와 바벨론의 창조설화에서는 인간이 창조된 목적은 '신들의 멍에를 메고 가기 위한' 것에 있다. 즉 신들이 매일 무거운 고역을 인간에게 지우기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아트라카시스 서사시'(The Atrachasis Epic)에서는 인간창조의 설화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매일 고된 노동의 책임을 진 하층계급의 신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들은 회의를 소집한 후, 인간에게 그 고역을 맡기기 위해 인간창조를 결정하였다. 그래서 신들은 고역의 멍에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인간창조를 축하했다. 수메르에서는 아주 고대로부터 대대적인 민중부역이 있었는데, 그것은 언제나 성전건축과 종교의식을 위한 것이었다. 인간은 바로 이런 부역을 위해, 신들을 섬기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바벨론의 아카드 제국의 창조설화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 제 6 편도 같은 내용을 전해준다 : 마르둑(Marduk) 신은 이렇게 말한다 : "내가 피를 모으고 뼈를 만들겠다. 내가 야만인을 창조하겠다. 그의 이름은 '사람'이라고 하겠다. 진실로 야비한 인간을 나는 창조하겠다. 그는 신들을 섬기는 책임을 맡을 것이다. 신들이 편안해지도록!"

그러나 P(제사)문서의 창조설화에서는 인간창조의 목적과 목표가 완전히 다르게 나타난다. 인간창조의 목적은 신들의 사건과 전혀 관련을 가지지 않으며, 땅과 지상의 사건과 관련맺고 있다. 즉 인간창조는 세계내적인 기능, 즉 세계성의 특징을 갖고 있다. 여기서 인간창조의 목적은 신들을 섬기는 일이나 신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 즉 인간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며, 모든 생명들을 다스리도록"(창 1:28), 즉 복을 받도록 지음받았다. 여기서 인간들은 신을 위해서 결정되었다기 보다는(수메르, 바벨론 설화) 하나님의 인간을 위해서(인간축복) 결정된 것으로 나타난다. 제사문서(성전건축과 성전제의를 강조하는 P기자)가 이처럼 인간창조의 목적을 성전건축과 예배행위에 제한하지 않고 전 인류와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그는 처음부터 인류역사의 안목에서 인간을 이해했고(창 10장에서 민족계보와 대조하며 한 민족의 역사를 제시함), 인간창조의 목적을 전 인류의 축복에 관련시킴으로써, 인간해방과 세속긍정의 의미를 부각시켰다(C. Westermann).

3. 인간의 기원(?)

성서는 우리에게 인간의 생성, 인간의 기원에 관한 자연과학적이고도 보편타당한 지식을 전달해 주는가? 만약 우리가 성서의 '창조설화'를 그렇게 이해한다면, 성서의 증언들을 오해하고 만다. 성서는 통일된 자연과학적 지식의 정보를 주려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래서 인간형성에 관해서도 통일된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 성서의 증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인류의 창조주이다"는 메시지(창조신앙)를 시대마다 다른 자연인식과 종합하면서, 자기의 동시대인들에게 새롭게 증언하려는 관심을 가졌다. 그러므로 성서의 창조설화들은 새로운 경험들을 통해서 수정되고 변화되는 '해석학적 과정' 속에 있다. 그것들은 세계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증언들로서, 세계를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새롭게 경험하도록 인도하며, 언제나 새로운 종합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 미래적 개방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성서는 창조에 대한 어떠한 교리(도그마티즘)도 허용하지 않는다(C. Westermann, J. Moltmann).

1) 인간형성에 관한 가장 오래된 표현은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 "(창 2:7). 사람이 흙(땅 혹은 먼지)으로 지음받았다는 표현은 구약성서에서 흔히 나타난다.

창 3:19 : "네가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창 3:23 :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 지를 갈게 하시니라."

창 18:27 : "아브라함이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시 90:3 :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

시 103:14 :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 104:29 :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가나이다."

시 139:15 :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받은 "

시 146:4 :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욥 4:19 :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욥 10:9 : "주께서 내몸을 지으시길 흙으로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 보내려 하시나이까? "

그런데 인간이 흙으로 지음받았다는 표상은 원시 문화권에서 오래 전부터 널리 알려진 것이다. 이 표상은 아프리카, 그리스, 바벨론, 유다, 에집트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적인 표상으로서 고대로부터 전승되어 왔다. 창 2:7의 표현도 주변세계의 표상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고 그보다 훨씬 더 고대로 미치는 전역사(前歷史)에 뿌리를 두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의 문헌들도 오래된 전역사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에집트 : 창조주 크눔(Khnum) 신을 새겨 놓은 비문에 아멘호렙 3세 왕의 아들이 흙으로 지음받았다고 묘사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바벨론) :『길가메쉬 서사시』

길가메쉬는 여러 신들이 만들어 초인간적인 모습을 갖는 존재인데, 길가메 쉬의 2/3는 신이고 1/3은 사람의 모양을 갖고 있다. 그 몸 모양은 들의 황 소와 같았다. 그의 공격은 비길 데 없이 강했다. 그가 우룩 성소에 도착하 자, 그곳의 귀족들은 방에서 우울한 상태에 빠진다. 길가메쉬는 밤낮으로 공격하여 아들과 딸들을 죽이고, 귀족의 약혼녀인 용사의 딸을 죽인다. 하 늘의 신들은 저들의 슬픈 탄식을 들었다. 하늘의 신들은 우룩 성소의 주들 이다. 그 신들 중에서 아루루 여신이 그렇게 강한 야생황소와 같은 길가메 쉬를 만들어 내어 놓은 것이다. 하늘 신들은 아루루 여신을 불러 말하길, 그대가 길가메쉬라는 인간을 창조했으니, 이제 그와 비슷한 인물을 창조하 라. 그 둘이 서로 경쟁함으로써 우룩 성소가 평화를 되찾게 하라고 했다. 아루루 여신이 이 말을 듣자마자 아누 신이 명한 것을 마음에서 만들었다. 아루루가 손을 씻고서 진흙을 떼어내어 집어 던졌다. 그녀는 엔키두, 힘있 는 용사를 만들었다.

J기자는 오래 전에 내려오는 전통적인 설화를 수용해 반복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J기자는 특히 두 가지 점을 부각 시키고 있다.

ⓐ 인간은 연약한 재료를 갖는 존재이고, 제한된 성격을 갖는다.

ⓑ 인간은 땅에서 유추할 수도 없고, 땅도 인간에서 유추할 수 없다. 인간과 땅은 모두 같은 단어(원래 피부, 표면을 의미했음)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인간(아담)과 땅(아다마)은 함께 서로 속해 있다. 땅은 인간을 위해 있고, 인간은 땅에서 살기 위해 존재한다.

2) '흙으로 지음받는 인간'에 관한 성서보도는 단 하나의 장면 즉 '코에 생기를 불어 넣음으로 사람이 살아 있는 존재가 된 장면'(창 2:7)과 결합되어 있다.

이런 표상도 다른 문화권에서 존재하고 있다.

에집트 : 여신 하소르(Hathor)가 크눔(Khnum) 신이 창조한 인간의 입과 코에 생명의 표식(ankh)을 붙여 줌.

바벨론의 인간창조 설화에도 창조신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음.

그리스 :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의 인간창조에도 이와 유사한 행위가 나타남(흙으로 사람의 몸을 만들고 이에 신들에게서 취한 불로써 생기를 줌.).

이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이 흙으로 지음받고 하나님의 생기(숨)로 인해 산 생명이 되었다"는 J기자의 설화도 그 이전에 이미 있던 표상을 수용한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오해를 반박할 필요를 느낀다.

ⓐ 하나님이 인간의 코에 생기(루아흐)를 불어 넣었다는 것은 인간에게 신적인 그 무엇이 함께 부여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H. Gunkel : 인간은 하나님과 유사하다. 그의 숨은 신적인 것의 빛을 발하는 것이다 ? ). 루아흐를 그리스적 혹은 현대적 영(혼)의 개념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 이런 해석은 필로(Philo)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서, 그 후에도 현재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A. Dillmann : 인간의 영적인 생명력). 루아흐(생기, 생명의 호흡, 숨)는 단순히 생명력, 호흡을 불어 넣음, 인간에게 생기를 줌(Lebendigkeit, das Einhauen des Lebensatems, die Belebung des Menschen)을 뜻한다. 이로써 "인간은 불멸하도록 창조되었다"는 주장은 탈락된다.

창 2:7은 신적인 질료가 흙(인간) 속으로 유출되어 둘어갔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신적인 생명력이 흙에게 부여되었음을 말한다(그러나 이것은 다른 피조물과 비교할 수 없는 친밀한 신인관계를 표현한다.).

ⓑ 하나님의 루아흐(생기)가 인간의 몸(흙)에게 주어져서 비로소 사람은 생명을 갖추게 되었다(숨을 쉬게 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몸 속에 '살아있는 영혼'(lebendige Seele)이 들어 갔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로서 전체적으로 이해된다. 네페쉬 하야는 생명이 없는 물체, 어떤 시체와는 다르게 산 생명체를 뜻한다. 창조자가 동작을 시켜 놓은 호흡이 비로소 인간을 살아 있는 네페쉬, 곧 생명체, 산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몸과 영혼으로 이루어졌다는 이해는 배제된다. 또 인간이 살아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그가 단지 살아 있는 존재로서만 대상화될 수 있다는 것, 어떤 인간상이나 인간론도 인간의 고유한 본질(인간성)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뜻하는 의미 : 모든 인간은 항상 전능자의 기운 덕분에 생명을 유지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생명이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 선물임을 의미한다(예수의 부자상인, 부자장사꾼 이야기 참조하라.).

3) 시편 139:13-16은 창 2:7과는 다른 각도에서 인간의 창조를 묘사하고 있다.

 J기자의 창조설화가 어떤 의미에서는 신화적이라면, 지혜시의 창조신앙은 더욱 지성적이고 솔직한 편이다. J기자가 하나님을 도공으로 보았다면, 시인은 직공으로 보고 있다. J기자의 창조이해도 그 당시로서는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으나, 시인의 창조이해는 훨씬 더 의학적이고 구체적이다.

시인은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의 창조의 기적에 의해 조직된 것임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내면까지 투명하게 살펴 본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는 자신이 만든 독립적인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자신의 존재와 본질의 근원을 하나님에게서 찾아 그것을 하나님의 창조행위로 고백하며, 그런 고백을 하는 순간을 바로 태초의 창조의 시간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는 자기의 어머니의 몸 속에서 자라나는 모든 과정이 위대한 직조자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그는 인간의 몸 전체를 '직물'(織物)로 이해하고 있다.

인간을 "땅의 깊은 곳에서 지었다"는 표상은 '모든 산 자의 어머니인 땅에 대한 고대의 신화적 이미지에서 유래한다(출생의 신비를 나타내는 시적 이미지로 사용함). 고대인들은 인간이 곡식처럼 땅 속에서 싹터 오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표상(표현)을 통해서 시인은 인간의 출생이 인간의 계획이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설명한다. 은밀하게 창조하는 하나님만이 태초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인간이 싹트는 태아모습도 하나님이 명백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2가지 특징 : ⓐ 어머니의 몸 속의 창조라는 현실적 창조이해, ⓑ 자연발생적 인간출생이 아닌, 하나님의 행위와 섭리에 근거하고 있는 인간의 형성에 대한 신앙고백).

4) 욥기 10:10f.의 창조이해는 훨씬 더 지성적이고 해부학적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창조신앙의 고백으로서 시편보다 훨씬 더 새롭고 정확하게 인간의 생성과 출생에 대하여 표현하고 있다. 가죽과 살로 입히고 뼈와 힘줄로 뭉쳐(얽어) 놓았다는 표현은 시편 139:13, 15와 비슷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때에 젖처럼 쏟고 엉긴 젖처럼 굳게하였다는 사고는 완전히 새롭고 독특한 사고이다. 이것은 젖같은 남성의 정액이 여성의 자궁 속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것과, 수태된 이후에 태아의 단단한 몸짓이 형성되는 것을 창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종교적, 신화적 창조이해와는 달리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관찰과 분석에서 인간형성을 표현하고 있다(C. Westermann, L. Scheffczyk, J. Moltma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