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서의 인간

 

1. 신학적 인간학의 출발점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

우리는 신학의 모든 주제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제 각기 다른 관점으로부터 볼 수 있고, 그래서 상이한 출발점 혹은 착안점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제 각기 다른 개념을 갖고서 "인간이 무엇이냐?"에 대한 답변을 내릴 수 있다. 또 우리는 서로 다른 틀(패러다임)을 가지고 동일한 내용을 제 각기 해석할 수 있다. 기독교 신학에서도 인간을 규정하는 출발점, 개념 혹은 틀은 다양하다. 하나님의 피조물(세계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 죄인(악마의 형상), 종말론적인 구원의 대상(칭의-성화-영화), 인간과 공동체(가정, 교회, 사회, 세계 혹은 우주), 물질과 생명, 전인 혹은 영-혼-육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인간학이 가장 중요시하는 인간이해의 열쇠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이다. 비록 이 개념이 성서를 통틀어 비교적 자주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이 개념을 기독교적 인간이해의 출발점으로 삼아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은 매우 오래된 전형적인 신학전통이 되어 왔고, 이러한 관점에서 연구된 성서적, 조직신학적 결과들은 교회사 혹은 신학사 만큼이나 다양하고 화려하다. 그러므로 본인의 연구는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고 전혀 새로운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시도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단지 지금까지의 논의된 '하나님의 형상' 이론들을 다시금 정리, 요약, 비판하고 본인의 관점에서 새로이 해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결론을 가지고 현대의 인간학의 결론 특히 '열린 인간 이해'와 대화하고 그 상관관계를 규명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의 어원과 기원 및 그 의미는 무엇인가? 형상(첼렘)과 모양(데무트)은 히브리어 원문에 접속사 없이 나란히 나온다(우리의 형상, 우리의 모양으로). 그러나 70인역(LXX)과 라틴어역(Vulgate)에서는 두 어휘 사이에 접속사 '와'(그리고)가 삽입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접속사의 삽입은 '하나님의 형상' 해석사에서 비극적으로 작용하였다. 앞으로 다루겠지만, 이러한 두 용어 간의 구분은 희랍적 인간이해와 결합되어 인간을 두 가지 구조 내지 본질을 갖는 이원론적 실재로 해석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래서 접속사 '와'의 단순한 삽입은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형상' 이해에 복잡한 해석과 오해를 낳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에서 두 어휘는 아무런 의미의 차이가 없다.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고 한다면, 첼렘은 '짜르다', '베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하고(동물이나 사람의 모습대로 조각되는 광경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단어), 데무트는 '∼와 비슷하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하여 '비슷한 모양'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두 단어는 사람이 어떤 점에서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며, 하나님을 대표하는 존재라는 사상을 나타낸다. 그러나 몰트만에 의하면, 첼렘[imago]과 모양[similitudo]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전자는 석고상을 가리키고, 후자는 비슷함을 가리킨다. 전자는 밖을 향하여 대리하는 면을 표현하고, 후자는 안을 향한 반사의 면을 표현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명제의 기원은 논쟁적이다. 인간이 하나님(神)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이야기는 많은 고대의 동양 신화들에서도 볼 수 있다. P기자는 아마도 '에집트의 왕의 신학'을 수용한 것 같다. 고대 에집트에서 파라오는 '지상에 있는 신의 형상'으로 간주되었다. 파라오는 땅 위에서 다스리는 하나님의 초상, 그의 대리자, 그의 임명을 받은 자, 땅 위에 있는 그의 광채와 그의 현현방식이다. 파라오는 그의 제국의 모든 지방마다 자신의 초상을 세워 자신의 현존을 표시한다. 이 초상은 신의 형상인 파라오의 주권과 영광을 드러내는 표지이다. 시편 8편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을 왕과 같은 사람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형상'의 표상이 이러한 '에집트 왕의 신학'으로부터 유래했다면, 사람은 땅 위에 세워진 대리자, 그의 주권의 표지, 땅 위에 있는 그의 영광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사람은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간접적 자기계시이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단지 왕만이 아니라 인간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기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표상에는 하나의 혁명적인 잠재력이 숨어 있다. 군주가 아니라 사람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 없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대리자, 하나님의 광채이다. 역사적으로 P문헌 속에 '왕의 신학의 민주화'가 들어 있든지 들어 있지 않든지 간에, 이 구절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정치사에서 '민주화'의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바벨론, 에집트에서 오직 왕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 일반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에집트에서도 이 표상의 민주화를 입증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메르와 바벨론의 창조신화를 지적했다. 수메르와 바벨론의 창조설화에서는 인간이 창조된 목적은 '신들의 멍에를 메고 가기 위한' 것에 있다. 즉 신들이 매일 무거운 고역을 인간에게 지우기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아트라카시스 서사시'(The Atrachasis Epic)에서는 인간창조의 설화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매일 고된 노동의 책임을 진 하층계급의 신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들은 회의를 소집한 후, 인간에게 그 고역을 맡기기 위해 인간창조를 결정하였다. 그래서 신들은 고역의 멍에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인간창조를 축하했다. 수메르에서는 아주 고대로부터 대대적인 민중부역이 있었는데, 그것은 언제나 성전건축과 종교의식을 위한 것이었다. 인간은 바로 이런 부역을 위해, 신들을 섬기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바벨론의 아카드 제국의 창조설화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 제 6 편도 같은 내용을 전해 준다. 마르둑(Marduk) 신은 이렇게 말한다 : "내가 피를 모으고 뼈를 만들겠다. 내가 야만인을 창조하겠다. 그의 이름은 '사람'이라고 하겠다. 진실로 야비한 인간을 나는 창조하겠다. 그는 신들을 섬기는 책임을 맡을 것이다. 신들이 편안해지도록!". 그러나 성서는 그 어디에서도 모든 인간이 다같이 신의 부역을 감당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록 에집트의 왕조신화가 '민주화'의 방향을 지시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P 기자가 하나님의 형상 개념을 수용하여 이를 탈신화하고 민주화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의 형상 '에 대한 종래의 견해들

1. 인간의 특별한 내면적 자질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견해들

헬레니즘적 유대교의 고대 전통은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정신에 집중시켰다. 하나님의 형상은 신적인 로고스의 복제이다. 클레멘스(Clemens)오리겐(Origen)에 의하면 내면적인 정신적 인간은 하나님 자신과 같이 불가시적이고 비신체적이고 파괴될 수 없고 죽을 수 없다. 여기서 플라톤적 유산이 교회 안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와 달리 터툴리안(Tertullian)은 스토아 사상을 더 강하게 따르고 있다. 정신-영혼의 불멸성과 함께 그는 의지의 결정능력을 우리가 신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사실의 표지로 보았다. 이레네우스(Iraeneus)는 자연적인 하나님의 형상과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모습을 구분한 최초의 신학자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간의 합리적이고 자유스러운 성품, 곧 인간의 합리성, 이성이다. 물론 이성에는 인간의 자유성, 결정할 수 있는 능력, 결정에 대한 책임성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타락으로 인해서도 상실되지 않는 성품이다. 하나님의 모습이란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신성의 의복)이다. 이것은 타락으로 상실되고 구속의 과정에서 다시 회복된다. 필로(Philo)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정신적 능력, 혹은 정신적 우월성으로 보았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으로 나누는 전통은 헬라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다. 필로의 설명은 고대교회에 의해 수용되었고 오늘 날까지 널리 다양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에게서도 우리의 내면적 정신적 인간은 삼위일체의 본래적 형상이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주로 인간의 지성 혹은 이성에서 찾는다. 그에 의하면 우리의 내면적 인간은 참으로 "삼위일체의 형상"(Imago trinitatis)이다. 우리의 외형적 육체적 인간 안에는 단지 "하나님의 흔적"(vestigia Dei)만이 있을 뿐이다. 정신적 인간은 내면적인 자기확신 가운데서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자신과 대면함으로써, 하나님 안의 사랑의 대화를 지시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사색을 물리쳤지만, 하나님의 형상의 자리에 대한 물음에서 우선적으로 영혼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명제를 받아들였고, 현대에까지 물려주었다. 예를 들면, 칼빈(Calvin)도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 인식, 의와 거룩함에서 실현된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 그 모든 능력의 질서와 건강을 경험하는 영혼 안에서 실현된다고 보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영혼'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 비록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외형 속에서도 빛나고 있긴 하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형상이 자리잡고 있는 장소는 인간의 '영혼' 속이다. 플라톤과 함께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그는 하나님의 형상의 좌소(座所)로서 불멸의 영혼을 강조한다. 영적인 것에의 집중화와 세계와 관련을 맺는 외형의 상대적 평가절하는 모든 진술을 각인한다.

2.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외형에서 찾는 견해들

헤르만 궁켈(H. Gunkel)은 창세기 5장 3절("아담이 130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과 같은 외모, 외형으로 보았다(신인동형동성론). 비록 그는 정신적인 것을 배제하진 않았지만, 첫 인간이 모양과 외모에서 하나님과 닮았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려고 했다. 궁켈 이래로 현대의 주석가들은 창세기 5장 3절을 지적하면서 '첼렘'이라는 단어가 '조각, 주조형상, 동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중에서도 폰 라트(v. Rad)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상이 원래에는 신체적 외관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예언가들에게서 "엘로힘과 같이" 창조된 인간은 인간과 같은 외관을 가진 주(主)와 상응한다. 데무트라는 단어에 조심스러운 거리유지가 내포되어 있지만, 에스겔(1:26)도 역시 "인간의 형태와 비슷한" 그 무엇만을 말한다. 물론 곧바른 모습에서 육체적 형태가 정신적 광휘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전인'이나 '인간 자신'으로 추상적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말할 때, 정신에 의해 관통되는 곧바른 몸의 형태를 주목해야 한다. 침멀리(W. Zimmerli)에 의하면 인간은 그의 외모가 실제로 닮았다는 뜻에서 하나님의 형태의 모형(Abbild)이다. 쾰러(L. Köhler)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직립형태이다. 슈탐(J. J. Stamm)도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을 형태의 닮음에서 찾았다.

3. 하나님의 형상을 나-너의 대면적 관계로 보는 견해들

칼 바르트(K. Barth) 에밀 브룬너(E. Brunner)는 현대인의 이성의 자율성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자들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서, 하나님의 형상론의 그리스도 중심적 측면을 철저히 관철시킨다. 여기서 이들은 분명히 마틴 부버(M. Buber)의 인격주의적 대화철학('나와 너의 철학')을 따르면서 "인간학적 전환"을 수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파악하는 설명에서 신학적 결정은 철학적 결정과 결합된다. 현대철학적 사고는 인간에 대한 정적이고 물적인 관점에서부터 관계적이고 활동적인 관점으로 옮아갔다. 이러한 경향에 일치하여 두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의 자리가 특별한 영혼의 능력이나 우리의 몸의 형태에 있다고 주장한 종래의 명제는 좋지 못한 객관화로 해석하면서, 그에 반해 인격적인 만남 가운데 그때마다 실현되는 근본적인 하나님 관계를 내세웠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존재와 그 구조, 그 성향, 그 능력 등에 관한 인간론적 묘사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거절했다. 그는 그러한 시도가 철저히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고, 창세기 2장 27절("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더라.")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존재의 대면(만남)의 기능 속에서 찾으려고 했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의 형상과 모습은 인간존재가 대면(Gegenüber, 서로 마주 봄) 속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 대해 나와 너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또한 인간과 인간이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서로 대면한다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다(Analogia relationis - 하나님과 인간 간의 관계의 유비). 왜냐하면 이러한 대면적 관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도, 그리고 하나님 안의 삼위일체적 관계 안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나-너의 관계 속으로 들어오는 분이다. 따라서 인간이 동료인간을 향하여 이와 동일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사실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관계성과 구별성(삼위적 관계와 구별)과 상응하도록 창조되었다. 인간은 그의 동료인간을 향해 '너'가 되며, 따라서 그에 대해 책임적인 존재인 '나'가 된다. 이 대면성을 제거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신성을 제거하고 인간으로부터 인간성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관계론적인 하나님의 형상은 정적인 것(Status)이 아니며, 인간에게 덧붙여 있거나 인간 안에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타락과 함께 상실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바르트는 주석가들의 통찰을 수용하며, 교회적 전통과 갈라선다. 하나님의 형상은 오로지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의 헌신 안에 근거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결코 인간이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소유물이 될 수 없다. 근본적으로 바르트는 인간이 하나님의 파트너로 결정되었다고 가르치는 종교개혁자들의 명제를 수용한다. 하나님의 파트너가 되도록 결정된 이러한 인간의 규정과 그리고 인간 상호 간에 파트너가 되도록 결정된 인간의 규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성취된다. 순종을 위한 그의 자유 안에서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은 유일하게 상응하는 응답을 얻는다. 이와 함께 하나님-인간의 사귐의 비밀이 계시된다. 교회라고 하는 하나의 여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자기헌신 안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뿐만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혼인적 동거관계도 완성된다. 이로써 바르트의 인간학은 철저하고 완전하게, 그리고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인간과 그의 실존을 인간 예수의 주석 안에서 이해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신학적 인간학이 되었다. 무능한 자기초월의 교만 안에 있는 인간의 자기기획(自己企劃)으로서의 '존재의 유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약의지 안에서 열려지는 관계들의 모방으로서의 '신앙의 유비'라는 철두철미한 방향전환은 상응의 전 구조를 드러낸다.

브룬너(E. Brunner)도 비록 하나님의 형상을 실질적 형상과 형식적 형상으로 나누어 설명하긴 하지만, 이를 관계성으로 푼다. 하나님의 형상의 실질적 측면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경외하는 반응, 하나님께 감사하며, 전 생애를 다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는 반응을 말한다. 이러한 온전한 반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죄로 인해 상실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의 형식적 측면은 인간의 책임성,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반응할 수 있는 능력, 동료 인간에 대한 책임성(반응 가능성)을 말하며 자유, 양심, 이성, 언어 등이 이것의 내용을 이룬다. 이것은 인간존재의 불변적 구조의 일부분이다. 이것은 남용될 순 있지만 제거될 순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조성은 인간존재 그 자체와 동일시되며,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소유하고 있는 존재의 특질과 동일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식적, 본질적 구조성은 오직 인간이 삶을 멈추는 곳에서만, 저능과 미침의 경계선에 있을 때에만 중지된다.

이러한 관점은 이미 1902년에 리델(W. Riedel)에 의해 시도된 것이다. 이미 그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은 - 분명히 빌헬름 헤르만(W. Herrmann)과 같이 -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에 집중된다.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은, 하나님이 인간과 교제할 수 있고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고 인간이 그분을 이해할 수 있고 그분에게 대답할 수 있다는 사실, 요약하면 종교적인 능력 혹은 소질(Anlage)에 있다. 물론 리델은 바르트와는 정반대로 이 교제를 "종교를 위한 능력 혹은 유비"와 관련시킨다. 마아그(V. Maag)에게서도 인간이 하나님과 유사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이 그의 창조주와 관계를 맺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4. 자연에 대한 인간의 통치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견해들

이런 견해는 종종 다른 해석들, 즉 인간에게 주어진 정신, 이성, 의지는 피조물에 대한 지배를 가능케 한다거나, 하나님의 대표성(대리성)은 나머지 피조물에 대한 지배 안에서 성취된다는 등의 해석과 밀접히 결합되었다. 볼프(H. W. Wolf)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를 높이는 임의적 행동 안에서가 아니라 책임적인 임무수행자로서 과제를 인식한다. 그의 통치권리와 그의 통치의무는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모방적인 것이다. 그로쓰(H. Gross)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참여하는 데 있다. 또한 오버홀처(J. P. Oberholzer)도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은 생산력과 자연 지배의 능력에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3. 앞의 견해들의 문제점들

지금까지 살펴 본대로 한 편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견해들은 그것을 인간의 본질적 구성으로 보느냐 아니면 기능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크게는 둘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구성적 요소로 보는 견해도 그것을 인간의 내면적 특성 혹은 본질(이성, 영혼, 의지 등)에서 찾느냐 아니면 인간의 외형(외모, 직립 등)에서 찾느냐에 따라서 둘로 나누어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기능으로 보는 견해도 역시 그것을 관계의 기능으로 보느냐 아니면 통치의 기능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둘로 나누어진다. 물론 학자들에 따라서 본질과 기능을 밀접히 연결시키는 자들도 있는가 하면, 이 둘을 엄격하게 분리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리고 기능과 통치의 구분도 때로는 모호할 수가 있다. 그래서 이 네 가지 견해들을 학자에 따라서 엄밀하게 분류하는 것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강조점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대체로 앞에서 말한 대로 네 가지 범주로 나누어 보는 것이 무리가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 네 가지 견해들을 어떻게 판단하고 해석하느냐의 문제가 남아 있게 된다. 여기서 본인은 성서적-신학적 인간학의 범주 안에서 이 네 가지 견해의 문제점들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1. 미래적, 종말론적 특징의 간과

성서적, 기독교적 인간이해의 중요한 열쇠가 되어 온 문장 즉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 혹은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문장은 구약성서에서 단 3번(창 1:26-28, 3:1-3, 9:6) 직접적으로 나타나며, 시편 8편에서 간접적으로 나타난 것을 제외하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성서에서는 야고보서 3장 9절에서 비슷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주로 인간이 새롭게 변화될(혹은 입게 될)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말한다(고후 3:18, 골 3:9-10, 엡 4:22-24는 심령이 새롭게 되고, 새 사람으로 지음받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신약성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스도론의 전제로 삼아 말하고 있다(고후 4:4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임, 골 1:15 -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임, 히 1:3 -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그 본체의 형상임). 그래서 신약성서는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중재하기 때문에,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그를 닮아야 한다고 말하며, 인간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도록 지음받았다고 말한다(롬 8:29). 그러므로 그리스도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향하여 창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선물(Gabe)이면서도 인간의 과제(Aufgabe)이다. 사실 P문서도 선물보다는 과제에 더 강조점을 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은사인 동시에 임무이며, 서술인 동시에 명령이다. 그것은 과제인 동시에 희망이요, 명령인 동시에 약속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게 주어진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미래의 약속, 종말론적 희망이다. 즉 사람의 존재는 종말론적 과정 속에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안에 주어져 있기보다는 언제나 인간 앞에 서 있다.

초대 기독교 신학자들, 특히 테오필로(Theophilo), 이레네우스(Iraeneus), 클레멘스(Clemens)에 의하면 최초의 창조는 아직까지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나이에 이르기까지 접근해 나가는 과정 안에 있는 유아적 시작이다.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에게서도 창조의 시작은 자연과 정신의 보편적 침투의 발전목표로 변화되었다. 그를 뒤이어 리하르트 로테(R. Rothe) 에른스트 트뢸취(E. Troeltsch)도 인간 피조물이 창조의 당시에 점차로 질료의 원상태로부터 만들어졌듯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암호도 상실된 시초의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라 역사적 발전 속에서 달성되어야 할 목표를 말한다고 장한다. 브룬너(E. Brunner)도 이런 비슷한 본문을 지적한다. 칼 라너( K. Rahner) 주변의 카톨릭 신학자들도 조심스럽게 아담의 기원을 그리스도 중심적 목표점으로 해석한다: "시작이 그 종말을 향한 분명한 시작인 한에서, 그리고 시작이 종말에서야 비로소 자기에게 이르는 한에서, 원초론과 종말론은 내적으로 서로 속해 있다." 이와는 반대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그를 따르는 종교개혁자들은 원초적 상태를 최고로 완전한 상태로 묘사했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았을 뿐만 아니라 피조물들도 그들에게 직접 개방되어 있었고, 그들은 수고하지 않고도 동물들의 세계를 지배했다. 인간의 존귀함이 화려하게 그려지면 그려질수록, 원상태의 순수함의 상실도 더 강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형상은 마귀의 형상으로 변질되었다(WA 42, 47, 22: "Haec et similia mala sunt imago Diaboli, qui ea nobis impressit."). 그러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불가피하게 제기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인간이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되었다면, 어떻게 그는 저 원초적인 존귀함을 알 수 있는가? 어떻게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다시금 하나님을 향해 열 수 있는가?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비록 왜곡되었지만 하나님의 형상의 나머지가 남아 있다고 했다. 이 남은 형상은 정통주의에서 계몽주의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다시금 "위대한 일의 담지자"가 되었다.

그러나 인간을 처음부터 완성된 존재로 창조된 것으로 보지 않고 종말론적 목표를 향해 늘 새롭게 창조되는 열린 존재로 본다면, 구원은 단순히 원래적 형상으로의 회복이나 복귀로 볼 수 없으며,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 완전히 사라졌느니 혹은 얼마 남았느니 하는 논의도 부적절하다.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원래적 형상을 회복할 뿐만이 아니라 그 종국적인 형상을 입도록 규정되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노선을 따르는 대개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의 이러한 종말론적 특징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대체로 고대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틀 안에서 사고하느라 구원사의 시간적, 종말론적 특성을 간과하였고,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도 이런 틀 안에서 해석함으로써, 인간구원의 종말론적 역동성을 쉬이 잃어 버렸다.

2. 인간의 본질과 기능의 분리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본질(구조)적 측면과 기능적 측면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전체성(全體性)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인간의 구조성과 인간의 기능성을 함께 포함하여야 한다. 기능과 구조는 하나님의 형상의 근본적인 두 가지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구조적 측면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맺고 있는 다양한 관계성과 소명들 속에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을 행하도록 기능하게 하는 모든 은사들과 재능들이 총체적으로 인간에게 부여된 상태를 지칭한다. 기능적 의미에서 본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어 작동하는 인간의 올바른 기능성을 의미한다. 다른 한 쪽을 희생시키면서 어느 한쪽을 강조하는 것은 편협한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릭슨(M. J. Erickson)의 견해를 청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관계적 견해는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을 알고 의식적으로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다는 진리를 제대로 파악했다. ...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전적으로 관계의 문제로 보는 견해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 우리는 바르트브룬너가 전적으로 실존주의로부터 유래한 반실재적인 가정들 때문에 길을 잃었다고 결론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이 견해는 인간의 독특성은 실체적이기보다는 형식적이야만 한다는 입장으로 귀결된다. 눈을 돌려서 견해를 살펴보면, 우리는 이 견해가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성경의 묘사에 나타난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 곧 인간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행위 바로 뒤에 지배의 명령이 뒤따라 나온다는 통찰력 있는 생각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형상과 지배의 실행 사이에는 최소한 긴밀한 연관이 있음은 분명하다. ... 그러나 이 견해에도 또한 난점들이 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배의 실행과 동일시한 명백한 언급이 없다. 오히려 이 두 개념을 구분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암시들이 있을 따름이다. 바꾸어 말해서 인간은 지배를 실행에 옮기도록 명령받기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존재로 이야기된다. ... 따라서 기능적 견해는 형상의 결과를 취하여 그것을 형상과 동일시하는 것 같다. ... 형상은 일차적으로 실체적인 또는 구조적인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형상은 인간의 본성 그 자체 안에 있는 어떤 것이며, 인간이 창조된 방식 안에 있는 어떤 것이다. 형상은 인간이 소유하고 있거나 행하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존재를 가리킨다. 그는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관계적이고 기능적인 견해들은 형상 그 자체보다는 형상의 결과, 기능, 역할 혹은 적용에 초점을 맞춘 견해들이다. 관계를 경험하는 것과 지배를 실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긴 하지만, 그것들 자체가 형상이라고 볼 수 없다. 형상은 인간의 구조 안에 있는 어떤 것으로서 인간의 목적 성취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을 가리킨다. ... 형상 그 자체는 이 관계들과 이 기능이 작용하는 데 필요한 일단의 자질이다. 이 자질들이란 하나님의 자질들이 인간 안에 반영된 것으로서, 경배, 인격적 교류, 일을 가능하게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자질들을 소유한 존재로 생각한다면, 인간도 그와 같은 자질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때때로 공유적(共有的) 속성(피조물인 인간 안에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발견될 수 있는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속성들이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을 구성한다. 이 속성은 어떤 한 가지 속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의 인간은 인격성 혹은 자아 전체를 포괄하는 어떤 본성을 가진다. 지성, 의지, 감성이 여기 포함된다. 이것이 인간의 형상으로서, 인간이 하나님, 동료 인간과의 거룩한 관계를 가지는 것과 지배를 실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은 본질과 기능 면에서 분리할 수 없는 전체적 인간이다. 어떤 한 부분을 강조하는 대가로 다른 한 부분을 약화하거나 멸시하는 것은 인간을 전체로서 보지 못하게 한다. 본질과 기능은 인간을 드러내는 두 측면이고 인간을 바라보는 두 관점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결코 분리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 인간의 내면과 외면의 분리

인간의 구조와 기능을 분리하는 것 못지 않게 인간을 내면과 외면으로 분리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구조의 특정한 부분에 제한하려는 것도 문제가 있다. 이러한 태도는 인간의 전인성(全人性)을 약화하거나 부인할 염려가 있다. 이런 경향은 헬라 철학, 특히 플라톤의 영향으로 인해 생겨난 것으로서 기독교 인간이해에 많은 부정적 영향을 남겼고, 지금도 그 영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능한 한 신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분리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다. 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 인간 안에 있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모습을 덧붙여진 무엇으로 간주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동일한 모습은 인간의 어느 한 부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현존하도록 부름받은 그대로 인간은 그의 존재 전체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폰 라트(v. Rad)의 주장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부분적인 속성에 있지 않고 전 인간의 구조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주와 인간 간의 상응관계(대면성)로 푸는 베스트만(Westermann)도 인간존재 그 자체,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다. 이것은 인간존재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존재를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4. 인간의 전체성, 전인성, 연대성의 파괴

앞에서 지적한 세 가지 문제점은 앞의 세 이론들이 적용되는 구체적 현실 혹은 정치사회적 영역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일으킨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전체로서 다른 피조물들과 달리 하나님에 의해 고귀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뒷받침하고 인간다운 사회를 창조하는 데 결정적인 구호로서 작용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종말론적 특징의 간과, 구조와 기능, 내면과 외면의 분리는 계급주의적 삶의 형태를 낳고,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의 본래적 의도와 달리 자신-이웃-사회의 파괴를 초래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형상을 종말론적 과정 안에 있는 열린 실체로 보지 않는 견해는 인간의 현 상태를 절대화하여 미화하거나 멸시하게 만든다. 먼저 이런 견해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을 미래적, 종말론적 관점으로부터 희망 안에서 보게 하지 않고 현 상황으로부터 단정적으로 규정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신을 현 상황에서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 즉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 보게 하거나,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 즉 악마의 형상으로 - 바라보게 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이런 태도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서 가장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즉 인간은 다른 사람들, 특히 죄인이나 약자를 미래의 희망의 관점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비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 현 상황으로부터 단정하여 억압하고 멸시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형상을 구조와 기능으로 분리하는 견해는 인간의 특정한 부분을 미화하거나 멸시하도록 만든다. 즉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는 인간조차 무턱대고 인간으로 찬양하거나, 거꾸로 기능을 잘 행하지 못하는 인간을 멸시하는 결과를 낳는다. 인간에 대한 단순한 본질주의적 이해는 인간의 기능과 역할을 간과할 위험을 갖고 있는 반면에, 인간에 대한 단순한 기능주의적 이해는 인간의 존엄성을 쉽사리 기능과 역할 혹은 업적으로 환원할 위험을 갖는다. 전자는 인간계발과 교육, 상호부조와 협력을 무시할 위험을 갖는 반면에, 후자는 기능이 약한 신체, 인간들(어린이, 여성, 장애자, 미성숙자 등)을 제거하거나 억압, 멸시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위험을 범한다.

셋째로 하나님의 형상을 내면과 외면으로 분리하는 견해도 마찬가지로 인간을 계급화하는 데 기여한다. 이 견해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본성이 지닌 어떤 한 가지 양상으로 환원되는데, 신학사에서 그것은 특히 인간이 지닌 지성적 국면이나 영혼적 국면으로 환원되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은 각 사람 안에서 다르게 나타나고, 또 각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만약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지성으로 환원되면, 더욱 더 지성적인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형상을 더 많이 지닌 존재가 된다. 그래서 정신적인 일을 하는 자는 정치적인 일이나 육체적인 일을 하는 자보다 우월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즉 학자, 남자나 문명인은 다른 사람들, 즉 노동자, 여자, 어린이나 미개인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만약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으로 환원되면, 인간의 육체성은 죄악시되거나 멸시, 비하되고, 성직자는 가장 높은 계급을 향유하는 특권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육체성 혹은 감정이나 본능에 가까운 성향이나 그런 부류의 사람들(어린이, 여성 미개인)은 억압되거나 도태되어도 좋다는 정당화도 여기서 생겨난다.

이처럼 앞에서 거론한 문제점은 하나님의 형상의 본래적 의미와 목표와는 달리 인간 자신, 사회를 계급화하고 그래서 다른 종류의 존재들을 억압하는 데 이바지한다. 그래서 이것은 인간의 전체성, 전인성, 공동체성 혹은 연대성을 심히 훼손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일에 도리어 방해가 된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표상에는 하나의 혁명적인 잠재력이 숨어 있다. 인간의 특정한 부분이 아니라 인간 전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군주가 아니라 사람이, 남자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특정한 문화와 계급, 인종의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전 인류가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대리자, 하나님의 광채로 창조되었다. 그리고 죄와 악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도록 부름받았다.

4. 삼중적 관계 안에서 본 '하나님의 형상'

우리는 앞에서 인간이 전체(全體)와 전인(全人)으로서 그리고 인류의 공동체성(共同體性)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향하도록 창조되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런데 인간의 종말론적인 규정, 전체성, 전인성과 공동체성(연대성)은 어떻게 드러나고 실현되는가? 인간은 고독한 개인으로서는 결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잠재적인 존재, 종말론적 지향성을 갖는 존재라고 할 때, 이것은 인간이 그 스스로 자신 안에서만 완결될 수 없으며, 완성의 도상에서 타자인 그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 무엇과 관계맺고 있다는 점을 내포한다. 인간이 본질과 기능으로서, 전체로서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본질은 기능 안에서 드러나고 기능을 목표로 한다. 존재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임무로 나타나지 않는 은사는 없고,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존재는 없다. 그런데 임무와 행동은 타자인 그 무엇을 전제하고 그것과의 관계를 요구한다. 즉 인간은 고독한 개인으로서는 결코 자신의 역할, 임무, 은사, 사명 혹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전인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이 정신이라는 것은 인간이 그 무엇을 향해 지향하고 개방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인간이 육체라는 것은 인간이 이 세계와 관련맺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정신과 육체로서 그 무엇과 관계맺는 존재이다. 그리고 인간의 공동체성도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혼자로서는 인간일 수가 없다. 인간은 관계 안에 있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의 진정한 의미와 본질도 '관계 안에 있는 인간'의 모습 안에서만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그 어떤 대상 안으로만 한정할 수 없고 환원할 수 없다고 앞에서 말했다. 그렇다면 그 어떤 대상 안에서 규정할 수 없는 인간은 바로 관계 안에서만 규정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무엇이라기 보다는 그 무엇과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본질과 기능은 그가 맺는 관계 안에서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을 내포한다. 우리는 이 점을 성서를 근거로 삼아서 규명해 보고자 한다.

1.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인간(창 1:26a)

인간창조의 텍스트는 일차적으로 인간에 관해 말하기보다는 인간창조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인간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기로 결심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결의("∼하자")와 상세한 규정(하나님의 형상에 따른 창조), 이 두 특징적인 요소는 창조주 하나님이 자기 자신과 관계되는 그 무엇을 만들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즉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과 상응하는 피조물, 그분이 말씀할 수 있는 피조물, 말씀에 귀기울이는 피조물을 창조했다는 데에 하나님의 형상의 일차적 본질이 있다. 즉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자신과 상응하도록, 다시 말하면,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서 무엇인가 일어날 수 있도록 창조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학적 개념이기 이전에 신(神)학적 개념이다. 먼저 그것은 창조되는 사람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자기의 형상을 스스로 만들고 그것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말한다. 먼저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과 관계를 맺는 하나님의 관계'를 말하며, 그 다음에야 '하나님과 관계맺는 인간의 관계'를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땅 위에 있는 그의 형상과 영광이 되게 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인간과 관계를 맺는다. 사람의 본질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이러한 관계로부터 생겨나며, 이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갖는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이 자신의 편에서 하나님과 상응하는 바로 거기에 있다. 자신의 영광을 땅 위에 있는 그의 형상 속에서 빛나게 하는 하나님은 자신을 이 형상 속에서 거울과 같이 반사한다. 인간은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대리자, 하나님의 대칭(반사),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책임있는 인간, 하나님을 사랑, 신뢰, 복종, 예배하는 인간, 하나님에게 기도, 감사, 응답, 반응하는 인간, 하나님과 교제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말한다(Coram Deo).

바르트에 의하면 이 관계의 기원의 비밀은 하나님 안의 세 존재방식의 인격적 대면이다.. 결정적인 연결고리는 '선택하는 하나님'(KDⅡ/2, 111.)과 '선택된 인간'(KDⅡ/2, 124.)인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은총의 선택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자유 안에서 사랑하는 자로 계시하며, 동시에 인간은 순종 안에서 응답하는 자로 계시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간의 영원한 은총의 계약이 수립되었다. 유비의 완전한 내용은 이로부터 나오거나 이 중심의 주변에서 집약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불가피한 관계 안으로 놓여졌다. 따라서 하나님 없는 인간은 참 인간이 아니다. 예수 안에서 인간됨은 "하나님과 함께 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음은. . . 가능성이 아니라 인간됨의 존재론적인 불가능성이다." 예수 안에서 인간은 항상 하나님의 처분에 내맡겨졌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초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 안에서 "함께 선택되거나 이 은총을 향해 선택된 피조물"로서 인간은 감사히 청종하며 책임적으로 순종하는 자기헌신 안에서 존재한다. 바로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자유를 갖는다. 예수 안에서 계시된 진정한 자유는 결코 열려 있다고 하는 두 가능성 사이의 추상적인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 안에서 확증된 피조적 존재를 기쁘게 붙잡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모든 '현존' 속에 있다. 영혼 뿐만 아니라 사람 전체가, 개인 뿐만 아니라 인간 공동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트만에 의하면 성서의 전통에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가 나타나고 인식될 수 있는 한 장소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거울이 되는 '사람의 얼굴'이다(고후 3:18, 4:6, 고전 13:12, 출 34:33-35, 마 17:2, 계 1:16).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향하심, 그의 돌보는 관심, 목적을 지향하는 그의 현존을 보편적으로 상징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의 얼굴에 집약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근원적인 규정과 함께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인식하리라는 종말론적 약속을 이미 갖고 있다. 이를 몰트만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관상학적 이론'이라고 말한다.

2. 남과 여, 동료인간과의 관계 안에 있는 인간(창 1:27)

하나님의 형상이 존재하고 실현되는 또 다른 관계는 사람들의 성적인 차이와 사귐에 있다. 인간이 남과 여라는 두 성(性)을 갖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의 존재, 인간의 규정은 두 성 안의 그의 존재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은 여기서 사회적 존재로 이해되고 있다. "독자적, 개체적 인간은 반쪽 인간이다"라는 침멀리(W. Zimmerli)의 표현은 지나치지만(고독한 존재도 여전히 온전한 인간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 사귐으로 결정된 존재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사귐은 하나님 자신과 상응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사귐 속에서 자기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신적인 복수(우리)는 하나님 안에서도 구별과 통일성이 있음을 지시한다. 이것은 자신 안에서 풍부한 사귐의 관계를 맺는 하나님을 지시한다. 하나님 안의 이 구별과 통일성은 인간들의 사회적 삶을 결정한다. 인간을 남과 여로 창조한 하나님은 남성적인 하나님이나 여성적인 하나님일 수만도 없고 중성적인 하나님일 수도 없다. 이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녀의 삶의 사귐을 규정하는 삼위일체적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 모든 종류의 이론적, 실천적 차별, 남과 여의 성적인 우위는 없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의 형상 속에서 나타난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의 '인성'의 의미는 동료인간을 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인간성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기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당신을 향하는 존재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이것은 훼손된 인간됨이 아니라 진정으로 완성된 인간됨이다. 예수는 진정한 인간성의 본질을 드러내심으로써, 우리에게 다음을 가르친다: "모든 인간의 인간성은 그의 존재가 다른 인간들과 함께 있도록 결정된 점에 있다." 서로의 눈을 바라봄으로써만, 함께 말하고 서로에게 귀를 기울임으로써만, 서로 도움으로써만, 우리는 다른 인간들과 참으로 만날 수가 있다. "참으로 자연적인 인간은 ... 그의 마음의 자유 가운데서 그의 동료인간과 함께 하는 인간이다." 이러한 '인간존재의 파괴할 수 없는 연속성'(Kontinuum)은 남자와 여자의 이중성 안에서 그 자연스런 자리를 갖는다. 사실 이러한 연속성은 세계 안에서 소유할 수 있는 상태로서 인간의 임의처분의 권한에 내맡겨져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에 근거해 있다. 여기서 바르트는 동료인간성의 지평 안에서 유비의 고리를 취한다: "인간 예수는 동료인간을 위한 인간이다. ... 인간은 동료인간과 함께하는 인간, 당신과 함께 하는 나, 여자와 함께 하는 남자이다."

3. 세계와의 관계 안에 있는 인간(창 1:26a, 2b)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 만물의 통치권을 부여한다. 만물의 통치권은 하나님의 형상에 '별도로 첨가된' 부차적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적 요소이다. 인간은 만물의 통치자를 이 땅에서 대리하는 존재이다(하나님의 통치의 대리자). 여기서 세계는 비신화화된다. 이 세계 안에는 어떠한 신성한 것들, 신비의 영역들도 없다. 인간은 모든 세계를 다스릴 수 있다(세계의 세속성). 그리고 인간에게 위임된 세계통치권의 성격은 무조건적인 우월성을 뜻한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류에게는 세계를 마음대로 취급할 수 있는 전권이 주어져 있다("정복하라, 다스리라."). 그리고 인간이 부여받은 통치의 대상은 우선적으로는 세계의 땅 전체이고 그 다음엔 동물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두 가지 오해가 있다. 세계 정복은 인간을 위험으로 몰고 가서는 안 된다. 환경의 오염이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파괴하도록까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세계정복이 기술이라는 새로운 신화를 통해 인간을 노에로 만들어선 안 된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이외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통치권에만 부여된 것이지, 인간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세계의 주인이 되려는 민족과 인종과 국가는 결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대리자, 땅 위에 현존하는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괴물이 될 뿐이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서만 신적으로 정당화된 지배를 행사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의 인격을 영과 육체로, 사람을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인류를 여러 계급으로 나누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바른 관계는 단순히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아니다. 아담에게는 에덴 동산을 가꾸며 돌보는 임무가 주어졌다. 이것은 섬기는 자세의 지배, 보존을 의미하지 착취로 오해되어선 안 된다. 땅 위에 있는 사람의 지배는 하나님을 위한 하인들의 지배이며, 하나님을 위한 땅의 지배이다.

5. 신학적 인간학과 철학적 인간학의 대화

현대의 철학적 인간학은 우주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특수한 위치와 본질을 '세계개방성'(쉘러, 겔렌), '탈중심성'(플레쓰너)이라는 개념으로 요약하였다. 그 이후로 이제 '세계개방성' 혹은 '탈중심성'이라는 개념은 현대인의 인간이해에 결정적인 중심축을 이루는 용어가 되었다.

그렇다면 현대인의 이러한 인간이해를 신학은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가? 신앙적-전승적인 기독교의 '하향적 인간학'이 실증적-철학적인 현대의 '상향적 인간학'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 것인가? 본인은 앞의 논문에서 이 문제를 차후의 과제로 남겨 놓은 적이 있는데, 여기서 이제 이 문제를 간단히 다루어 보고자 한다. 이 과제는 대체로 세 가지 가능한 관점에서 풀어 갈 수 있다.

1. 선교를 위한 접촉점의 가능성

첫째의 가능성은 '열린 인간 이해'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이해시키기 위한 선교적 혹은 대화적 '접촉점'(E. Brunner : Anknüpfungspunkt)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즉 '세계개방적이고 탈중심적인 인간'과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실현하는 인간'은 '열린 인간'이라는 접촉점 위에서 서로 만나고 대화할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래서 상향적 인간과 하향적 인간은 서로 비켜 가거나 배척하지 않고, 이러한 '열린 인간'이라는 공통분모 안에서 만나서 자신을 해명하고 변호하고 대화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접촉점을 위한 이러한 대화는 그리스도인의 편에서 선교를 위한 준비일 뿐이지, 아직은 선교의 목표가 제시된 것은 아니다. 즉 신학은 철학적 인간학의 결론을 갖고서 죄나 편견 혹은 전통이나 이기심 등으로 인하여 닫혀 있어서 복음을 배척하는 인간을 '개방시키는' 준비를 할 수는 있지만, 이 단계에서는 그에게 아직 복음이 무엇이며, 그가 왜 복음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설명할 수는 없다.

2. 질문과 대답의 상관관계의 가능성

둘째의 가능성은 현대인의 질문의 구조에 맞추어 복음의 대답을 해명해 주는 '상관관계'(P. Tillich : Method of correlation)의 가능성이다. 인간의 세계개방성과 탈중심성은 세계에 대해 혹은 세계를 넘어서 개방하는 인간, 중심적 자아를 넘어서 제 2의 자아를 지향하고 그것마저 무한히 넘어서는 인간을 지시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인간은 어디를 향해 자신을 개방하는가? 인간의 개방성은 무한한 자기초월성인가 아니면 그 어떤 대상을 향한 지향성인가? 이 질문에 대해 상향적 인간학은 대답을 줄 수 없다. 이것은 단지 자신을 초월하여 세계에 대해 무한히 열려 있는 인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어도, 세계를 넘어서는 개방성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하는지는 분명히 말할 수 없다. 물론 쉘러(M. Scheler)의 이론에서는 인간의 개방성은 인간 안에서 형성되어 가는 신(神) 자신의 개방성이다. 그래서 인간은 잠재적인 가능성 안에 있는 신과 함께 완전한 신성의 실현을 향한 범신론적이고도 신비적인 목표를 갖는다. 그러나 신앙을 전제하지 않는 여타 다른 인간학자들은 개방성과 탈중심성의 목표를 분명히 제시하지 않는다.

여기서 신학적 인간학은 그 '하나님의 형상'의 이론으로써 하나님과 인간과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진정한 인간됨의 규정을 대답으로 제시할 수 있다. 하나님에 의해 그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그 무엇을 향해 열려진 존재로 창조된 인간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신학적 인간학은 철학적 인간학의 구조와 상관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전자는 후자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신앙에 기초하여 대답한다. 즉 인간은 하나님과 이웃과 세계를 향해 열려진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인간은 이웃과 세계마저 넘어서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질문하는 존재라는 것을 복음은 말한다. 이런 점에서 판넨베르크의 견해는 옳다고 여겨진다: "인간의 무한한 의존성은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질문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세계를 향한 인간의 무한한 개방성은 오로지 세계를 넘어서는 그의 운명으로부터만 귀결된다. ... 환경과 동물의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와 같다. 하나님은 인간의 탐구가 안식하고 그의 운명이 성취될 수 있는 유일한 목표이다."

여기서 판넨베르크는 "주여 내가 당신의 품에 안길 때까지는 내 마음에 아무런 안식을 찾을 수 없었나이다"라고 고백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을 연상시키고 있다. 심지어 판넨베르크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개방성을 지향하는 현대의 인간학은 그 역사적 뿌리를 성서적 사고 안에 두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물론 현대의 인간학자들은 대개 이런 결론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논의는 별도로 하더라도, 복음은 현대인에게 세계개방성 혹은 세계의존성의 목표로서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세계를 말할 수 있고, 또 인간을 포함하는 세계를 넘어서는 개방성의 목표로서 하나님을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개방성을 갖는 전형적인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인간을 제시할 수 있다.

3. 지평확장을 위한 수용의 가능성

셋째의 가능성은 철학적 인간학의 분야에서 입증된 인간 존재의 현상을 신학적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임으로써, 신학의 차원을 유의미하게 확장하는 '기초신학적 인간학'(W. Pannenberg : Fundamentaltheologische Anthropologie)의 가능성이다. 이 방법론은 먼저 인간의 현상에 주목한 후에, 이것이 종교적-신학적으로 적합한 의미를 갖는지 질문하면서, 비판적으로 이것을 신학에 적용한다.

관계는 열림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관계는 쉽게 배타적 관계 혹은 닫혀진 관계로 변질될 수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교의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는 다른 경험의 인격적 관계나 타 종교의 비인격적인 신앙(신념)의 대상(法, 道 등)에 대해서는 배타적으로 닫힌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열린 사귐의 관계는 다른 종파의 그리스도인들이나 비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는 배타적 관계로 고착될 수 있다. 또 조화로운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찬양적 태도는 혼돈스러운 세계나 다른 세계관에 대해서는 무조건 눈을 감게 만들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분명히 정당성과 함께 위험성도 갖고 있다. 그 위험성이란 자신의 특정한 신념을 절대화하고 스스로 신 아니 우상이 되는 온갖 종류의 독선주의적, 근본주의적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쉽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철학적 인간학의 '열린 인간 이해'는 닫힌 관계로 변질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인간-세계와의 관계의 지평을 확장하는 의미있는 역할을 할 수 있기에, 우리는 판넨베르크의 기초신학적 인간학의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비판적, 초월적, 신비적 신학이 긍정적, 계시적, 정언적(定言的) 신학을 무조건 부정하는 방향으로까지 나아가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말씀을 듣는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한다. 그러나 기초신학적 방법론은 자신의 체계나 신앙 안에 갇혀서 이 세계에 대한 적합성과 책임성을 상실한 신학과 인간을 교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변증법적(辨證法的) 기능을 갖는다. 신학과 그리스도인은 원칙으로 하나님과 인간과 세계에 대해 열려 있음으로써만,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책임을 다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를 존재의 속성으로 갖는'(E. Bloch) '희망의 하나님'(J. Moltmann)에 대한 신앙적 응답을 열린 사랑의 능력 안에서 행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