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전인(全人)으로서의 인간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또한 인간을 어떤 측면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크게 달라진다. 인간을 다른 사물이나 동물과 같이 보느냐, 혹은 개인의 측면에서 보느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보느냐, 아니면 신과 관련된 존재에서 보느냐 등에 따라서 인간을 때로는 물질로, 때로는 영혼이나 정신으로 규정하고 설명해 왔다. 그리고 이 물질, 영혼과 정신의 기능과 그 상호관계도 다양해게 설명되어 왔다. 인간 존재의 신비를 풀려는 인간의 철학적 노력은 "인간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느냐?"의 문제와 관련되어 다양한 답변을 내어 놓았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입장들을 소개하고 평가하기로 하자.

1. 철학사에 나타난 다양한 견해들

1. 영혼의 불멸성과 우월성에 입각한 이원론(플라톤)

플라톤은 정신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보다 우월하다고 본 전형적인 철학자였다. 더욱이 그는 영혼을 몸과 반대되는 그 어떤 독특한 것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몸이 영혼을 방해하고 오염하기까지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인간은 몸으로부터 분리되어야 깨끗해진다. 감감적인 지각은 영혼을 제한하며 영혼이 진리와 접촉하는 것을 막는다.

영혼은 욕망으로 생긴 몸이라는 감옥 속에 갇혀 있다. 그래서 플라톤은 죽음조차도 영혼이 몸으로부터 벗어나는 행복한 탈출의 과정으로 보았다. 영혼은 몸과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에, 다른 세계를 향해 항해해야 한다. 영혼은 이 지상의 현실보다 먼저 존재해 있었기 때문에 지상의 몰락과정에 편승되지 않는다. 몸은 사라질 수 있으나 영혼은 계속 존재한다. 영혼은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 정신적인 세계, 신적인 세계와 관련맺고 있다. 그래서 플라톤에게서는 영혼의 윤회와 재탄생의 사상도 발견된다.

"플라톤의 '죽음의 명상'은 영혼이 우위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사상에 근거한 삶의 태도는 스토아의 삶의 철학 속에 나타난다. 행복과 고난, 건강과 질병, 삶과 죽음에서 흔들리지 않는 감정과 의연한 태도, 영혼의 무감정 속에 부동요성의 힘이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죽음의 명상'은 신체의 저질성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몸의 삶으로부터 생동적인 관심을 빼앗으며, 몸을 영혼과 무관한 껍질로 하락시킨다. 그것은 몸을 마치 땅의 찌꺼기와 같은 것으로 탈정신화하며, 이 찌꺼기를 가지고 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게 한다."(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294) 이런 사상은 인간의 존재를 매우 좁게 한정시키며, 몸이나 이 세계를 죄악시하거나 경시하는 사고를 조장한다. 그리고 영혼이 몸 속으로 들어온 곳을 종종 타락의 결과로 보게 한다. 몸과 영혼의 이원론은 오랫 동안 서구사상, 특히 기독교 교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혼불멸의 교리, 구원을 몸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보거나 몸이나 이 세계와 무관한 순수히 정신적이고도 내세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 몸이나 지상적인 것과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금욕적 태도 그리고 성(性)을 비하 억압하거나 죄악시한 것(성욕을 육체적 정욕의 죄로 규정한 것) 등은 의심할 나위도 없이 플라톤 사상의 영향에서 유래한 것이다. "몸의 멸시와 과소평가 때문에 이 관념은 성서의 창조신앙과 결합될 수 없다"(몰트만, 294).

2. 영혼과 몸의 분리와 결합을 강조하는 이원론(데카르트)

데카르트는 매우 분명하게 몸과 영혼의 분리를 주장하였다. 그는 영혼을 정신적인 것, 사유하는 본체로 보고, 몸을 물질적인 것, 연장적인 본체로 보아서, 이 양자를 구분하고 대치시켰다. 정신은 분할할 수 없으나 몸은 분할할 수 있다. 영혼이 없는 몸은 복잡하고 생동력있는 기계이나, 영혼은 의지와 오성, 의심과 상상력 등을 포함하는 사유작용이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이해하는 인간은 마치 '기계 속에 들어 있는 유령'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는 영혼과 몸의 결합을 매우 강조한다. 인간은 통일체이며, 천사가 인간의 몸 속에 들어 있는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영혼이 인간의 몸 속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배 안에 있는 선장'의 모델을 사용한다. 그러나 영혼과 몸의 결합은 선장과 배의 결합보다 훨씬 더 강하다. 선장은 배에 생긴 구멍을자신의 바깥에서 관찰할 수가 없지만, 인간의 영혼은 자기 몸에 생긴 상처를 확인하고 관찰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고통과 불안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영혼이 몸에 첨가된 것이라는 이전의 견해를 수정했다. 몸이라는 기계도 우리와 동일한 감정과 욕망을 알며 진정한 인간을 형성할 수 있게 한다. 이리하여 데카르트는 인간의 통일성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영혼과 몸의 결합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됨에 본질적인 것이다. 인간은 영혼과 몸의 통일으로서 자기 충족적인 전체, 하나의 본체를 형성한다. 그렇다고 영혼과 몸이 본체의 절반인 것은 아니다. 영혼과 몸은 각각 완전한 본체이지만, 인간의 전체성에서 볼 때는 불완전한 본체이다. 그렇다면 이 두 본체가 어떻게 결합되어 하나의 완전한 본체를 이루는가? 데카르트는 몸과 영혼이 송과선(松果腺)이라는 기관을 통하여 상호작용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이러한 견해는 그 이후 많은 철학자들의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비물질적인 영혼이 어떻게 몸에 작용할 수 있는가? 영혼이 위치한 자리(송과선)를 지적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영혼은 비공간적이고 몸의 어느 곳에도 자리잡고 있지 않다고 말한 데카르트의 견해와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또 몸을 따로 떼어서 자동적인 기계로 보는 이원론적 인간관은 구체적인 현실 전체를 포괄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하나의 견해일 수 밖에 없다. 비록 그가 인간을 일체적으로 보려고 하는 강한 흔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늘 체험하는 영혼과 몸의 일체성을 철학적으로 허용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사람의 주체성이 연장되지 않는 사유 속에 자리잡고 있다면, 사람의 몸은 자동기계들의 대상적 세계로 전락한다. 구체적이고 사유하는 나와 몸의 결합은 완전히 우연적인 것이며 나에게 중요하지 않게 된다"(몰 296). 철학적으로 보건대 영혼은 몸과 관계없이 스스로 존재할 수 있고, 이와 마찬가지로 몸도 영혼과 상관없이 스스로 몸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나는 몸 없이도 존재할 수가 있다고 말하였고, 이런 방식으로 영원을 생각했다. 양자의 상관관계는 철학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이다. 영혼과 몸의 결합은 하나님의 의지일 뿐이다.

그러나 영혼과 몸의 결합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고유한 본질적인 측면이 아닌가? 진정한 인간의 육체성은 이미 영혼을 함축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사람을 정신화시키는 데카르트의 방식은 육체를 거짓된 비정신성 속으로 추방시키는 대가를 치루고써야만 얻어질 수 있다. 그리고 데카르트에게서 영혼과 몸의 관계는 일방적인 지배와 소유의 관계로 묘사된다. 나는 사유하는 주체이며 나는 나의 육체를 소유하고 있다. 나는 명령하고 이용하는 입장에서 나의 소유물인 나의 육체에 대하여 대치하여 서 있다"(몰, 296이하).

3. 몸의 실체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유물론(포이어바하)

포이어바하는 다른 유물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몸의 배후에 신비로운 다른 존재(영혼)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그에 의하면 신학은 곧 인간학이다. 왜냐하면 신의 이념은 인간성의 투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는 영혼이나 정신의 존재를 부인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틀림없는 유물론자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을 마치 기계에 불과한 것으로 보기 쉬운 '유물론'이라는 말보다 '유기론'이라는 말을 더 애호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을 살아 움직이는 유기적인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오관(五官)과 연결될 수 있는 것만이 현실적이다. 몸과 영혼, 이 두 본체는 인간 오성이 고립시킨 추상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둘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느냐는 물음은 공허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감각적인 상상 속에서 그려진 사물들 간에는 상호작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감각적인 존재에게만 가능하다. 포이어바하에게는 몸이 곧 영혼이다. 몸은 타인 앞에서, 타인과 더불어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인간이다.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서 하나의 부대 현상이요, 자기 존재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생긴 주관적인 착각에 불과하다. 인간은 타인과의 상호관계 가운데서도 순전히 물질적인 존재요, 유기적인 존재이다. 주관성의 차원에서는 비물질적이고 정신적인 것도 객관성의 차원에서는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것이다. 이처럼 포이어바하는 영혼을 궁극적으로 육체적인 범주로 환원시킨다.

유물론적인 인간관은 인간을 한 특정한 관점에서 볼 때 가능하다. 인간을 대상으로 고정시켜 버릴 때, 개인의 산 경험의 세계를 무시해 버릴 때, 인간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묵과해 버릴 때, 유물론적인 인간관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유물론적 인간관은 사실 상 인간을 연구하기 전에 미리 자리잡고 있던 전제에 사로잡혀서 선택한 결과이다. 여기서 채용한 방법은 물질적인 대상을 파악하기에 알맞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정신적인 요소를 모두 부정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없다. 주체적 상황을 무시해 버리면, 몸은 곧 물질적이고 유기적인 연구 대상으로 밖에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인간의 불가사의한 면은 유물론의 결론으로써만 답변될 수 없다. 인간을 그냥 주어져 있는 대상으로 관찰하는 것이 철학적으로 만족스러운 것인가? 인간이 주체임은 인간학적 성찰에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이 문제에서 우리의 일상 생활의 산 경험을 팽개쳐 버리고 어떤 특정한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일방적인 처사가 아닐까?

4. 정신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유심론(버클리)

아일랜드의 철학자 버클리의 사상은 현실 전체를 정신적인 측면에서 설명하려는 여러 입장들 중에서 매우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는 결국 물질의 존재를 부인하고 인간의 정신을 가시적인 세계의 중심으로 보기에 이르기까지 극단적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버클리의 결론은 물질이란 존재하지 않고 정신(특히 하나님과 인간의 정신)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존재란 무엇이 인간에 의해 지각된다는 뜻이다. 버클리는 먼저 나의 밖에 존재한다고 하는 소위 '외재성'(外在性)의 관념이 허구에 불과한 것임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외부 세계를 듣고 보는 행위를 촉감이나 촉감의 예측으로 환원해 버린다. 그에 의하면 처음 보기에는 인간을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은 사물은 실제로 인간 자신의 경험(촉감적인 경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몸의 현상은 곧 정신에 의존해 있다. 모든 감각적인 사물은 관념이다. 이 관념은 오직 정신 안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물의 존재는 자각되는 데 있다. 이 말은 현실을 증발시켜 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이 구체적으로 지각되며, 그 배후에 숨겨져 있는 본체의 그림자가 아님을 보여 주고자 한 것이었다. 이것의 논리적 결과는 지각된 현상의 배후에 본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물의 존재는 항상 정신과 관계맺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물은 나 개인을 떠나 존재하지만, 그 때에도 궁극적으로는 다른 정신 (하나님의 정신) 안에서 존재한다. 존재는 다같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현존의 상징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것은 무엇이나 만물 안에 있는 하나님의 표현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자연은 보편적인 상징의 성격을 띤다. 이것을 버클리는 유물론과 무신론의 반증(反證)으로 보았다. 버클리는 몸의 존재도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단지 그에게는 몸이 정신의 현존을 상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인간이 위치해 있는 세계는 결코 대상적으로 만들 수 없는 지평선을 갖고 있다는 것을 버클리는 보여 주었다. 그는 물질적인 세계에 정신적인 성격을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값진 결론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물질을 정신으로 환원할 수 있을까? 그는 몸을 너무나 정신적인 것의 측면으로 보게 되어 이를 대상이나 본체로 생각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의 배후에는 사물과 사물의 관계가 임의적인 관계에 불과하다는 유명론(唯名論)이 깔려 있다. 인간의 존재가 눈 앞에 있는 물질적인 대상으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는 측면을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사물도 완전히 정신(언어와 기호)으로만 환원할 수 없다. 언어와 기호는 우연적이거나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표시하는 사물에 본질적으로 속해 있다. 그러므로 몸은 정신적인 영역 안에서 증발될 수 없다. 유물론과 마찬가지로 유심론도 먼저 이원성을 전제하고 그 후에 한 측면을 다른 측면으로 환원하려고 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것은 항상 필연적으로 선택해야 할 유일한 출발점인가? 항상 이원성을 전제로 삼아 사물에 접근할 수 밖에 없는가?

5. 정신과의 긴장 가운데 있는 몸과 영혼의 통일성(아리스토텔레스)

철학사에서 몸과 영혼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초기의 그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영혼을 독립적인 실체로 보는 입장을 보였지만, 후기에는 영혼과 몸을 따로 분리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했다. 도장과 도장에 새겨진 무늬가 하나이듯이, 몸과 영혼도 하나이다. 몸과 영혼의 관계는 질료와 형상의 관계이다. 질료는 일정한 형상이 없이 표상할 수 없고 형상이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듯이, 영혼과 몸도 하나로 밖에는 이해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생명의 가능성을 가진 자연적인 몸의 형상이나 몸의 잠재성을 실현하는 힘으로 보았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들과 같은 평면 위에 서 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식물적인 혼, 동물적인 혼, 이성적인 인간의 혼을 구분했다. 이성적인 혼은 지상에서 가장 뛰어난 형태의 영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본입장은 몸과 영혼이 상관관계 속에 존재하고, 그 어느 것도 그 자체로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혼은 몸이 없이 그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영혼은 몸의 실현이다. 영혼은 몸이 아니지만 몸을 떠나 따로 존재할 수 없다. 몸도 영혼을 통해서만 비로소 몸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로써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체를 인과론적인 기계로 설명하는 입장에 반대되는 생기론(生氣論)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이처럼 그는 확실히 인간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반적인 영혼과 정신을 구분하고 정신을 인간에게만 있는 고유한 관조능력으로 이해한다. 정신은 영혼이 아니면서도 영혼과 불가분리적인 관계를 이루면서 활동한다. 정신의 활동은 영혼에 의해 이루어지는 내적인 생활의 일부이지만, 이 가운데서도 정신은 더 고귀하고 신적인 힘으로 나타난다. 정신은 죽음에 종속되기도 하고 영원히 존재하기도 한다. 개인적인 삶의 차원에서 볼 때 정신은 결국 죽는다. 그러나 개인의 생활을 영위하는 정신은 초개인적인 정신의 작용에 의해 비로소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발전시킬 수 있다. 현실적으로 인간 안에 침투하여 사유와 반성을 가능케 하는 정신(수용적인 정신)은 죽음과 함께 없어지지만, 원리적으로 초월해 있는 초개인적인 신적인 정신은 불멸한다. 그러나 이 초개인적인 신적인 정신이야말로 인간의 불멸성을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인적 인간이해의 배후에는 새로운 이원론이 감추어져 있다. 이 이원론은 영혼과 몸의 반대편에 정신을 설정한다. 이것은 결국 플라톤의 인간이해의 영향이다. 정신에 대한 이론은 결국 그의 경험적인 관찰로부터 형성된 전인적 인간이해와 조화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에게서 영혼과 정신의 관계는 항상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으로 남아 있다.

2. 전인으로서의 인간

구약성서에서 영혼을 일컫는 히브리어 네페쉬는 원래 호흡과 관련된 말이다(창 2:7 참조). 영혼은 생명력과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영혼은 생명력에만 국한되지 않고 감정과 정서의 소재이다. 영혼은 순전히 정신적으로 이해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곧 영혼이다. 영혼은 전 인격을 뜻하기도 하고 시체를 뜻하기도 한다. 인간은 영혼으로 인하여 하나의 통일체를 이룬다.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영혼이고 동시에 몸(바사르)이다. 인간은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의 합성물이 아니다. 몸은 하나님과 마주하는 인간의 존재, 인간과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의 일시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몸도 하나님을 갈망하는 의미에서 영혼이기도 하다(시 63:1, 84:3).

구약성서는 하나님을 영(루아흐)이라고 말한다. 인간도 영을 소유하고는 있지만, 인간은 영이 아니다. 영은 영혼인 인간 안에 움직이는 힘이고, 생명의 모체가 되는 힘의 분위기를 가리킨다. 이 힘은 하나님에게 근원을 두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일시성의 상징인 몸은 영과 반대편에 놓여 있다.

신약성서에서도 특히 바울이 몸(소마)을 말할 때마다, 그것은 전인을 뜻한다. 인간은 몸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이 곧 몸이다. 육(사르크스)은 인간의 육체성에 매여 있는 죄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죄에서의 해방은 육에서의 해방을 뜻한다. 그러나 바울은 헬레니즘의 이원론보다는 구약성서의 노선에 더 가까이 서 있다. 육은 하나님의 영원성에 비추어 본 인간의 허무성을 말한다. 육은 영혼이나 몸과 대칭되는 악한 죄성을 갖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의 본질을 표시할 때 신약성서가 사용하는 단어는 프뉴마(영)인데, 이것은 인간 자신의 특징적인 면을 나타내기 보다는 단순히 인간의 영 혹은 인간을 뜻한다. 영혼(푸시케)이라는 단어도 몸과 대칭되는 의미를 갖지 않고 히브리어의 네페쉬처럼 전인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H. W. Wolf, 문희석 역, 舊約聖書의 人間學, 분도출판사 참조) 이처럼 성서는 전반적으로 헬레니즘의 인간이해와는 달리 인간을 전인으로 이해하고 있다. 인간은 전인으로 창조되고 살고 죽고 그리고 부활에 참여한다(영혼불멸이 아닌 영적인 몸으로의 부활!).

현대사상에서도 이원론의 모델(영혼과 몸, 정신과학과 자연과학, 주체성과 객관성)은 문제시되고 있다. 영혼과 몸은 모델로 인정되지만 독립적인 실체로는 부인된다. 두 측면은 어떤 객관화의 방법을 택하느냐, 즉 안에서 밖으로 접근하느냐 혹은 안에서 밖으로 접근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 두 측면은 서로 의존해 있다. 영혼과 몸은 인간 생명의 단일성의 구성적이고 서로 속한 측면들이지, 서로에게로 환원될 수 있는 측면들이 아니다. 영혼은 인간의 육체성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고, 역으로 인간의 몸도 죽은 육체가 아니라 그 모든 생활양상에서 영혼의 작용을 받고 있다. 정신은 곧 전형적인 인간의 행동의 장(場)이요 항상 변하며 상징을 통하여 가능한 인간과 주변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영혼은 몸에, 몸은 영혼에 매여 있다. 영혼과 몸은 서로 관통하고 침투하며 일체를 이룬다(상호순환의 관계). 인간은 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