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결론 - 인간으로 지양되는 그리스도인


 

1.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

H. Küng : "왜 그리스도인인가? 참으로 사람이고자! 인간실존을 희생하는 그리스도인 실존이란 없다. 인간실존 이외나 이상이나 이하의 그리스도인 실존이란 없다. ... 그리스도인은 모든 인본주의자 못지 않게 인본주의자다. 그러나 그리스 도인은 사람다움을, 인도적임을 ... 인간성을, 자유, 정의, 생명, 사랑, 평화, 의미를 그리스도에 근거해서 바라본다. 믿음은 사람을 참으로 사람답게 만든다." (그리스도인으로 지향되는 인간, '왜 그리스도인인가' 중에서 4f.).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약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왜곡되고 부패된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하고, 또 그리스도의 형상을 덧입음으로써 종말론적인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살펴본 바대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참 인간이 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 이웃, 세계를 향하여 늘 열린 마음을 갖고 그들과 열린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진정한 인간이 되고 진정한 인간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참 인간이 된다는 것을 뜻하며,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참 인간됨을 그 목표로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자성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명분으로 우리는 그 얼마나 비인간화된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우리는 오히려 더 비인간적인 사람이 되지는 않았는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참 인간이 된다는 것과 정반대의 사실로 생각해 오지는 않았는가? 우리는 비그리스도인들보다 얼마나 더 인간적인가? 인간적인, 참으로 인간적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뭔가 초인간적인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우리는 얼마만큼 하나님에게 우리를 온전히 드리고 온전히 열어 놓았는가? 우리의 가장 귀중한 것은 유보한 채 오히려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구걸하지는 않는가? 하나님을 우리의 제한된 사고, 교리, 전통, 이해관계, 권력구조, 이데올로기 등 안으로 강압하지는 않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끊임없이 섬겨 달라고 졸라대지는 않는가? 우리는 과연 늘 기도하는 자세로 살아가고 있으며, 살아가는 자세로 기도하는가? 우리는 기도와 생활로써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정의를 먼저 구하는가?

우리는 얼마만큼 이웃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갖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 신앙을 명분으로 삼아 이웃을 외면하는 거짓 정당화를 추구하지는 않는가? 우리는 가까운 이웃의 물질적-정신적-영적 필요에 얼마나 호응하고 그를 섬기는가? 우리는 특히 고통당하는 인간의 울부짖음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는 이웃을 자신의 목적실현의 수단으로 대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이웃에게 교만하고 이웃의 일에 태만하고 이웃을 기만하지는 않는가? 우리는 자기중심적 삶을 얼마나 극복하고 있는가? 우리는 참으로 이웃에 대해 열린 인간인가?

그리고 우리는 이 세계의 문제, 억압과 소외와 폭력과 전쟁과 환경파괴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는가? 우리는 피조물의 탄식소리를 듣고 있는가? 우리는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 이웃의 울부짖음, 생명의 환희와 고통, 혼돈과 파괴의 영들의 어지러운 놀이를 느끼고 있는가? 우리는 이 세계의 미래, 지구와 우주의 미래를 진지하게 걱정하고 이에 참여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 세계의 완성을 위해서도 일하고 있는가?

2. 위대한 인간이 된다는 의미

몇몇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대개의 철학적, 신학적 인간학자들은 그 어떤 다른 생명체들보다 인간이야말로 우주 안에서 가장 높은 가치와 비중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인간이 위대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며, 어떤 점에서 인간은 다른 생명체보다 더 위대할 조건을 갖추었는가? 그것은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는 달리 주어진 본능체계나 생활조건을 끊임없이 벗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말하는 자들은 처음부터 인간이 다른 생명체보다 더 우월한 능력을 갖춘 존재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어느 진화의 단계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 예를 들면 돌고래보다 지능이 더 낫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뛰어넘었고,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켰고 개변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보다 훨씬 큰 동물조차도 지배할 수 있는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위대한 것은 다른 생명체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실에 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태초에 완성형으로 주어진 특별한 소여, 소유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앞에서 배운 바대로 바로 그 무엇이라기 보다는 그 무엇이 될 수 있는 가능성, 끊임없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 안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잘 실현된다. 그렇다면 인간이 위대해진 것은 항상 자신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고, 역으로 인간이 항상 자신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늘 더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위대함과 동시에 비참함의 근원도 존재한다. 동물은 비동물이 될 수 없다. 여우는 비여우가 될 수 없다. 단지 더 나은 혹은 더 못한 여우가 될 수는 있지만, 여우가 아닌 존재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은 비인간이 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가능성을 닫아 버리고 후퇴함으로써 동물보다 더 경직된 자가 될 수 있다. 그는 교만, 불순종, 정욕을 통하여 자기중심적인 이기적 존재가 됨으로써, 동물보다 더 못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동물은 타락을 모른다. 인간의 눈에 아무리 잔인한 행동같이 보이는 것이라도, 그것은 본능에 충실한 자연적인 반응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는 본능과 무관하게, 환경과 조건과 무관하게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바로 그만큼 위대해질 수도 있고 타락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무한한 자유, 세계개방성, 가능성은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의 조건이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인간은 참다운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를 따름으로써, 즉 그와 같이 그리고 그의 구원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이웃과 세계에 온전히 헌신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를 온전히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품성,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최대의 약속을 희망으로 갖고 있다. 우리는 정말 위대한 존재로 창조되었고 또 위대한 존재로 재창조될 수 있다. 죄악이 크다고 이 일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더 넘쳤다"고 말하지 않는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 새로운 인간이 가까왔다. 그러니 우리는 늘 회개(변화, 개혁, 혁명)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