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선택론

(제3권 21장)

 

 

제21장: 영원한 선택,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

 

(예정 교리는 중요하므로 무례한 논의나 침묵은 불가하다. 1-4)

1. 예정론의 필요성과 이것이 가져오는 이로운 결과 : 호기심의 위험성

생명의 언약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전해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또는 같은 정도로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다양성에서 하나님의 판단이 매우 놀랄만큼 깊다는 사실이 나타난다. 이 다양성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의 결정에 이바지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값없이 구원이 주어지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길이 막히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되는 일임이 분명하다면 즉시 중대하고 곤란한 문제들이 생겨나지만, 경건한 마음으로 선택과 예정에 대해서 바른 길을 따라 생각하는 바를 결정할 때에 비로소 문제가 해결된다. 많은 사람이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수많은 일반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은 구원으로 예정되고 어떤 사람들은 멸망으로 예정된다는 것 같이 불합리한 일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릇된 생각으로 스스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는 것은 다음 논의에서 밝혀질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을 놀라게 하는 그 흑암 속에서 이 교리의 유용성뿐 아니라, 그 깊은 향기로운 열매까지도 알려진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알기까지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의 원천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충분히 또 분명하게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영원한 선택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소망을 무차별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주시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절하신다는 이 대조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명백하게 드러낸다.

이 원칙에 대한 무지가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켰으며, 진정한 겸손을 얼마나 감소시켰는가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를 일체 무시하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결정하신 사람들을 선택하시지 않는다면, 꼭 알아야 할 다음의 사실을 알 길이 없다고 바울은 단정한다.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만일 행위로 된 것이면 은혜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행위가 행위되지 못하느니라"(롬 11 : 5-6 참조). 오직 하나님께서 너그러우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명백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선택의 과정을 회상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것을 제거하고자 하는 자들은, 드높게 찬양하며 선포해야 할 이 일을 극도의 악의로 희미하게 만들며, 겸손을 송두리째 뽑아버린다. 바울은 분명하게, 백성 중에서 남은 일부분이 구원을 받은 것을 은혜에 의한 선택으로 돌릴 때에 한해서, 하나님이 다만 자기의 원하시는 대로 그 구하고자 하시는 사람들을 구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며, 또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빚을 지실 수 없으므로 보상을 주시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고 증거한다.

문을 닫고 아무도 이 교리를 맛볼 수 없도록 만드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람을 꼭 같이 해한다. 이 교리 이외에는 우리에게 올바른 겸손을 가르치는 것이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진지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 없다. 또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것과 같이, 우리가 굳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공포심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며, 무수한 위험과 함정과 필사적인 투쟁 속에서도 우리를 승리자가 되게 하시려고 아버지께서 그에게 맡겨 보관하게 하신 것은 모두 안전하리라고 약속하신다(요 10 : 28-29). 이런 말씀에서 우리는, 자기가 하나님의 것임을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 끊임없는 공포심으로 불행할 것이라는 것을 추론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한 세 가지 은혜를 모르고, 우리의 구원의 기초가 우리 사이에서 제거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준다. 이 점에서 교회가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지는데 그것은 베르나르드가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피조물 사이에서 발견되거나 인식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놀랍게도 복된 예정의 품속에 그리고 또 가련한 정죄받은 대중 속에 교회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라고 바르게 가르친 것과 같다.

그러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일종의 서론으로서 두 가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할 필요가 있다.

예정에 대한 논의는 그 자체가 이미 다소 곤란한 것인데, 사람의 호기심 때문에 심히 복잡하게 되고 위험하게 되기도 한다. 인간의 호기심은 아무리 억제하려고 해도 금지된 샛길을 방종하며 높은 곳으로 돌입한다. 그대로 버려 두면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찾아내며 해명하려고 한다. 이런 염치없는 짓을 하는 사람들이 각처에 있고, 그 중에는 다른 점에서는 나쁘지 않은 사람들도 있으므로 적당한 시기에 그들에게 이 점에 관한 그들의 의무의 한도를 깨우쳐 주어야겠다.

첫째로, 예정을 탐구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의 성역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태연하고 자신 만만하게 이 곳에 뛰어들어가는 사람은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며, 미로에 들어가 빠져나올 곳을 찾지 못할 것이다. 주께서 깊이 감추어 두기로 정하신 일을 사람이 마음대로 탐색하거나, 가장 숭고한 지혜를 사람이 영원 자체로부터 풀어내려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지혜를 이해하기보다는 경외하기를 원하시며, 경외함으로써 찬탄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에게 나타내시고자 하는 그의 비밀의 뜻은 그의 말씀을 통해서 제시하셨다. 우리에게 관계되며 유익하리라고 예견하신 범위 내에서 계시하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2. 예정 교리는 오직 성경에서만 찾아야 한다

어거스틴의 글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믿음의 길에 들어섰으므로 어디까지나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이 길은 임금님의 침실에 이르는 것인데, 거기에는 지식과 지혜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다. 주께서 그의 위대하고 선택된 제자들에게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에(요 16 : 12), 그 분께서는 조금도 원망을 품으시지 않았다. 우리는 걸음을 계속해서 전진하며 성장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아직 깨달을 수 없는 일들을 우리의 마음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저 끝날이 되면, 그 때에는 우리가 지금 알 수 없는 일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주께 대해서 알아도 좋은 모든 일을 탐구할 때에, 주의 말씀만이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우리가 주에 대해서 보아야 할 모든 것을 보려고 할 때에, 우리의 눈을 비추어주는 빛은 주의 말씀뿐이다. 만일 이 생각이 우리를 지배한다면 우리는 곧 모든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말씀의 한계를 넘는 순간에 바른 길을 벗어나 암흑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과, 거기서 반드시 헤매며 미끄러 넘어지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이 점을 명심해야 하는데, 즉 예정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알려주는 것 이외의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길 없는 황야를 걸어가려는 것이거나(욥 12 : 24 참조) 또는 어두운 데서 무엇을 보려고 하는 것 못지 않게 어리석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모르는 점이 있는 것을 우리는 부끄러워하지 말자. 여기에는 일종의 유식한 무식이8 있기 때문이다. 알려고 갈망하는 것이 어리석을 뿐 아니라 위험하고, 심지어 치명적인 일에 대해서는, 우리는 차라리 자진해서 묻지 않는 것이 좋다. 경박한 호기심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 때에는, 우리는 그것에 대항하는 생각으로 억제하는 것이 종을 것이다. 즉, 물도 너무 많이 먹으면 좋지 않은 것과 같이, 호기심으로 영광을 탐구하는 자는 영광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잠 25 : 27 참조). 이 오만 무례한 행동은 우리를 파멸에 빠뜨릴 뿐이므로, 우리는 당연히 단념해야 한다.

 

3. 둘째 위험성 : 선택의 교리에 대해 걱정스런 침묵하는 것

이런 폐해를 없애려는 생각으로 어떤 사람들은 예정에 대해서 일체 말하지 않는다. 암초를 피하듯이, 그들은 이 문제를 피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그들은 이 신비한 문제를 논할 때에는 심히 침착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그들의 이 온건한 태도는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도 낮은 수준으로 내려가므로, 쉽사리 제한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지성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도 올바른 한도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주의 말씀에서 지성에 관한 확실한 법칙을 찾아야 한다. 성경은 성령의 학교이며, 여기서는 필요하고 유익한 지식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 동시에, 유익한 지식이 아니면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예정에 대해서 밝힌 것을 신자들에게서 빼앗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그들에게서 빼앗는 악한 자로 보일 수 있으며, 알리지 않았어야 좋을 것을 공표했다고 성령을 비난하고 냉소하는 자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한다.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하시는 모든 말씀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 마음과 귀를 열고 듣는 것을 우리는 허락해야 한다. 다만 제한 조건은, 주께서 입을 여시지 않을 때에는 신자도 즉시 모든 탐구의 길을 닫으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침착한 태도의 한도는, 배울 때에 하나님의 인도를 따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기를 그치실 때에는 우리도 더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위험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말아야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라고 하는(잠 25 : 2) 솔로몬의 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경건 생활과 상식으로 보아서 이 말은 모든 일에 무차별하게 적용할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구별하는 길을 찾아서 겸손과 침착의 자세를 보이며 짐승과 같은 무지로 만족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모세는 이 점을 간단한 말로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신 29 : 29).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선포하는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이 하늘 명령을 근거로 삼아서만 율법의 교훈을 연구하도록, 모세는 사람들에게 권고한다. 또 그는 이 이유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이 범위 안에 머물라고 했다. 즉 죽을 인생이 하나님의 비밀에 침입해 들어가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4. 이 교리에 위험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부인한다

불경한 사람들은 예정에 관해서 갑자기 어떤 점을 붙잡고 비난하며 욕하며 떠들어대며 조롱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의 파렴치 때문에 우리가 제한을 받는다면, 그들과 같은 무리가 모독하지 않는 신앙 문제는 거의 없으므로, 우리는 믿음에 대한 가장 중요한 교리들을 숨겨야 할 것이다. 완악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에 그가 어떻게 될 것을 미리 아셨다는 사실을 들을 때, 하나님의 본질 안에는 세 위(位)가 있다고 들었을 때에 못지 않게 교만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들은 우주 창조 이후로 5천년이 약간 지났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폭소를 금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 잠자는 상태에 있었느냐고 묻는다. 요컨대, 그들은 무슨 말을 들어도 반드시 조소하며 공박한다. 이런 모독적인 언사를 막기 위해서 우리는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말하지 않을 것인가? 우주 창조에 대해서 침묵을 지킬 것인가? 그럴 수 없다. 이 점에서나 다른 모든 점에서나 하나님의 진리는 심히 강력하므로, 악인들의 험담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소논문 견인의 은혜에 대하여(The Gift of Perseverance)에서 이 점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거짓 사도들이 바울의 진정한 교리를 중상하고 비난했지만, 바울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논의가 경건한 사람들에게 위험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충고를 방해하며, 믿음을 흔들며 속마음을 어지럽게 하며 공포심을 불어넣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의미한 말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어거스틴도 예정에 대한 설교를 너무 많이 한다는 비난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런 비난을 여지없이 반박했다. 게다가 이 점에 있어 여러 가지 어리석은 생각들이 공격하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 적당한 곳에서 처리하기로 했다. 다만 내가 그들에게 일반적으로 인정하기를 바라는 점은 이것이다. 즉 우리는 주께서 비밀로 그대로 두신 것은 탐색해서는 안 되는 동시에, 공개하신 것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한편으로 과도한 호기심을 가졌다는 비난을 피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도 은혜를 모른다는 비난을 피할 수 있다. 어거스틴도 이 생각을 잘 표현하였다.

곧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굽어보면서 천천히 걷듯이 성경도 약한 우리가 뒤떨어지지 않도록 하면서 전진하므로, 우리는 안심하고 성경을 따라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약한 영혼들을 어지럽게 할까 해서 조심하기 때문에 또는 두려워하기 때문에 예정을 아주 묻어버리고자 하는 사람들은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어리석고 사려가 없다고 비난하는 그 교만을 어떤 애매한 구실로 덮을 것인가? 그들의 태도는 마치 자기들이 현명하게 대처했다고 느끼는 그 위험성을 하나님께서 예견하시지 못했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예정의 교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교회에 해로운 일을 지각없이 누설하셨다는 듯이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비난한다.

 

(이스라엘 백성과 각 개인에 관련해서 예정을 정의하며 설명함. 5-7)

5.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 이스라엘의 선택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자는 아무도 예정 즉,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생명의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선고하시는 그 예정을 감히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반대자들, 특히 예지를 예정의 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잡다한 반대 의견으로 예정설을 묻어버린다. 물론 우리는 예정과 예지를 다 하나님 안에 두지만, 예정을 예지에 종속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께 예지가 있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모든 일은 하나님의 눈앞에 항상 있었고 또 영원히 있을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미래나 과거가 아니라 모든 것이 현재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현재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현재 우리 앞에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개념을 통해서 생각하고 계실 뿐 아니라, 참으로 그 모든 것이 그의 앞에 놓여 있는 것같이 보시며 식별하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예지는 우주전체를 통해서 모든 피조물에 미친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고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스스로 예정하셨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생이 예정되며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이 중의 어느 한 쪽 결말에 이르도록 창조되므로, 우리는 그를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개개인에게서 증명하셨을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 전체를 한 예로서 우리에게 보여주심으로 각 민족의 장래도 그의 선택에 달렸다는 것을 밝히셨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신 32 : 8-9). 그 구별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밝히 알 수 있다. 다른 백성들이 제외되고 마른나무와도 같은 아브라함이라는 개인에게서 한 민족이 특별히 선택되었다. 그러나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모세가 후세 사람들이 자랑하지 못하도록, 그들이 우수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사랑 때문이라고 가르칠 따름이다. 그들이 구원을 얻은 원인에 대해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열조를 사랑하셨고 "그 후손 너를 택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신 4 : 37).

다른 장에서는 더욱 명백하게 말한다.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신 7 : 7-8). 모세는 자주 같은 말을 반복한다. "하늘과‥‥‥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신 10 : 14- 15).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되었으므로(신 7 : 6) 성별되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또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는 것은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신 23 : 5). 신자들도 이구동성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시 47 : 4)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선물들을 누리게 된 사람들은 모두 그 선물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사랑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선물을 받을 가치가 없었다는 것을 알뿐만 아니라, 저 거룩한 조상 자신도 자기와 자손들을 위해서 그런 큰 영예를 얻을 만한 높은 덕이 없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교만을 더욱 효과적으로 분쇄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완고하고 목이 곧은 그들에게 이런 은혜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책망하신다(출 32 : 9, 신 9 : 6 참조). 예언자들도 유대 백성들이 부끄럽게도 은혜를 배반하고 떠났기 때문에 그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그들 앞에 하나님의 이 선택을 자주 언급하여 책망했다(암 3 : 2).

여하간 이제 하나님의 선택을 사람의 가치나 행위의 공로에 연결시키려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백성보다 한 백성을 총애하신 것을 보며,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 심지어 악하고 완고한 사람들까지도 총애하신 것은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말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자비를 이런 방법으로 증명하시기로 정하셨다고 해서 그들은 하나님께 항의를 할 것인가? 아무리 떠들어도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며, 하늘을 향해서 모욕의 돌을 던져도 하나님의 의를 건드리거나 상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도리어 돌은 그들의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이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될 때나,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어야 될 때에는 이 거저 주신 언약의 원칙을 상기했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 : 3). "우리 자신"을 배제하기 위하여 첨부된 부정어는 공연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풍성하게 가진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는 그렇게 큰 영예를 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기 때문에, 하나님 스스로에게서 이유를 구하셨다는 것을 그들에게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예언자는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만을 만족하게 생각하라고 하면서, "그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고 한다(시 105 : 6). 하나님의 계속되는 은혜가 선택의 결과임을 말한 후에, 결론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너그럽게 행하신 것은 "그의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시 105 : 42 참조). 온 교회의 찬송도 이 교리와 일치한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시 44 : 3) 그런데 "땅"을 말할 때, 그것은 양자를 포함한 비밀한 선별을 의미한다는데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다윗은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백성에게 권한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33 : 12). 사무엘은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삼상 12 : 22)라고 백성들에게 소망을 고무시켰다. 이와 같이 다윗도 자기의 신앙이 공격을 받을 때에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시 65 : 4)라고 하면서 무장을 갖춘다. 그뿐 아니라, 선택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어서, 첫째 해방과 둘째 해방, 그리고 그 사이의 여러 가지 은혜로 확인되었으므로, "선택한다"는 말은 이사야서에서 다음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사 14 : 1). 예언자는 미래를 묘사하여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같이 보였던 백성의 남은 자들을 모으실 것인데, 그것은 그 순간에는 무효로 된 것처럼 보이던 하나님의 선택이 확고부동하다는 표징이 되리라고 한다.

그는 또 다른 곳에서,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고 말하여(사 41 : 9),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인자하심이 놀랍도록 너그러우시며 끊임없이 계속됨을 역설한다. 스가랴서에 있는 천사는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표현하여, "여호와께서‥‥‥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라고 한다(슥 2 : 12). 마치 하나님께서 혹심한 징벌로 이 도성을 버리셨거나, 민족의 포로 생활로 인하여 선택이 중단된 것 같다는 말이다. 그러나 선택의 표징이 항상 나타나는 것이 아닐지라도, 선택 자체는 여전히 침범할 수 없다.

 

6. 둘째 단계 : 이스라엘 백성 개인들에 대한 선택과 유기

우리는 이제 선택이 둘째 단계 곧 제한적인 성질을 첨가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더욱 특별한 은혜가 분명히 나타난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서 어떤 사람은 버리시고, 어떤 사람은 교회 안에 보호하셔서 그의 자녀들 사이에 두셨다. 이스마엘은 영적 언약의 표징인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동생 이삭과 동등한 지위를 얻었지만 그는 제외되었다. 그 다음에 에서가 제외되고, 그 후에 무수한 사람들이-거의 모두 온 이스라엘이 제외되었다. 이삭 안에서 그의 후손이 부르심을 받았다. 같은 부르심이 야곱에게 계속되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신 것도 똑같은 일례이다. 이 일은 시편에서,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시 78 : 67-68)라고 훌륭하게 선포되었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여러 번 반복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비밀을 이 변경을 통해서 밝히 드러낸다. 이스마엘과 에서의 무리가 양자된 지위에서 제외된 것은 그들 자신의 결함과 죄책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충실히 지켜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언약을 위반하고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른 민족보다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다. 시편을 보면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시147 : 20)라고 언급되어 있다. 두 단계를 보아야 한다고 내가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 온 민족을 선택하심에 있어서 그는 오직 그의 관용을 베푸실 때에 어떤 법에 의해서 구속을 받으시지 않고 자유로우시기 때문에 은혜의 평등한 분배를 그에게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은혜가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은혜가 값없이 주어지는 것임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말라기는 이스라엘이 은혜를 저버렸음을 역설한다. 그들은 전인류 가운데서 선택되었을 뿐 아니라, 거룩한 가문에서 선별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인데, 불충하고 불경하여 은혜를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경멸하였기 때문이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고 하나님께서는 물으신다.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말 1 : 2-3, 롬 9 : 13)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이 다 한 거룩한 아버지께로부터 난 언약의 상속자 즉, 거룩한 뿌8??가지들이었으므로, 그리고 야곱의 자손은 그 존엄한 지위를 가지도록 용납되었으므로, 둘 다 당연히 특별한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셨다. 그러나 맏아들인 에서가 제외되고, 출생으로 보면 그보다 낮은 그들의 조상 야곱이 후계자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중으로 은혜를 저버리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시며, 그들이 그 이중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고 한탄하셨다.

 

7. 실제적인 선택으로서의 개인의 선택

하나님께서 그 은밀한 계획에 의하여 원하시는 사람을 거저 선택하시며 다른 사람들을 제외하신다는 것이 이제 충분히 밝혀졌다. 그러나 그 분께서 개개인에게 구원을 제공하실 뿐만 아니라 결과의 확실성이 보류되거나 의심스럽지 않도록 배정하시는 것을 알지 않으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택은 아직 절반 밖에 해명되지 않은 것이다. 이런 개인들이 바울이 말하는 저 독특한 후손으로 인정된다(롬 9 : 7-8, 갈 3 : 16이하 참조). 선택이 되는 것은 아브라함의 수중에 놓였다. 그러나 그 후손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썩은 지체로 인정되어 제외되었다. 그러므로, 선택의 효과가 나타나며 참으로 영속하기 위해서 우리는 머리로 올라가야 한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 머리 안에서 그의 선민을 모두 모으시며 풀 수 없는 끈으로 그들을 자기에게 결합시키셨다. 다른 민족들을 배제하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을 선택하신 데에는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은혜가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머리에 접붙임을 받아 결코 구원에서 제외되는 일이 없으므로, 그들에게서 은혜의 더욱 위대한 힘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방금 인용한 말라기서의 말씀에서 출발하여, 하나님께서 영생의 계약을 맺으시고 어떤 민족을 자신에게 부르실 때에는, 그 중의 일부를 위해서 특별한 선택의 방법을 사용하시지, 무차별적인 은혜로 모든 사람을 효과적으로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고(롬 9 : 13), 훌륭한 논법을 전개한다.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라고(말 1 : 2) 하신 말씀은 이조상의 모든 후손들에게 적용되는데, 예언자는 이 사람들과 에서의 후손들을 대조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 안에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신 채로 지나치시는 일이 없는 선택의 실례를 우리 앞에 보여주신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을 "남은 자"라고 부르는 것에 바울이 관심을 갖는데(롬 9 : 27, 11 : 5, 사 10 : 22-23 참조), 그 까닭은 무수한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탈락하여 사라지고, 극히 적은 일부만이 남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한 민족에 대한 전체적인 선택이 때로는 확고하며 유효하지 못한 이유는 쉽게 설명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맺는 사람들에게 끝까지 참고 견디어 언약을 지킬 수 있게 하는 중생의 영을 즉시 주시는 것이 아니다. 이 내면적인 은혜만 그들을 보존할 수 있는데, 그것이 없는 외면적인 변화는 인류가 버림을 당하는 것과 극소수의 경건한 자들이 선택되는 것 사이의 중간 상태이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했지만(신 32 : 9, 왕상 8 : 51, 시 28 : 9, 33 : 12 기타), 그 중에는 이방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와 구속자가 되시겠다고 하신 것은 무의미한 약속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를 버리는 많은 배반자들보다 자기가 거저 주신 은혜에 주의하신다. 배반하는 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신실은 배제되지 않는다. 이는 자기를 위하여 남은 몇 사람을 보존하심으로써 그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는 것"이 나타났기 때문이다(롬 11 : 29).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민족들보다 아브라함의 자손 사이에서 계속적으로 교회를 모으셨다는 사실은 그의 언약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대부분이 언약을 어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언약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도록. 그것을 소수에 국한시키셨다. 요약하면,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공통으로 택하신 것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일부에게 주신 더 큰 은혜를 나타내 보일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상징이었다. 바울이 아브라함의 혈통에 의한 자손들과 이삭과 같이 부르심을 받은 영적 후손들을 조심스럽게 구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갈 4 : 28). 단순히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이 헛되고 무익한 일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런 말은 반드시 언약을 모욕하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을 자기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 변할 수 없는 계획은 본질적으로는 이 영적 후손들에게서만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독자들은 어느 쪽으로나 선입견을 가지지 말고, 성경의 구절들에 비추어 취해야 할 견해가 분명히 나타나기까지 기다리기를 권고하는 바이다.

 

선택 교리의 요약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분명히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고도 변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구원으로 받아들이실 사람들과 멸망에 내어 주실 사람들을 오래 전에 걱정하셨다고 말한다.

선택된 사람들에 관해서 이 계획은 그들의 인간적 가치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를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정 무흠하면서도 불가해한 판단으로, 저주에 넘겨주신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문을 닫으셨다. 그런데 선택받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선택의 증거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선택받은 자들이 선택의 완성인 영광으로 들어갈 때까지, 칭의도 선택을 나타내는 한 표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께서 소명과 칭의에 의해서 선택된 자들을 인치시는 것과 같이, 버리신 자들에 대해서는 그의 이름에 대한 지식이나 성령에 의한 성결의 길을 끊으심으로써, 이를테면 이런 표로써 어떤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가를 계시하신다. 여기서 나는 예정론을 뒤집어엎기 위해서 어리석은 사람들이 조작한 여러 가지 공상을 무시하겠다. 그런 공상은 말로 표현되면 즉시 자체의 허위성을 충분히 증명하게 되므로 반박할 필요도 없다. 나는 다만 유식한 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단순한 이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과, 불경건한 자들이 하나님의 의를 공격하기 위해서 그럴 듯하게 제의하는 것들을 잠깐 검토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