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

(제2권 16장)

 

 

제16장: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구속자의 기능을 완수하였는가? 여기서 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도 논한다

 

6. "십자가에 못박힘"

그리스도의 죽으신 모양도 독특한 신비를 나타낸다. 사람들의 의견뿐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 규정에서도(신 21 : 23) 십자가는 저주를 받은 것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때에 스스로 저주를 받으셨다. 일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아니, 우리를 덮고 있던 저주를 완전히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에게 옮겨 놓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또 율법에서 희미하게 예시된 일이었다. 그런데 죄를 위해 바치는 희생과 속죄 제물을 "아슈모트" 라고 불렀다. 이것은 원래 죄 자체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다. 성령께서는 이 말을 상징적으로 사용하심으로써 이 제물들은 죄로 인한 저주를 맡아 쓰고 가는 속죄 염소와 같다는 것을 알리셨다. 모세의 율법에 있는 희생 제물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 그 상징들의 원형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났다. 그러므로 그는 완전한 속죄를 성취하려고 자기의 목숨을 "아샴"으로서(사 53 : 10), 곧 선지자들이 말한 것 같이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서 내주셨다. 그 제물 위에 이를테면 우리의 오점과 벌을 던져서 우리에게 돌리지 않게 만드신 것이다. 사도는 이 점을 더욱 명백하게 증언해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가르친다(고후 5 : 21).

하나님의 아들이 아무 죄도 없이 완전히 깨끗하면서도, 우리가 지은 죄악의 수치와 비난을 맡으시고, 그 대신에 우리에게 자기의 순결을 입히셨다. 바울이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의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고 말하는 것도(롬 8 : 3) 같은 뜻인 듯하다. 죄의 저주가 그리스도의 육신에 전가되었을 때에, 아버지께서 죄의 세력을 깨뜨리셨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아버지에게 드려 속죄 제물로서 죽으시게 한 것은 그의 희생으로 모든 배상을 치른 후에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기 위해서였다고 하는 말뜻이 여기 있다. 이제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사 53 : 6) 하는 예언자의 뜻은 분명하다. 즉, 더러운 불의를 깨끗이 하려는 사람이 책임 전가에 의해서 그 불의를 썼다는 것이다. 그가 못박히신 십자가가 이 일을 상징한다는 것은 사도의 증언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갈 3 : 13-14, 신 21 : 23). 베드로가 "그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가르치는 것도 같은 뜻이다(벧전 2 : 24). 우리는 바로 그 저주의 상징을 보고 우리를 압박하던 짐이 그에게 옮겨졌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저주에 압도되어 쓰러졌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그는 저주를 담당하셔서 그 힘을 전적으로 꺾고 부수어 버리셨다. 그래서 믿음은 그리스도가 받으신 정죄에서 무죄 방면을 얻으며, 그가 받으신 저주에서 축복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마치 수치가 가득하던 십자가가 개선하는 전차로 변한 듯이, 자기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얻으신 승리를 웅장하게 선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십자가에 못박으시고‥‥‥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셨느니라"고 바울은 말한다(골 2 : 14-15),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른 사도가 증언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자기를 드렸기" 때문이다(히 9 : 14). 여기서 저 본성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 일들이 우리 마음속에 굳고 깊게 뿌리를 박기 위해서 우리는 희생과 씻음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희생 제물이 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가 우리의 구속과 몸값과 대속물이시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구속 방법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피를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는 배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 버리는 놋대야가 되었다(참조, 엡 5 : 26, 딛 3 : 5, 계 1 : 5).

 

7. "죽으시고 묻히시며"

`사도신경에는 다음에 "그리스도의 죽으시고 묻히시며"라고 한다. 여기서도 그가 우리를 구속하는 값을 치르기 위해서 모든 점에서 우리를 대신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죽음의 멍에 아래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죽음의 권세에 자기를 넘겨주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구출하셨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다"고(히 2 : 9) 하는 사도의 말도 이런 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죽지 않게 하셨다. 바꿔 말하면, 자기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출해서 확실히 살게 하셨다. 그러나 그와 우리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었다. 즉, 그가 이를테면 죽음이 자기를 삼키는 것을 허락하신 것은 죽음의 깊은 연못에 자기가 빠져 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불원에 삼켜 버렸을 그 죽음을 자기가 삼키시려는 생각이었다(참조, "죽음을 삼키심"은 벧전 3 : 22의 불가타역에 있음). 그가 자신이 죽음에 따른 것을 허락하신 것은 그 세력에 압도되시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위협하며 우리의 몰락한 상태를 기뻐한 그 죽음을 굴복시키시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목적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는 것이었다(히 2 : 14-15). 이것이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처음 열매다.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우리가 얻는 둘째 효과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그의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죽음이 땅에 붙은 우리의 지체들을 죽여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며,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을 죽여 번성하거나 결실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의 장사지낸 바 된것도 같은 결과를 나타낸다. 그 매장에 우리도 참가함으로써 그와 함께 죄에 대해서 매장되는 것이다. 사도는 가르치기를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와 연합한 자가 되었으며"(롬 6 : 5), "그와 함께 장사되어" 죄에 대하여 죽었으며(롬 6 : 4),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갈 2 : 19, 6 : 14),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한다(골 3 : 3). 이런 발언들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신 모범을 나타내 보이라고 우리에게 권면할 뿐 아니라,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무용하고 무효한 것으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그 죽음에 내포된 효력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나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는 우리가 받아 즐길 이중의 축복을 제시한다. 즉, 우리가 묶여 있던 그 죽음에서 해방되며, 우리의 육신을 죽이는 것이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교리에 대한 설명. 8-12)

8. "지옥에 내려 가사"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옥에 내려간 사실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구속을 실현하기 위해서 적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고대 저술가들의 글을 보면, 사도신경에 있는 이 어귀가 교회에서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 않은 때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교리의 요점을 설명할 때에는 이 어귀를 보존해야 한다. 매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귀중하고 유용한 신비가 거기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일부의 고대 저술가들은 이 어귀를 생략하지 않는다.그러므로 이 어귀는 얼마 후에 삽입되었고, 교회 내에서 즉시 통용되지 못하고 점진적으로 관례가 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 표현이 모든 경건자의 공통된 신념을 반영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교부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를 말하지 않은 사람이 한 명도 없고, 다만 해석이 서로 다르다. 그러나 누가 언제 이 문구를 삽입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도리어 이 신경에 대해서 주목할 점은, 거기 우리의 믿음의 전체가 모든 세부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포함되었으며,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서 오지 않은 것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이 조문을 신경에 넣는 데 대해서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신조가 우리의 구속 전체를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가는 곧 명백하게 될 것이다. 즉, 이 신조를 제거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의 혜택은 많이 상실될 것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이 신조에 아무 새로운 말이 없고, 그리스도의 매장에 대해서 이미 말한 것을 반복하며, "지옥"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자주 "무덤"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말의 뜻에 대해서 그들이 하는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한다. "지옥"은 "무덤"으로 해석해야 할 때가 많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가 그들의 의견에 반대하며, 나를 그들에게 찬성하지 않도록 설복한다. 그 자체로서 전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일을 분명하고 쉬운 말로 표명한 다음에, 그것을 밝히기보다 도리어 모호하게 만드는 말로 되풀이한다는 것은 얼마나 부주의한 짓이었겠는가! 같은 문맥에서 같은 일을 위해서 두 가지 표현이 사용될 때에는 후자는 전자의 설명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장사한 바 되셨다"는 것이 "그가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뜻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설명이 될 것인가? 둘째로, 우리 믿음의 중요한 점들을 적절하고도 가장 간결하게 요약한 글에 이런 쓸데없는 반복 문구가 잠입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이 문제를 신중하게 고려한 사람이라면 곧 내게 찬성하리라는 것을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9. 그리스도는 음부 세계에 가셨는가?

어떤 사람들은 해석이 달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율법하에서 죽은 족장들의 영혼들에게 내려가서 이미 성취된 구속을 발표하며 갇혀 있는 감옥에서 그들을 해방하셨다고 한다.

이 해석을 뒷받침 하기 위해서 그들은 시편에서 "저가 놋 문을 깨뜨리시며 쇠 빗장을 꺽으셨다"라는 말씀을(시 107 : 16) 인용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마찬가지로, 스가랴의 "그가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으리라"는 말씀을 인용한다(슥 9 : 11 의역). 그러나 시편은 먼 나라에서 노예가 된 사람들이 해방되리라는 예언이며, 스가랴는 백성이 당한 바벨론의 비극을 깊고 물 없는 구덩이에 비교하는 동시에, 교회 전체의 구원은 낮고 깊은 곳에서 석방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이럭저럭하는 중에 그곳을 지하에 있다고 생각해서 "림보"라는이름까지 붙였다. 이 이야기는 유명한 저술가들이 반복했고, 지금도 여러 사람이 참말이라고 열심히 옹호하지만, 여전히 이야기에 불과하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감옥에 가둔다는 것은 유치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무슨 필요가 있어서 그리스도의 영혼이 그들을 석방하러 그리로 내려가셨을 것인가?

나는 기꺼이 인정한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힘으로 그들에게 비추셔서, 그들이 소망으로만 맛보던 그 은혜가 그 때에 세상에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을 베드로서에 있는 구절도 아마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망대'에 있는 또는 보통 번역하는 대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벧전 3 : 19). 문맥으로 보아서, 그 때보다 먼저 죽은 신자들도 우리와 같은 은총에 참가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힘이 죽은 자들에게까지 미친다고 해서 그 힘을 찬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건한 영혼은 간절히 기다리던 강림을 목전에 보고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악인들은 자기들이 구원에서 전적으로 배제된 것을 더욱 분명히 깨달았다. 그런데, 베드로는 경건자들과 불신자들을 분명히 구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양자를 무차별적으로 혼동했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는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알았다고 가르치려는 것뿐이다.

 

10. "음부에 내려가심"은 우리를 위해서 받으신 영적인 고통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신경과는 별개로, 그리스도의 지옥에 내려간 것에 대해서 더 확실한 설명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 있는 설명은 거룩하고 경건할 뿐 아니라, 놀라운 위로가 가득하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것이 육체의 죽음뿐이었다면, 그 죽음에는 효험이 없을 것이다. 참으로 그는 동시에 하나님의 엄격한 천벌을 받으며, 그 진노를 진정시키며, 그 공정한 심판대로 배상을 치르실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는 지옥의 세력과 영원한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상대로 직접 맞붙어 싸우셔야 했다. 조금 전에 인용한 예언자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며",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고 한다(사 53 : 5). 예언자가 말하려는 뜻은 그리스도가 악인들을 대신해서 보증과 담보가 되시며, 심지어 피고가 되셔서 그들이 받아야 하는 모든 벌을 참고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벌을 받으셨다-다만 예외가 하나 있었다. "그는 사망의 고통에 매여 있을 수 없었다"(행 2 : 24). 그러므로 그가 지옥으로 내려가셨다고 말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악인들에게 가하신 죽음을 그가 당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매장이 있기 전에 있었던 일을 그 뒤에 두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이유로 순서가 이렇게 뒤집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너절하고 가소로운 반대를 하는 것이다. 문제의 요점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당하신 고난을 신경이 말한 다음에, 그가 하나님 앞에서 받으신 저 보이지 않고 헤아릴 수 없는 심판에 대해서 적절히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구속하시는 대가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 보다 더 위대하고 훌륭한 값도 주셨다는 것을 즉, 정죄와 버림을 받은 사람의 무서운 고민을 그의 영혼이 겪으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하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하늘에 정좌하심. 13-16)

13.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다음에 있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이다. 이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것이 완전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과 장사에서 나타난 것은 무력함뿐이므로, 믿음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해서 그 완전한 힘을 얻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대로 배상을 치르며, 저주가 제거되며, 형벌을 완전히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완전히 실현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죽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되었다고 한다(벧전 1 : 3).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에 대한 승리자가 되신 것과 같이, 우리의 믿음이 죽음을 이기는 것도 오직 그의 부활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의 의롭다 함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느니라"고 하는(롬 4 : 25)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성격을 더 잘 표현한다. 그 뜻을 바꿔 말하면, "그가 죽으심으로써 우리 죄가 제거되고 그가 부활하심으로써 의가 소생하며 회복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 자신이 죽음에 굴복해 버리셨다면, 어떻게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하실 수 있었겠는가? 그 자신이 싸움에 지셨다면, 어떻게 우리를 위해서 승리를 얻어 주실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내용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나누어, 그의 죽음에 의해서 죄가 말소되고 죽음이 말살되었으며, 그의 부활에 의해서 의가 회복되며 생명이 소생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부활의 덕택으로 그의 죽음은 우리 안에서 그 권능과 효력을 나타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라고 한다(롬 1 : 4) 그 때에 그가 드디어 하늘 권능을 나타내 보이셨고, 이 권능은 그의 신성(神性)을 분명히 반영하는 거울인 동시에 우리의 믿음을 굳게 지탱해 주기 때문이다. 다른 데서도 바울은 그는 육신이 약하시므로 고난을 받으셨으나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살으셨다고, 같은 뜻으로 가르친다(고후 13 : 4). 같은 의미에서 바울은 다른 곳에서 완전성을 논할 때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함이라"고 말하고, 즉시 계속해서 "그의 죽으심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라고 첨부한다(빌 3 : 10). 이와 긴밀히 일치하는 것이 베드로의 발언이다. "하나님께서는 저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셨으니 이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 1 : 21).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지탱되는 믿음이 흔들린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아래서 우리를 지켜주는 하나님의 권능이 특히 부활에서 나타났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동시에 그의 부활에 속한 일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또 "부활"이란 말에 대해서도 부분으로 전체를 대표하는 이 표현법이 적용된다. 즉, 죽음과 별도로 부활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우리는 그것은 특히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일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사심으로써 승리자의 상을 타셨으므로 -즉, 부활과 생명이 있게 하셨으므로-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속임수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고(고전 15 : 17) 주장하는 것은 바르다. 따라서 그는 다른 구절에서 정죄가 일으키는 공포심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랑한 후에, 더욱 역설하는 의미로, 확실히 죽으신 이가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의 중보로서 하나임 앞에 나타나신다고 첨부한다(롬 8 : 34).

그뿐 아니라, 우리의 육을 죽이는 일은 그의 십자가에 참가하는 데 달렸다고 우리가 이미35 설명한 것과 같이, 우리는 그의 부활에서도 거기 부합하는 혜택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에 합하여 접붙임이 된 것을 그의 부활에 참여하여 우리로 하여금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사도는 말한다(롬 6 : 4) 따라서 다른 구절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에서(골 3 : 3) 우리는 지상에 있는 우리의 지체를 죽어야 한다는 증명을 얻어낸다(참조, 골 3 : 5). 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근거로, 우리는 지상의 일이 아니라 위에 있는 일을 구해야 한다고 추론한다(골 3 : 1-2). 이런 말은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새로운 생명을 추구하라고 권고할 뿐 아니라, 우리는 그의 권능에 의해서 중생하여 의를 얻었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그의 부활에서 셋째 혜택도 받는다. 즉, 그의 부활이 실증하는 일종의 보증을 받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얻는다. 바울은 이 문제를 고린도전서 15 : 12-26에서 자세히 논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이 말은 그의 죽음과 부활의 진리를 표현한다.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이 자연히 죽는 것과 같은 죽음을 겪으셨고, 그가 죽을 인간으로서 입으셨던 그 육신으로 영생 불사를 받으셨다는 것이다.

 

14. "하늘에 오르사"

부활과 승천이 연결되어 있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그리스도께서는 비천한 지상 생활과 십자가의 수치를 벗어버리고 부활하심으로써 영광과 권능을 더욱 완전히 나타내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참으로 나라를 창건하신 것은 비로소 승천하신 때였다. 그리스도는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는 사도의 말은 이 일을 가리킨다(엡 4 : 10). 거기는 모순이 있는 것 같지만, 훌륭한 일치가 있다는 것을 바울은 밝힌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떠나셨으나, 떠나심으로써 우리에게 더욱 유익하게 되도록 하셨다. 지상에 우거하신 동안은 미천한 육신을 집으로 삼으시고 그 안에만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오라"고 하는 유명한 초청의 말씀을 기록한 다음에(요 7 : 37),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믿는 자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첨부했다(요 7 : 39 의역). 주께서도 친히 이 점을 제자들에게 확인하셔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6 : 7). 그는 육신으로 계시지 않는 문제로 그들을 위로하시면서, 그들을 고아같이 버리지 않고,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더 좋은 방법으로 그들에게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셨다(요 14 : 18-19, 16 : 14).

사실, 그들은 그때에 더욱 확실한 체험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 행사하시는 권위와 권능은 신자들을 축복 가운데 살며 기쁨으로 죽게 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 후에 성령을 얼마나 풍성하게 부어 주셨으며, 얼마나 놀랍게 그의 나라를 확대하셨으며, 얼마나 그의 큰 권능을 발휘하셔서 자기 백성을 도우며 원수들을 흩으셨는가를 안다. 그러므로 승천하심으로써 육체적으로 우리 앞에 계시지 않게 하셨지만(행 1 : 9), 그것은 아직 지상 순례를 계속하는 신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더욱 직접적인 권능으로 천지를 주관하시려는 뜻이었다. 승천하심으로써 약속하신 일을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것을 실현하셨다. 그의 몸이 모든 하늘 위로 들려 가신 것과 같이, 그의 권능과 힘은 온 천지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확산되며 보급되었다. 나는 내 말보다 어거스틴의 말로 이 점을 설명하겠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셔서 아버지의 우편으로 가셨다가, 그리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게 되어 있었다. 그는 순수한 가르침과 믿음의 원칙에 따라 육체적 임재로 이 일을 하려 하셨다. 그가 영으로 함께 계시는 것은 그의 승천 후에 있게 되어 있었다." 다른 데서 어거스틴은 더 자세하고 분명하게 말한다. "말할 수 없고 볼 수 없는 은총에 의해서는, 그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이(마 28 : 20) 실현될 것이다. 말씀이 취하신 육신에 의해서는, 처녀에게서 나신 사실에 의해서는, 유대인들에게 잡혀 나무에 달리며 십자가에서 내리워 세마포로 싸여 무덤에 눕히며 부활로 나타나신 사실에 의해서는,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이(마 26 : 11) 실현되었다. 왜? 그는 40일 동안 육신으로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며, 그들과 함께 계셨을 때에 그들이 보면서도 따라가지 못하는 가운데 승천하셨고(행 1 : 3, 9) 여기는 더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는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막 16 : 19). 그러나 그의 숭엄성의 임재를 거두지 않았으므로 그는 여기 계신다(참조, 히 1 : 3). 그러므로 숭엄성의 임재에 의해서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 그러나 육신의 임재에 관해서는 제자들에게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이(마 26 : 11) 바르다. 교회는 육신의 임재로는 그리스도를 며칠 동안 모셨고 지금은 믿음으로 모시며 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15.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결과적으로 곧 이어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말이 있다. 이 비유는 임금들이 정사를 맡기는 신하들을 자기 옆에 앉히는 데서 왔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통치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으로 영접되셨다고 한 것이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천지에 대한 주권을 받으시며, 위임된 정권을 엄숙히 장악하셨으며, 일단 차지하셨을 뿐 아니라, 심판 날에 내려오실 때까지 통치를 계속하시리라는 것이다. 사도가 이렇게 해석한 발언을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엡 1 : 20-21. 참조, 빌 2 : 9), 또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고전 15 : 27),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 1 : 22). 이것으로 저 "앉아 계시는" 목적을 알 수 있다. 즉, 천지의 모든 피조물들이 그의 숭엄성을 우러러보아 경탄하며, 그의 지배를 받으며, 그의 명령에 복종하며, 그의 권능에 순종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목적을 가르치려고 사도들은 자주 이 일을 회상해서, 만사는 그리스도의 결정에 위임되었다고 했다(행 2 : 30-36, 3 : 21, 4장, 히 1 : 8). 그러므로 이 말은 그의 축복된 처지를 가리킬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못이다. 사도행전에 스데반이 그리스도가 서 계신 것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행 7 : 55) 중요한 점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된 것은 그의 자세가 아니라, 그의 숭엄한 권위였기 때문이다. "앉아 계시다"는 것은 하늘 심판대에서 주재하고 계시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리스도가 심판하러 미래에 다시 오심. 17)

17.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있는 자기의 권능에 대해서 자기 백성에게 분명한 증거를 주신다. 그러나 그의 나라는 지상에서는 이를테면 비천한 육신 밑에 숨겨졌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그가 저 마지막 날에 나타내실, 눈에 보이는 임재(臨在)를 심사 숙고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옳다. 그는 승천하신 때와 같이, 보이는 형태로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이다(행 1 : 11, 마 24 : 30). 그리고 그의 나라의 형언할 수 없는 숭엄성과 영생 불사의 광채와 신성(神性)의 무한한 권능과 함께 일단의 수호 천사들을 데리고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실 것이다. 우리는 그가 그 날에 저리로부터 우리의 구속자로서 오시는 것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시면 양과 염소, 선택된 자와 버림받은 자를 분리하실 것이다(마 25 : 31-33). 생사간에 아무도 그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나팔 소리가 땅 끝까지 울려 모든 사람을 심판대 앞에 부를 것이니, 그날에 살아 있는 사람들과 이미 산 자들 사이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모두 소집될 것이다(살전 4 : 16-17).

"산 자와 죽은 자"라는 말을 다르게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대 저술가들 중에 이 표현을 설명하는 방법에 대해서 의심을 품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물론 안다. 그러나 방금 제시한 설명은 평이하고 분명하므로 신경에 훨씬 더 가깝다. 신경은 분명히 보통 사람이 이해하도록 쓴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 뜻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라"고 한 바울의 발언과 다르지 않다(히 9 : 27). 최후 심판 때에 아직 육신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자연적인 죽음은 겪지 않겠지만, 그들이 당할 변화는 죽음과 같을 것이므로 "죽음"이라고 불러도 부적당하지 않겠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다 변화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고전 15 : 51). 이것은 무슨 뜻인가? 그들의 죽을 운명의 생명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삼켜 버리고, 새로운 본성으로 직접 변화하리라는 것이다(고전 15 : 52). 이렇게 육신이 사라지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산 자와 죽은 자가 심판에 호출되리라는 것은 여전히 바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이다(살전 4 : 16-17). 그런데 이 표현은 누가가 기록한 베드로의 설교와(행 10 : 42) 디모데에게 보낸 바울의 엄명에서(딤후 4 : 1) 따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