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칭의론

(제3권 14장)

 

 

제14장: 칭의의 시작과 지속적인 발전

 

(자연 상태의 인간은 죄로 죽었으며 구속될 필요가 있다. 1-6)

1. 칭의와 관련하여 인간은 네 종류로 나누인다

이 문제를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일생 동안 어떤 종류의 의를 가질 수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 좋겠다. 의를 네 가지로 구별하려 한다. 사람은 ⑴ 하나님을 전연 모르고 우상 숭배에 파묻혀 있거나, ⑵ 성례전에 참가하게 되었으나, 불결한 생활을 계속하여 입으로 하나님을 고백하면서도 행동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거나, ⑶ 그 사악한 마음을 헛된 의식으로 감추는 위선자이거나, ⑷ 하나님의 영으로 중생하여 진정한 성화에 관심을 가지는 이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인다.

첫째 경우에 있어서 사람을 그 천품에 따라 판단한다면, 머리로부터 발바닥에 이르기까지 선한 것은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성경의 증거를 거짓말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면, 아담의 모든 자손에 대해서 성경이 판단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그들은 마음이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였다는 것이다(렘 17 : 9). 또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온통 악하며(창 8 : 21), 사람의 생각이 허무하며(시 94 : 11),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며(시 36 : 1, 롬 3 : 18),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시 14 : 2). 요컨대 그들은 육이다(창 6 : 3). 이 말의 뜻은 바울이 열거한 행위를 모두 포함한다. 즉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그밖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추하고 가증한 것이다(갈 5 : 19-21). 이런 것을 사람들은 자랑하며 의지할 가치가 있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거룩하다고 인정되는 덕행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탁월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찬란한 겉모습을 전연 무시하기 때문에 의를 위하여 사람의 행위에서 어떤 가치를 발견하려면, 우리는 행위의 근원을 깊이 탐구해야 한다. 여기에 논의할 광범위한 분야가 있으나 이 문제를 간결하게 처리할 수도 있으므로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히 나의 주장을 서술하겠다.

 

5.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의는 은혜에서 오며, 아무리 선한 행위일지라도 행위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자연 상태와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비교하면 그 증명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은혜를 베풀만한 가치를 느끼게 하는 것을 전연 찾으실 수 없지만 우선 너그러우심으로 값없이 사람에게 오신다고, 성경은 도처에서 가르친다. 죽은 사람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아는 지식으로 우리를 비추실 때에 그는 우리를 소생시키시며(요 5 : 25),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다고 한다(고후 5 : 17). 특히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자주 이러한 비유로 찬양한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위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한다(엡 2 : 4-5). 다른 곳에서는 아브라함을 모범으로 삼아 일반 신자들이 부르심을 받는 데 대해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한다(롬 4 : 17). 우리가 없는 자라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욥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교만을 엄격하게 억제하여 말씀하신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욥 41 : 11). 바울은 이 말씀을 설명하는 의미에서(롬 11 : 35),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순전히 부끄러운 빈곤과 허무 이외에 어떤 다른 것을 차지고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언급한다.

그러므로 위에서 인용한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행위에 의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구원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엡 2 : 8-9 참조) 증명하려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 : 10). 사도가 말하려는 뜻은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우선 중생함으로 해서 오는 것이며, 누가 자기의 의로 하나님을 감동시켰다고 자랑할 수 있느냐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천성대로 한다면 우리가 선행을 하는 것은 돌에서 기름을 짜내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수치스러운 상태에 있는 인간이 아직도 자기에게 무엇이 남아 있는 듯이 감히 생각한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 위대한 도구와 함께 주께서 "우리를‥‥‥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임을(딤후 1 : 9) 인정해야 한다. 또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을(딛 3 : 4-5,7) 인정해야 한다. 이 고백에 의해서 우리는 사람으로부터 모든 의를 빼앗는다. 즉, 하나님의 자비만으로 중생하여 영원한 생명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에게 털끝만한 의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만일 행위의 의가 우리를 의롭다 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된다면,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말이 거짓말이 되기 때문이다. 사도가 의롭다 하심이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에 분명히 그는 이 사실을 잊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구절에서 만일 행위가 도움이 된다고 한다면 은혜는 벌써 은혜가 아닐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롬 11 : 6). 주께서 자신이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마 9 : 13) 말씀하신 뜻도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일 죄인만을 받아준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의를 가장하면서까지 들어가려고 애쓸 것인가?

 

6. 사람은 자기의 의를 위해서 아무 것도 공헌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비를 주장하기 위해서 애쓸 때에, 나는 하나님의 자비가 의심스럽거나 모호하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하나님의 자비에 부당한 위험한 일을 저지르지나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악의는 큰 압력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결코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 길을 좀더 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성경의 교훈이 분명하므로 내 자신의 말보다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주장을 세우겠다. 이사야는 인류 전체의 멸망을 모사한 다음에 회복의 순서를 아름다운 말로 첨가한다.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시고‥‥‥기뻐 아니하시고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사 59 : 15-16). 하나님을 도와 구원 사역을 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예언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어디 있는 것인가? 다른 예언자도 죄인들을 자신과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호 2 : 19,23). 이것은 분명히 우리와 하나님과의 첫 연합을 의미하는 계약이며, 이 계약이 하나님의 자비를 근거로 한 것이라면 우리의 의가 설 곳은 전연 없다.

사람은 다소의 행위에 의한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대체로 하나님이 용납하시는 의 이외에 어떤 다른 의가 있을 수 있느냐고 묻고자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미친 짓이라면, 하나님께서 멸시하시는 원수들이-또 그들의 행위가-어떤 용납될 만한 것을 하나님 앞에 보낼 수 있겠는가? 의롭다함을 얻고 또 친구로서 영접을 받기 전에는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대해 철저하고 노골적인 원수라는 것을 진리는 증거한다(롬 5 : 10, 골 1 : 21 참조). 칭의가 사랑의 시초라면, 어떤 행위에 의한 의가 그보다 먼저 있을 것인가? 이 악한 교만을 제거하기 위해서 요한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고(요일 4 : 10) 성실하게 깨우쳐 준다. 여호와께서도 이미 예언자를 통해서 똑같은 뜻을 가르치셨다. "내가‥‥‥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호 14 : 4).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기꺼이 우리 쪽으로 기울어졌다면, 그것은 분명히 우리의 행위 때문에 움직여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지한 대중은 이 뜻을 오해하여 아무도 그리스도께로부터 완전한 구속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며, 우리는 구속을 얻기 위해서 우리의 행위에서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한다.7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가기까지는 암흑과 죽음의 상속자이며 하나님의 원수인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불결을 깨끗이 씻는 일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 일을 하시기까지는 실현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고전 6 : 11). 베드로도 같은 뜻을 말하기 위해서, 성령의 성화의 사역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는다고 주장하였다(벧전 1 : 2). 만일 우리가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는다면, 이 정결(淨潔)이 있기 전에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없는 죄인과 조금이라도 다른 것이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출발점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들어가는, 일종의 부활이라는 것이 사실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특권을 받은 때에(빌 1 : 29), 드디어 우리가 죽음을 벗어나 생명으로 옮겨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위선자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은 정죄틀 받는다. 7-8)

7. 의는 심령의 문제이다

여기에는 위에서 말한 분류 중에서 둘째 종류와 셋째 종류가 포함된다. 이 두 종류의 인간들이 아직 하나님의 영에 의해 중생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 불결한 양심이 증명한다. 그리고 중생이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려 준다. 따라서 그들은 아직 하나님과 화목케 되지 않았으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이 두 가지 은혜는 믿음에 의해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죄인이 그의 심판대 앞에 가중하지 않은 것을 가져올 수 있겠는가? 모든 불신자들은, 특히 모든 위선자들은 자기 마음속에 불결한 것이 가득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착한 듯한 행동을 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멸시하시지 않으리라는 어리석은 확신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악한 마음이 지적되어도 여전히 자기들에게 아무 의도 없다는 고백을 할 수 없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게 된다. 자기들의 불의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는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기들에게 조금은 의가 있다고 주장한다.

주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이런 허영을 명쾌하게 반박하신다.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니라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학 2 : 11-14). 이 말씀을 우리가 믿고 또한 우리 마음에 깊이 기억하기를 바란다. 일평생 악하게 산사람도 주께서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심히 악한 사람도 율법의 어느 한 가지 의무를 행하면, 그것이 자기의 의로 인정되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선 심령이 깨끗하게 되지 않으면 이 행위에서 성결을 얻을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 또 이 말씀만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위는 그 불결한 심령 때문에 오염된다고 언명하신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오염된 행위라고 하신 행위에서는 의라는 이름을 제거해야 한다. 또 주께서 이것을 설명하시는 비유는 얼마나 적절한가! 이는 주께서 명령하신 일은 필연적으로 거룩하다는 항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취하시는 입장은 다르다. 주의 율법에 거룩하다고 한 일도 악인의 불결 때문에 오염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고 하신다. 부정한 손이 만지면 거룩한 것도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8. 사람과 행위

이 문제를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에서도 아름답게 다루신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焚香)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困備)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사 1 : 13-16, 58 : 1-5 참조).

여기서 율법을 지키는 것을 주께서 가증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확실히 주께서는 진실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을 멸시하시지 않으신다. 율법을 지키는 시초는 하나님의 이름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그는 도처에서 가르치신다. 이 시초가 배제되는 때에는 그에게 드리는 것은 모두 무익할 뿐 아니라, 싫고 가증한 오물이 된다.

이제 위선자들이 가서 마음속에 악을 깊이 감춘 다음에 행위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는가를 시험해 보게 하라. 그들은 하나님을 더욱더 노엽게 할 것이다. 이는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기" 때문이다(잠 15 : 8). 그러므로 참으로 성결하게 되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리 빛을 드러낼 행위를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죄로 인정된다. 이것은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는 상식일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아무도 행위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고, 우선 하나님의 은혜를 얻은 때에만 그의 행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9 가르친 이들은 참으로 옳은 말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우리를 인도하는 순서를 충실히 따라야 한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라고 기록하였다(창 4 : 4). 모세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보다도 그 사람을 먼저 열납하신다고 지적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을 순결하게 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하는 행위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신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눈은 성실을 돌아보신다고(렘 5 : 3)한 말은 언제나 옳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의 심령은 믿음에 의해서만 순결하게 된다는 것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성령이 선언하셨다(행 15 : 9). 그러므로 살아 있는 참 믿음이 첫째 기초가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중생한 사람들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 9-11)

9. 또 진정한 신자들도 자기 힘으로는 아무런 선한 일을 하지 못한다

이제 넷째 종류의 사람들은 어떤 의를 가졌는가를 검토해야겠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에 의해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고, 죄를 거저 사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의 이 은혜는 큰 자비와 연결되는데 이 자비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계시며 그 힘으로 우리의 정욕을 날로 더욱더 죽이시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는 성결케 된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 바쳐진 자가 되어 참으로 순결한 생활을 하며, 우리의 마음은 율법에 순종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섬기며 모든 수단을 다하여 그의 영광만을 증진시키는 것을 무엇보다도 먼저 원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 길을 걸으며 자기를 잊고 교만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지만, 우리의 불완전한 자취는 여전히 남아 있어서 겸손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성경은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전 7 : 21, 왕상 8 : 46 참조). 그러면 그들은 행위에 의해서 어떤 종류의 의를 얻을 것인가?

내가 우선 말하려는 것은, 그들이 제시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행위도 항상 육의 불결로 더럽혀지고 부패해지는데, 이를테면 찌끼가 섞여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라고 할 만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평생 한 일 가운데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을 선택하게 하라.

그리고 그 일의 여러 부분을 잘 검토하게 하라. 틀림없이 그는 그런 행동도 어딘가 육의 부패한 냄새가 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선행에 대한 우리의 열심은 결코 그것이 지녀야 할 성격을 가지지 못하는데, 이는 우리의 큰 약점이 우리의 경주(競走)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성자들의 행위에 묻은 오점은 비록 극히 작은 것이지만, 우리 눈에 분명히 보인다. 그렇다면 그 오점은 하나님의 눈에 거슬리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별들까지도 순결하지 못하다(욥 25 : 5). 성자들이 하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 판단한다면, 공정한 보상으로서 치욕을 받아야 할 것뿐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10. 자신의 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율법의 엄격성을 오해하였다

다음에 전적으로 순결하며 완전한 행위를 할 수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예언자가 말하듯이 죄가 하나라도 있으면 종전의 의에 대한 기억이 말소될 수 있다(겔 18 : 24). 야고보도 "누구든지‥‥‥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약 2 : 10) 말하면서 이에 찬성한다.

그런데 이 인간 세상은 결코 순결하거나 죄가 없을 수 없으므로 우리가 어떤 의를 체득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 뒤를 잇는 죄악들로 인하여 부패해지고 억압되고 소멸되므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거나 우리의 의로 인정될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하면, 행위에 의한 의가 문제될 때에는 우리는 율법에 의한 행위를 볼 것이 아니라 계명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율법에 의한 의를 구할 때에 개개의 행위를 제시하는 것은 헛된 일이며 율법에 대한 끊임없는 복종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의 미련한 신념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죄의 용서를 한 번 우리의 의로 인정하신 것은, 우리가 과거 생활에 대한 용서를 받은 후에는 의를 율법에서 찾으라는 뜻이 아니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거짓 희망을 품게 되며 자신을 비웃으며 조롱하게 될 것이다.

이 육신을 쓰고 사는 동안 우리는 완전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율법은 완전히 의로운 행위를 항상 유지하지 않는 사람에게 죽음과 심판을 선고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언제든지 우리를 고발하며 정죄할 근거가 있을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자비가 율법과는 반대로 우리의 죄를 끊임없이 용서하심으로써 우리의 무죄를 거듭 선언하신다면 사태는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처음에 한 말은 언제든지 성립된다. 만일 우리 자신의 가치에 따라 우리를 판단한다면, 무엇을 계획하며 무엇을 실행하든 간에 또 아무리 많이 노력하며 수고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죽음과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

 

11. 신자들의 의는 언제든지 믿음에 의한 의다

우리는 두 가지 점을 강력히 주장해야 한다. 첫째로, 경건한 사람의 행위일지라도 하나님의 엄격한 판단에 따라 검토할 때는 별로 정죄를 면할 수 없다. 둘째로, 그런 행위가 있다고(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가정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용납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행위가 자신이 죄 짐을 지고 있어서 그 행위도 곧 약화되고 오염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논쟁하는 중심점이다. 칭의의 기초에 관해서는 비교적 건전한 스콜라 학자들과 우리 사이에 싸울 일이 없다. 즉 죄인은 정죄받는 것에서부터 값없이 해방되어 의를 얻으며 이 일은 죄의 용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다만 그들은 "칭의"라는 말에 새롭게 됨을-즉,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우리가 율법에 복종하도록 개조된다는 것을-포함시킨다. 참으로 그들은 중생한 사람의 의를 고사하기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한번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은 선행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며 선행의 공로에 의해서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주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정하셨다고 선언하신다(롬 4 : 3). 이것은 아브라함이 아직 우상을 섬겼을 때가 아니고, 그가 거룩한 생활을 다년간 훌륭히 계속한 후였다. 그러므로 그는 오랫동안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했으며 죽을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율법에 순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진 의는 믿음에 의한 것이었다. 이것을 보아서 우리는 바울의 추리에 따라, 그의 의는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단정한다(엡 2 : 9). 마찬가지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합 2 : 4) 예언자의 말은 불경건하고 세속적인 사람들에게-주께서 믿음으로 전환시켜서 의롭다 하실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적용되는 말이 아니라, 신자들을 상대로 한 것이며 신자들에게 믿음에 의한 생명을 약속한 것이다. 바울도 이 생각을 확인하기 위하여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 : 2, 31 : 1, 롬 4 : 7)라고 한 다윗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모든 의심을 일소한다. 다윗의 이 말이 불신자에 대한 것이 아니고, 그 자신과 같은 신자들에 대한 것임은 명백하다. 그것은 그가 여기서 그의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복을 한 번만 가질 것이 아니라, 평생 지녀야 한다. 끝으로, 값 없이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는 소식은 하루 이틀만 전할 것이 아니며, 이 전도 사명은 교회 안에서 항구적인 것이라고 바울은 증거한다(고후 5 : 18-19 참조).

따라서 신자들에게는 죽는 날까지 여기서 묘사된 의 이외에 다른 의가 없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는 영원한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영원히 효력을 나타낸다. 즉, 정화와 보속과 속죄와, 끝으로 우리의 모든 불의를 가리우는 완전한 순종을 실현할 수 있다. 에베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우리가 은혜에서 구원을 받기 시작했다고 말하지 않고, 은혜를 통하여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하며,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한다(엡 2 : 8-9).

 

17. 어떠한 경우에도 행위가 거룩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철학자들은 사물이 형성되는 데는 네 가지 원인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원인들을 살펴보면, 우리의 구원을 실현하기 위해서 행위는 어떤 원인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은 도처에서 우리가 영생을 얻는 동력인(動力人)은 하늘 아버지의 자비와 거저 주시는 사랑이라고 선언한다. 물론 질료인(質料人)은 그리스도시다. 그는 순종으로 우리를 위해서 의를 지으셨다. 형상인은 믿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요한은 이 세 가지 원인을 한 문장에 포함시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 : 16). 목적인에 관해서는, 사도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며 하나님의 인애를 찬양하는 것이라고 증거하고 같은 곳에서 다른 세 가지도 명백하게 말한다. 로마서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 : 23-24, 엡 1 : 6 참조)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자비로 우리를 포용하신 것을 제일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라고 한다(롬 3 : 24). 우리의 의를 실현하기 위한 질료인이 여기서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롬 3 : 25)라고 한 말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형상인을 가르친다.

끝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고(롬 3 : 26) 부언한 것은 하나님의 의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는 목적인을 가리킨다. 겸해서 이 의는 화목을 근거로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바울은 화목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내어주셨다고 언급한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에서도 사도는 이렇게 가르친다. 우리는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로 그의 은혜를 받게 되었고, 이 일은 그리스도의 중재로 실현되었으며 믿음으로 받게 되며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 완전히 빛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엡 1 : 3-14).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은 그 모든 부분이 우리의 밖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행위를 믿거나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은혜에 아무리 반대하는 원수라도 만일 성경 전체를 부인할 생각이 없다면, 동력인이나 목적인에 대해서 우리와 논쟁을 일으킬 수 없다. 그들은 질료인과 형상인에 대해서 그릇된 생각을 가졌고 마치 우리의 행위가 믿음과 그리스도의 의와 병행하여 자리의 절반을 차지하는 듯이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생각에 대해서도 큰 소리로 반대한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이신 동시에 생명이시며 은혜로서의 이 의는 믿음에 의해서만 우리의 소유가 된다고 가르칠 뿐이다.

 

18. 그러나 선행의 모습은 믿음을 강하게 해줄 수 있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기의 결백과 정직함을 기억함으로써 힘과 위로를 얻으며, 때로는 서슴지 않고 그것을 공언하기도 한다. 여기에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자기의 선한 입장과 악인들의 악한 입장을 비교해서 자기의 승리를 믿는 것이다. 자기의 의를 믿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자들이 정죄받는 것이 당연하고 공정하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방법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검토할 때에 양심이 깨끗한 것을 느낌으로써 다소의 위로와 자신을 얻는 것이다.

첫째 이유는 후에 고찰하겠다. 여기서는 둘째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위에서 한 말과 어느 정도로 일치하는가를 간단히 설명하겠다. 하나님의 심판 하에서 사람은 행위를 의지하거나 행위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자랑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말했다. 합치점은 이것이다. 즉, 성도들은 자기의 구원의 기초를 놓으며 굳게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행위를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만을 우러러본다. 복의 시초는 하나님의 선에 있다고 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로 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을 복의 완성이라고 믿고 그 안에서 안주한다. 이와 같은 기초 위에 수립된 양심은 행위를 생각할 때에도 같은 방식으로 확립된다-즉, 그 행위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를 무관하시는 증거인 때에 한해서 양심은 그 행위에 자신을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우선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지 않으면, 행위에 대한 이 자신은 설 곳이 없다. 따라서 그것은 그 의지하는 기초와 상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위에 대한 신뢰감을 배척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행위의 공로가 구원에 대한 보조 수단이 된다는 생각으로 돌아가지 말고 값없이 의를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표징(表徵)에 의해서 이 믿음을 강화하는 것을 우리는 금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선물을 생각할 때에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얼굴에서 비치는 광채와 같이 우리 마음을 비추어 선의 최고의 광명을 바라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 선행의 은혜에 대해서 더욱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그 선행은 양자의 영이(롬 8 : 15 참조) 우리에게 주신 것을 보여 준다.

 

19. 행위는 소명에 대한 열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양심의 결백을 느껴 믿음을 강화하며 기뻐할 때에, 그들은 소명의 결과를 보고 자신들이 주의 자녀로서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라고 한 솔로몬의 말이나(잠 14 : 26), 성도들이 간혹 기도를 들으시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소명을 이용하여,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았다는 것을 증거하려고 하는 사실은(창 24 : 40, 왕하 20 : 3) 양심을 강화하기 위한 기초를 놓는데 아무 소용이 없으며 다만 결과적으로 볼 때에만 가치가 있다. 그것은 이런 발언들에는 완전한 확신을 확립할 수 있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또 성도들은 자기들에게 있는 성실은 많은 힘의 흔적이 섞여 있는 것뿐임을 의식한다. 그러나 중생의 결과를 성령이 내주하시는 증거라고 보며, 이런 신념에서 큰 힘을 얻어 모든 난관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대망하게 된다. 이는 이 중대한 문제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체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체험조차 할 수 있으려면, 우선 확실한 약속으로 보장된 하나님의 선을 깨달아야 한다. 선행을 표준으로 판단하기 시작한다면 이 체험은 무엇보다도 불확실하고 약한 것이 될 것이다. 행위를 그 자체대로 판단한다면 그 불충분한 순결성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하는 것과 같이 그 불완전성은 하나님의 진노를 선언할 것이다.

요컨대,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며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 은혜에는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엡 3 : 18). 사도가 말하려는 뜻은 이것이다.

"신자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든지 간에, 아무리 높이 솟으며 아무리 널리 돌아다니더라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떠나서는 안되며 전적으로 이 사랑을 명상하는 데 힘써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것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지식을 초월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깨달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된다고 한다(엡 3 : 19). 다른 곳에서도 바울은 신자가 모든 싸움에서 승리자가 된다고 자랑한 다음에 곧 첨부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라고 이유를 말한다(롬 8 : 37).

 

20. 행위는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신자들의 자기 확신의 기초가 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성도들이 행위를 의지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행위의 공로에 돌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행위는 오직 하나님의 선을 인식시키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자기들이 선택된 것을 알게 하는 부르심의 표징이라고 여길 뿐이다. 또 그들이 행위를 믿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얻는 의를 조금이라도 멸시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그것은 행위에 대한 확신은 값없이 받은 의를 의존하며, 이 의가 없으면 그 확신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이 생각을 간단하게 그러나 훌륭하게 표현하였다. "저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라고(시 138 : 8) 말씀드리지 않나이다.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이다(시 77 : 2 참조).

그러나 저는 제 손이 한 일을 천거하지 않나이다. 당신께서 보시고 공로보다 죄를 더욱 많이 발견하실까 하나이다. 제가 말하는 것, 제가 바라는 것, 제가 원하는 것은 하나 뿐이옵나이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시옵소서. 저의 안에서 당신의 행위를 보시고 저의 행위를 보지 마옵소서. 저의 행위를 보신다면 그것을 정죄하실 것이오나, 당신 자신의 행위를 보신다면 거기 면류관을 씌우실 것이옵나이다. 제게 선행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당신에게서 온 것이옵니다."그는 하나님 앞에서 감히 자기의 행위를 자랑하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를 말한다. 첫째로, 그에게 무슨 선행이 있다면 그것 안에서 자기 것은 조금도 볼 수 없기 때문이고, 둘째로, 이런 행위도 무수한 죄에 압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양심은 확신보다 두려움과 당황함을 느낀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선행에서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은혜만을 보시며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완성하시기를 원한다.

 

21. 때때로 선행을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는 이유라고 말하는 의미

주께서 신자들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시는 것은 그들의 선행 때문이라고 성경이 가르친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미 주장한 것을 반박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한 동력인(動力人)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며, 질료인(質料人)은 아들이신 하나님의 순종이며, 형상인은 성령의 조명인 믿음이며, 목적인(目的人)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원인은 주께서 행위를 종속적인 원인으로 삼으시는 것을 막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영생을 상속하도록 자비로 예정하신 사람들을 주께서 인도하면서 영생을 소유하게 만드실 때에, 그의 일반적 경륜을 따라 선행의 수단으로 그렇게 하신다. 경륜의 순서에서 앞서는 것을 뒤따르는 것의 원인이라고 부르신다. 그래서 간혹 영생이 행위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그것은 영생이 행위의 결과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선택하신 사람들을 마침내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서 의롭다 하시기 때문에(롬 8 : 30), 앞에 온 은혜를 다음에 온 은혜의 원인으로 만드신다. 그러나 진정한 원인을 찾아야 할 때에는, 행위에서 피난처를 구하라고 명령하시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을 바라보게 하신다. 사도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영생이니라"고(롬 6 : 23) 가르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무슨 까닭에 그는 생명과 죽음을 대조시키는 것처럼 의와 죄를 대조시키지 않는가? 무슨 까닭에 죄가 죽음의 원인이라고 하는 것처럼 의를 생명의 원인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 했으면 완전했을 대조를 이렇게 변형하여 씀으로써 어느 정도 깨뜨렸다. 그러나 사도는 이런 비교법으로 한 가지 진리를 표현하려고 하였다. 즉, 죽음은 사람의 행위에서 오는 결과지만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달렸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말들은 원인보다도 시간적 전후 관계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위에 은혜를 쌓아 올리심으로써 앞에 있는 은혜를, 다음에 따르는 은혜를 첨가하는 원인으로 삼아 그의 종들을 부요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너그러우신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로 하여금 만사의 근원이며 시작인 값없이 주신 그의 선택을 항상 주목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매일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을 사랑하시지만, 그 선물들의 근원은 선택에 있으므로 우리로서는 값없이 우리를 용납해주시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우리의 영혼을 지탱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후에 베풀어주시는 성령의 선물들을 저 제일 원인에 종속시키며, 그 선물들이 선택의 가치를 결코 손상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