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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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박 성 광(학번: 199726041)

 

 

 

하나의 간단한 묘사는 화해의 교리와 우리가 지금 그것을 발전시켜야 하는 궁극적인 변화의 의미에 대한 이전의 우리 제안의 진행 과정을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기독론은 하나의 수평선과 만나는 하나의 수직선과 같다. 인간의 죄 교리는 수평선이다. 칭의의 교리는 수직선에 의한 수평선의 교차점이다. 여전히 존속하는 교회와 믿음의 교리는 또한 수평선이지만 이번엔 수직선에 의해 교차되어진 것으로써 보여진다. 수직선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속죄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수평선은 그 사역의 목적이다.; 인간과 인류. 우리는 지금 이 모든 만남의 최후의 국면에 도달한다(화해의 사건 안에서). 복잡하고 특별한 그 문제는 속죄의 주관적인 실현으로서 설명되어질 수 있다. 속죄의 현실성은 신적인 행동과 제공 그리고 그 안에서의 능동적인 인간의 참여 안에서 객관적인 면과 주관적인 면을 갖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역사(History); 다른 많은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이 역사 안에 둘러싸여 있고 실증되었다. 우리는 이 다른 면의 계속적인 회상으로만 기독론을 발전시킬 수 있다. 죄의 교리는 우리에게 의문 속에 있는 하나님의 행동에 어떤 사람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칭의의 교리에서 우리는 어떤 것에서부터 다른 어떤 것으로 변화시켰다. 화해의 신적인 행동 안에 있는 인간의 능동적인 참여에서, 그것에 의하여 결정됨으로써 이 다른 것에 관계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만이 남아 있다.(p643) 우리는 그것을 기독교 공동체의 이 부분에서 그리고 기독교적 믿음의 부분에서 서술할 것이다. 한 인간의 행동에 형용사 '기독교적'을 덧붙이는 것은-기독교 공동체와 기독인 개인의 행동- 우리는 지금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와 속죄의 주관적인 실현의 범위에 있어서 특별한 관계에 있는 인간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p644)

그 교리의 적용에 대한 포기는 있을 수 없다. 두 번째에서 세 번째의 주제로 전환되는 이 시점에서 '나는 신앙한다'(credo)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언급된다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사람이 단지 믿음 안에서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화해 교리의 그리스도론 주제에 대한 어떤 포기도 없다. 우리가 기독교 공동체와 기독교 신앙을 말할 때 생각하는 그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안에 포함되고 실증된다. 여전히 숨겨진 면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는 세상과 하나님의 화해의 역사이다. 그것은 기독교 공동체와 기독교 신앙의 역사 안에서 소진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역사 안에서-여전히 드러나야만 하는 세상 역사의 의미에 대한 선포로써-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통해서 해야만 한다. 인간 역사의 관점에서 현재 유지되고 있는 존재와 행동, 우리는 실로 핵심에 대한 껍질로써 관련되어진 기독론과 칭의 교리에 대한 기독교 메시지 본질의 존재론적 관련성을 파악하게 될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도 역시 그것의 본질로서 해야만 한다. 그러나 기독론과 칭의의 교리에서 제시해야만 했었던 그 본질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다른 영역에 있지 않다.; 우리는 단지 다른 각도에서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와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중심을 갖고 있는 고백의 본질에 속해 있다. 기독교 교회에서 우리는 이 독특하고 임시적인 형태 안에 있는 사람, 그의 역사, 존재, 행동으로서 해야만 한다. 만일 기독론과 칭의의 교리가 하나의 신화라면 그것은 우리가 지금 사람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하고, 놀랍고, 사람의 자기 인식의 관점에서는 난해하고, 하나의 신비이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신화가 아닌 신비라면 그것은 기독론과 칭의 교리는 우리가 사람에 관해서 보고 말해야만 하는 근거와 대상의 모든 것으로서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article에 따르면 인간이 기독교 공동체와 기독교 신앙의 형태 안에서 신의 행동과 제공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는 사실과 이 부분이 그 교리에 속한다는 사실은 전혀 자명하지 않다.(p644) 분명히 그것은 창조나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보다 훨씬 덜 자명하다. 왜냐하면 창조와 성육신의 신비는 감각에 있어서 우리에게 명확히 깨닫게 한다.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사람은 그 스스로에게 이상하고 놀랍고 난해하다.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단지 사람의 구체적인 충성에서 일어나고, 예수 안에서 일어났던 칭의의 현실성의 근거 위에서, 그 안에서 공언된 것으로 신적인 결정의 진실한 선(virtue)안에서 일어난다. 기독교 공동체와 기독교 신앙과 이 새 사람-우리는 신약에서 나타난 승천과 성령강림절 사이의 중간 휴지를 상기한다-하나의 새로운 존재, 신비의 다른 차원, 인간에 대한 그의 설교에서 현저한 하나님의 길과 과정에 있는 다음 단계, 그리고 자신의 사역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길과 과정에서 아직은 새로운 존재가 아닌, 단지 맨 처음의 관점으로부터 있어온 것의 일시적인 끝이다. 그것은 창조와 성육신과 동일하지 않다. 개념적으로 분리된다. 그것은 숙고되어 왔고 성육신과 창조에서조차 고찰되어져 왔다. 그것은 그것들로부터 추론되고 그것들과 관련되어질 때 실제적이며, 이해할 만 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것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p645)

우리 제안의 결론적인 이 단계에서 성령의 개념과 현실성은 우리 관심의 중심임에 틀림없다. 성령은 이 세 번째 article: '나는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credo in spiritum sanctum)에서 기독교가 신앙하고 고백해야만 하는 모든 것을 통괄하는 주제이다. 우리는 공동체와 신앙을 말할 때 인간의 경험, 행동, 그리고 속죄의 주관적 실현을 말한다. 인간의 경험과 행동은 인간 자신의 이성과 능력이 아니고 자신의 능력, 결의, 노력의 덕이 아니다. 루터는 말하기를 "성령께서 복음으로 나를 부르셨고 그의 은총으로 나를 깨닫게 하셨고 바른 믿음안에서 거룩하게 하셨고 유지시키셨다. 진리와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모든 기독교인을 부르고 모으고 깨닫게 한다". 이것은 성령에 의해서 생긴다. 인간은 화해의 신적인 행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그 스스로 할 수 있는 팔, 손, 손가락도 갖고 있지 않은 죄 많고 교만하고 타락한 존재이다. 만일 이것이 기독교 공동체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생기고, 만일 인간이 스스로 의지할 수 없는 것을 의지하고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할 때, 그것은 특별한 장소와 은총의 근거 위에 있게 되고 특별한 하나님의 일깨우는 힘의 덕에 있게 되고, 죄인으로서의 그의 존재와 신분에 대한 저항 안에서 그는 다른 사람이라는 지배와 충동 하에 그는 성령에 의해서 이 의지, 능력, 이 행동의 자유에 대해 다시 태어난다. 이러한 특별한 장소와 은총 안에 있는 하나님, 이러한 일깨우는 힘 안에 있는 하나님, 이 다른 사람의 창조주로써의 하나님은 성령이다.(p645) 하나님은 이 사역 안에 스스로 계시고 창조의 사역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객관적 실현에 대해서 동일하게 언급되는 완전한 의식 안에 계신다. 그러나 인간은 그 스스로 이 객관적 실현에 대한 유익하고 살아 있는 지식을 위해 그리고 그것의 주관적 실현을 위해 열려 있거나 준비되어 있지 않다. 그는 단지 그가 그 스스로 그 안에서 들어 올려 진 것을 발견할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공언된 그 결정이 그 밖의 모든 사람과 함께 그 스스로에게 적용된다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있을 때, 그는 단지 놀랄 수 있다. 예수 안에서 성취된 죄인의 칭의는 그의 칭의이며 모든 사람의 칭의이다. 그는 이것을 어떤 방법으로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지식에 대해 눈을 여시고,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 그를 자유롭게 하시고 준비시킨다. 그 기적은 그 사람 안에서 일어난다. 인간은 그 자신의 변화로써 그것을 주장할 수 없을 것이고 단지 인간을 하나님에게 회심시킨 하나님 자신의 것으로써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일어난 모든 경험 안에서, 그가 그것에 의해 얻은 모든 통찰 안에서, 그가 그것안에서 실행한 모든 결정 안에서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그것들은 분명히 그의 경험, 통찰, 결정, 행동이지만 그것들에 대한 관련성안에서 그는 단지 감사할 것이다. 다른 태도에서는 그는 단지 그가 기독교 공동체와 신앙을 고백할 때 그가 한 것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과 비록 그가 얼마나 진지하고 진정으로 그것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것을 저버릴 것이다. 성령은 신앙인 공동체와 함께 그 안에서 공동체 사역을 위해서 감사한 존재이다. 성령은 세상의 영도, 공동체의 영도, 어떤 개인 기독교인의 영도 아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 하나님 자신이다. 성령은 영원히 성부와 성자로부터 비롯되고, 성령은 영원한 사랑으로 성부와 성자를 일치시키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경배되며 영광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과 함께 하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인간 자신의 영이 아니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성령은 그의 하나님으로써 그를 위해 그에게 행동하는 하나님으로써 인간의 영에게 그 스스로를 입증하시는 하나님이다. 성령은 그 스스로에게 세상과 사람을 화해시키는 하나님으로서 그에게 드러나시는 그러한 방식으로 사람에게 오신다. 그러한 방식으로 성령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일하심으로 인간이 들을 수 있고 실제로 듣는 말씀이 되신다. 그러한 방식으로 사람은 하나님과 화해한다.(고후5:20) 하나님의 자기 입증은 성령이 사람에게 말하고 그로 하여금 받아들이도록 하는 말씀을 하게 한다. 성령은 이 자기 입증 안에 있는 하나님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유익하고 살아있는 지식으로 인간을 자극시키는 능력 안에 있는 하나님이다. 성령은 인간을 위해 화해시키고 행동하는 하나님이다. 사람에게 그 스스로를 드러내고 그런 방식으로 성령은 그 스스로에게 긍정(yes)을 말하고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긍정(yes)을 가능하고 필요하게 한다.(p646)

이 모든 것으로부터 기독교회와 기독교인 개인은 성령과 지시하고 지배하는 그의 사역을 조정하거나, 소유하거나, 통솔하거나 할 수 없고 다만 성령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그리고 성령은 그 스스로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유롭다.: 주의 성령. 성령은 인간을 신앙으로 일깨운다.(p646)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그를 믿어야 한다. 기독교 공동체와 기독교인의 성령에 대한 사귐은 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창조된다.-최고의 현실성과 확실성으로. 그러나 이것은 성령의 새로 오심과 증거와 자극을 위한 순종과 기도의 사람이 될 때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기독교 공동체와 기독교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우리는 단지 성령에 의해서 세워진 그 범위 안에서만 진행될 수 있고 그러므로 그들은 계속해서 성령에 의해서 다시 세워져야만 한다. 그러나 성령에 의한 필수적인 재생은 그가 이미 성취한 근거의 회복에 있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다른 면에 있어서 공동체를 기독교 공동체로 만들고 한 사람을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성령의 경험은 그들이 진정으로 성령을 기대하고 성령 받기를 원한다는 사실에서 그것 자체를 밖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성령이 진정으로 기대되는 곳, 성령 받기를 위한 열망이 있는 곳, 그것은 바로 그가 이미 시작한 사역이고 그의 임재의 확실한 증거이다.(p647)

공동체와 신앙의 전제인 영과 일깨우는 힘은 성령이다. '거룩한'이라는 말은 단순히 그는 신적인 존재이며, 그 스스로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반복하거나 강조하지 않는다. 고전8:5에 따르면 많은 신들이 있고 그들을 증명하기 위한 많은 영들이 있다. 물론 형태가 많은 만큼 이러한 영들의 실질적인 영향은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세상과 사람의 그러한 것들은 그들의 신의 본성에 부합된다고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은 그 영들이 그를 소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영들을 소유할 수 있다. 그 근저에는 그들이 그를 지배하는 만큼 그가 그들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이러한 영들로부터 분명히 구별된다. 그 이유는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영이고 세상을 그 자신에게 화해시키고 그 자신을 이 사역의 행동자로서 세상에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에게 신적인 어떤 것으로 증명하지 않는다. 성령은 사람에게 가정된 보다 높은 지혜에 대한 지식을 의도하지 않는다. 성령은 사람을 하나의 가정된 힘의 멍에에 종속시키지 않는다. 성령은 사람에게 성자를 증거한다. 성자는 성부의 뜻에 순종하여 저 먼 나라로 향하는 그 마지막 길을 걸어갔다.-그의 재판관은 그 스스로를 그의 장소에서 재판받도록 내어 주었다. 그는 불의에서 의로,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그의 변화를 증명한다. 그는 성부의 판단과 그의 죽음과 부활에 드러난 그 자신을 세상에 증거한다. 이 모든 것은 추상적인 역사적 진실이나 추상적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증거이다.:(p647) 그러므로 그것은 단지 그의 역사이며 그 안에서 일어난 진실이고 그 자신이다. 성령은 그가 성부의 뜻을 성취하고 드러낸 성자와 성부의 영이라는 사실에 관한 한 그 스스로 증거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고 그는 그 안에서 행동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사람에게 일깨우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그는 하나님의 영이다. 이런 면에서 그는 거룩하고 사람을 거룩하게 한다.(p648)

그리고 이것은 최종 지점과 관계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보내지고 사람에게 온다. 요 20:22에 따르면 성령은 요3:8에서 묘사된 자유함 안에서 그의 호흡으로써 분다. 그는 그의 행동의 양식이다. 그의 행동은 차단되지 않고 이미 생겼기 때문에 그만두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적인 정보나 추상적인 교리가 될 수 없다. 그것은 계속되는 그의 행동의 양식이다. 그의 행동은 그가 그 자신을 주고 오늘도 그의 단독성안에서 생기는 행동으로서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은총이 된다. 그의 은총 안에서 사람은 앎에 자유하고 믿음 안에서 그것을 이해하고 사람은 그 안에 참여한다. 이 행동은 몇몇 사람에게 첫 번째 계시로써 모든 사람에게 마지막이자 일반적인 계시로서 그의 부활로부터 온다. 이것은 그의 행동 양식이다. 그것은 그 행동의 주제로써 그의 삶의 표현이자 확증이다.(p648)

우리는 성령을 예수의 일깨우는 능력으로써 묘사한다. 후에 우리는 성령에 대하여 예수를 자극하고 가르치는 힘으로써 묘사할 것이다. 우리는 말할 수 있는 모든 것까지는 그에 대해서 아직은 말하지 않았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능력이다. 사람들은 성령은 그들의 것이고 그들은 성령의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들의 역사는 진실로 그의 역사 안에 속하고 그의 역사는 마찬가지로 그들의 역사 안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밖의 그에 대한 서술은 그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 자신에게 세상을 화해시켰던 그 행동의 근거로서의 그의 길, 그의 행동, 경험, 그의 삶, 또는 기독교인의 믿음, 소망, 사랑의 삶 안에서, 주님으로써 그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공동체의 삶 안에서 그의 중요성, 관련성, 영향력에 대한 서술이다. 그 고백: '나는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credo in spiritum sanctum) 그 고백에서 우리는 그와 공동체, 그와 개인 기독교인의 사귐, 교제, 연합에 관련된다.(p648)

우리가 성령의 사역이 이루어지는 그 방법에 대해 보다 명확한 어떤 것을 듣고, 알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는 인간 역사 안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첫 번째 실례로써 어떻게 실제로 일어날 수 있었는가? 어떻게 다른 인간 역사 안에서 이러한 역사가 실현될 수 있는가?-눅1:34의 마리아의 질문처럼. 하나님은 어떠한 방법으로 타락한 마음과 어두워진 지식과 죄인의 반역하려는 욕망과 싸움 속에서 그들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일깨움을 일으킬 수 있는가? 어떻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가? 어떻게 역사 안에서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가?(p649)

'나는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credo in spiritum sanctum)에 대한 고백은 우리에게 이 '어떻게'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이 모든 것이 일어나고, 일어났고, 계속해서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지시한다. 그것은 단지 땅과 하늘 아래에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의 아들 안에서 그와 화해시킨 하나님께서 하셨고 하시고 하실 것이라는 즉 눈먼 자를 뜨게 하고 귀먹은 자의 귀를 여시고 저는 자를 일으키시고 쓸모 없는 손을 훈련시키시고 죽은 마음이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도록 일깨운다는 것을 말한다. 신약에서조차 한쪽에서는 그리스도의 사건과 또 다른 쪽에서는 기독교 공동체와 기독교 신앙 사이에 성령이 계속적으로 있지만 '어떻게'에 관해서 그의 사역의 양식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p649)

바람이 불고 소리가 들리지만 우리는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는 말씀은 그것이 불고 들린다는 사실에 대한 설명으로 어떤 질문도 인정하지 않는다.(요3:8) 성령에 대한 모든 언급은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고 그의 능력은 어떤 사람 위에 있고 그는 그렇게 그들에게 오시고 그는 사람들에게 부어지고 그는 그들 위에 좌정하시고 그들을 충만케 한다는 사실과(행2:14) 성령은 그들이 그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한에서 공동체의 세워짐과 기독교인의 경험에 있어서 영향력 있고 분명한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하나의 증거이며 확증이다. 이 사실에 대한 설명과 주장 너머의 교회에 대한 두 번째 그리고 그 다음의 신학에서조차 성령과 그의 사역에 대한 어떤 교리도 드러나지 않는다. 되어진 모든 것은 기독론과 칭의 교리로부터의 이러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에 대한 언급과 교회와 신앙의 교리로부터의 그것에 대한 언급이 있다.(p649)

이 이중의 언급 너머로 갈려는 시도는 분명히 헛되다. 하나님 자신-구체적으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말씀-은 그의 자유 은총과 창조 사이에 계신다. 이 이중의 언급은 제쳐놓고 우리는 단지 말할 수 있다.:"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 하여금 침묵 가운데 있게 하자". 성령강림절 설교가 아주 어렵거나 아주 쉬운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성령강림절 설교가 아주 분명하게 그러나 신비하게 표현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p650)

요약

바르트는 성령의 사역을 화해론의 범주안에서 다룬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세상과 화해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수직선이고 죄인인 인간과 인류는 수평선이다. 이 수직선과 수평선의 교차점이 바로 칭의, 교회, 믿음의 교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과 세상의 화해의 사역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공동체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자리잡게 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신앙에, 화해의 신적인 행동에 인간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은 단지 일깨우는 힘인 성령에 의해서만 이러한 능동적인 참여가 가능하다. 성령은 사람을 새로운 사람으로 창조하는 하나님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다.

성령은 세상의 영도, 인간의 영도, 교회의 영도 아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 하나님 자신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비롯되고, 성부와 성자를 일치시키며, 성부와 성자와 함께 경배의 대상이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같은 하나의 본질로서 삼위일체를 이루신다. 또한 성령은 주(主)로서 인간으로부터 자유롭다. 성령은 인간을 위해 화해시키고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령은 인간을 신앙으로 일깨운다. 성령은 공동체와 개인의 신앙을 일깨울 뿐만 아니라 유지, 보존하신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공동체와 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일깨우고 그들을 거룩하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성령의 사역의 구체적 방법, 즉 '어떻게'에 대해서는 사람으로서는 알 길이 없고 다만 신비의 영역에 속한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성령께서 하나님과 세상을 화해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계속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