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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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출자: M.A. 9813201 김성열

 


1. 교회의 이율배반성: 가시성과 비가시성, 여기와 저기

성령의 사역인 기독교 공동체, 즉 기독교는 인간 안에서 일어난 사건으로서의 교회를 의미한다. 이러한 공동체는 역사를 갖지만, 이 역사는 정해진 역사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이 공동체는 성령을 통해,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모아지고, 자신을 모으게 하고, 스스로를 모은다(726-727). 그러므로 교회의 생성 근거는 지금 여기에서 교회를 가능케 하는 성령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가 예수의 부활사건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일깨우는 힘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 교회는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 구원 사건의 증인, 선포자, 선창자가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소집된 교회는 복음의 법, 즉 생명의 영의 법에 복종하고, 자유 안에서 순종해야 한다. 이 생명의 법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과 맺은 하나님의 신실과 평화의 계약을 말한다. 또한 교회는 모든 피조물 중의 첫째로서 이 세계의 주님을 저 계약을 성취하시는 자신의 주님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공동체 구성원의 특별한 연대성(Miteinander) 속에서 비로소 교회가 된다. 즉 공통적인 들음과 순종이 교회에게 요구된다. 말씀으로 들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자신의 실존적 응답이 요구된다(727).

이런 특성 외에도 교회는 뚜렷한 인간적 활동의 형태로 존재한다. 즉 교회는 세계사적 현상으로 존재함으로써 다른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심리학적, 사회학적으로 파악 가능하다. 단적으로 말해 교회는 보이는 교회이다(ecclesia visibilis). 이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다른 의미에서 교회가 비가시적인 것(ecclesia invisibilis)이 본질적이듯이, 보이는 교회 역시 본질적이다. 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있다. 육체가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 없듯이 구체적 형태가 없는 교회를 생각할 수 없다(728-729).

여기에서 특별히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먼저 보이는 교회를 부정함으로써 생기는 위험성을 생각해보자. 교회의 가시성을 부정하거나, 그것을 악으로 규정해버리게 되면 교회론적 가현설에 빠지게 된다. 교회론적 가현설은 기독론적 가현설만큼이나 무모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깨우는 힘인 성령의 사역은 지상적이며 역사적인 형태를 띤다. 또 모든 기독교인들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존재하면서 구체적인 인간적 형태를 갖듯이 기독교 공동체도 이상적 존재가 아닌 구체적이며 가시적 존재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몸의 부활을 믿는다면(credo resurrectionem carnis), 교회론적 가현설을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728-729).

그러나 교회를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현상적으로 모여진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다. 하지만 교회는 그 구성원들인 기독교인들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보여진다. 그 방법이 아니면 교회는 보이지 않게 된다(731). 교회를 보기 위해서는 이러한 특별한 가시성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이 특별한 가시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신앙의 관점을 말한다. 살아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공동체로서의 교회 존재는 신앙의 관점을 요구한다. 다른 관점을 가지고서 교회의 존재에 접근할 수 없다. 교회는 하나님의 속죄하시고 자신을 계시하시는 은총에 의해서, 성령의 보내심과 사역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사역에 의해서 이러한 특성을 갖게 된다.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은폐되었던 것처럼, 공동체의 영광도 은폐되어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계시가 전 세계 앞에 극명히 들어날 때까지는 신앙이라는 조건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733). 이것은 교회의 세 번째 차원의(dritte Dimension)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로 소집된 교회는 보이는 역사적 지평 위에서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지 않는 성령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점에서 신앙은 교회에게 필수적이다(734-735).

그러므로 단순히 보이는 공동체의 형태 자체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몸(caro Christi) 자체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증거한다. 보이는 교회 뒤에는 보이지 않는 교회의 영광이 숨어있다. 공동체의 영광은 자신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을 쉬지 않고 계속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영광의 근거는 자신이 될 수 없다. 공동체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비치는 그곳,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의 영광이 비치는 바로 그곳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는 이 장소는 하나님의 최종적 계시의 순간까지 구체적(외형적) 형태 속에 은폐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지상적이며 역사적인 실존 양태이다. 신약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그에 의해서 생겨났으며 성령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갱신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근거이자 전형이라고 하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어떠했는가? 그는 고립되거나 고독한 삶을 살지 않았다. 그분은 단지 인간 역사를 넘어서, 저 먼 외계로부터 지상에 오신 분이 아니다. 그분은 결코 늘 지상에 대하여 초월자로만 남아 있는 분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사셨고, 그 안에서 지상적이고 역사적인 실존 형식을 취하여 사셨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공동체의 전형이다. 성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공동체의 머리이고,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공동체에 속하고,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의 비밀이며, 세 번째 차원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의 관점에서만 볼 수 있는 교회의 존재이다(738).

이러한 교회는 그러나 종말론적인 존재이다. 무한정 지상적 역사의 양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인 것을 고백하는 그 날이 온다.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시간의 끝이자 목표이다. 역사의 단절(Abbruch)이자 모든 인간 역사 '너머'(Jenseits)의 도래(Anbruch)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저 '너머'를 볼 수 있는 존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산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로 오신다는 사실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만, 교회만이 신앙을 통해서 그것을 알 수 있다. 교회는 세속 역사의 중심에 서서 '모든 다른 사람들에 앞서 지금 벌써(allen Anderen zuvor jetzt schon)' 마지막 날의 광휘를 인식한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종말론적 존재이다(739).

2. Una ecclesia

Credo unam ecclesiam(나는 하나의 교회를 믿는다). 구성원이 많고 다양하기는 하지만 교회의 존재 양식이 다양할 수는 없다. 교회 이외의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양식이 있을 수 없다. 이 사실에 대한 가장 강력한 유비적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머리로 선택받았고, 그들의 대리자가 되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자신의 몸으로 모든 사람들을 불러모았다(746).

그러므로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가 두 개의 교회가 될 수 없다. 보이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 교회에 의해서 살아가고, 보이지 않는 교회는 보이는 교회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그 둘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통일성 안에서 하나가 된다(746-747).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할 사항이 있다. 공동체의 소집이라는 구체적 사건에서 볼 때 교회는 지상적이며 역사적 양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소집 현상은 세상의 어느 곳에서도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역적 통일성에 의해서 구분되어지고 서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게 된다. 환경, 역사, 언어, 관습, 사고방식, 삶의 방식 등의 변수에 의해 상이한 다른 모습으로 교회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한 교회가 시공을 초월해서 모든 교회들의 표준이 될 수 없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그렇다면 어떻게 교회가 하나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런 외형적인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교회가 하나라고 했을 때,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외적인 변수가 교회의 단일성을 파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교회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는 모든 공동체의 주님이시다. 교회의 근거가 그분이 되는 한 지역적 거리나 차이가 교회의 본질을 해치지는 못한다. 교회의 단일성을 결정하는 것은 본질적이지 않은 차이성이 아니라, 교회를 교회로 근거짓는 예수 그리스도이다(750-751).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분열이 존재하는 것은 음울한 수수께끼이고 스캔들이다. 그렇다면 교파의 분화와 교회 분열이라는 현실 앞에서 Credo unam ecclesiam이라는 고백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이 신조가 의미하는 것이 도피운동(Fluchtbewegung)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도피운동이라는 것은 한 기독교인이 다른 모든 교회들에 대하여 극심한 혐오감을 갖고 멀리하면서, 자신만의 신앙을 구축해 은둔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에서만 만족을 찾고 기뻐한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그 어떤 은둔자의 처소나 탑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하든지, 아니면 성도이기를 포기해야 한다. 개인적이며 단자적 신앙은 결코 기독교의 신앙이 될 수 없다. 스스로 선택한 이런 초교파적 방법은 결국 교회의 일치로 가는 길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분파를 양산해서 교회의 특성을 희석화 할뿐이다(756-757).

우리는 또한 Credo unam ecclesiam을 외적으로 실현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어떤 교회, 혹은 교회의 특성을 가진 그룹도 '들어오는 것을 생각해봐!(Cogite intrare!)'라는 말, 즉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압력을 다른 교회나 그룹에 행사할 수 없다. 때로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연합, 연대 등이 가능하다고 생각되고, 그런 것들이 그럴 듯해 보이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설사 우리가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성과를 얻고, 실질적이며 현실적인 목적을 달성했다고 하더라도, 그 대신 신앙의 필요성과 자유는 이미 잃은 것일 수 있다. 분열 가운데 있는 예수 그리스도 공동체의 통일성을 믿는다는 것은 그렇게 허약하고 불명확한 신앙의 결과일 수 없다(757-758).

그렇다면 교회의 분열이라는 난점과 스캔들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가. 한 공동체가 가시적이며 비가시적인 존재에서, 그리고 그 형태와 본질에서, 자기 자신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불일치 상태에서 다양한 교파로 존재하면서도 결국 하나의 교회라는 것은 무엇인가. 독특한 공동체(Sondergemeinde), 독특한 교회(Sonderkirche) 등의 거부할 수 없는 복수로 존재하면서 Credo unam ecclesiam이라는 고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758).

의인(Rechtfertigung)의 인식이 일어나는 곳은 어디인가. 그곳은 죄의 인식이 일어나는 곳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는 그곳에 참된 의인의 깨달음이 있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의' 공동체에 대한 인식도 분열이라는 교회의 슬픈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다. 이 고백은 분열의 상황 속에서 교회의 불일치를 제거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그리고 앞에서도 밝혔던 것처럼 이러한 교회의 일치 근거와 확실성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모든 독특한 교회(Sonderkirche)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확실성과 요구에 단단히 매어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이론으로, 역사적이며 사변적인 세계관을 가지고서, 어떤 교리로, 아니면 특별한 기독론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묶어두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땅히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증거에서,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 교회 공동체에 살아 계셔서 말씀하시는 주님이 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교회에 문제가 되는 것은 결코 개 교회의 독특성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독특한 전승, 독특한 가르침,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얼마만큼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잘 섬기고 선포하는지, 그래서 결국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는지 하는 것이다. 교회가 교회 되는 근거는 개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 독특한 실존으로 존재하는 교회들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에 의해서 하나의 교회로 불림 받았다는 것을 상기하고 하나의 교회가 되려고 씨름해야만 한다(759-762).

3. Sancta ecclesia

Credo sanctam ecclesiam(나는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 여기에서 '거룩한'이라는 말의 의미는 '구분된', '구별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 개념은 기독교 공동체가 다른 세속 공동체와 대조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세상에 존재하는 공동체들과 다르다. 교회는 자연적으로 생긴 공동체도 아니고, 인위적인 공동체도 아니며, 이익 단체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다른 공동체의 근거를 가지고 이해되거나 판단될 수 없다. 교회에는 다른 공동체들이 공유하지 않는 독자적인 척도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앙이다. 이 법에 의해서 교회는 세속적인 공동체들과 구분된다(765-766).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세계 속에서 다른 인간 공동체들과 함께 여러 가지 관계성을 맺으면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교회는 결코 초월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교회가 이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한, 교회의 통일성과 거룩성은 숨겨진 상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에서 Credo sanctam ecclesiam이라는 고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계시와 계시의 인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모든 사람들의 손에 쥐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성령의 사역인데,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계시 인식도, 고백도 불가능하다. 궁극적으로 교회를 거룩케 하는 분은 성령이시다(766).

교회를 거룩케 하시는 분이 성령이라고 할 때, 그 구체적인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Credo ecclesiam이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믿듯이 교회를 믿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라틴어에서도 in ecclesiam이라고 쓰지 않는다. 교회는 하나님처럼 절대적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교회가 거룩하다고 할 때도, 그 거룩이 성령의 거룩과 같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령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덧붙여진 거룩이다. 사실 교회는 거룩하지 못하고 흠이 있다. 별 특별한 것이 못된다. 그런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당신의 거룩함에 참여하게끔 하신다. 또 성령께서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구분하시고 분리하신다. 성령께서 교회에게 당신 자신의 존재와 특별한 삶의 법을 주시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교회는 거룩한 것이고, 이 교회를 만드시는 분이 성령이라고 말할 수 있다(766-767).

이런 거룩한 공동체는 파괴될 수 없다. 교회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기인하고, 그래서 교회가 그의 몸이라는 사실은 결코 포기될 수 없다. 따라서 교회가 교회 이외의 다른 것(Anderes)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완전한 존재인 것은 아니다. 교회는 박해를 당할 수도 있고, 궁지에 몰릴 수도 있다. 또 이스라엘처럼 타락할 수도 있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위험하고 나쁜 것은 교회가 스스로를 가장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교회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주님의 시험을 감내해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 성찰과 자기 교정이 늘 필요하다. 그러므로 ecclesia semper reformanda(항상 개혁되어야만 하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770).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병들거나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공동체의 신앙이 약해지고, 사랑이 식어지며, 소망이 급격히 소멸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앙, 사랑, 소망의 근거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까지나 남아 계시다는 사실이다. 몸의 머리되시는 주님은 몸의 약함 때문에 몸을 떠나시지 않는다. 교회가 아무리 보잘것없는 존재로 전락한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는 기꺼이 교회의 신랑이 되신다. 그러므로 교회가 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런 것이다. 교회의 거룩함도 마찬가지이다. 교회 스스로 거룩한 게 아니다. 교회 공동체의 거룩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의 반영이며, 성령의 은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거룩함은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수동적 거룩이라는(christiana sanctitas non est activa, sed passiva sanctitas) 루터의 말은 옳다. 우리는 결코 스스로 구별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교회의 행위가 교회를 거룩하게 한다는 생각도 잘못된 것이다. 교회를 거룩케 하는 주체는 주님이며, 철저하게 은사이다(771-775).

그러나 교회가 수동적인 거룩함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거룩한 교회의 근거에 대한 인식이 이루어졌으면, 거기에는 순종의 문제가 따라오게 된다. 그것은 교회가 믿고 있는 분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 행동하지 않는 분으로 남아계시지 않고, 많은 행동을 스스로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마찬가지로 주어진 거룩에 만족하여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써 능동적인 참여를 해야만 한다. 교회가 행위로 거룩함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과 행동 척도를 잃어서도 안 된다. 결국 교회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절반만 할 수도 있고, 모두 할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교회에게 주어진 순종의 문제이다. 그러나 반복하여 말하지만, 교회는 이 모든 행위 후에 거룩을 요구하거나 주장해서는 안 된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우리는 다만 무익한 종일 뿐입니다(눅17:10)라는 고백이다(781-783)

교회는 필연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한계를 입고 세상과 관계를 맺으신 것처럼, 교회도 일종의 한계인 역사적 형태를 입고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그 존재 형태가 교회의 본질을 규정하지는 않는다. 교회는 역사적이며, 사회학적인 법칙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는다. 또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의 하나도 될 수 없다. 교회의 존재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 교회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어떤' 방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다른 독특한 방법이 요구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앙의 관점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령에 의해서 가능케 된 교회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신앙의 관점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이렇게 존재 방법이 다른 교회는 종말론적 존재이다. 역사만을 보는 존재가 아니라, 역사 너머를 본다. 역사 속에 살지만, 주께서 가져오실 역사 너머의 빛을 인식한다. 교회는 그렇게 여기에 살면서 동시에 저기에 산다.

교회는 역사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다양한 모습을 가지게 된다. 환경, 역사, 언어, 관습, 사고방식, 삶의 방식에 따라서 교회의 모습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존재방식이 다양할 수는 없다.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못된다. 본질적인 것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은 분명하다. 교회를 교회이게 하는 분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분이 바로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따라서 교회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하나이다. 그 이유에서 우리는 Credo unam ecclesiam을 고백할 수 있다.

교회는 완전하지 않다. 오히려 교회는 죄가 있고, 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Credo sanctam ecclesiam을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교회를 거룩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 있다. 교회가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신랑이 되신다. 또 성령께서 오늘 여기에서 교회에게 그것을 가능케 하신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은 세상으로부터 교회를 구분하시고, 분리하신다. 따라서 거룩한 교회를 고백하는 것은 교회 자체의 능력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교회의 거룩은 교회의 주님으로부터 덧입은 거룩이다. 주님께서 가능케 한 거룩이다. 그러나 교회가 이 거룩에 머물러 만족해서는 안 된다. 사랑하는 주님께서 교회에게 말씀을 통하여 부탁한 명령이 있다. 교회는 그것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이 교회의 거룩함을 해칠 수는 없다. 그러나 순종의 문제는 남는다는 것이다. 거룩을 부여받은 교회는, 주님께서 활동적인 삶을 사셨던 것처럼 행동으로써 모든 일에 능동적인 참여를 해야할 것이다.